Largo 冬
Fin
포크
*축제*
[얘들아?ㅠㅠ 언제 보낼 거야ㅠㅠ 기다리다 지쳤어ㅠㅠㅠ]
지민이 피곤 가득한 눈을 비비며 메시지를 보냈다. 축제 무대에 오르는 아이들이 음원을 조금 고쳐서 12시 전까지 보낸다던 말은 거짓말이었는지, 벌써 2시였다. 지민은 요즘 자주 듣는 솔로 가수의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얘들아. 늦게 보낸 거 뭐라 안 할 테니까 답장만 보내줘ㅠㅠㅠ제발ㅠㅠ]
애원하는 말투였다. 지민은 내일 바쁘게 리허설 할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자서는, 내일 체력적으로 힘들게 분명했다. 그렇게 지민이 한숨을 내쉬던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이들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쌤 안 혼내실 거죠?]
[진짜죠?]
[저희 몇 분 전에 정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원래 음원 쓰기로 했어요. 죄송해요.]
지민은 속에서 울컥울컥한 기분이 솟아올랐다. 정성스레 한 단어, 한 단어를 누르던 지민은 전송버튼도 손끝이 희어질 정도로 세게 눌렀다.
[내일 얼굴 보고 얘기하자^^]
그렇게 지민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휙 던지더니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렇게 지민은 누운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지민의 예상대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그냥 나빴다. 커피를 마시고 좀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허설을 준비하던 태형은 그런 지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다가가서 귀찮게 굴고 싶진 않았다.
“쌤. 많이 졸려요?”
“응...”
1부 리허설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태형이 빈 대기실에 있던 지민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지민의 어깨를 힘껏 주무르며 물었다. 지민은 태형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태형은 지민의 몸이 점점 늘어지며 고개가 까닥거리는 것을 보았다. 한 눈에 봐도 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형은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 도시락이랑 쌤 도시락 좀 챙겨줘]
[ㅇㅋ]
친구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고 태형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태형은 그제야 지민의 어깨에서 슬쩍 손을 떼곤 그 옆에 앉았다. 불편해 보이는 지민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올리는 것 또한 빼놓지 않고. 그렇게 보니 지민의 손이 휑한 게 잡아주고 싶었다. 태형은 아주 천천히,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지민의 손을 잡고 손잡이에 팔을 기대었다. 이제야 모든 게 완벽하단 기분이 들었던 태형은 지민의 머리에 살며시 기대었다. 지민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키득대었다. 몽글몽글하게 속이 차오르는 기분. 태형은 아침에 먹었던 솜사탕이 속에서 증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야!! 김태형!!”
“쉿!!”
태형의 친구가 벌컥 문을 열곤 들어왔다. 태형은 급하게 검지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태형의 친구는 개의치 않아하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올려두곤 빠르게 대기실에서 나왔다. 친구는 지민이 왜 태형에게 기대어 자는지, 태형이 왜 지민의 손을 잡고 있는지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태형은 친구가 나가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다닐 아이가 아니란 것만은 알았다.
눈치가 좋은 거야...나쁜 거야... 태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민을 쓰다듬었다. 큰 소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자고 있던 탓이었다. 태형은 10분만 지나고 나서 깨우자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살포시 일어났다. 자신의 대기실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베개와 담요를 챙기곤 다시 지민에게 돌아갔다. 지민이 불편하지 않도록 목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주고 나서야 만족한 태형은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으어...태형아...”
태형이 도시락을 반 정도 먹었을까. 지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태형은 지민의 도시락을 까선 그의 앞에 대령했다. 지민은 태형이 자신의 앞에 놓은 도시락을 그저 바라볼 뿐 먹지 않았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탓이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은 보곤 미소 짓더니 닭튀김을 하나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민은 그제 서야 입을 열곤 우물우물 받아먹었다. 태형은 지민의 모습이 귀여워 그저 킥킥대었다. 그 이후 태형이 몇 번을 더 먹여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지민은 빠르게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리허설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태형은 아쉬웠지만 조르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회관이 북적거렸다.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했던 터라 더욱 복잡했다. 더군다나 대부분 아이들이 사복을 입은 탓에 누가 학생이고 외부인인지조차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지민은 무대 뒤에서 첫 무대를 하는 아이들에게 주의사항과 신경 써야할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짚어주고 있었다. 태형은 2부에 무대를 오르지만 대기실에 있지 않고 지민을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첫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용과 아이들의 군무였다. 지민이 역시 잘한다며 감탄하고 있는 사이 태형이 그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뭐해?”
“에헤이. 씁.”
태형이 검지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태형은 지민의 손을 톡톡 치더니 깍지를 끼곤 잡았다. 지민은 혹시 누가 볼까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해했지만 태형은 그저 웃으며, 어두워서 아무도 모른다고 둘러대었다.
그렇게 둘이 구석에서 손을 잡은 채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첫무대는 끝이 났다. 음향이나 조명은 방송부 아이들의 몫이었으므로 지민은 무대 뒤에서 아이들의 입장만 도와주면 되었다. 지민은 태형의 손을 놓고 다음 순서인 학생들에게 갔다. 태형은 지민과 잡고 있던 손이 허전해 쥐었다 피길 반복했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아이들이 입장하자 지민은 다시 태형에게 돌아갔다. 아까만 해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던 지민은 자연스레 태형의 손을 잡았다. 태형이 키득거리자 얼굴이 빨개진 지민은 팜플렛으로 슬쩍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후 무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지민이 말하지 않아도 입장할 준비를 했으며 지민은 그저 그런 아이들을 조금씩 도와주기만 하면 되었다.
“쌤. 저 몇 번째에요?”
“또 왔냐?”
1부 마지막 공연을 하던 중, 한 남학생이 지민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까부터 불안한 듯 계속 물어보던 학생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지민은 마주잡은 손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긴 뒤 태연하게 답할 뿐이었다. 태형이 놀란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자 빨개진 그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지민은 자신이 들고 있던 팜플렛을 그 남학생에게 보여주며 개의치 않은 척했지만 태형을 속일 순 없었다.
“쌤. 저랑 계속 손잡고 싶으셨구나.”
1부가 끝난 뒤 휴식시간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뒤를 졸졸 쫓으며 물었다. 지민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애써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식히려 하였다.
“넌 다음 무대 준비나 열심히 해.”
지민은 태형을 째려보며 말했지만 태형에게 그 모습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너 반주자 어딨어?”
그러나 태형은 지민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태형의 차례가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반주자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지민의 물음을 들은 한 아이가 말하길, 화장실에 있다고 했다. 지민은 빨리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앞 사람의 무대는 이미 후반부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지민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태형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쌤이 걔 대신 반주자 해주시는 건 어때요? 저랑 호흡 맞춰보신 적도 있잖아요.”
태형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은 복잡했다. 그야 실격이 아닐 리가 없었다. 대회 주의사항에도 명시 되어있었다. 참가 신청서를 낼 때 쓴 반주자와 다른 사람이면 그대로 실격이라는 말이. 태형의 말을 들은 옆의 아이는 안 된다며 말리려 했지만 태형은 그대로 그 친구의 입을 막았다. 더군다나 앞 차례의 무대가 끝나고 사회자가 다음 무대인 태형을 호명했다. 지민은 실격이니 뭐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걔 아직도 안 왔어? 태형이 곡 칠 줄 아는 사람 없어?”
아무도 지민의 답에 대답하지 못했다. 지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지민은 자신의 옷가지를 단정히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옷이 깔끔해서 반주자처럼 보이긴 하다는 것일까.
지민은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풀었고 태형은 무대 중앙을 향해 걸었다. 태형이 무대 중앙에 서자, 조명이 켜졌다. 지민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태형을 위해 틀리지만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연주도, 태형의 노래도 순조로웠다. 지민은 학원에서 함께 연습했을 때보다 더욱 실력이 늘은 태형에 감탄했다. 혼자 빨라지지도, 떨리던 음도 완벽히 고쳤다. 지민은 저가 더 뿌듯해져서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노래가 끝이 날 무렵, 지민이 자주 틀리던 구간이 금방이었다. 지민은 절대 틀리면 안 된 다를 속으로 몇 십번이고 생각했다. 간절함이 도움을 준 것인지 연주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지민은 곡이 끝나자마자 무대 뒤로 들어갔다. 태형은 관객들에게 인사한 뒤 활짝 웃으며 지민에게로 갔다. 오랜만에 지민이 피아노 치는 것을 들으니 마냥 좋았다. 사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지민은 무대 뒤로 돌아와서야 태형의 의상이 눈에 띄었다. 단정한 정장이었다. 갑자기 바빠진 2부 탓에 신경 쓰지도 못한 게 그제야 보였다. 지민은 자리에 앉아 태형을 칭찬했다.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수트도 잘 어울린다며 웃었다. 그런 둘 사이에 어떤 아이가 쭈뼛쭈뼛 와서는 입을 열었다.
“쌤...국어 쌤이 부르시는데요...”
태형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속으로 뜨끔했다. 지민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학년부장 선생님이 이유 없이 부를 리는 없으니까. 지민은 급하게 무대 맨 앞줄로 향했다.
태형이 대기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지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지민의 얼굴을 본 태형은 자신이 호되게 혼날 것을 예감했다.
“너 알고 있었지.”
지민이 태형의 앞에 앉아 말했다. 아이들의 입장은 다른 쌤께 부탁했기에 지민은 이후로 자유롭게 태형을 혼낼 수 있었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적이 맴돌았다. 무대에서의 노랫소리가 붕붕 울렸지만, 정적이었다. 태형은 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반주자가 다르면 무조건 실격인 건 알고 있었어요.”
지민은 더 해보라는 식으로 태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태형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기분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원래 반주해주기로 한 애 노래 다 끝날 때쯤에 왔고...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순서를 바꾸면 됐잖아. 사회자한테 바로 얘기하면 가능했어.”
태형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지민을 응시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얼굴을 보곤 맥이 탁 풀렸다. 잘못은 태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대회에 관해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 앞에서 쩔쩔 매고 있는 태형의 모습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더 그랬다. 지민은 한숨을 내쉬곤 무대 뒤로 돌아갔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뒤를 차마 따라가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치던 태형은 후회했다. 지민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듯해서.
며칠이 지나도 지민은 쌀쌀맞았다. 지민 자신은 화가 풀렸다곤 하지만, 은연중에 태형에게 날카롭게 대한 것이다. 태형은 최대한 지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서운한 건 별개의 문제였다. 특히 오늘은. 태형의 1지망 실기 면접날이었다. 지민이 전에 데리러가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기에 그랬다.
[쌤 진짜 안 와요? 저 번호 엄청 뒤라서 학교 다 끝나고 인데ㅠㅠ]
태형이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지하철로 2시간. 태형은 한숨을 내쉬며 뒤에 머리를 기대었다. 물론 자신도 대회에서 1등을 하여 솔리스트로서 무대를 하고 싶었다. 안되면 콰르텟이라도. 하지만 반주자도 없는 김에,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태형은 그 순간 지민과 무대를 하는 것이 더 좋았다. 지금도 그것만은 후회하지 않고. 하지만 지민이 이렇게 화를 낼 줄 알았다면 안하는 것이 나았을까 싶긴 했다.
그 시각, 지민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고 싶기도 하고, 약속도 했지만. 하긴 했지만...도착하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태형의 말로는 어머니께서 알아서 갔다 오라며 보내셔서 또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 가야할 것이 뻔했다. 지민은 이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수업 후엔 시간이 비었다. 교직원 회의도 없었고. 지민은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요 근래 자신의 태도에 풀이 죽은 태형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지민은 미소를 짓곤 메시지를 보냈다.
[알았어. 데리러갈게. 늦을 수도 있으니까 따뜻한 데서 기다리고.]
♬
“으아...추워.”
태형이 부들부들 떨며 조수석에 탔다. 지민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자신에 놀랐다. 태형은 따뜻한 데서 기다리라는 지민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30분을 넘게 밖에 있었다고 한다. 지민은 차의 히터 온도를 높이며 물었다.
“어때. 잘했어?”
“망하진 않았어요.”
태형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지민은 태형의 말에 한참을 웃더니 평소의 자신감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 태형은 자신을 바라보는 지민의 입에 뽀뽀를 쪽 했다. 지민의 얼굴이 벌게져선 당황한 사이 태형이 입을 열었다.
“쌤한테 자신감 다 줬잖아요. 쌤 앞에서 계속 낑낑대고.”
지민은 태형의 말이 당황스러운 건 둘 째 치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태형이네 학원 이후로 이런 스킨십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지민을 눈치 챈 태형이 슬금슬금 지민에게 다가가려 했다. 지민은 태형에게 기어를 넘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태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쌤이 넘어오면 되겠다. 그죠?”
지민은 태형의 말에 졌다는 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형은 킥킥대더니 빨리 오라며 투정을 부렸다. 차 안에서 꽤나 시간을 보낼 것을 감지한 지민은 시동까지 꺼버리곤 태형에게 키스했다. 태형은 눈을 감은 지민을 슬쩍 보더니 손으로 얼굴을 잡았다. 워낙 손이 커서 지민의 얼굴이 다 덮어질 것만 같았다. 서로가 물고 빨길 반복하자, 지민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코로 숨 쉬려 해봐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쌤 왜 이렇게 숨 쉬기 힘들어하나 했더니 심장이 엄청 빨리 뛰네.”
달리기 하다오셨어요? 태형이 웃으며 놀렸다. 지민은 태형의 놀림을 무시하며 차의 시동을 다시 켰다. 새삼 차 안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부끄러웠던 지라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볼에 쪽하고 떨어지더니 입을 열었다.
“성인 되면 운전면허부터 따야겠다. 쌤 피곤할 테니까 내가 운전할게요. 몇 달 후부턴!”
“초보 운전자한테는 안 맡길 거거든.”
사실 작년에 면허를 딴 지민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민은 벌써부터 태형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모습이 상상했다. 안 그래도 태형이 자신을 애처럼 대하는 데 차 운전까지 해준다면 연상으로서의 체면이 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형은 아니지만 지민은 그런 부분을 은근히 신경 쓰는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쌤 아직도 화 안 풀렸어요?”
태형이 슬쩍 물었다. 지민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화났으니까 재롱 좀 부려봐.”
태형은 지민의 말에 화가 다 풀리고도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형은 목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랩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웃기려는 식의 발음이었다. 지민은 처음으로 듣는 태형의 랩에 놀라고, 자신을 웃기려는 모습에 빵 터졌다.
“위험하니까 진짜 웃기지 좀 마...”
빨간 불이었기에 망정이었다. 지민은 눈물이 맺힌 자신의 눈을 닦곤 숨을 골랐다. 하지만 또다시 랩을 시작한 태형에 끅끅 숨을 참아가며 웃었다. 초록 불에는 얌전히 있는 태형에 지민은 안도했다. 운전 중인데도 웃겼다면, 혹시 사고가 나진 않았을까 싶어서. 그러다가 지민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놀란 소릴 내었다.
“나 사람 많은 곳에서 연주했잖아?”
“아.”
태형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지민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했단 것보다도 이제 와서 알아챈 것이 신기했다. 태형은 나중에 자신이 커다란 공연장에서 무대를 할 때면 꼭 반주자가 되어달라며 웃었다. 하지만 지민은 태형이 아닌 이상, 연주할 마음도 없을뿐더러 태형이 없다면 연주를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때도 태형만을 생각하며 무대에 섰더니 아무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수능도 끝이 나고, 태형은 1지망에 썼던 대학에 붙었다. 물론 최저 등급도 잘 맞추었고. 지민의 반에는 유학을 준비하기 때문에 대학에 지원하지 않은 학생이 있었지만, 지원한 학교에 모두 떨어진 학생도 있어 마음이 아팠다.
수능도 끝이 나고, 대학 발표도 끝이 나니 학교는 아주 개판이었다. 5명이 결석하던 것이 15명이 출석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니 할 말은 다 했다. 물론 지민의 반이 가장 심한 경우였다. 수면 바지는 기본이고 학교에서 탈출하기 위해 조퇴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지민은 이제 다 끝났는데 잡을 필요가 더 있겠어? 하는 마음에 아이들을 하고 싶은 대로하게 내버려두었다. 물론 태형은 지민을 보러 학교에 꼬박꼬박 왔다. 물론 옷은 사복이었지만. 지민은 태형이 조퇴도 마다하는 모습(물론 가끔 빠지지만)을 보고 새삼 찐사랑이구나...하고 생각했다.
방학은 1월 중순. 여름방학이 길었기에 그만큼 졸업이 늦었다. 학교는 영화관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였다. 작년에는 이 기간에 놀이공원에 놀러가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겠다며 숨어버리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에 올해는 가지 않는 것으로 되었다. 지금 이 기간은, 선생님에게나 학생들에게나 지겨웠다.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이 지나가더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태형은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그 당일에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차마 지민과 지낼 수 없었다. 지민 또한 아쉬웠지만 저녁에 집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민은 잘 준비를 하고 침대로 향했다.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이미 1시를 넘긴 시간이었기에 지민은 문을 열어볼 생각도 않고 인터폰을 집었다.
“누구세요?”
“쌤!”
오늘하고 내일은 만날 수 없다던 태형이었다. 지민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문을 열어제꼈다. 너무 급하게 연 탓에 태형이 문에 맞았다. 태형이 코를 부여잡고 지민의 집에 들어오더니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지민은 태형이 뭘 하는가 싶어 화장실 문에 귀를 대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민이 소파에 앉아 화장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문이 열렸다. 태형이 산타 옷을 입고 있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가방을 의심하던 지민은 예상대로였다며 빵 터졌다.
“그렇게 웃겨요?”
“아냐. 아냐. 귀여워.”
지민은 숨도 못 쉬고 웃으며 말했다. 태형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산타 같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산타는 원래 없지만 오늘만 나타났어요!”
“우와.”
“지민 어린이만 편애하는 거니까 더 호응하세요!”
지민은 태형의 말에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소파를 퍽퍽 때리며 웃는 지민의 모습에 태형은 절로 뿌듯해졌다.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형은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선물을 꺼내어 건넸다. 조금 작은 모양으로, 초록색 포장지에 싸여있었다.
“이게 뭐야?”
“귀걸이요.”
태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평소 지민이 링 귀걸이만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고른 것이었다. 조그마한 십자가 모양이 귀여웠다. 지민은 선물을 뜯어보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혹시 태형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하여 초조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지민이 방에 들어가선 노란 포장지에 싸인 선물이었다. 태형에게 열어보라며 주던 지민은 소파에 기대어 얼굴을 가렸다. 태형 또한 선물을 열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야 지민의 선물도 태형과 같은 귀걸이였으니까. 심지어 모양도 비슷했다. 물론 지민이 산 귀걸이의 십자가가 좀 더 크고 가운데에 붉은 보석이 박혀있단 것만 빼면.
“우와. 진짜 비슷하게 생겼다.”
“그냥 그 옆에 있던 목걸이 살걸...”
“아니에요. 겹치니까 좋은데요. 왜. 우리 텔레파시 쩐당.”
태형이 네모나게 웃으며 말했다. 지민은 태형의 말에 혹해서는 그에게 맞장구를 쳤다. 태형은 두 귀걸이를 유심히 보더니 자신이 산 것의 한 쪽은 지민에게 끼워주곤, 다른 한 쪽은 자신의 귀에 꼈다. 지민이 산 것 또한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아요?”
“이쁜 것 같아.”
지민이 태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태형 또한 지민의 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귀가 참 예뻐서 뭘 하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같이 가서 피어싱 할래요? 같은 자리에 같은 거 끼우고.”
태형은 흔한 반지 같은 것보다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도 좋다며, 다음번에 꼭 그러자고 약속했다.
“근데 너 여기 어떻게 왔어?”
“걸어서요.”
“아니. 늦었잖아. 부모님이 뭐라 안하셔?”
태형은 지민의 질문에 뜨끔했는지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했다. 지민은 뭔가 있다는 생각에 계속 물어보았고 태형은 지민의 귀에 속삭였다.
“몰래 나왔어요.”
지민은 태형이 왜 속삭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태형에게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혹시라도 부모님께 들켜서 혼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태형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끔 이랬는데 걸린 적 없어요.”
“진짜?”
“넴. 새벽에 심심하거나 잠 안 오면 나와서 몇 시간 동안 산책하거나 공원가기도 해요.”
지민은 태형의 말에 안심했지만 혹시 들킬지도 모르니 빨리 가는 것이 좋겠다며 산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태형은 불만을 중얼거렸지만 지민의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태형이 자신을 그렇게 빨리 보내고 싶냐고 물었다. 지민은 태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곤 쪽 했다.
“걱정되니까 그러지 바보야.”
태형은 삐죽 나온 입을 다시 넣진 않았지만 불평하는 것을 멈추었다. 태형은 현관에서 지민을 얼싸안고 말했다.
“나가면 춥고, 오래 걸어야하고, 옷은 무겁고. 쌤이랑 더 있고 싶은데. 내일도 못 만나는데. 가기 싫다. 자고 가면 안 돼요?”
태형은 지민의 허락을 맡기 전에 자신의 사정 상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웅얼거리며 물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빨리 가라고 속삭였다. 태형이 삐진 체를 하자 지민은 미소 지으며 그런 태형의 목에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이제 진짜 가야지? 해 뜨겠어.”
“아직 멀었는데...”
“씁.”
지민은 태형이 투정 부리려는 것을 막고 문을 열어주었다. 1층까지 배웅해줄 셈이었지만 태형이 춥다며 말렸다. 태형은 지민에게 뽀뽀를 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더니 다시 뒤돌아 지민의 앞으로 와선 지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쪽쪽쪽하고 입술에 뽀뽀를 하고 나서야 떨어진 태형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새해에 또 올게요!”
태형이 내려가고 집에 들어온 지민은 내심 아쉬웠다. 태형에게 빨리 가라며 재촉했지만 막상 가버리고 나니 허전한 기분. 그렇게 지민은 태형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각지도 못하고 잠에 들었다. 물론 귀걸이는 머리맡에 고이 모셔두고 말이다.
*해피 뉴이어*
11시 53분. 지민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았다.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태형의 전적이 생각났지만 설마하고 문을 여니, 정말 설마였다. 손을 흔들며 지민에게 인사하는 태형이 있었다.
“어떻게 집에서 나왔어?”
“부모님 다 술 드시고 빨리 주무셔서 몰래 나왔죠!”
태형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자연스럽게 지민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때도 같이 못 있었는데 새해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냐며 태형이 너스레를 떨었다.
지민이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태형에게 가져다주자 TV에서 제야의 종의 치기 시작했다. 1월 1일 새해였다. 지민은 소파 위에 앉아 바닥에 앉은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형은 급하게 코코아를 들이키다가 대였는지, 혀를 내놓곤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너도”
새해였지만 둘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민은 태형의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태형이 코코아를 다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갖다놓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우리 밖으로 나갈까?”
“밖이요?”
지민은 활기차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태형의 옷을 집어주곤 자신도 외투를 입었다. 핫팩도 뜯어서 태형의 주머니에 하나, 자신의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 태형은 지민이 어딜 갈 계획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따라갔다.
밖은 추웠다. 그냥 추운 수준이 아니었다. 한겨울의 새벽이니 말할 필요도 없이 추웠다. 지민은 코를 훌쩍이더니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게 재미있는지, 걸으며 계속 후하후하 거리길 반복했다. 태형은 옆에서 그런 지민을 바라보며 웃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지민은 후미진 골목 쪽으로 들어갔다. 낮은 아파트 단지였다. 지은 지 꽤 된 것인지 벽에 금이 가있는 것이 조금씩 보였다. 가로등 빛이 은은한 주황색으로,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형은 조금 무서워져 지민에게 더욱 붙어 걸었다.
“짠.”
지민은 다 쓰러져가는 놀이터로 뛰어 들어갔다. 지민이 그네에 앉아서 몇 번 다리를 휘적휘적 하니 그네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민은 추운 바람에 얼굴이 시리어 이내 그네를 멈추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빤히 보다가 그 옆의 그네에 앉았다.
“여긴 왜 왔어요?”
“여기 귀신 자주 나오는 곳이거든. 주변에 흉흉한 소문이 많아.”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태형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민이 말하길, 이 근방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고, 새벽이면 아기 귀신이 놀이터를 뛰놀며 웃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단다. 태형은 믿을 수 없다며 거짓말이 아니냐고 물었다.
“거짓말 맞아.”
지민이 깔깔대며 말했다. 태형은 한숨을 내쉬며 안심했다. 하지만 놀이터의 분위기만 보면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낌새였다. 지민은 겨울이야말로 괴담과 어울린다고 말하며 발로 모래장난을 하였다.
지민이라고 무서운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꺼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민에게 이 근처 동네는 익숙했기에 그다지 공포심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태형이 얼마나 무서워할까 궁금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지민의 속내를 모르는 태형은 차마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고 땅바닥의 모래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쌤도 한 살 먹었고 저도 한 살 먹었네요.”
“또 한 살 먹다니...너가 두 살 먹어주면 안 돼?”
지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태형은 지민의 한탄에 킥킥대더니 21살도 나쁘지 않다며 웃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슬쩍 보더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태형의 앞에 섰다. 우물쭈물하며 내민 것은 목걸이였다.
“생일 선물 겸 새해 선물.”
새해 선물은 처음 들었다며 태형이 웃어댔다. 태형의 생일은 분명 이틀 전이지만 애매하게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지민은 문자로 꼭 근래에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며 약속을 했지만, 태형은 이렇게 무서운 곳에서일 것이라는 건 예상도 못했다. 지민은 꼼지락거리며 태형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태형의 탄생석인 터키석이었다.
지민은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겹치지도 않으면서 의미가 깊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귀걸이를 사며, 그 옆에 있던 탄생석 목걸이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지민은 화려한 태형의 얼굴에 목걸이가 묻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진심으로) 하지만 막상 목에 건 것을 보니 잘 어울려 뿌듯했다.
“목걸이 진짜 이쁘다. 저 이거 연주회 때 걸게요! 물론 합창 때만 무대에 오르지만.”
지민은 태형의 머리를 쓰담아주더니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수다나 떨었을 뿐인데 벌써 1시가 한참 넘어있었기 때문에.
“집에 케이크도 있어.”
지민이 태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태형과 지민 모두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던 탓에 얼굴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물론 마주잡은 두 손도 시리긴 마차가지였다. 하지만 손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 추위 정도는 용서할 수 있었다.
지민은 외투를 벗을 생각도 않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로 향했다. 지민이 산 케이크는 딸기가 잔뜩 올라가있는 생크림 케이크였다. 지민은 케이크를 뜯자마자 초를 꽂을 생각도 않고 그 위의 딸기를 태형의 입에 쏙쏙 넣어주었다.
“처음엔 니 생일 초고, 그 다음은 새해 초야.”
지민이 태형의 나이 초를 꽂으며 말했다. 태형이 집의 불을 다 껐을 땐, 지민도 초의 불을 다 붙인 상태였다. 지민은 혼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마지막에는 흐지부지 끝났다. 하지만 태형은 그마저도 좋은지 후 하고 초를 껐다. 지민은 어두운 틈을 타 태형의 얼굴에 생크림을 잔뜩 묻혔다.
“피부가 달아지겠네.”
“드셔볼래요? 설탕 뺨치는 피부?”
지민은 태형은 농담에 웃으며 해피 뉴이어라 쓰인 알파벳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태형이 불까지 다 붙이자 둘은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지민은 소원도 빌지 않고 금방 눈을 떠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소원을 비는 탓에 지민은 장난이 치고 싶었다. 태형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초를 하나하나 끄는 척도 했다. 하지만 태형은 꼼짝하지 않았다. 지민은 태형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뭘 그렇게 계속 비는가 생각하던 참에 태형이 눈을 뜨더니 지민에게 뽀뽀를 쪽하곤 초를 다 껐다.
“소원 안 빌고 왜 앞에서 장난쳐요?”
태형이 거실 불을 켜며 물었다. 지민은 태형의 기습적인 스킨십에 깜짝 놀라 포크로 케이크를 들쑤실 뿐이었다. 태형이 지민의 옆에 앉자 지민은 태형의 입에 딸기를 쏙쏙 집어넣어주었다. 씹을 틈도 주지 않자 태형은 지민의 손에 들린 포크를 빼앗았다. 태형은 빼앗은 포크로 딸기 3개를 연달아 꽂곤 지민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민은 꽉 찬 입에 불만을 중얼거리며 딸기를 씹었다. 지민이 입에 있는 딸기를 다 먹자 태형은 케이크를 지민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민은 싫은 척하면서도 태형이 주는 것을 다 받아먹었다.
케이크가 큰 탓에 둘이 다 먹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태형은 위의 딸기만 먹었으니 말이다. 지민은 태형이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다, 배가 불렀는지 배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기대었다. 태형은 지민에게 주려 했던 마지막 한 입을 자신의 입에 넣곤 아쉬움을 삭혔다.
시간은 벌써 2시가 조금 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보단 이른 시각이었지만 지민은 태형에게 집으로 빨리 가라며 재촉했다. 물티슈로 얼굴을 닦던 태형도 불안하긴 했는지 투덜거리지 않고 외투를 챙겼다. 지민은 케이크도 선물이라며 가져가라고 했지만 태형은 지민의 집에서 먹고 싶다며 두고 가기로 했다.
지민은 아파트 현관까지 태형을 마중 나갔다. 태형은 말하진 않았지만 아쉽긴 아쉬웠는지 3걸음에 한 번씩 돌아보며 지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민은 태형이 보이지 않을 쯤이야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아들.”
태형이 도어락을 천천히 누르고 문을 아주 살살 여닫았다. 그렇다고 도어락의 소리가 작아지는 건 아니지만. 태형은 온 집 안의 불이 다 꺼진 것을 보고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형의 억측이었는지 거실 소파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태형을 부르기까지 했다. 태형의 어머니였다.
“어디 갔다오니?”
“잠깐 편의점..?”
“2시간 넘게?”
태형은 크게 혼나겠다고 예상했다. 그 예상대로 태형의 어머니는 거실 불을 켜더니 태형의 귀를 잡아당겨 소파에 앉혔다. 태형은 그 이후 1시간 동안이나 설교를 들었다. 태형의 아버지는 안방에서 머리를 쏙 내미시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젓곤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하지만 태형은 어머니에게 혼날지언정 지민과 새벽에 논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