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엔플라잉-굿밤
점입가경
테리
내 나이 서른셋에 엄마한테 속아 고기집이 아닌 점집에 끌려오다니.
“소고기 먹자며. 여기가 고기집이야?”
“여기 세 달 전부터 예약해야 되는 곳이야. 끝나고 내려가면서 사줄게.”
“아, 내가 살 테니까 그냥 가자.”
“미쳤어? 여기가 얼마나 용한 덴 줄 알아? 잔말 말고 따라와!”
또또또 그 놈의 잔소리. 네가 여자를 안 만나니 엄마가 걱정이 돼서 살 수가 있겠냐. 너만 생각하면 하루에 주름이 두 개씩 늘어가는 기분이다. (보톡스 잘 놓는 병원 알아봐준다니까 성질만 더 냈다.) 소개 좀 받아보래도 싫다 결혼도 관심 없다 하나 뿐인 아들이 이러니 엄마는 속이 문드러진다. 이하 생략. 하... 진짜. 엄마 나 어디 하나 잘못 태어났나봐. 남자한테도 여자한테도 꼴리지가 않아. 이걸 확 말할 수도 없고.
아무리 가을이 왔다 해도 이렇게 해가 쨍쨍한 대낮에 산을 오르면 당연 더울 수밖에. 엄마 덥지? 덥지? 그러니까 얼른 한우로 배 채우고 시원한 냉면으로 입가심이나 하자니까. 아무리 꼬드겨도 넘어오질 않는다. 평소엔 그렇게 귀가 얇던 김여사님이. 귀가 얇아서 쓸데없는 돈 쓰기 좋아하는 울 엄마. 이번엔 또 여기다 얼마를 썼을까.
아니, 그나저나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입구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게 해놔야지. 더워죽겠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큰 마당으로 들어가니 편안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눈 아플 정도로 화려한 한복 입고 무서운 분위기 뿜어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는 내 손을 김여사가 확 잡아끌었다.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한참 점을 보던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떼자 감흥 없이 방 안을 둘러보는 내 허리를 김여사가 집중하라는 듯 콱 찔렀다. 와 씨, 놀래라. 방금 저 손가락 내 갈비뼈 사이로 들어갔다 나온 거 같은데.
“있어요? 보여요?!”
김여사가 호들갑 섞인 말투로 방석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쁘장한 애 하나 있네.”
“어머 어머!”
아! 내 등짝은 왜 때려!
“이름에 태... 태가 들어가네.”
...뭐가 진짜로 보이긴 하는 거야? 의심스런 표정의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여자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고 역시나 귀 얇은 김여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등짝을 때리며 어머 어머만 연발했다.
“어머! 김태희 같은 앤가 보다! 어떡하니!”
아, 쪽팔려. 집에 가고 싶다 진짜.
“부적 하나 써줄 테니까 지갑에 넣고 다녀. 이거 있음 좀 더 빨리 올 거야.”
“아 무슨...!
김여사는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고 기다렸다는 듯 지갑을 열었다.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두둑한 돈 봉투에 뒷골이 다 당겼다. 아니, 필요도 없는 부적에 저 큰 돈을 쓴다고?
“엄마 진짜 미쳤어?”
“조용히 해.”
“하...”
지금쯤 하늘에 계신 울 아부지 얼마나 답답해하실까. 아부지 보고 있어? 엄마 꼭 철 들게 하라던 아부지 유언... 나 못 지킬 것 같아. 엄마 좀 봐. 내가 벌어다 준 돈 부적에나 쓰고 있다. 아부지가 다시 내려와서 좀 말려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말고 김여사가 달라졌어요 뭐 그런 건 없나. 생전 처음 보는 아침상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김여사가 얼른 앉으라며 팔을 잡아당겼다. 왜 이렇게 말랐냐고 귀하게 다루라는 점쟁이 말 듣고 이러는 거 같은데... 영 적응이 안 된다. 아침 댓바람부터 상 위에 고기가 몇 개야. 심지어 고3 수능 전에도 이런 아침상은 못 받아봤다. 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김여사를 바라봤다.
“엄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고기 더 구워줘?”
“아니. 제발 그만 줘.”
잠도 덜 깬 아침이라 입맛도 없는데 김여사가 지켜보고 있으니 우선은 꾸역꾸역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김여사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그런 날 지켜봤다. 엄마 안 먹어? 물었더니 김태희 같은 며느리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르단다. 이젠 자꾸 소환되는 김태희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 맞다. 태형이 왔더라.”
슬쩍 눈치를 보다 계란말이를 하나 집었는데 용케 눈치 챈 김여사가 그걸 불고기로 바꿔주며 말했다.
“누구?”
“윗집 태형이.”
“김태형? 걔 내후년에 온댔잖아.”
“몰라. 빨리 왔대.”
“엥? 말도 없이?”
“응. 밥 먹고 가봐. 고기도 좀 갖다 주고.”
김태형이 왔다고? 갑자기? 젓가락을 쪽 빨면서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일엔 전혀 그런 내용 없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바로 윗집으로 이사 온 김태형은 우리 학교, 우리 반, 그것도 내 짝꿍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베프가 됐다. 김태형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그림이랑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들 취직하느라 정신없을 때 훌쩍 떠나버린 김태형은 그 후로도 내게 꾸준히 메일을 보내왔다. 사실 김태형은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 했는데 그건 좀... 이상하고 간지러운 것 같아서 싫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는 7년을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였다.
갈비찜 한 솥을 들고 초인종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며 환하게 웃으셨다. 시선이 냄비에 꽂혀있는 걸 보니 이미 고기 올려 보낸다는 연락을 받으신 듯 했다. 태형이 온 거 들었구나? 아줌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민이?”
“...김태형?”
영국 물 먹더니 태형이 멋있어졌더라. 김여사가 냄비를 주면서 스치듯 했던 말이 이제 와서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뭐야. 내가 아는 그 김태형 맞아?
“내가 가려고 했는데 왔네.”
“......”
난 멍청하게 서서 입까지 벌리고 김태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깨... 어깨가 왜 저래? 목소리는 또 왜 저러고? 아니, 잠깐만.
“야... 뭐야?”
“응?”
“너... 코끼리 눈 사이가... 존나 멀어졌네?”
언제 왔어? 도 아니고 보자마자 코끼리 타령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하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 반팔 아래 드러난 두툼한 팔뚝으로 시선이 향했다. 심지어 처음엔 점 두 개가 어디 갔나 한참을 찾았다. 제 팔뚝을 내려다본 김태형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바람에 존나게 넓어진 어깨가 또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래! 이거 훨씬 가까웠잖아.”
와 시발. 팔뚝이 어떻게 이렇게 두꺼워지지? 키는 또 왜 이렇게 커졌어? 얘 대학 다닐 때 엄청 말라서 내가 맨날 질질 끌고 다니면서 밥 먹였는데. 어째서!
“지민아. 근데 언제까지 만질 거야?”
“어?”
싱긋 웃는 얼굴에 잠시 넋이 나갔다가 황급히 손을 뗐다. 참나, 내가 또 뭘 얼마나 주물럭댔다고.
“들어와서 얘기하다 가.”
“아... 아냐. 나 출근 준비해야 돼.”
“맞다. 그럼 퇴근하기 전에 연락 줘. 내가 데리러 갈래. 같이 저녁 먹자.”
“어... 뭐... 그러든지.”
강아지 마냥 해맑게 웃는 김태형을 뒤로 하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후다닥 집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남자는 늦게까지 큰다더니 진짜 저런 경우도 있구나.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숨이 차고 아랫배가 당기냐. 나 아무래도 너무 충격 먹었나봐.
대학 다닐 때 김태형과 자주 다니던 단골 가게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네 번째 단골 가게까지 없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냥 바뀐 가게로 들어왔다. 다행히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 듯 했다. 문제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는 거였지만. 어쩐지 사방이 다 커플들이더라.
“부적까지?”
“응. 내가 김여사 때문에 못 살겠다.”
김태형은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배고프다더니 음식도 별로 먹질 않고. 그래서 지금 지갑에 있어? 묻는 말엔 쪽팔려서 대답 없이 피자나 입에 물었다. 김태형은 그런 날 보고 웃으며 맥주를 내밀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것 같지 않게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나한텐 그런 말 없었잖아.”
“음...”
큰 눈을 나른하게 한 번 깜빡인 김태형의 시선은 다시 내게로 와서 닿았다.
“생각 안 하고 충동적으로 온 거라... 누가 좀 보고 싶기도 했고.”
“누가 좀 보고 싶다고 이렇게 먼 거리를 갑자기?”
“꿈에 계속 나오더라고.”
그래서 못 참고 왔어. 김태형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접시 위 피자를 포크로 콕콕 찔렀다. 꿈에 나올 정도면 봐야지. 누군지 궁금하네. 점점 올라오는 취기에 혼자 중얼거리자 김태형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언제나 술만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졌다. 김태형과 아주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고 밤거리엔 내가 좋아하는 밴드 음악이 흘러나왔다. 노래에 맞춰 신나게 걷는 내 뒤를 김태형이 느긋하게 따라 걸었다. 난 뒤를 돌아 김태형을 보며 걸었다. 넘어진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너 안경 안 쓰니까 되게... 이상하다.”
“지금도 뭐 볼 때는 가끔 써.”
“......”
“많이 이상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통이 엄청 큰 바지를 입고 말없이 카메라만 들고 다니던 김태형이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이 김태형이라니. 생각할수록 오늘 하루는 정말 이상했다. 김태형 키가 이렇게 큰 것도 처음 알았고 어깨가 넓은 것도 처음 알았고. 눈이 이렇게 예뻤구나. 손가락이 이렇게 길었구나. 좋은 냄새가 나고. 다정하게 웃는구나. 알고 있던 것들인데도 모든 게 다 처음 같았다.
“아니 아니. 하나도 안 이상해.”
“이상하다며.”
“그냥... 신기해서.”
김태형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내가 걸음을 멈추고 서있었구나 깨달았다. 뭔가에 홀린 듯 김태형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다. 이렇게 얼굴을 만져보는 건 처음인데 김태형은 마치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가만히 날 보고만 있었다. 손가락이 입술 가까이 내려갔을 땐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술 겁나 퍼마시고 토하던 날들의 그 익숙한 느낌이 아닌 걸 분명 알았지만 김태형한텐 술 때문에 속이 안 좋다고 둘러댔다. 황급히 뒤돌아 걷는 동안 정말 입 밖으로 심장이라도 튀어나올까 조마조마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출근을 했다. 출근 잘 하라는 김태형 문자엔 답장도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벽에 머리를 쾅 박았더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맘 같아선 그냥 이대로 콱 죽고 싶었다. 꼭두새벽부터 엄마 몰래 속옷을 빨다가 결국 빡쳐서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이 나이 먹고 몽정이라니. 남자한테도 여자한테도 꼴리질 않아서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게다가 흔해빠진 야동 한 장면도 아니고 친구랑 키스하는 꿈이나 꾸면서! 시발! 김태형이 알면 날 죽이고 싶어 하겠지? 하... 아니다. 차라리 걔 손에 죽는 게 마음 편할지도.
하루 종일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민씨 무슨 일 있어? 지민씨 어디 안 좋아? 만 열댓 번은 들은 것 같다. 회사를 알려주고 나니 김태형은 매일 우리 회사 로비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말도 안 되는 꿈 때문에 잠을 한 숨도 못 잔 내가 퀭한 몰골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김태형이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 마이 갓이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고 저 얼굴을 봐야 한다니. 이미 날 본 것 같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급히 백스텝을 밟아 후문으로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지민아 지민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꿈속의 김태형 얼굴도 얄궂게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악 시발! 이제 제발 그만 좀 사라져!
...그래. 자존심 상하지만 금방 잡힐 거 알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말라가지고 운동도 못할 것 같던 김태형은 사실 나보다 달리기가 빨랐다. 운동도 한 번 하면 나보다 훨씬 잘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숨겨둔 갑빠가 있었던 거야. 그게 이제야 저렇게 고개를 내민 거고. 보는 사람 당황스럽게. 갑자기 왜 도망 가냐고 묻길래 인사 하는 거 못 봤다고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횡설수설 했는데 김태형은 순진하게 그걸 또 믿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날씨도 좋으니 산책을 하재서 근처 가까운 한강으로 걸어갔다. 김태형이 낮에 보고 왔다는 영화 얘기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아까부터 가을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김태형 냄새만이 마음을 더 심란하게 했다. 친구를 상대로 그런 꿈을 꿨다는 게 아침까지만 해도 죄책감으로 느껴졌는데 어느새 그 이상을 상상하고 있는 미친 내가 있었다. 난 진짜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새끼가 분명했다.
“오늘 바빴어?”
“엉?”
“답장이 없길래.”
“아... 쪼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색하지. 나만 느끼는 건가. 하...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꿈 때문이야.
“근데 너 보고 싶은 사람 있다며. 맨날 이렇게 한가롭게 나 데리러 와도 되는 거냐.”
“이미 봤어.”
“아...”
와 박지민 미친놈아. 방금 아무렇지 않게 그거 누구냐고 물어볼 뻔했어. 네가 그걸 왜 궁금해 하는데?
“누구냐고 안 물어보네?”
“어? 뭐... 내가 그걸 알아서 뭐하냐.”
괜히 쿨한 척 김태형 어깨를 퍽 쳤는데 분위기만 더 이상해졌다. 망했다. 대학 다닐 땐 이게 먹혔는데.
“지민아.”
“응.”
“여기 아무도 없는데 손 잡아도 돼?”
...응?
“아까부터 손 잡고 싶었는데 참았단 말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잠시 우리가 원래부터 손 잡고 다니던 사이인 줄 착각했다.
“안 돼?”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고 웃어 넘겨야 되나. 미친놈이 왜 장난질이냐고 화를 내야 되나. 아냐, 얘 원래 좀 독특했잖아. 그냥 정말 단순히 지금 누군가와 손이 잡고 싶은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가. 머리가 터지게 고민하는 사이 살며시 다가와 내 손에 깍지를 끼는 따뜻한 손이 느껴져 숨을 헙 들이켰다. 두 눈을 깜빡이며 쳐다봤더니 좀 전까지만 해도 뭔가를 고민하듯 내내 무표정이던 김태형이 세상 행복한 얼굴로 히히 웃었다. 문제는 7년 전만 해도 김태형이 저렇게 웃으면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바보 같이 웃지 마. 사기 당하기 딱 좋으니까.” 하면서 잔소리 겁나 해댔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바보 같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서 구경이나 하고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끝내 손을 왜 잡았는지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채 집에 들어오니 거실에서 김여사와 수다 중이던 태형이네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별안간 짓궂은 표정으로 웃으셨다.
“지민이 왔어?”
“안녕하세요.”
“조만간 예쁜 짝꿍 생긴다며?”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는구나.
“아... 하하... 저는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후다닥 방으로 도망가려는 내 팔을 김여사가 달려와 붙잡았다.
“밥은 먹었어?”
“응. 먹었어.”
“누구랑?”
“...친구.”
뭐야? 그냥 태형이라고 하면 되는데 나 왜 망설이고 둘러대? 미쳤나봐.
“지갑에서 부적 안 뺐지?”
“하, 그 놈의 부적! 부적! 그거 때문에 내가 진짜...!”
“......”
“......”
“진짜 뭐? 너 누구 생겼어?”
“아, 몰라!”
“지민아. 잠깐. 야. 박지민! 문 열어봐!”
문을 잠가버리고 침대에 엎어져선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름에 태가 들어가는 예쁘장한 애. 왜 자꾸 그게 김태형처럼 느껴지는 거지. 나 설마 그게 김태형이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는 거 아냐?
“태형아.”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혼자 작게 김태형 이름을 불러보았다.
“야... 너 내 손 왜 잡았냐. 응?”
왜 잡았냐고. 나 너 때문에 미치겠어.
김태형은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적극적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하기 시작했다. 이제 손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잡고 집 앞에서 헤어질 때마다 묘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없이 날 바라봤다. 웃긴 건 모르는 척 쏙 들어가 버리면 그만인데 똑같이 마주 보고 서서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나였다. 미친놈. 대체 뭘 바라고 서있는 건데? 네 입으로 친구라며. 너 진짜 지옥 가고 싶어? 아니, 그 막 예지몽 이런 것도 있지 않나. 혹시 모르잖아. 야 박지민. 네가 그냥 먼저 해버려. 인생 뭐 있어? 너 솔직히 요즘 김태형만 보면 그렇고 그런 생각하잖아. 이미 그것만으로도 지옥행 급행열차 티켓은 끊어놓은 거야. 저질러 버려! 매일매일 여러 자아가 튀어나와 싸우며 날 괴롭게 했다.
어쩌면 김태형은 내 영혼을 쪽쪽 빨아먹기 위해 다시 나타난 게 아닐까.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글쎄 그 잠깐 사이에 김태형이 번호를 따이고 있었다. 물론 철벽 치는 걸 보고 금방 마음을 놓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그래, 지금의 김태형을 봐. 누구도 가만 두고 싶지 않은 얼굴과 몸이잖아. 게다가 순둥이 같은 저 성격까지 알게 된다면. 바로 게임 끝이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그건 나만 알아야 해. 위기감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러다 김태희 같은 여자를 김태형이 만나면 어떡해? 그 생각까지 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질투고 뭐고 금방이라도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윗집 아랫집 살면서도 우린 매번 헤어지기 싫어서 집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하릴없이 시간을 때웠다. 지금도 요 앞 놀이터에서 맥주 한 캔씩 까고 놀다 겨우 들어오는 길이었다.
“들어가.”
“......”
아... 오늘은 진짜 이대로 그냥 들어가기 싫은데 어떡하지. 괜히 김태형 옷깃을 잡고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 지민아?”
“......”
지옥이고 나발이고 도저히 안 되겠다. 난 김태형이랑 키스하고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김태형 입술에 쪽, 뽀뽀를 하고 후다닥 돌아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순식간에 허리가 잡혀 돌려세워졌다. 그리곤 놀랄 새도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급하게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혀에 끙 소리를 내자 김태형이 날 더 세게 꽉 끌어안았다. 꿈이랑 똑같아서 더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내 머릿속에선 윙윙 비상벨이 울렸다. 부적의 주인공은 김태형이 맞다고. 계속해서 울려대고 있었다.
잠을 한 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개운하고 행복한 아침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제 고기는 지겨워서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다고 징징 대던 내가 진심을 다해 맛있게 먹자 오히려 김여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엄마. 그 부적 있잖아.”
부적 얘기를 꺼냈더니 김여사 표정이 단박에 달라졌다. 호들갑을 떨면 내가 더 얘기 안 할까봐 애써 차분하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거 효과가 있긴 한가봐.”
“왜. 왜. 너 누구 생겼어?”
“......”
“진짜로? 누군데?”
“...생각해보니까 태 들어가는 것도 맞아. 예쁘장한 것도 맞고.”
“어머! 웬일이니! 거봐. 거기 용하다니까. 엄마는 괜찮으니까 아무 때나 데려와. 맛있는 거 해줄게. 너무 궁금하다.”
“응. 아무거나 해도 돼. 어차피 엄마 요리 좋아하니까.”
“응? 그래. 아무튼. 어머 어머. 어떡하니. 오늘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김여사는 갑자기 작년 이맘때쯤 무슨 옷을 입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며 정신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난 심드렁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엥... 옷도 살 필요 없는데.
김태형은 울 엄마가 놀랄까봐 걱정했지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음. 우리 김여사 앵간한 걸로는 충격 잘 안 받아. 그리고 이렇게 예쁜 며느리 들어오는데 왜 충격을 받아? 레드카펫 깔고 환영해야지. 잡은 손을 만지작 만지작 하며 개주접을 떨었더니 김태형은 그것마저 귀엽다고 내 볼 여기저기에 쫍쫍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날 이후 뽀뽀 중독에 걸린 우리는 며칠 사이 쪽쪽 댄 횟수만 따져도 2~3년 사귄 커플을 가뿐히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
“지민아. 나 약간 긴장되는데...”
“걱정 마. 내가 옆에 딱 붙어서 지켜줄게.”
“웅...”
으이그. 몸만 컸네. 몸만 컸어. 내가 먼저 들어가서 동태를 살필 테니까 넌 쫌만 이따 들어와.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살짝 긴장은 됐지만 쫄았다는 티를 낼 순 없어서 일부러 더 위풍당당하게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문제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태형이네 아주머니였다. 순간 당황해서 아주머니 여기서 사시는 건 아니죠? 하고 물을 뻔 했다.
“아... 아주머니도 계셨네요.”
“너희 엄마가 하도 자랑을 해서 구경 왔는데. 괜찮지? 불편하면 아줌마 갈까?”
“아, 아니에요. 그냥 있으셔도 돼요. 어차피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계획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뭐 어때. 차라리 한 번에 해치우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괜찮아. 들어와.”
처음 보는 블라우스에 치마까지 차려입은 김여사는 설렘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내 뒤에 잠깐 숨었다 나타난 김태형은 내 손을 꼭 잡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어? 어... 그래. 태형이가 여긴 왜...?”
“엄마가 데려오라며. 며느리.”
“...응?”
김여사는 정말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 결국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아주머니 표정 또한 별반 다르진 않았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태형아. 너희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말해봐.”
“...지민이 지갑에 있는 부적. 그거 나야.”
“뭐?!!!”
부적 얘기를 하니 알아듣는 구만. 김태형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김여사가 달려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얻어맞을 준비를 했는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김태형이 날 안고 등짝을 퍽퍽 맞고 있었다. 엄마 미쳤어? 왜 애를 때리고 그래!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나서서 소리를 지르셨다.
“아니, 왜 우리 태형이가 며느리야? 지민이가 며느리를 해야지!”
...하, 아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우리 이제 어떡해?”
늦은 밤 놀이터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한 우리는 그네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붕어빵을 꺼내 먹었다. 인심 좋은 아저씨가 문 닫기 전 마지막 손님이라고 4개나 더 챙겨주셨다. 난 자연스럽게 팥이 없는 꼬리를 김태형 입에 넣어줬고 김태형은 팥이 들어있는 몸통을 호호 불어 내 입에 쏙 넣어줬다. 김여사는 자신이 때린 게 김태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깐 놀랐다가 이내 날 째려보며 뒷목을 잡았고 태형이네 아주머니는 끝끝내 자기 아들이 며느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점집에서 말한 게 넌데.”
“아줌마가 나 싫어하시면 어떡해.”
“그럴 리가 없어. 울 엄마가 널 얼마나 예뻐하는데.”
그제야 좀 마음이 놓이는지 김태형이 흐흐 웃더니 내가 탄 그네를 쭉 잡아당겨 두 다리로 내 허리를 감았다. 슬금슬금 더 다가오는 게 딱 봐도 뽀뽀하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었다.
“지민아. 여기 아무도 없는데.”
“키스 하자구? 안 돼. 너 완전 선수 돼서 온 거 같아.”
“태형아 얼른 와~ 보고 싶어~ 하면서 맨날 꿈에 나오던 게 누군데.”
“그거 나 아니거든?”
“그래봤자 그 부적은 나거든?”
쳇. 얄미워서 흘겨보면 김태형이 능청스레 웃다가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쪽쪽 뽀뽀를 했다. 간지럽다고 손을 빼려 하면 얼굴을 들이밀었다. 치사하게 얼굴 공격이냐. 에라 모르겠다 싶어 김태형 두 귀를 잡고 입술에 마구 뽀뽀를 퍼붓자 김태형이 만족스러운 듯 제 손가락으로 여기도 여기도 하며 눈이랑 코랑 아무데나 찍어댔다.
방금 그렇게 집 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또 좋다고 뽀뽀 장난이나 치고 있으니 어른들이 환장할 만도 하겠다. 이따 들어가면 등짝 엄청 맞겠지. 김태형이 며느리여서 안 된다고 하면 내가 며느리 해야겠다. 김태형 여기까지 오라고 부적까지 썼는데 다들 뭐 어쩌겠어. 우리가 좋아죽겠다는데.
“그치. 태형아?”
“웅.”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조건 내가 하는 말엔 웅이란다. 부적 갖고 다니기 잘 했다. 내 사랑스런 부적. 일루와. 뽀뽀 더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