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T 연구소, 평행 세계 이동경로 개발 연구 성공 ]
텔레비전을 틀었다하면 매일 보이는 헤드라인이었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도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고 있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우주 과학 분야에서 저명한 과학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BT사설연구소는 장장 몇 년에 걸쳐서 평행우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본래 이 연구는 BT재단에서 큰 투자를 들여 몇 년간 철저한 보안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내부 유출로 인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고, 일파만파 퍼져버린 그 내용에 연구소는 결국 공식적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상 가능하듯이, 평행세계라는 말에 대중들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반인들은 평행 세계 이동을 시도해볼 순 없었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건 여러 뜬소문을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같은 시기에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선 새로운 도시 괴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일명 ‘버스 괴담’이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즉슨, 정체불명의 번호를 달고 있는 버스를 잘못 타게 되면 평행 세계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루머에 가까운 괴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 버스를 타봤다는 후기들도 올라왔지만 대개는 조회수를 끌어 모으려는 수작으로 꾸며낸 것이었다. 결국 아무도 그 버스의 존재 유무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출처를 모를 괴소문은 연구소까지 흘러들어가 연구소장은 최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평행 세계 이동 경로를 누군가가 해킹이라도 한 것이라면 연구소가 개발한 원래의 경로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타격이 꽤나 클 게 분명했기에 연구소장은 고민 끝에 연구원들에게 중대 발표를 했다. 정체불명의 경로로 평행세계에 온 일반인을 연구소로 데리고 오는 연구원에겐 현재 직급이 무엇이든지 다음 프로젝트 연구에 책임 연구원직으로 임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연구원 내부는 떠들썩해졌고, 그날부터 특히 직급이 낮은 주임직들은 지나가는 일반인들을 눈에 불을 켜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종착지는 평행 세계
카멜
이제는 꽤나 쌀쌀해진 가을날 오후였다. 태형과 지민이 나란히 앉아있는 버스 정류장은 오늘따라 더 한적했다. 한참동안 말이 없는 지민에 태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버스가 몇 대나 지나갔건만, 지민은 태형의 고백에 뭐 어떻다 하는 대답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태형의 자신감이 점점 바닥을 쳤다.
“태형아.”
“어, 어?”
드디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지민에 태형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의 앞머리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날렸다. 무표정이었던 지민의 입술 양끝이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어, 웃은 건가? 묘하게 바뀐 지민의 표정에 태형은 내심 기대하는 눈빛을 보였다. 살짝만 웃고 있던 지민은 이내 웃음을 못 참겠는지, 결국 혼자서 웃음이 터졌다. 태형은 살짝 당황했다. 끅끅대며 웃는 지민에 태형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 지민에 태형은 흠칫했다. 지민이 태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형을 쳐다보는 지민의 눈이 단호했다.
“미안한데, 너 내 취향 아니야.”
***
올해 신입생인 태형은 ‘공대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대 아닌 공대생. 태형은 문과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패션은 공대생의 완벽한 교과서였다. 사계절 데일리룩인 체크남방(옷장 안이 전부 다 체크일수도 있다), 정체불명한 핏의 바지, 뭐가 들어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들고 다니는 검정백팩, 마지막으로 뿔테 안경까지. 동기들은 그나마 좌 우산, 우 물통까진 아니라서 다행이지 않냐고 입을 모았다. 태형의 패션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번은 정말 공대생들이 소문을 듣고 태형을 보러 온 적도 있었다는 거다. 공대생들은 태형의 엄청난 아우라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요즘은 공대생도 안 저래..”
하지만 태형은 그들이 뭐라 하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태형이 안경을 고쳐 올리며 생각했다.
'체크패턴이 얼마나 기하학적으로 멋진데.'
주변 사람들은 태형에게 안경만 벗어도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태형과 대화를 나눠 본 선배들은 하나같이 태형에 대해서 말하는게 똑같았다.
“복학생 귀신이 씌인 거 아니야?”
그런데, 그런 태형에게 어느 날부터 체크 남방보다 먼저인 사람이 생겼다. 같은 영어 교양 수업을 듣는 박지민이었다. 수업 첫날에 지민과 태형은 같은 조가 되었는데, 앞으로 한학기 동안 서로의 회화 메이트가 되어주어야 했다. 태형과 정반대의 스타일을 가진 지민은 첫날부터 태형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 태형의 말에 방긋방긋 잘 웃어주기까지. 지민이 무용과라는 것을 알게 된 태형은 기필코 이번 학기가 종강하고 고백을 하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태형에겐 절망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초래한 건 슬프게도 태형의 탓이 컸다. 그러니까 한 학기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냐.
강의실에선 교수님의 열띤 수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태형은 자신의 옆에 앉아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지민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다 지민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지민아 근데 너, 무용과면 춤 되게 잘 추겠다.”
“응? 아냐, 나보다 잘 추는 애들 많아.”
“아니야 네가 제일 잘 출 것 같아.”
“그래, 고마워.”
살짝 미소를 짓는 지민을 보며 태형이 웃으면서 다시 멀어졌다. 지민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에 태형이 다시 지민에게 속삭였다.
“무슨 춤 추는 거야?”
“현대무용.”
“현대무용은 뭐 추는 거야?”
“딱히 막 정해진 형식은 없어.”
아아-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멀어졌다. 지민은 나름 한번 더 웃어줬다. 하지만 조금 있다 다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태형의 목소리가 지민의 귀에 들렸다.
“그럼 즉흥이야?”
“...즉흥이라기 보단, 약간 표현적인 춤?”
지민이 잠깐 뜸을 들인 뒤 시선은 그대로 앞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렇구나-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슬슬 교수님의 눈치가 보였다.
'...이제 이만하면 그만하지..'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해맑은 태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표현적인 춤이 뭐야?”
“...”
흡사 돌림 노래같은 태형의 질문에 지민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유튜브 검색해봐.”
한번은 실전 회화연습이랍시고 옆 사람과 ‘인생 목표’에 관해서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민은 무용을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지 잠시 고민하다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과 마주 본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민, 어, 왓 디쥬 헤브 포 런치?”
“ㅁ,뭐?”
당황한 지민이 눈썹 한쪽을 꿈틀거렸다. 태형을 말을 듣고 잠시 멍을 때리던 지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무용에 관한 영단어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스파게티.”
“오 미투! 유 헤브 학식? 아이 헤브 학식. 위 쌤쌤. 두유노 학식 제육볶음?”
“...노.”
“댓츠 릴리 딜리셔스. 벗, 어..아, 근데 밥이 질다, 이게 영어로 뭐지?”
“...근데 태형아. 회화 주제가 학식이 아니라, 인생 목표인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근데 진짜 밥이 질다가 영어로 뭘까? 아 외국에선 밥을 설익게 하나..”
지민은 결국 체념했다. 오늘 인생 목표를 주제로 한 영어회화는 못할 것이다. 그냥 어서 태형의 밥 얘기부터 끝내게 해야 했다. 지민이 교수님을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교수님, 밥이 질다가 영어로 뭔가요?”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친구 사이까지는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결정적인 일은 중간고사 날에 벌어졌다. 회화 테스트가 끝나고 교수님께서 다음 수업스케줄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태형이 지민의 옆에서 혼자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다. 지민은 갑자기 혼자 웃는 태형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얘 왜 이래?
“지민아, 이거 봐봐.”
속삭이는 태형에 지민은 하는 수 없이 태형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탕탕탕탕!”
“...?”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든 태형이 지민을 향해 쏘는 시늉을 했다. 지민은 잠시 멍을 때렸다.
‘별 미친..’
얼빠져있는 지민을 보며 활짝 웃은 태형이 지민에게 물었다.
“이거 뭐게?”
“...그게 뭔데?”
“사탕! 탕 네번! 짱 웃기지 않아?”
태형은 그렇게 말하고선 허리를 굽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목까지 빨개져있는 태형을 보고 지민은 결국 뚜껑이 열렸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갑자기 커진 지민의 말에 순식간에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태형을 보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강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토끼눈을 뜬 채 지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렇게 지민은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후다닥 달려 나갔다. 민망함은 지민의 몫이었다. 지민은 일주일 뒤에 있을 영어 수업이 벌써부터 걱정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짜증나는 게 존재했다. 강의실을 달려 나온 뒤로 며칠 동안 지민은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기 직전에도 한번씩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니 차라리 까먹기라도 하면 좀 낫다. 문제는 시도때도 없이 그 빌어먹을 사탕 개그가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김태형이 내 머리를 지배하다니. 심지어는 샤워를 하다가도 생각이 나는 바람에 지민은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한번은 지민이 빌렸던 교양 서적을 반납할 겸 학교 도서관을 찾아갔다. 도서관에 간 김에 오랜만에 신간 도서라도 구경해볼까 싶어 지민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눈높이에 위치한 책장을 찬찬히 둘러보다 맘에 드는 제목을 발견해 그 책을 책장에서 꺼낸 지민은 그만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책을 꺼내서 비어버린 공간 너머에 체크무늬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저 사탕 새끼, 이젠 날 따라다녀?”
김태형 너 딱 걸렸다. 지민은 얼굴이 벌게진 채 건너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지민은 체크남방을 입고선 뒤돌아 서있는 남자의 어깨를 세게 잡아 돌려세웠다.
"야!!"
하지만 지민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뗐다. 태형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남자는 여간 당황한 표정이 아닌 듯 했다. 남자는 벙쩌있는 지민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민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민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서관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앞이 잘 보이든 말든 지민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내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다 그만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지민이 허리를 굽히며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박지민?"
지민의 눈앞에 김태형이 서있었다. 김태형은 꽤나 반가워보인다는 얼굴을 하고있었다.
"근데 너 왜 앞을 안 보고 다녀, 위험하게."
태형의 말에 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지민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엥? 누구 때문인데? 아 그건 그렇고, 지민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뭔데?"
그렇게 둘은 버스 정류장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민은 단호하게 태형의 고백을 거절했다. 태형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지민의 반응에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 안경테를 고쳐 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거절하는 이유 물어봐도 돼?"
태형의 말을 들은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원한다면 말해줄게. 진짜 이제라도 말해서 다행이다."
곧이어 지민이 가방을 고쳐 매고선 속사포로 내뱉었다.
“너 진짜 내가 몇 번 받아주니까 그러나본데, 질문도 정도껏 해야지. 정도를 몰라 사람이! 어? 놀림 노래해? 아니 그리고, 밥이 진 게 뭐가 중요한 건데? 인생 목표를 말하라잖아. 넌 인생 목표가 밥이야?!"
말을 끝낸 지민이 잠시 씩씩거리다 홱 뒤돌아섰다. 몇 걸음 안간 지민이 이내 다시 태형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그리고 사탕 개그 같은거 하지마. 진짜 재미없는 건 둘째 치고, 짜증난다고!“
지민의 마지막 말에 태형이 충격 받은 표정을 보였다. 그런 태형을 잠시 바라보던 지민이 이내 몸을 다시 돌려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점점 사라지는 지민을 보며 태형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나름 그거 큰 그림이었는데..”
오늘따라 가을바람이 더 차가웠다.
***
아까 지민과 함께 앉아있었을 때 버스 몇 대 지나간 건 그냥 우스울 정도였다.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태형은 벌써 해가 진 지 오래된 것도 몰랐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며 이따금씩 훌쩍거리는 태형을 흘깃 쳐다보곤 했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태형이 괜히 코를 매만졌다. 그제서야 정류장에 사람들이 뜸해졌다는 걸 깨달은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벌써 10시 13분이었다.
“헐, 막차시간인데.”
그때 태형이 있는 정류장 쪽으로 버스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일단은 타고보자라고 생각한 태형이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삑-
“잔액이 부족합니다.”
카드를 찍던 태형이 멈칫했다. 분명히 충전되어 있는걸로 아는데.. 어쩔 수 없이 현금을 내야겠다 생각한 태형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지갑을 열어본 태형은 절망했다. 현금조차 없었다. 오늘따라 참 되는 일이 없는 기분이었다. 태형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하 씨, 진짜, 흑..되는게 없어..”
“학생, 그냥 타.”
운전기사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얘진 탓에 운전기사의 얼굴이 흐릿했다. 태형이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
“흑, 감사합니다..”
버스에는 태형 혼자인 듯 했다. 자리에 앉은 태형이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때문에 부은 눈가가 비쳐보였다. 그러게 왜 갑자기 울어서... 태형은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버스에 아무도 안 타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누구라도 그 광경을 봤다면 태형은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눈물을 쏟아낸 탓인지 힘이 빠진 태형은 점점 눈을 감고 뜨는게 느려졌다.
‘아 깜빡 잠들어서 정류장 놓치면 안되는데..’
하지만 결국 태형은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
퇴근을 한 지민이 버스에서 내린 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연구소 업무가 더 힘들게 느껴졌다. 피곤해서 걸을 힘이 나지 않아 의자에 잠시 앉아있다 가기로 한 지민은 핸드폰을 켜 인터넷 화면만 멍하니 쳐다봤다. 여전히 인터넷에선 온통 평행 세계 얘기였다. 우리 연구소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뭐하나. 스포트라이트는 윗사람들에게만 비춰질 뿐이었다. 씁쓸해진 지민은 자신은 언제쯤 승진하려나 생각했다.
태형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체감 상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밖을 보니 이제는 꽤 어두운 밤이라도 된 건지 깜깜해서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태형은 시간을 보려 핸드폰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태형이 의아해하며 홀드버튼을 꾹 누르자 배터리가 방전되었다는 화면이 나왔다. 분명히 배터리가 남아있었는데.. 태형이 당황한 채로 버스 안을 둘러봤다. 처음에 버스에 탔을 때와 똑같이 버스 안에는 태형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번 정류소는 어디라는 안내 멘트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괜히 오싹해진 기분에 태형이 얼른 버스 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버스 기사는 기다렸다는 것 마냥 바로 버스를 세웠고 태형은 서둘러 내려버렸다.
“진짜 잠은 왜 잔거야..”
중얼거린 태형이 버스가 간 방향 쪽을 쳐다봤다. 버스는 그새 코너라도 돈 건지 보이지 않았다. 태형이 한숨을 쉬며 자신이 내린 정류장이 어딘지 보려 몸을 돌렸다.
“어?!”
순간적으로 놀란 태형이 들고 있던 가방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아까 처음에 탔었던 정류장과 똑같은 곳이었다. 보통은 종점에서 운전기사가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할텐데.. 벙찐 태형이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이런..이런 경우가 있나? 태형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흘긋 쳐다보고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눈이 커진 태형이 다시 옆을 쳐다본 뒤에 놀라 소리쳤다.
"박지민?!"
태형의 말에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지민도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토끼눈을 뜬 채 태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태형은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물론 좋은 말은 안 했지만,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얼굴을 보며 말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모른다고? 태형은 애써 꾹 눌렀었던 감정이 또 터질 것 같았다. 결국 태형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너 이제 나 모른 척 하기로 한 거구나. 아무리 내가 너한테 차였다지만, 이건 아니지.”
"...저한테 차이셨어요?"
태형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눈 앞에 있는 지민은 태형을 진심으로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지민의 머리 색깔도 묘하고 다르고, 입고 있는 옷도 평소 스타일과 달라보였다. 태형은 소름이 돋았다. 귀, 귀신인가?
"...너 누구야?“
태형의 말에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지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루라도 좋게 끝나는 날이 없지. 지민은 가방을 고쳐 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이름이 맞긴 한데,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지민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초면인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나 하고.’
지민은 태형을 흘겨보며 그대로 태형을 지나치려다 문득 태형이 아까 타고 왔던 버스가 생각났다.
‘근데 그...버스 번호가 뭐였더라?’
이상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춘 채 꽤 심각하게 생각하던 지민이 잠시 뒤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엄마. 나 승진해.’
***
흥분한 지민이 태형에게 다짜고짜 여긴 평행세계라고 외쳤다. 지민의 말에 벙찐 태형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지민은 무작정 태형의 팔을 잡고선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끌었다.
'드디어 일반인을 찾았다!‘
지민은 태형에게 평행세계에 갑작스럽게 오게 되어 거주지도 없을 텐데 자신의 집에서 당분간 지내라며 최대한 친절한 척을 했다. 갑자기 돌변한 지민에 태형은 영문을 몰라 혼란스러웠지만 지민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여전히 자고있는거 아냐? 태형은 자신의 팔을 잡아 이끄는 지민을 쳐다봤다. 태형이 원래 알고 있었던 그 박지민이 자신을 보며 웃는 것처럼 보였다. 괜시리 먹먹해진 태형이 지민을 나지막히 불렀다.
"지민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 박지민 맞아!“
그렇게 순식간에 집에 도착한 지민이 오자마자 티비를 켰다. 역시나 티비에선 여전히 평행 세계를 주제로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거 봐! 요즘 여기서 엄청 이슈야. 네가 평행세계에서 온 거라고!”
태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티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민은 뻣뻣하게 서있는 태형을 소파로 데리고 와 앉혔다.
“앞으로 여기서 당분간 지내. 어차피 너도 당장 갈 데 없잖아.”
그런 지민의 말에 태형이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태형이 잠시 생각하고선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그래도 이건 내가 민폐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태형의 말에 깜짝 놀란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형을 말렸다.
“아니, 왜? 나 진짜 괜찮아. 어차피 나도 혼자 지내느라 적적했고, 어..평행 세계 사람 궁금하기도 했었어! 너 그리고 아까 보니까 나 아는 것 같던데, 그냥 내가 걔라고 생각해!”
“...그럼 정말 나 여기있어도 돼?”
“그렇다니까! 아, 넌 이름이 뭐야?”
“김태형. 근데 지민아, 너도 여기서 대학생이야?”
“어? 어...아니.”
지민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학생이라하면 매일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할테고, 연구원이라 하면 괜히 태형의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래, 그냥 회사원이라하자.
“그냥..회사원.”
“우와, 여기 박지민은 벌써 취업했구나.”
“응..”
지민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뭔가 계속 대화를 나누다간 거짓말만 해야할 것 같은 생각에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이불과 편한 옷 몇 가지를 들고 나온 지민이 소파 위에 이불을 펼쳤다.
“그래도 나름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인데 한 침대에서 자긴 좀 그렇고, 그나마 바닥보단 소파가 낫겠지? 난 내일 또 출근을 해야하니까, 평행 세계 관련된 건 저 프로그램이 자세히 설명해줄거야. 그럼 잘 자 내일 보자!”
지민은 가식적인 눈웃음을 보이고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방문이 확실하게 닫혔는지 확인한 지민이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기쁨을 주체 못하고 이불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던 지민이 몸을 뒤집어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지민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이제 인생 폈다 지민아.’
***
다음 날 아침에 지민은 평소 습관대로 거실로 나와 티비를 켰다. 아침잠이 많은 지민이 잠을 깨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비몽사몽한 채 그대로 소파에 털썩 앉는 순간 깜짝 놀란 지민이 스프링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이불 안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금세 잠이 깬 지민의 머릿속에 어제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와, 진짜 나도 까먹을게 따로 있지.‘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 지민이 이불 위로 태형을 토닥였다. 씻고 나서 준비를 마친 지민은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마시며 거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태형이 어제 입고 왔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채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 채널에서는 큰 헤드라인을 밑에 고정한 채로 여러 명이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 평행세계 이동, 상용화는 언제쯤? ]
꽤나 집중하며 보고 있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여기선 티비에서 평행세계 얘기 엄청 나온다. 우리쪽에선 전혀 없었는데."
"아...그래?"
태형은 여전히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저거 일반인들은 이동이 안 된다고 그러는데, 난 어떻게 온 거지? 헐, 지민아. 나 막 잡혀가는거 아니..“
"ㅁ, 켁켁!"
순간적으로 태형의 말에 흠칫한 탓에 목에 사레가 크게 들린 지민이 허리를 굽힌 채 켁켁거렸다. 놀란 태형이 괜찮나며 지민에게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지민이 굽힌 허리를 피며 말했다.
"저런거 너무 믿고 그러지 마. 완전 저것도 쇼야 쇼. 그냥 다 헛소리야.”
띠링-
그 때 지민이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에서 알림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손목을 올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형이 지민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우와 너 시계 짱 신기하다.”
"아 이거? 그냥 스마트워치야. 회사에서 줬어. 대학생들도 많이 쓰지 않아?"
"그래도 난 아직 아날로그 시계 쓰는데."
태형은 지민의 시계가 신기해 보였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민은 태형의 손목 위에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검정색 시계 초침이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게 보였다. 지민은 잠시 동안 초침이 움직이는 걸 쳐다보다 태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근데 너도 어디 나가게?“
"너 데려다주려고."
"에?"
"혼자 있어서 적적했다며. 출근길도 심심했을 것 같아서."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하지만 태형은 이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지민은 하는 수 없이 태형을 따라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지민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을 쳐다봤다.
“근데 너, 핸드폰은 작동 돼?”
“아 맞아. 나 여기온 뒤로 핸드폰 완전 먹통 됐어. 충전해도 안 켜져.”
지민은 태형의 말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무작정 태형을 연구소로 데려가기엔 좀 부자연스러웠는데, 아무래도 먹통이 된 핸드폰이 태형의 소식을 친히 차단 해줄테니 연구소로 데려가기 전까지 시간을 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은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태형을 보며 갔다올게,라고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지민이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니 태형이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따라 손을 흔들어 줬다.
'나중에 데리러 나올게.'
태형의 입모양을 읽은 지민이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나 몇시에 퇴근할지 몰라!”
이내 태형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태형이 알아들은 건가 싶은 지민이 손사래를 치던 걸 멈췄다.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였다.
'고맙다고?'
그런 태형의 입모양을 읽고선 기가 차버린 지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미친놈아!"
하지만 이미 출발한 버스에 태형은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아마 김태형은 지민의 퇴근 시간쯤에 버스 정류장에 나와있을게 분명했다. 지민은 짜증이 섞인 채 혼자 꿍얼거렸다.
"아 쟤는 전화도 안 되는 상황에 내가 언제 도착할 줄 알고.."
***
그렇게 매번 태형은 지민의 출퇴근길을 함께했다. 지민은 계속 이러다간 괜히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태형이 자신을 원망하기라도 할까싶어 매번 태형을 말렸다. 하지만 태형의 고집을 이길 순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을 한 지민이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하늘을 쳐다보며 그래도 다른 날보단 일찍 마쳐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정류장 쪽으로 옮긴 시선 끝엔 태형이 서있었다. 지민을 발견한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지민아 보여줄 거 있어.”
“뭔데?”
지민은 태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태형이 정류장 뒷편으로 몇 발자국 안 가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짠. 완전 예쁘지.”
지민은 태형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민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코스모스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엄청 큰 꽃밭을 이룰 만큼 많이 피어있진 않았지만 나름 핑크빛 물결이 보일 정도긴 했다. 지민이 무릎을 접어 앉으며 말했다.
"와, 나 여기 코스모스 피어있는 거 이제 알았어."
“나도 오늘에서야 봤어.”
태형이 지민의 옆에 똑같이 무릎을 접고 앉았다. 둘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코스모스를 쳐다보던 태형이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 코스모스가 영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
"당연하지. 우주잖아."
"근데 자세히 보면 코스모스 꽃 모양도 진짜 우주같다? 가운데 노랗게 빽빽한 부분이 꼭 별처럼 생겼어. 한번 봐봐.“
"그런가?"
지민이 코스모스 꽃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태형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야 별이 보인다고 말했다. 지민이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그런 지민을 보며 태형은 웃음을 참은 채 장난을 쳤다.
“더 크게 떠야해.”
코스모스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에 태형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풉."
태형이 웃는 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너 지금 나보고 웃은거야?"
"아니, 그냥 귀여워서."
태형의 말에 당황한 지민이 얼빠진 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의 해맑은 웃음 위로 앞머리가 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게 보였다. 지민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후다닥 일어섰다.
“집 안 갈 거야?”
지민의 말에 태형이 따라 일어서며 먼저 가는 지민의 뒤를 쫓아갔다. 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옆에서 같이 걷는 태형의 발을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 코스모스 보니까 생각났는데, 난 꽃들 중에서 코스모스가 제일 맘에 들어.”
“그래?”
지민이 고개를 들어 잠시 태형을 보고선 다시 땅으로 시선을 옮겼다.
“응. 꽃 색도 예쁘고, 뜻도 예쁜 것 같아서.”
***
지민에게 갑작스럽게 출장 일정이 잡혔다. 무려 아침 8시까지 출근해야하는 일정이었다.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이 연구소는 연구원들 피 빨아먹으려 세워진 곳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이번 주만 그래서 다행이지. 자기 직전에 태형에게 아직 얘기를 못 전한 것이 생각이 난 지민은 방문을 열어 소파 위에 누워있는 태형을 보며 말했다.
"나 이번주만 8시까지 출장가야해서 당분간 일찍 나가."
소파에 누워있던 태형이 지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헐, 8시? 너무 이르다. 그럼 퇴근도 그만큼 일찍 해?"
"잘 모르겠어. 아마 평소랑 똑같지 않을까 싶긴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번주는 데리러 안 나와도 돼."
"알았어. 얼른 자. 너 내일 피곤하겠다."
"그래, 너도 잘 자라."
"응. 아, 지민아!"
"어?"
"내 꿈 꿔!"
방문 쪽으로 뒤돌던 지민이 순간적으로 정색을 했다. 지민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우 닭살...'
하지만 지민은 태형의 비위를 맞춰줘야했다. 지민이 애써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태형쪽으로 몸을 돌렸다.
"으,응.. 너도."
방문을 닫은 지민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닭살이 여전히 올라온 팔을 만지며 탁상 위에 놓여져있는 달력을 쳐다봤다.
'당분간은 출장이 있으니까, 상황 봐서 다음주 쯤에 제보하면 되지않을까. 다들 아마 엄청 놀라겠지?'
이불을 젖힌 지민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렸다. 곧 승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출근할 준비를 마친 지민이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으려 하는데 화장실에서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은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태형이 벌써 일어났나 싶었다.
“김태형, 벌써 일어났어? 나 간다!”
“지민아!”
“왜.”
지민이 태형의 말에 대답을 하며 가방을 고쳐 들고선 신발 뒤축을 구겨 신었다.
“세수하고 보니까 수건이 없어. 좀 갖다 줄 수 있어?”
‘거 참, 수건이 걸려있는지 좀 보고 세수를 할 것이지.’
지민은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간을 보고선 건조대에 걸려있는 수건을 아무거나 집어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담부턴 수건부터 확인하,”
지민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태형의 안경이 세면대 구석에 놓여있었다. 지민이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세수를 방금 마친건지 물줄기가 태형의 얼굴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태형은 젖은 앞머리가 약간 거슬렸는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거울로 지민과 눈이 마주친 태형이 지민을 향해 뒤돌았다. 젖은 얼굴 때문인건지 태형의 이목구비가 더 부각되어보였다.
‘와..뭐냐.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왜, 잘 생긴건데?’
지민은 태형에게 수건을 전해주는 것도 까먹은 채 그저 멀뚱히 서있었다. 그때 태형이 지민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지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태형은 지민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민은 가까이 붙은 태형에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민은 당황스러움에 동공이 흔들렸다.
‘갑자기 이 분위기 뭐지? 왜, 왜 그렇게 보는거지? 아니, 우리 너무 가까운 거 같은데..’
지민이 태형의 눈을 피하려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귀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턱을 잡고선 자신에게로 다시 돌렸다. 당황한 지민의 흔들리는 시선을 본 태형이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민아, 안 일어나?”
‘...뭐?’
지민이 감고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이 고개를 돌리니 태형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게 보였다.
‘...뭐야. 꿈이었어?!’
“...너..너 왜 안경 쓰고있어?”
“뭐라는거야! 너 오늘 8시까지 출근해야한다하지 않았어?”
“...지금 몇신데.”
“7시..”
“...뭐?!”
그대로 벌떡 일어난 지민이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후다닥 나와 아무 옷이나 꺼내 입은 지민이 현관쪽으로 빠르게 가서 신발을 마구 구겨 신고선 도어락으로 손을 옮겼다.
“지민아 가방 가방!”
“미쳤나봐. 가방 두고갈뻔했네. 고마워!”
지민은 태형에게서 가방을 건네받고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도로변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은 지민이 숨을 헐떡이며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며 머리를 대충 이리저리 쓸어넘겼다. 택시는 한참을 속도를 높여 달렸다. 지민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선 그래도 지각은 면할 것 같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창문으로 옮겨진 지민의 시선에 그제서야 빗방울이 띄엄띄엄 떨어지는게 보였다.
'뭐야, 비 와? 아 씨, 우산 안 가져왔는데.'
하늘을 보니 굉장히 우중충해 보였다. 야외 출장이라 우산은 필수일 듯 했다. 지민이 애써 차분히 만들어놓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되는게 없냐. 출장 장소에 가까워지니 설상가상으로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다가 편의점에라도 들려서 우산을 사야할 것 같았다. 지민이 지갑을 미리 꺼내려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것을 꺼낸 지민은 순간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우산?'
지민이 자신의 손에 들린 우산을 빤히 쳐다봤다. 지민은 가방을 통째로 열어젖혔다. 항상 서류파일과 지갑만 있던 가방 안에는 지민이 아침에 자주 먹는 요구르트도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태형이 아침에 지민이 급하게 준비하는 동안 가방에 우산과 요구르트를 넣은 것 같았다. 지민은 괜시리 심각해진 표정으로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입을 꾹 다문 채 한참 멍을 때리던 지민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나, 왜 안 시키는 짓을 하고..’
출장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탄 지민이 시간을 확인했다. 첫날 퇴근은 생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평소보다 1시간이나 퇴근시간이 지나있었다. 지민은 어젯밤에 혹시 몰라 태형에게 이번 주는 정류장에 안 나와도 된다고 말한 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카드를 찍고선 버스에서 내린 지민이 우산을 펼쳤다.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류장 의자로 향했다. 익숙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김태형?!"
"오늘 좀 늦었네?"
"야...내가 안 나와도 된다 했잖아. 너 얼마나 기다린거야?"
"에이, 별로 안 기다렸어."
"별로 안 기다렸기는. 너 신발 다 젖어있는데."
태형의 신발 앞코가 꽤 젖어있는게 지민의 눈에 들어왔다. 태형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웃음만 보일뿐이었다. 태형의 해맑은 표정에 지민은 괜시리 죄책감이 들었다. 묘해진 기분에 괜히 마음과는 반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왜 안 시키는 짓을 해. 내가 가방 챙겨 달래? 내가 나 데리러 와 달라 했어?"
둘만 있는 정류장의 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태형은 자신의 신발을 잠시 보다 시선을 올려 지민을 쳐다봤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지민은 여전히 웃고 있는 태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들고 있던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내 정류장 안으로 들어온 지민이 우산을 접으며 말했다.
"...네가 들고 나온 우산이 더 큰 거니까, 같이 쓰고 가."
"엥? 따로 우산 쓰면 더 안 젖어서 좋은 거 아니야?"
"아, 좀. 나도 그냥 내 맘대로 할거야.“
그런 지민의 말에 태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은 저보다 키가 조금 더 큰 태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들어줘. 네가 키 더 크잖아."
"알았어."
태형이 우산을 펼치자 지민이 태형의 옆에 바짝 붙었다. 태형은 지민의 한쪽 어깨가 젖을 새라 최대한 지민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얼마 안 있어 자신과 달리 태형의 한쪽 어깨가 젖은 걸 발견한 지민한테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
아침에 태형이 눈을 뜨자 지민은 이미 출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출근시간이 지나있었다. 평소에 늦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지라 태형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지민이 자고 있는 태형을 깨우기 뭣해서 조용히 나간 것 같았다. 태형은 물을 마시려 부엌으로 향했다. 하품을 하며 컵에 물을 따르는데 식탁 위에 저번에 태형이 신기해했던 지민의 시계가 올려져있었다.
‘준비하다가 깜빡했나보네.’
다른 건 놓고간게 없나 둘러보던 태형이 시계를 다시 지민의 방으로 옮겨놓으려고 집는 순간 시계 화면이 밝아졌다. 태형이 시계를 잡고있던 손을 멈칫 했다. 시계에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태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메시지에 적힌 글자들로 향했다. 태형은 꽤 오랫동안 시계화면을 쳐다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시계를 식탁 위에 올려놨다. 잠시 의자에 앉아 식탁을 의미없이 두드리며 생각을 하던 태형이 이내 물을 마시려한 것도 까먹은 채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민 씨, 본관가는 길이지?”
“아, 네.”
“그럼 가는 길에 이거 3층 연구실에 좀 전달해줄래? 어딘지 알지?”
“네, 주세요.”
지민의 손에 분철된 서류들이 올려졌다. 본관으로 향하면서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레 서류의 가운데 문단으로 향했다.
[ 두 개의 평행세계에서 차원을 넘어 신호를 전달하는 매개체는 시계, 전기, 음파 등이 있으며, 모스부호를 통해... ]
지민도 함께 수집했었던 자료였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며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는데 지민의 귀에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우리 옆 연구실에 주임 직급인 김 후배. 며칠 전에 일반인 제보해서 진급했대. 진짜로 다음 프로젝트 참여 권한 받았다나봐.”
“와, 진짜 어떻게 찾은 거야? 나도 한번만 내 앞에 나타나주면 소원이 없겠다. 당장 연구소 데려올 자신있는데.”
지민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지민이 고개를 들자 연구원 두 명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자신의 동기가 진급했다는 말에 솔깃해진 지민이 대화를 좀 더 엿들으려 괜히 게시판을 보는 척 주위를 서성거렸다.
“부럽긴 하지. 아니 근데 나는 더 궁금한게, 그럼 그 일반인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소장님만 아시겠지 뭐. 근데 내가 들은 소문으로는, 괜히 나중에 뒷얘기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 메모리를 싹 다 초기화시켜서 돌려보낸대.”
“뭐? 하하,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평행세계 후기가 하나도 없는걸 보면 진짜일수도 있겠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휑해진 복도에는 지민만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쳐다보던 지민이 이내 자신도 연구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기화를 한다고?’
지민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거 생명엔 지장이 없나? 아니, 근데 그렇게 막 지워도 되는건가? 잠시 생각을 하던 지민이 피식 웃었다.
‘아, 근데 다행이다. 나 늦잠자서 추하게 나갔던 거 까먹겠네. 아! 요구르트 먹다가 사레 들린것도. 그거 은근 쪽팔렸었는데.’
지민이 고개를 숙이고선 복도 무늬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걔 나 처음 봤을 때 막 울려했던 거도 까먹겠네. 아쉽다, 그거 계속 놀려먹어야하는데.’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던 지민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근데 그러면 그 버스 정류장은? 매번 나 데리러왔었던.’
‘코스모스는?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우산 같이 썼던것도.’
지민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러면 나도 까먹겠네.”
복도 한가운데 선 지민이 괜히 애꿎은 입술을 뜯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연구원이 지민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지민씨! 이거 우리 연구실 갖다 줄 자료맞죠? 제가 들고 갈게요.”
지민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어색하게 웃으며 서류를 넘겨줬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고선 뒤를 돈 지민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아니, 내가 그 걱정을 왜 하고 있지?”
‘아무리 정이 들었다 해도 그렇지, 이런 기회를 날려버릴 생각을 하냐. 승진이 코앞인데. 내일은 진짜로 김태형을 데리고 오든지 해야지.’
나름 다짐을 한 지민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
어김없이 버스에서 내린 지민이 고개를 들어 정류장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휑했다. 평소라면 태형이 당연히 서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태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지민이 정류장 뒤편도 살펴봤지만 태형은 없었다. 지민이 의아해하며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았다.
‘늦을 리가 없는데..’
지민이 집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골목이 더 휑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지민의 머릿속에 아까 연구소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지민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최대한 빨리 뛰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도어락을 급하게 누른 지민이 숨을 헐떡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센서가 켜지며 그와 동시에 거실 불이 켜졌다.
“서프라이즈!”
당황한 지민의 눈에 케이크를 들고 서있는 태형이 보였다. 지민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지민이 가만히 있으니 잠시 뒤에 현관 센서가 꺼졌다. 그와 동시에 개구쟁이처럼 올라가있던 태형의 입꼬리가 슬며시 내려왔다.
“지민아, 너..”
케이크를 든 태형의 손이 내려갔다.
“울어?”
정말 태형의 말대로 지민의 눈가가 빨개져있었다. 지민이 눈물을 약간 글썽인 채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사람 놀래킬래?!”
태형이 케이크를 바닥에 잠시 내려놓았다. 지민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으려 최대한 띄엄띄엄 말했다.
“나는, 너,”
“너, 없어진 줄 알고,”
지민이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태형은 지민의 어깨를 토닥이다 이내 다시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다.
“그래도 초는 불어. 오늘 너 생일이잖아.”
“뭐?”
태형의 말에 지민이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시선을 옮겼다. 10월 13일. 지민은 그제서야 오늘이 자기 생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선 태형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태형이 얼른 초를 불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지민은 눈에 눈물이 맺은 채로 초를 불었다.
지민은 태형이 직접 만든거라는 케이크를 접시에 올려놓은 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 생일인건 어떻게 알았어?”
“너 시계가 알려주던데?”
“시계?”
그제서야 자신의 손목을 본 지민은 아침에 스마트워치를 찬다는걸 깜빡하고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지민은 괜히 접시 위에 올려진 케이크의 생크림을 포크로 뒤적였다. 아무리 생일을 알았다 해도.. 계속 입 언저리에만 말이 맴돌았다. 진짜 케이크를 만드는 정성은 또 뭐야. 맨 위에 올려진 뭉뚱그린 형체의 딸기조차 김태형같았다. 지민은 애꿎은 딸기를 포크로 콕콕 찔렀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네.”
“다행이다. 케이크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건데!”
이런 재주가 또 있었네, 생각하던 지민은 이상하게도 태형의 얼굴을 보기가 괜시리 미안해졌다. 얼굴 제대로 보고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라고 생각은 하는데 행동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지민이 케이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태형에게 말했다.
“걔한테도 만들어준 적 있어?”
“누구?”
“그 왜, 나랑 똑같이 생겼다는 그 박지민.”
“아니?”
태형의 말에 지민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지민의 앞에 무언가가 올려졌다.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레 태형이 올려놓은 것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했던 물건에 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핑크색으로 가득한 코스모스 꽃다발에 지민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거 너 생일 선물. 너 그때 코스모스가 제일 좋다며. 이거 꽃다발 구하는데 진짜 힘들었어!”
꽤 감동을 받은 지민은 꽃을 가까이 가져와서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태형과 눈을 마주쳤다. 지민이 해맑게 웃어보였다.
“이거 구하느라 고생했겠다. 고마워. 진짜 예쁘다.”
지민의 말에 태형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지민은 시선을 내려 코스모스의 노란 꽃가루를 눈에 담았다. 태형이 이전에 말했던 게 생각났다. 별처럼 생겼다던 꽃가루. 그런 코스모스를 한참 바라보던 지민이 문득 태형을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근데, 너 나 첨에 봤을 때 막, 차였다 그러지 않았어?”
“...엉. 그날 원래 있던 세계에서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한테 차였었어.”
“왜 차이고 그러냐.”
“그냥 내가 자기 취향이 아니래.”
지민은 태형이 처음 입고 있었던 옷을 떠올렸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공대야?”
“...아니. 나 문과인데.”
“미안.”
지민은 괜히 무안해져 케이크를 입안에 마구 쑤셔 넣었다. 한참을 쑤셔 넣던 지민은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태형에게 다시 물었다.
“그, 있잖아, 그러면...걔가 나아, 내가 나아?”
“그 원래 세계 박지민이랑 너 둘 중에?”
“응.”
“음...”
고민을 하는 것 같은 태형의 모습에 지민의 눈이 땡그래졌다.
“야, 너 지금 고민하는거야? 아니, 왜? 걔는 너 찼다며! 나는, 어? 생판 처음 보는 너 데리고 와서 재워주고 밥 주고, 어? 당연히 나 아니야?”
속사포로 내뱉는 지민의 말에 태형은 잠시 멍하게 있다 이내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는 태형에 결국 지민도 따라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지민은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진심으로 친절함을 베풀었다기보단, 처음엔 태형을 속인 것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태형의 얼굴을 한참 보던 지민이 태형의 안경을 빤히 봤다. 아 저거 안경, 저거 벗으면 난리날텐데. 지민은 묘하게 질투가 났다.
“너, 만약에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간다면, 안경 안 벗으면 안돼?”
“왜?”
“아니..뭐, 그냥..네가 시력 안 좋다하니까.”
지민은 괜히 얼버무렸다. 지민은 태형이 입고 있는 자신의 옷을 쳐다봤다. 태형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왔었던 날, 지민은 태형에게 평소 자신한테는 사이즈가 좀 컸던 옷들을 건네줬었다. 그저 체크남방에서 맨투맨으로 바꿨을 뿐인데 훨씬 나아보였다.
“너 거기 가서 체크남방도 계속 입고다녀.”
“싫은데?”
“아, 그냥 입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며!”
괜히 투정을 부리는 지민에 태형은 장난을 치며 웃어보였다. 지민은 민망함에 괜히 딴청을 피우다 태형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결국 그를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지민이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계속 입 언저리에 맴돌았다.
‘우리 집에 계속 있으면 안돼?’
***
지민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태형은 평소와 같이 소파에 이불을 깔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지민은 이때까지 태형을 괜히 소파에서 자게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 좀 추웠을텐데..’
“...들어와서 자.”
“어, 어?”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버린 태형에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지민은 괜히 민망해지는 바람에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아니, 거실 춥잖아. 괜히 감기 걸렸다 뭐다 하지 말고 방에 들어와서 자.”
“진짜 그래도 돼?”
“대신 침대 좁으니까 바닥에서 자야하는데.”
“아 당연히 그래야지.”
태형이 이불을 바리바리 싸들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역시나 어색하다.
어두컴컴한 방에 함께 있은 적이 처음이라 그런지 어색함이 감돌았다. 지민은 오히려 태형이 바닥에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체감상 벌써 30분째 눈이 말똥말똥한 듯 했다. 옆으로 누워있는 탓에 눈을 깜빡일때마다 속눈썹이 베개에 스치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민은 이상하게도 잠에 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잡생각이 늘어났다. 지민이 억지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왜 잠이 안 오지. 나만 잠이 안 오는건가. 김태형은 지금 자나?’
문득 지민은 뻔하디 뻔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서로 썸 타던 주인공들이 어쩌다 같은 방에서 자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마는.
‘아, 뭐. 내일 주말이니까 괜찮은...’
지민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서려있었다.
‘미친! 지금 무,무슨 생각한거야? 참나, 상대가 따로 있지. 내,내가 왜..얼른 자자 얼른..’
지민이 겨우 눈을 다시 감았다.
“지민아...자?”
“!”
그 순간 태형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지민이 어깨를 움찔하며 눈을 떴다. 새삼 태형의 목소리가 평소와 더 다르게 느껴졌다. 지민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왜?”
지민이 대답하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지민은 왠지 모를 긴장감에 괜히 침을 한번 삼키고선 그 소리가 또 컸나싶어 혼자 놀란 채 입술을 깨물었다. 곧 태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 혹시...”
지민은 심장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갑자기 꿈에서 봤던 안경을 벗은 태형의 얼굴이 생각났다. 지민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 잠시만. 나, 나 아직 준비 안됐,’
“A형이야?”
“...??”
‘뭐?’
지민이 눈이 당황스러움에 빠르게 깜빡였다.
'A형? 내가 아는 그.. 혈액형 A형?‘
지민의 눈썹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지민은 태형의 뜬금없는 말에 자신이 방금 잘못 들었나하고 생각했다.
‘그,그래. 뭔가 필요한 얘기겠지.’
“그..런데. 왜?”
지민의 말에 태형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A형일줄 알았어! 아니, 갑자기 생각난게, 내가 AB형이거든? 근데 내가 어디서 봤는데 궁합 1순위가 A형이래! 완전 대박이지? 우리 진짜 혈액형도 운명, 억!”
“야!! 고작 혈액형 얘기하려고 사람을 깨워?!”
태형은 눈치 없게도 입에 모터가 달린 듯 신나게 궁합 얘기를 하다 지민이 던진 베개에 제대로 맞고 말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태형이 조심스럽게 침대 위를 올려다보자 지민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무섭게 빛나고 있는게 보였다.
‘아, 지민이는 자려고했는데 내가 깨운거구나. 그러면 혈액형은 내일 아침에 얘기해줘야겠네.’
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참나, 비과학적인 얘기를 할 사람이 따로있지.’
지민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난 뭘 생각한거야.’
현타가 온 지민이 천장을 보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잠시 눈을 감고있던 지민이 베개를 고치려 손을 뒤로 뻗다가 허전에 느낌에 아까 태형에게 자신의 베개를 던졌던게 생각났다.
‘아 씨..’
지민은 태형이 누운 바닥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태형이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허, 진짜 잠든거야? 누구는 지 땜에 지금까지 잠도 못자고..’
그런 태형을 한참 쳐다보던 지민은 이내 베개를 집으려는 것도 까먹은 채 태형을 따라 잠이 들었다.
***
“아, 역시 넌 나한테 안돼.”
“참나, 나 원래 잘하거든?”
일요일 저녁, 지민의 집 거실에선 태형과 지민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났다. 둘은 게임기를 든 채 티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에선 카트를 탄 캐릭터들이 열심히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내 태형이 골인 지점에 먼저 도착했고, 태형은 지민을 놀려댔다. 지민이 씩씩거리는 것을 보면서 끅끅 대며 웃던 태형이 지민에게 말했다.
“좋아, 그러면 이번 판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하자.”
태형의 말에 승부욕이 생겨버린 지민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오, 그래. 너 이제 죽었다. 야, 근데 막 엄청 비싼거 그런건 안된다?”
“아, 당연하지 그럼.”
태형이 비실비실 웃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수상쩍다는 듯 눈을 작게 뜨다 이내 티비 모니터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3,2,1 카운팅이 끝나고 두 사람은 재빠르게 게임기 버튼을 눌러댔다. 카트 두 개가 현란하게 달렸다. 생각보다 막상막하로 달리고 있는 게임에 지민은 태형의 다리를 팔꿈치로 누르며 방해 작전을 펼쳤다. 태형도 따라서 한쪽 손으로 지민의 눈쪽을 가리며 최대한 게임에 집중했다. 그렇게 막상막하로 달리다 마침내 태형의 캐릭터가 먼저 골인했다.
[ Player 1 WIN! ]
"야 너 이거 반칙,“
화면에 글자가 뜨자마자 지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형은 들고 있던 게임기를 반대편으로 던지고선 지민에게 입술을 부딪혔다. 한참 뒤에 입술을 뗀 태형이 놀라서 토끼눈을 하고있는 지민을 보며 말했다.
“...반칙이야?”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한참동안 말이 없다 이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눈웃음을 지어보인 지민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태형에게 입을 맞췄다.
***
오늘따라 기분 좋게 연구소로 출근한 지민은 연구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평소보다 밝게 아침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은 지민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지민은 평소처럼 컴퓨터를 키고선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지민 씨, 소식 들었어. 축하해 진짜!”
“맞아요 지민씨. 부러워요.”
“뭐가요?”
지민이 잠깐 뒤돌아본 뒤 다시 고개를 돌리고선 의자에 앉으며 되물었다.
"지민 씨 오늘 아침에 승진했다면서?“
“와, 우리 몰래 언제 제보한거래?”
들고 있던 서류에 집중하던 지민이 별 생각 없이 웃으며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하, 제가 승진은 무슨,”
타자를 치던 지민이 이내 이상함을 느끼고선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네?! 제가 승진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