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새로운 학교에 왔다. 인생 첫 전학이었다.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복도 창문을 들여다보며 머리칼도 정돈하고, 눈곱이 끼진 않았는지, 코털이 삐져나오진 않았는지, 교복 핏은 잘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열여덟씩이나 먹어서 전학이라니. 정든 동네 정든 친구들 다 떠나 모든 게 새로운 곳에서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니. 긴장이 안 될 리 없었다. 유난히 날이 흐린 덕에 창 바깥 풍경이 어두워서 거울로 쓰기에는 딱 좋았다. 아마도 늦가을에 비가 내리려나보다. 오전인데도 이렇게 하늘이 어두컴컴한 걸 보니.

 

 

   “지민아? 들어가자.”

   “아, 네에….”

 

 

   선생님의 부름에 얼른 뒤를 따랐다. 왼쪽 옆구리에 스치는 크로스백 감촉이 낯설었다. 이전 학교 교복은 천이 두꺼워서 가방에 살이 쓸리는 일은 없었는데, 이 학교 교복은 좀 얇았다. 니트 조끼에 마이까지 다 챙겨 입었는데도 자꾸 가방 스치는 느낌이 났다. 이거 리베이트 아냐? 무슨 사립재단도 아니면서 교복 질이 왜 이렇게 떨어지나 궁금해졌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차던 중 갑자기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요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 첫날부터 이상한 이미지로 찍히면 안 되는데. 투명한 유리어항을 든 양손이 괜히 시렸다.

 

 

   “춥지는 않니?”

   “네. 괜찮아요.”

 

 

   안 추우니까 괜찮다고 대답한 건데 선생님 눈빛이 영 께름칙하다. 꼭 나를 엄청나게 안쓰러워하는 듯이. 저도 온혈동물인데요, 하고 덧붙이려다 말았다. 대신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히히.

 

 

   “아이고, 이게 뭐야! 주번 나와. 칠판이 아주 한강이야. 어?”

 

 

   교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물백묵을 지우다 만 흔적이 역력한 초록 칠판이었다. 그걸 본 선생님이 역정을 냈다. 좀 고슴도치 같다고 생각했다. 뾰족뾰족. 저 선생님 진짜 고슴도치일지도 몰라. 앞으로 쭉 보게 될 담임 선생님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이 주번인 애가 후다닥 뛰어나와 걸레가 붙은 지우개로 칠판을 쓱쓱 닦았다. 희멀건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비위가 상해 고개를 틀었다.

 

 

   “자, 여기는… 새로 전학 와서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친군데. 네가 직접 자기소개 해볼래?”

   “아니요.”

   “그래… 음. 지민이라고 한다, 박지민. 강원도 쪽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니까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고….”

   “쌤, 쌤. 질문해도 돼요?”

 

 

   아니 질문 같은 거 안 받고 싶은데…. 하지만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애들은 벌써 손을 번쩍번쩍 들고 있었다. 다 고만고만하다. 1분단 중간 즈음에 앉은 애… 달력이 붙어있는 기둥 아래에 앉아있는 남자애 하나 빼고는. 걔도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얼굴이 존나 엄청나게 잘생긴 걸 빼면.

 

 

   “어느 학교 다녔어, 전에?”

   “동해고.”

   “학교 이름이 진짜 동해고야…?”

   “그럼 가짜 동해고도 있겠냐?”

   “어… 저… 전학은 왜 왔어?”

   “이런 질문에도 대답해야 해요?”

 

 

   선생님이 손을 내저었다. 이제 좀 앉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얼굴이 특별한 그 남자애가 손을 딱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목구비가 자기주장이 강한 게, 아,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타입이네. 내 얼굴이 저렇게 생겼더라면 나의 첫사랑 순이도 그렇게 쉽게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을 텐데… 흑흑. 루키즘이 만연한 이 세태에 개탄하던 때였다.

 

 

   “손에 든 거, 그건 뭐야?”

   “어항인데.”

   “그냥 물?”

   “아니, 바닷물. 날 추워지면 이게 그나마 덜 얼어.”

 

 

   그 말에 애들의 표정이 묘해진다. 왜? 바닷물 처음 보나? 서울 사람들은 바다도 안 가? 아니잖아? 멀뚱하게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엄청난 표정을 짓더니 다시 평온해진 얼굴로 말했다.

 

 

   “참. 지민이는 인어니까 어울릴 때 많이 신경 써줘야 한다.”

 

 

   미리 말해놓은 거 아니었어?

 

   나도 당황하고, 애들도 당황하고, 선생님만 무표정하게 헛기침을 했다. 창밖으로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이 가을날, 3교시에.

 

 

 

 

 

인어의 계절

My Fall Is You

 

김태형X박지민

 

 

 

 

 

   나는 인어다.

 

    

   “진짜 인어야?”

   “그래서 동해에 산 거야?”

   “아니야….”

 

 

   나는 굳이 내 입으로 부모님이 빚져서 여기저기 도망치며 살다가 거기까지 갔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초면에 욕도 못하겠고,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 채 웃기만 하니 이번엔 어항은 왜 가져왔냔다. 왜냐니.

 

 

   “서너 시간에 한 번씩 숨 쉬어야 해. 그냥 숨 말고, 물에 있는 공기를 마셔야 돼가지고. 그래서 그래.”

   “우와….”

   “나 인어 처음 봐! 진짜 신기하다.”

 

 

   나도 너처럼 생긴 애는 처음 봐.

 

 

   “그럼 도시에서 살아본 적 없어? 지하철 이런 건 타봤어?”

 

 

   우리 집에도 TV는 있거든?

 

 

   “어쩌다 서울로 이사 왔어?”

 

 

   빚 다 갚아서.

 

   이런 비생산적이고 재미없는 질문들에 내가 정말 하나하나 답을 해야 하는 건가. 자괴감 들고 괴롭던 그때 옆자리에 누가 털썩 앉았다. 아까의 그 남자애였다. 놀랍도록 잘생긴.

 

 

   “안녕, 지민아.”

   “어….”

   “너도 오버워치해?”

 

 

   처음으로 정상적인 질문을 받았다. 나는 약간 감동을 받아서, 그러나 오버워치 관둔지는 백만 년도 더 됐으므로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 애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옵치는 솔직히 지는 해지. 난 요새 배그만 조져.”

   “배그나 옵치나. 쨌든 뭐, 게임 좋아하나보네.”

   “엄청 좋아하진 않고. 남동생 있어서 걔랑 놀려면 게임 말고 적당한 게 없더라고….”

 

 

   그 애가 웃었다. 뭐 웃는 것도 잘생겼냐, 부럽게.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친해져서 몇 주 동안 줄곧 붙어 다녔다. 그 애 이름은 김태형이었다. 이름도 얼굴이랑 잘 어울리는 애였다.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 아니 강원도 전 지역,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도 이런 얼굴은 더 안 나올 것 같았다. 게다가 유머 코드도 잘 맞고, 성격도 수더분하니 괜찮은 것 같았고, 어두운 구석도 딱히 없어 보였다. 확실한 건 아니다. 나만 보면 벙긋벙긋 잘 웃었으므로 합리적인 추측을 한 것뿐이다.

 

   다른 애들에게 태형이가 유명하냐고 물었더니 다들 그렇기는 하다고 했다. 약간 미심쩍은 건 묘하게 의아해하는 듯한 애들의 태도였다. 저 얼굴에 안 유명하기도 힘든데 왜 ‘그렇다’가 아니라 ‘그렇기는 하다’인 거지? 묻고 싶었지만 아직 전학 온 지 하루도 안 된 처지에 말이 많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척했다.

 

   태형이는 착했다. 쉬는 시간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며 학교 여기저기를 보여줬고, 매점 꿀팁 같은 것도 가르쳐줬다. 도서관과 수영장 가는 길도 알려줬다. 내가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학교를 택한 이유였다. 수영장.

 

   학교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아무도 없는 수영장엘 잠깐 들러서 태형이랑 수다를 떨면 속이 후련해졌다. 물 근처에 있는 것도 좋았고, 태형이랑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원랜 출입 통제를 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허가를 받은 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교복을 입고 들어와서 발이나 담그고, 몇 시간씩을 그렇게 떠들었다.

 

 

   “지민이 너는 학교 말고도 수영장 자주 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가야 몸이 좀 살아. 안 그러면 막 뻐근해지고 좀 숨도 잘 안 쉬어지고 그래.”

   “근데 수영장 물 안 좋잖아. 소독약 이런 것도 풀고.”

   “평범한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아. 나도 좀 특이하긴 하지만 아무튼 사람이니까, 그 정도 약탄 물에 안 죽어. 물고기도 아니고.”

 

 

   농담한 건데 태형인 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놓고 인종차별하는 애들은 몇 봤지만 얘처럼 섬세한 애도 또 처음이라 놀라웠다.

 

 

   “야아, 그렇게 미안해서 죽어버릴 거 같은 표정 안 해도 돼.”

   “내가 인어는 잘 몰라서 실수했어.”

   “괜찮아. 어디 인어가 흔하냐 뭐… 나도 우리 친척들 말고는 살면서 딱 두 명 봤어.”

   “친척은 몇 명이나 되는데?”

   “엄마네 아빠네 합쳐서 한 삼사십 명…?”

   “…….”

   “궁금하면 명절에 같이 우리 집 놀러 가도 되는데.”

   “아냐, 괜찮아.”

 

 

   그 말을 하고 나서는 할 말이 없어서 창밖만 봤다. 벽 세 면이 전부 통유리로 돼 있어서 사방이 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에 길게 지는 오렌지색 노을과, 벌써부터 단풍물이 들어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들이 꼭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수영하면 진짜 탁 트인 곳에 있는 기분일 거 같아. 태형이 넌 수영해본 적 있어?”

   “아니… 나는 수영을 아예 할 줄 몰라. 좀 트라우마 같은 게 있어서.”

   “아. 많지, 그런 사람. 우리 엄마도 물 싫어해. 어렸을 때 계곡에 빠져서 죽을 뻔한 적 있다고.”

   “어머니는 인어 아니셔?”

   “인어 맞는데.”

 

 

   태형이가 존나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우매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벌써 수십 번은 한 것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풀었다.

 

 

   “너 지금 나 봐봐. 내가 물고기 꼬리 달고 있어, 두 발로 발장구 치고 있어?”

   “…두 발로.”

   “우린 다 그래. 걸어 다닐 수도 있고 헤엄치면서 살 수도 있어. 아예 바다에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일단 우리 가족들은 안 그래. 우리도 아파트 살거든….”

   “…….”

   “그리고 인어라고 수영 다 잘하는 건 아니야. 물론 난 잘하지. 근데 우리 엄만 못하셔. 그러니까 엄마한테 인어라는 건 알러지나 다름없는 거야. 틈틈이 물에서 숨 쉬어줘야 하고, 하루에 한 번은 깨끗한 물에 목욕해야 하고. 그거 빼면 너네랑 똑같아.”

   “너도 그래?”

   “난 누가 봐도 본투비 인어.”

 

 

   내가 낄낄 웃자 태형이도 나를 따라 웃었다. 나는 괜히 딴생각이 나서 얼른 저 멀리 노을이나 내다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별 건 아닌데, 그냥, 동그랗게 올라가는 걔 볼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

 

 

 

*

 

 

 

   어느덧 이 학교에 다닌지 두 달이 지났다. 나름 친구들도 생기고, 단짝인 태형이와도 사이좋게 다녔고, 전학 온 후 처음으로 모의고사도 쳐보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적응 잘했다 싶던 때였다.

 

   원랜 대중교통 타고 등하교하는데, 오늘은 엄마가 근처에 출장이 있다고 차로 학교에까지 데려다줘서 기분이 꽤 좋았다. 시간이 남아가지고 학교 앞 편의점에 가서 새로 나온 호박고구마맛 우유도 사 먹어보고, 개미 떼처럼 우르르 몰려가는 애들을 구경하며 속편하게 웃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야 김태형!”

   “……?”

   “너 뭐야. 보고도 아는 척을 안 해.”

 

 

   얼른 뛰쳐나가서 생글생글 웃으며 그 애 곁으로 따라붙었는데 표정이 좀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 누구야?”

   “네가 2반에 전학 왔다는 걔구나. 동해 인어.”

 

 

   나랑 그 애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뒤늦게 그 애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읽었다.

 

   김태형이 아니라, 김한성이었다.

 

 

   “나도 너랑 한 번 얘기 해보고 싶었는데… 김태형 그 새끼가 워낙에 꽁꽁 감춰놔서 기회가 없었네.”

   “야, 대답부터 해. 너 누구냐구….”

   “태형이 형이야. 쌍둥이 형.”

 

 

   근사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태형이와 꼭 닮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나는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치다가 휙 몸을 돌려서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김한성인지 김개인지 하여간 태형이와 닮은 얼굴을 가진 그것은 나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 괜히 재수 없게 느껴졌다. 그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서 싸한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지가 뭔데 여유로워? 어떤 포인트에서?

 

   그 뱀 같은 놈을 피해 후문으로 들어가려고 학교 담벼락을 반바퀴나 휭 돌았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걸으려고 노력했는데 자꾸 딴생각이 났다. 똑같이 생겼는데 그 새끼는 왜 재수가 없지? 태형이가 보고 싶었다. 너네 쌍둥이 형 혹시 싸이코냐. 물어보고 싶기도 한데, 뭔가… 지난 한 달 남짓 알고 지내면서 걔가 단 한 번도 자기가 쌍둥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어서. 물어보면 안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보고 싶었다. 나 원래 이렇게까지 친구한테 의존하는 성격이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지민아.”

 

 

   맞은편에서 태형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창 걔 생각에 빠져 있다가 눈앞에서 맞닥뜨리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어딘가 좀 불편하게 간지럽기도 하고.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으니 태형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얼굴이 별로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전에 말한 호박고구마맛 뚱바 먹어봤는데 맛이 별로여서….”

   “뭐야.”

 

 

   태형이가 부스스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면 바닷속에 들어간 것처럼 뭔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면서도, 낙엽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 느낌도 같이 들었다. 나는 태형이와 손을 잡고 학교로 들어가면서 몇 번을 머뭇하다가, 한참 만에 물었다.

 

 

   “아까 김한성이라는 애가 나한테 아는 척했어.”

   “…….”

   “걔가 너랑 쌍둥이라고 그랬어….”

 

 

   묘하게 눈치가 보였다. 힐끗 태형이를 쳐다보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애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내가 말 안 했었나? 쌍둥이 형 있거든. 내가 동생이야… 하하. 마음에 들었어? 한성이.”

   “아니,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이유를 세라면 한두 개가 아니라 태형이한테 상처가 될 거 같았다. 내 눈엔 쎄했지만 어쨌든 걔는 태형이의 가족이니까. 그런데 태형이는 오히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사람처럼 낯빛이 환해지더니 다시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나도 별로.”

   “…진심이야? 농담이야?”

   “진심인데? 내가 너 좋아하는 만큼 순수한 진심.”

   “야, 내가 너무 잘생기고 멋지고 희귀한 사람이라 네가 첫눈에 반한 건 알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면 너무 오예야.”

   “지민이오빠. 저랑 결혼해주세요.”

   “노르웨이로 따라와라.”

 

 

   평소처럼 뻔뻔하게 농담을 던지는 태형이를 보며, 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쳐 줬다. 사이가 좀 안 좋은가보다.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남의 집 가정사 길게 알아봐야 좋을 것도 없고, 또… 태형이가 싫어하는 거면 나도 싫어서 굳이 알고 싶지가 않았다.

 

   교실로 들어오자 애들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가 다시 흩어졌다. 전학 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애들은 아직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누구나 나와 말을 해보고 싶어 했고, 내가 진짜 인어가 맞는지 궁금해했고, 나한텐 별 거 아닌 내 이야기들을 몹시 재밌어하며 동시에 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애들의 관심을 적당히 받아주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내 단짝은 태형이였다. 태형이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없었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잘생겼고 성격도 좋은데 왜? 심히 유감이었지만,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태형이랑 있는 게 좋았고 태형이도 그렇다고 했으니까.

 

  오전 수업을 듣고, 전쟁 같은 중식 시간을 지나 5교시가 되었다. 음악 시간이었다. 오늘은 가창 수행평가가 있어서 목을 좀 풀어야 했다. 이런 걸로 쑥스러워하고, 오글거린다고 괜히 삐죽대면 맵시가 안 사는 법이었다.

 

 

   “아! 아!!!”

   “지민아, 목 풀어?”

 

 

   태형이가 다가와 목에 따뜻한 뭔가를 대주었다. 조그만 병에 든 꿀물이었다. 내가 그걸 받고 웃자 태형이도 나를 따라서 웃었다. 참 좋은 애라고 생각했다.

 

 

   “뭐 부를 거야?”

   “원랜 애국가 부르려고 했는데 앞에서 애들이 넘 많이 불러서 좆됐어.”

   “그래서 다른 거 하려고?”

   “응.”
   “뭔지 알려주면 안 돼?”

   “비밀이야. 이따가 들어.”

 

 

   태형인 김 씨라서 지난주에 벌써 끝난지 오래였다. 얘도 애국가를 불렀는데 솔직히 좀 잘 불렀다. 가만 보면 공부도 꽤 하고, 성격도 좋고, 말도 재밌게 하고, 노래도 잘 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앤데 어쩌다 친구가 나밖에 없나 싶기도 했다. 아마 그 김한성인가 김도토리인가 걔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티는 내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태형이랑 나는 각자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음악실에서 내 자리는 창문 바로 옆이고 태형이 자리는 복도 바로 옆이었다. 같이 앉으면 좋을 텐데. 쩝쩝 입맛만 다시고 있자 짝꿍이 뭐 부를 거냐고 물어왔다. 비밀이라고 선을 딱 긋는 사이 내 앞에 한 서너 명이 먼저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냥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몇 소절 쓱쓱 부르고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남들 부르는 동안엔 괜찮았는데, 정작 내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이 뚝 멎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태형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복도쪽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역광인데도, 그 완벽하게 생긴 얼굴로 씩 웃고 있는 태형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까 갑자기 괜찮아졌다.

 

 

   “다음이 31번이네? 이 반 원래 30번까지 아니었나?”

   “얼마 전에 전학 왔어요.”

   “아아, 그래. 지민이가 그래서 끝번이었지. 지민이는 오늘 어떤 노래를 부를 거니?”

   “…저희 가족들한테 배운 노래인데, 제목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태평양 민요? 지중해인가. 아무튼 그냥 민요요.”

 

 

   애들이 술렁술렁하는 소리가 몸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었다. 아 걍 평범하게 발라드 같은 거 할 걸. 음악쌤도 벌써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그 노래를 골랐어?”

   “인어들끼리만 부르는 노래라 가산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하하, 좋지. 대신 잘 불러야 가산점도 있는 거 알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혀끝이 바짝 마르는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눈을 콱 감아버리고 노래를 했다.

 

 

   “Θα πας στο πανηγυρι του Σκαβορω….”

 

   Μαϊντανό, φασκομηλο, δενδρολιβανο, θυμάρι.

   Θύμισε σε κάποιον που ζει εκεί.

   Oτι ήταν κάποτε η αγάπη της ζωής μου.

 

   사실 나도 어느 나라 말인지 잘 모르겠는 오래된 노래이긴 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으니까 친숙한 거지. 가사가 맞는지도 좀 헷갈렸다. 천천히, 딱 2절까지만 부르고 눈을 떴는데 교실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좀 머쓱해서 여기까진데요, 하고 자리에 앉자 짝꿍이 희번뜩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야, 지민아… 너 진짜 인어긴 인어구나. 개쩐다.”

   “뭐가.”

   “나 방금 진짜 천국 갔다 온 거 같았어….”

   “하 참나, 내가 우리 가족 중에서도 유독 좀 한 가락 하기는 하는데. 너무 고마워하지는 마라. 짜식. 머메이드 디너쇼 가면 노래 한 곡 듣는 데에 50만 원씩 깨진다던데 난 돈은 안 받을게.”

 

 

   조금 부끄러워서 일부러 더 쾌남인 척 한 건데. 애들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님까지 자꾸만 나를 봤다. 이상하게도, 태형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별로였나? 나 노래 괜찮게 하는데. 우리 부모님도 나는 진짜 딴 건 몰라도 우리 노래는 찰떡처럼 잘 부른다고 칭찬해줬는데.

 

   수업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도 태형이는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뿐이게, 같이 걷지도 않고, 말도 안 걸었다. 화가 난 건가 싶어서 태형이 뒷모습을 쳐다봤는데 다른 애들이 자꾸 달라붙어가지고 조금 짜증이 났다.

 

 

   “진짜 멋있더라! 어느 나라 말이야? 그거 인어들 언어야?”

   “나도 몰라. 잠깐 좀 나와봐….”

   “사실 어항물에 숨 쉬는 것만 봤지 아직 수영하는 것도 못 봐서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 인어 같더라, 아까.”

   “나와보라고. 나 지금 좀….”

 

 

   태형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업종은 쳤는데, 어딜 간 건지 모르겠어서 눈만 굴렸다. 그마저도 애들 때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음 교시가 진행되는 동안 태형인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

 

 

 

   “너 어제 왜 말도 없이 수업도 안 들어오고, 내 톡도 다 씹고, 아침에도 나 무시해?”

 

 

   음악 수행 전까지는 노래 잘 부르라고 꿀물까지 사줬으면서. 나는 너무 속상하고 태형이 속을 모르겠어서 잔뜩 신경질 난 상태로 학교에 왔다. 어젠 끝까지 태형이하고 제대로 대화를 못 해서 애간장이 닳다 못해 가루가 되어 없어진지 오래였다.

 

   오늘도 말할 기회가 없어서 눈치만 보다가 4교시 체육 시간이 돼서 비로소 태형이랑 둘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 반에는 체육 때 수영장 가는 애가 예닐곱 명 정도밖에 안 돼서, 다른 애들이랑 다 같이 있을 때보단 훨씬 편했다. 태형이랑 둘이 있는 게.

 

 

   “야, 김태형.”

   “…….”

   “대답해. 너 뭐냐고.”

   “…미안.”

   “내가 지금 사과받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설명해달라고, 너 갑자기 왜 그러는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풀에 발만 담그고 있는 태형이를 따라 그 곁에 앉았다. 태형이는 수영부를 신청해놓고, 단 한 번도 물속에 제대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어차피 수영 시간은 자율로 주어지는 거라 선생님도 태형이한테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반바지 수영복에 교복셔츠를 걸치고 있는 태형이 모습이 늘 신경 쓰였다. 오늘은 더 신경 쓰였다. 얘가 나랑 말을 안 해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태형아.”

   “아니.”

   “그럼 왜 그래?”

   “무서워서….”

   “뭐?”

   “무서워서 그랬어.”

 

 

   그러면서 태형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마냥 예쁘게 생긴 눈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나를 똑바로 마주한 그 눈이 어쩐지 좀 서늘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낙엽길 같았다.

 

 

   “지민아.”

 

 

   그때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태형이랑 닮은 목소린데, 태형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얘가 부른 게 아니었다. 그럼 뭐야.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지난번에 한 번 봤던 얼굴이 쑥 나타났다. 태형이네 쌍둥이 형.

 

 

   “김한성?”

   “내 이름 기억하네? 잘 됐다. 어젠 얘기도 제대로 못 해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우리 더 대화할 수 있지?”

   “한성아, 뭐해!”

   “야 오늘 아이스크림 걸고 수구 내기하기로 했잖아. 빨리 와, 니가 센터 포워든데.”

   “어. 잠깐만. 나 이것 좀.”

 

 

   이거? 나?

 

   졸지에 이거가 된 난 어이가 승천할 지경인데 김한성인지 김시발인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확 짜증이 났다.

 

 

   “나 친구랑 얘기해야 해서 바쁜데.”

   “김태형이 너랑 친구야? 얘가 그냥 친구래?”

   “김한성. 너 입 다물어.”

 

 

   나는 태형이랑 알고 지내면서 그렇게까지 음산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근데 김한성인지 김우웩인지는 익숙해 보였다. 다른 애들한테도 태형이가 이렇게 비쳤을까, 그래서 애들이 태형이를 피했던 건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 새끼가 먼저 와서 태형이를 긁어놓는 것 같단 말이야.

 

 

   “지민아. 너 인어라며, 인기 많겠다.”

   “좀 귀찮긴 한데 괜찮아… 난 태형이랑 친해서.”

   “김태형이랑 왜 친해졌어? 김태형이 먼저 너한테 다가갔지?”

   “김한성.”

   “지민아, 쟤… 호모야. 집착도 존나 심해.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른 애들까지 다 쟤라면 학을 떼는 거야.”

   “뭐 씨발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야 너 입술 소근육을 좀 곱게 써, 이 개새끼야!”

 

 

   속으로만 생각하려던 게 입 밖으로 나간 찰나였다. 내 욕지거리보다 더 빠르게 태형이 주먹이 김한성한테 날아갔다.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휘청하던 김한성은 바로 앞에 있던 풀에 빠졌다. 다이빙 풀이라 좀 깊은데. 김한성이 빠지면서 물속에 붉은색 길 같은 게 났다. 코피 터졌구만.

 

   근데 트라우마가 있다던 태형이랑 다르게 김한성은 수영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금세 물 위로 올라오더니, 무시무시한 눈으로 태형이를 노려보다가 태형이 발목을 잡아챘다. 내가 미처 태형이를 잡기도 전에 태형이는 김한성한테 잡혀 물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주변으로 모인 애들은 한성아, 한성아 너 피나, 이 지랄을 하면서 김한성 걱정만 했다.

 

   미친 새끼. 나는 김한성을 노려보다가, 물로 뛰어들었다.

 

   태형이는 다이빙풀 거의 바닥 쪽까지 가라앉아있었다. 발버둥도 못 치고 그렇게 가라앉는 걸 보니 더 화가 났다. 태형이 쪽으로 내려가려는데 수영복이 자꾸 걸리적거려서, 밑으로 몸이 잘 안 뻗어 나가서,

 

   아 진짜. 엄마가 밖에서 이러지 말랬는데. 나는 다리에 힘을 풀었다. 수영복이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하반신에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야 김태형! 물 먹었어? 눈떠봐, 태형아….”

 

 

   태형이를 건져서 다시 물 위로 올라오니 애들이 경악했다는 듯, 혹은 경이롭다는 듯, 아니면 그 가운데에 좀 어중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인어 꼬리를 제대로 본 적은 없을 테니까. 태형이한테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인데 이렇게 보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그나저나 얘가 눈을 떠야 할 텐데.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아서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우리 반 애 한 명한테 소리를 질렀다.

 

 

   “야 재밌냐? 구경할 만 해? 나 같으면 씨발 보건쌤을 먼저 불러왔겠다!”

   “어? 어, 어! 미안 지민아, 내가 얼른 가서 불러올게.”

 

 

   저 멀리에서 체육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쌤들 오시면 괜찮겠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면서 안심하려고 노력했는데 태형이 얼굴을 붙든 손이 자꾸만 떨렸다.

 

   김한성 저 뚝배기 깨버릴 새끼가. 나는 뜻모를 얼굴을 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김한성을 보다가, 꼬리를 내리쳐서 그 새끼 얼굴에다 물을 튀겼다.

 

 

 

*

 

 

 

   태형인 오후 수업도 못 듣고 내내 보건실에 누워있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닌데 몸이 놀라서 좀 쉬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듣는지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다가, 석식 종이 치기 무섭게 보건실로 달려갔다.

 

 

   “태형아.”

 

 

   다행히 태형이는 깨어서 앉아있었다. 나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걔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그 곁으로 가서 앉았다.

 

 

   “지민아.”

   “…….”

   “미안해. 아까 사과 제대로 못한 거 같아서.”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미안해….”

   “어제 오늘 너한테 잘못했잖아, 나.”

   “그 정도는 미안하다고 안 해도 용서할 수 있어. 그냥 왜 그랬나 궁금했던 거지.”

   “김한성 말이 맞아.”

   “뭐가?”

   “나 집착이 심해.”

 

 

   김한성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건 다 가졌어. 그래서 난 열등감도 심하고, 집착도 심하고, 뭐든 그랬어. 부모님 사랑이든 친구들이든. 내가 갖고 싶었던 건 다 김한성한테 갔어. 어릴 때 계곡 가서 사고난 적이 있었거든. 김한성이랑 나랑 둘 다 물에 빠졌는데, 부모님이 걔만 건졌어. 나는 혼자 허우적대다가 한참 뒤에야 119가 와서 구조됐어. 그 뒤로 물이 무서워졌어. 김한성은 수구부도 들어가고, 수영도 하고, 재밌게 잘 사는데.

 

   난 그냥 김한성처럼, 아니, 김한성이 가진 10퍼센트라도 좋으니까, 김한성 동생이 아니라 김태형으로 날 대해주는 사람이 갖고 싶었어.

 

   그래서 친구들이 생기긴 했는데 다들 금방 도망갔어. 내가 너무 집착해서 싫어했어. 김한성 친구들은 온종일 걔랑 붙어있는데, 왜 난 그렇게 같이 있는 친구를 못 사귈까…. 그러다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어떤 앨 좋아해 봤는데 걔가 남자애였거든. 그래서 김한성이 너한테 나 호모라고 그런 거야. 호모 맞으니까.

 

   걔도 아마 니가 마음에 들었나봐. 김한성이 한두 마디만 걸면 내 친구들은 다 김한성 친구가 되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던 거 같아. 원래 다른 애들한테 내가 호모라고까지 얘기하진 않거든. 그래서 지민이 니가… 니가 계속 내 친구를 하니까. 나도 이상했어. 넌 왜 나랑 친구를 할까.

 

 

   “너는 원래도 애들이 되게 좋아했지만, 수행평가 하고 나서 다른 애들이 이제 약간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네 뒤만 쫓아다니니까… 그게 좀 섭섭했던 거 같아. 말도 안하고 유치하게 굴어서 미안해.”

   “됐어. 야, 그리고 친구 하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지.”

 

 

   태형이 얘기를 듣고 나니까 마음이 이상했다. 슬라임이 된 거 같았다. 푹 찌르면 들어갈 것도 같았고, 주먹으로 꽉 쥐어짜면 그대로 줄줄 흐를 것도 같았다. 슬픈 건지 기쁜 건지, 아니면 우울한 건지 모르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태형이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김한성 신경 안 쓰고 바로 나한테 달려와줘서 고마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네 친구지, 걔 친구냐.”

   “나한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었는데.”

   “그럼 이제 내가 1등이다. 그리고 곧 더 생길 거야. 난 너랑 친구 하면서 진짜 좋았거든. 얘처럼 멋진 애가 내 친구라니, 막 그런 거. 다른 애들도 눈치까면 줄 서서 번호표 받아갈걸. 김태형 친구 하고 싶다고.”

 

 

   태형이가 잔잔하게 웃었다. 낙엽이 부서지는 것 같은 그 웃음에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

 

 

   “근데 지민이 네 꼬리 처음 봤는데, 원래 그렇게 다들 새빨간 색이야?”

   “아씨.”

   “…말하지 말까?”

   “아냐… 됐어. 내 선택이었는데 뭐. 꼬리는 다들 색이 좀 달라. 머리색은 대체로 인종 따라 비슷한데 꼬리는 약간 고유한 그런 거야. 우리 집에선 나만 그 지랄이야. 엄만 상아색이고 아빤 회색이고, 우리 동생은 회색빛 연한 하늘색.”

   “예쁘기만 하던데 왜?”

   “진심이야?”

   “응, 단풍 같고…. 진짜로.”

   “네가 좋으면 됐어.”

 

 

   그러고 나서는 잠시 침묵이었다. 겨우 두 달 남짓 알고 지냈는데, 침묵이 이만큼이나 불편하지 않은 사이가 됐다니 조금 놀라웠다.

 

 

   “나는 가을이 싫었어, 지민아. 나한테 가을은 두 배로, 서너 배로 외로운 계절이었어서.”

   “…….”

   “근데 이젠 괜찮아. 나한테 가을은 약간 인어 같아. 새로운데 자꾸 기대하게 되고. 너 만난 게 가을이라서 그런가봐. 너랑 처음으로 보낸 계절이 가을이라서.”

   “야, 누가 들으면 웃기겠다. 그럼 너한테 가을은 인어의 계절이냐?”

   “사실 네가 인어인 건 별 상관없어. 너 인어 아니었어도 난 너랑 친구 하고 싶었을 거 같아. 그러니까 인어의 계절보다는 지민의 계절.”

   “하여간 말은 잘 해.”

   “…만약 내가 친구 말고 다른 거 하고 싶다고 하면, 그럼 어떡할래?”

   “노르웨이 언제 갈지 고민 좀 해볼게. 일단 확실한 건, 난 도망은 안 가.”

 

 

   귀여워 죽겠다. 안쓰러운데, 귀엽기도 하고, 그냥 꽉 안고 내가 낼름 업어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형이 어깨에 뺨을 부볐다. 잠깐 머뭇하던 태형이의 팔이 곧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우리가 아마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닐 거라는 거. 그래도 상관없어.

 

 

   “너나 나나 비범한 애들인 건 매한가지인데 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집에 가면 사람들 앞에서 꼬리 보였다고 엄마한테 디지게 혼날 게 뻔했고, 어제 오늘 수업을 제대로 못 들어서 다른 애들한테 필기 빌리느라 진땀 뺄 것도 상상됐고, 앞으로 복도에서 지나다니다 김한성 보면 어떻게 조질지 피도 끓었지만, 지금은 그냥 다 잊기로 했다.

 

   태형이 목덜미에서 수영장 물 냄새가 났다. 마르면서 냄새가 남았나봐. 또 한참 말이 없던 태형이는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내게 물었다.

 

 

   “지민아. 너한테 가을은 뭐야?”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나는 느릿하게 눈을 떠서 태형이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나한테 가을이라는 계절은….”

 

 

 

   인어의 계절

   My Fall Is You

 

   End.

©  2019 Season of VMIN, FALL, for 1230X101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