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기상 이변으로 20도 부근까지 치솟은 기온의 가을날에 태형은 마침 겨울 의상 촬영이 딜레이 되어 패딩을 입고 땀 흘리며 애를 먹었다. 그 시각 미국에서 지민은 꽉 찬 수업과 더불어 파이널텀 시험 준비 그리고 시험과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과제에 시달렸다. 결국 둘의 시간이 어긋났다. 최대한 조정을 해봤지만 오늘치의 페이스 타임을 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자취를 하고 있는 학교 앞 원룸으로 돌아온 태형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팔을 접어 머리를 베고 천장을 올려보던 태형은 이번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돌렸다. 자연스럽게 시야에 책상위의 큼지막한 액자에 꽂혀 있는 여러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들어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형은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이내 청승맞게 눈물 한방울이 흘렀다. 페이스 타임을 하지 못한 것이 오늘따라 희한하게 상심을 넘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움직이는 지민이 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턱에 호두를 만들기 시작한 태형은 손으로 눈가를 대충 닦아냈다. 같은 공간에 없는 지민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이번 여름 방학은 지민이 현지에서 인턴십을 하느라고 한국에 들어오질 못했기에 둘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시간을 곱씹자면 이제는 까마득했다.
태형은 머리맡에 뒀던 핸드폰을 그러쥐고 은행 어플을 열었다. 그러자 꽤 큰 액수의 잔액이 화면에 떴다. 지민의 겨울 방학에 맞춰 그가 공부를 하고 있는 시카고를 방문하기 위해 태형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었다. 죄송하지만 부모님께는 4학년이 되기전에 스펙을 쌓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번 학기를 휴학했다. 새내기 시절부터 각종 지인과 선후배, 친구들의 권유에도 얼굴이 팔려서 싫다고 거절했던 피팅 모델 알바를 몇탕씩 뛰면서 돈을 모아왔다. 역시 패완얼인지라 태형이 입은 제품들은 쇼핑몰들에선 금방 베스트 카테고리에 올라갔다. 물론 솔드 아웃도 빈번했다. 그에 비례하여 페이도 급상승했지만 태형은 허투루 쓰지 않고 학교를 다니던 학기보다 바쁘게 지내며 쉬지 않고 일했다. 오직 지민을 보러 미국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심정이 복잡해진 태형은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 버릇처럼 뒷머리를 마구 만지작거렸다. 허나 순간 커다란 눈동자에 명석함이 반질하게 돌았다. 태형은 폰에서 바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검색창에 '미국 추수 감사절'을 입력했다.
WELCOME TO THE WINDY CITY, CHICAGO!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보이는 공항 복도에 쓰인 광고의 문구를 보자 태형은 내가 정말 이 도시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좁은 공간에서 열세간이 넘도록 갇혀 있었더니 온몸의 신경이 뻐근하다고 아우성이었다.
악명이 높은 미국의 입국 심사를 어설프지만 무사히 통과하고, 배기지 클레임에서 트렁크를 찾은 태형은 게이트를 나와서 마주한 다양한 인종의 인파와 낯선 공간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김태형! 하는 고운 목소리가 반대쪽에서 들렸다. 태형은 갈팡질팡하지 않고 곧장 뒤를 돌았다. 그러자 까만 털모자를 써서 올망졸망한 이목구비가 더 두드러지는 말간 얼굴이 보였다. 태형은 쥐고 있던 트렁크도 내팽겨치고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민을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코를 박자 코를 가득 채우는 포근한 살내음에 그제야 태형은 비로소 지민과의 재회가 실감이 났다. 태형의 품에서 잠자코 있던 지민은 손가락으로 톡톡 태형의 등을 두드리더니 물었다. 김태형 너 트렁크 어쨌어?
우리 사이 10,503 km
카모마일
태형이 먼저 트레인을 타자고 했지만 지민은 14시간의 장시간 비행이 얼마나 피로한지 잘 알기에 태형의 트렁크를 빼앗아 바퀴를 굴리며 앞장 서고 폰으로 우버 택시를 불렀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둘은 마주보기만 해도 미소가 입에 걸렸다. 차 시트위에 편하게 올려둔 손이 살짝씩 닿을때마다 둘은 온몸의 말초 신경이 날뛰는듯 했다.
지민이 살고 있는 저층 아파트의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올라타자 태형은 반년도 버텼던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을 찍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지민을 만지고 싶었다. 옆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산스러움을 눈치 챈 지민이 살며시 웃더니 주머니에서 키를 꺼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지민이 혼자 살고 있는 원베드룸 유닛에 들어서자 마자 태형은 백팩도 벗지 않고 지민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제 몸에 가까이 붙였다.
"살 또 빠졌네. 남들은 인제 미국으로 유학가면 다 찌던데 넌 어째 점점 더 빠지냐. 건강 맨날 해야지."
"나 몸무게 그대로야. 됐고, 잔소리 말고 이거부터."
지민은 자신의 납작한 허리 부근을 매만지며 걱정을 늘어놓는 태형의 목에 팔을 두르고 뒤꿈치를 들어 입술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도 전혀 흠칫하지 않은 태형은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틀어 파고 들었다. 입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장난기가 섞였던 자잘한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머금고 깨무는 짙은 키스로 넘어갔고 이내 혀를 섞기 시작했다.
꼬르륵.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빈틈없이 붙이고 있던 상체사이에서 무시하기엔 너무도 분명한 소리가 났다. 키스에 몰두했던 두 사람의 입술사이로 킥킥, 하는 참지 못한 웃음이 결국 새어 나왔다.
"배고팠어?"
"쪼금."
"말하지. 언제부터? 공항에서부터?"
"…웅."
지민은 태형의 솔직한 시인에 상체를 무너뜨리듯 웃으며 기댔다. 오랜만에 보는 실물의 태형은 여전히 지독하게 근사한 얼굴을 한 주제에 지민이 아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태형의 키보다 작은 냉장고에는 두 사람이 찍은 폴라로이드 필름이 가득했고 파스타의 레시피가 적힌 메모지가 마그네틱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보이스톡으로 태형이 연말이 아닌 추수 감사절에 맞춰서 오고 싶다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예상치 못하게 앞당기는 일정에 조금 놀라긴했지만 지민은 바로 좋아. 라고 대답을 했었다. 추수 감사절이 워낙 큰 연휴이기에 학교도 학기 중이지만 일주일정도 짧은 브레이크가 있었다. 생각 잘 했어. 여기 겨울에 지인짜 추워. 적응할 겸 미리 와 있으면 좋지. 라는 말도 덧붙이며 이르게 시작된 설렘에 어쩔 줄 몰라 침실에서 나와 좁은 거실을 서성이며 통화를 이어갔었다.
태형에게 대접하기 위해 지민이 며칠전부터 레시피를 준비한 파스타로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 식사를 마쳤다. 지민은 맥주를 곁들이고 태형은 소다를 마셨다.
지민이 스낵과 음료를 꺼내서 커피 테이블위에 차리고 리모컨을 쥐고 TV에 연결된 넷플릭스로 뭘 볼지 고심하는 동안 태형은 설거지를 금방 마쳤다. 크지 않은 쇼파에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둘은 작년 전미 박스 오피스를 히트한 액션 블록버스터를 틀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세가 흐트러져 종국엔 팔걸이에 머리를 베고 길게 누웠다. 지민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에서 살포시 안은 자세를 하고 있던 태형은 여독과 12시간이 넘는 시차에 점차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육군 만기 제대한 예비군의 정신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수마였다. 뽀얀 뒷덜미에 콕 박힌 점에 간헐적으로 버드 키스를 하면서 버텨내려던 태형의 눈꺼풀은 이미 쏟아지는 잠에 천근 만근이었다.
"아 맞다. 울 멜론귀신 줄려고 멜론도 사놨는데. 너 주황색 멜론 먹어봤어? 지금 먹을래?"
"..."
"태형아, 김태형...?"
"...어, 어. 지민아, 나 안잤어, 안자!"
의식할 새도 없이 저도 모르게 졸고 있던 태형은 귓가에 이명처럼 들리다가 선명해지는 지민의 부름에 그제야 눈을 부릅뜨고 대답을 횡설수설했다. 이제 겨우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지만 밖은 해가 이미 져서 어두웠다. 몸을 돌려 태형과 마주 눕게 된 지민은 애써 뜬 커다란 눈에 들어찬 졸음을 보고 손을 뻗어 장시간 비행에 조금 거칠어진 듯한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침대에서 편히 자."
"아이 안되는데에.."
"안되긴 뭐가 안돼. 여태까지 본 영화 내용 뭔지 기억나? 하나두 모르겠지? 얼른 씻고 자자."
"...콘돔 겁나 챙겨왔단 말이야."
"한국에서부터 그걸 가져왔어? 여기도 다 파는데. 암튼 오늘이 첫날인데 급할게 뭐 있어. 내일하자 내일."
"아 원래 롱디들은 완전, 다시 만난 첫날에...어? 파바박 스파크가 튀어가지구 딱! 해야하는데."
"아까 너 눈 돌아가서 내 입술 다 먹어버렸잖아."
"그렇긴 하지. 그걸론 좀 아쉬워서 그렇지..."
사실 지민도 드럭 스토어에서 콘돔을 한 상자 사뒀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아. 으차차. 우리 태태 우선 씻으세요."
먼저 쇼파에서 내려온 지민이 태형의 팔을 끌어 일으켜서 욕실로 밀어 넣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나온 태형은 지민이 과제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눈만 감고 있을테니 오해 말라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었다. 곤히 잠든 태형의 옆에서 침대 헤드에 기대어 랩탑을 톡톡 두드리며 과제를 하던 지민은 자꾸 고개를 돌려 곁에 누워있는 태형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했다. 워드 창을 내리고 포털 사이트의 새 탭을 켠 지민은 미술관의 오픈 시간을 훑었다.
소리를 죽여 침실에서 나와 거실에서 과제를 마무리하자 어느새 밤 11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씻은 지민은 정자세로 자고 있는 태형의 팔을 조심스레 잡고 움직여서 빈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쏙 파고 들어갔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지민은 단잠을 자고 있는 태형의 입술에 작게 입맞추고 저도 눈을 감았다. 얼마만의 동침인지. 지민은 피부에 닿아는 태형의 티셔츠 자락의 버석한 촉감마저 감격스러웠다.
다음날 둘은 태형이 지민의 취향에 맞게 싸온 한국에서 유행하는 군것질거리들을 꺼내 정리했다. 파자마 바지만 입은 채로 마음껏 키스하고 만지면서 느긋하게 온종일 뒹굴거렸다. 함께 공유하는 오랜만의 여유가 너무나 달콤했다. 저녁은 외식을 나가 치즈가 가득한 시카고 딥디쉬 피자로 뱃속을 채웠다.
"저거 예쁘다."
"응 괜찮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걷다가 가격대가 꽤 나가는 브랜드의 매장의 쇼윈도 앞에 멈춰 서서 묻는 태형의 손끝은 마네킹이 걸친 오트밀 컬러의 니트 맨투맨을 향했다.
"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 사줄게. "
"너 말고 나? 그동안 보내준 옷도 넘쳐."
"아니 내가 여기서 직접 선물하는 건 또 다르지. 나 완전 캐쉬 부자야. 잔고 빵빵한 체크 카드도 있고."
태형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우터 안주머니에서 얼핏 보기에도 두툼한 은행 봉투를 꺼내 보였다가 다시 넣었다. 놀란 지민이 왜 이렇게 환전을 많이 했냐고 물었다.
"밀린 데이트 다 하면서 너랑 실컷 놀려고."
"장하긴 한데 그래두 너무 많네. 다 쓰지 말고 한국 돌아갈 때 남겨서 가져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님. 저거 별로 맘에 안들어? 그럼 다른 거 사도 돼. 일단 들어가서 보기나 하자."
그렇게 쇼윈도 앞에서 옥신각신하던 둘은 결국 태형이 지민의 손에 쇼핑백을 쥐어 주는 것으로 평화를 찾았다. 일정에 없던 쇼핑을 하는 바람에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저녁 다음 코스로 찍어 두었던 곳으로 이동했다. 윈디 시티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가을치고는 한기가 스미는 칼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곳은 윌리스 타워였다.
시카고에서 최고층 빌딩으로 알려진 윌리스 타워는 대표 관광명소였다. 그래서인지 103층에 위치한 스카이 덱 전망대에는 이미 많은 입장객들이 각자의 무리와 함께 아름다운 뷰를 감상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지없이 온통 평지인 시카고는 대화재 이후 세워진 도시 건설 계획대로 건물들과 도로가 체스판처럼 질서정연했고, 동쪽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어 퍽 매혹적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야경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있던 태형은 전망대에서 가장 붐비는 인기 스팟인 돌출 유리 바닥 앞에서 한없이 약해졌다. 지민 역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치를 설치했는지 도통 이해불가였다.
"태태, 너 먼저 올라가봐."
"아니 너한테 양보할게. 짐나, 너가 나보다 2달 일찍 태어났잖아."
"이럴때만 형 취급하지?"
스카이 덱에는 바닥과 벽이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된 돌출 스팟이 3개 있었다. 그 위에 올라가면 마치 하늘에 발을 딛고 있는 짜릿함이 들었다. 물론 이 두사람은 예외였다.
"지민아, 이거 정말루 강화유리 맞아? 아무래도 불안해. 하나도 안 두꺼워 보여."
"아까 보니까 다른 남자들은 이 위에서 뛰고 난리던데. 내 옆에 딱 붙어 알겠지?"
"자, 잠깐만! 어으..."
겨우 유리 위로 올라온 태형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숨기며 벽을 손으로 짚고 힘이 빠지는 몸을 지탱하려 했다. 허나 사방이 훤히 뚫린 유리 벽이라 불안을 더해 손을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결국 지민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지민은 크기만 컸지 귀여운 짓을 하는 태형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작게 웃었다.
"사진 찍을래? 여기서 기념으로 다들 찍던데."
"웅, 그러면 최대한 빨리 찍자."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발 밑에 여과 없이 펼쳐진 허공에서 반짝이는 빌딩과 자동차의 불빛에 머릿속이 순간 아찔해진 태형은 103층의 높이가 주는 압박감에 허겁지겁 대답했다.
"태형아, 아래 보지 말고 앞을 봐."
지민은 자의로는 바닥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겁에 질려하는 태형의 턱끝에 손가락을 가져가 자신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다시 정상적인 시야확보를 할 수 있었던 태형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 호흡을 쉬며 빨라진 심박수를 다스렸다. 지민은 풉,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앞에 있는 관광객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건네며 부탁을 하기 위해 움직이느라 거리가 벌어진 와중에도 자신의 옷을 쥐고 힘을 풀지 않는 손길에 웃음이 멎질 않았다.
원, 투, 쓰리. 관광객의 구호에 태형은 경직된 얼굴 근육을 움직여 겨우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그래도 타이밍 좋게 지민의 어깨위에 팔을 둘렀다. 지민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태형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였다.
예술 분야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은 태형에게 시카고는 미술과 건축으로도 명성이 있어 꽤 괜찮은 도시였다. 시차로 인해 이른 새벽부터 눈을 뜨고 말똥 말똥해진 태형을 오늘은 다운타운에 있는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데려갔다.
미술관의 가장 윗층에 딸린 카페테리아의 통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밀레니엄 파크는 붉은 단풍으로 뒤덮여 가히 장관이었다. 다운타운 중앙에 구름과 하늘, 그리고 시카고의 건축물들을 반사하는 거대 조각품 클라우드 게이트, 여름이면 각종 뮤직 페스티벌이 열리는 야외 극장과 아이들이 뛰노는 분수대를 겸비한 밀레니엄 파크가 있었고 동쪽엔 내륙임이 아쉽지 않을 만큼 바다만큼 드넓은 미시간 호수와 서쪽엔 각각의 개성이 살아있는 모던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여 황홀한 스카이라인을 이루었다.
"여기 하루종일 있어도 다 못 본대. 너무 커서. 얼른 가자."
"웅. 신난다."
둘은 남은 크로와상을 입안에 밀어넣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지민은 예술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방문할 때마다 거대하고 고즈넉한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아늑함이 편안했고, 작품들을 유심히 감상하는 태형의 그림같은 옆선은 더 마음에 들었다. 컨템포러리 아트 관에 들어서자 프로젝터에서 쏟아지는 오색의 빛이 높이 세운 흰 벽을 덮고 있었다. 그 앞을 가로 지른 태형은 손을 뻗어 이리 저리 움직여보더니 그럴듯한 모양새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 그림자는 핸드폰을 들어 태형을 담고 있는 지민의 머리 꼭지를 쓰다듬었다.
"뭐하세요 김태형씨?"
"지금 약간 지민이를 예뻐해주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태태 고개 살짝 들고 분위기 있는 척 좀 해봐라."
자신을 찍고 있는 핸드폰 렌즈가 아니라 그 너머의 집중하고 있는 지민을 곧게 응시하던 태형은 고른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었다.
기프트 샵까지 둘러보느라 5시인 폐관시간까지 머물렀다. 걸음을 옮겨 다운타운을 가로지르는 시카고 강의 산책로로 향했다. 가을 노을 빛이 강의 표면에 부딪히며 눈부시게 일렁였다. 울창한 나무는 계절에 맞게 알록달록하게 물들고 산책로의 화단엔 노랗게 잘 익은 호박들과 갈대로 장식이 되어 있어 추수 감사절의 무드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지민은 강가의 노천 카페에서 파는 펌킨 스파이스 음료를 주문해서 일년 중에 딱 이 시즌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라며 태형에게 쥐어 줬다. 의뭉스러운지 지민을 장난스럽게 흘기던 태형은 고소한 냄새에 흥미가 생겨 패기롭게 한모금 머금었다. 허나 바로 뿜어버렸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함께 다닐 때 지민의 앞에서 폼을 잡으며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몇초도 참지 못하고 컵에 도로 뱉었던 태형을 상기하며 지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걸 삼켜야지 땅에 뱉으면 어떡해."
"별미라며. 별미가 아니라 완전 노맛인데. 아 나 코코아 마실래."
"알겠어. 마시멜로우 넣을거지?"
"웅. 뭘 물으세요, 콜. "
태형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능청스럽게 입안에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결국 태형의 손엔 마시멜로우가 반쯤 녹은 핫초코, 지민의 손엔 태형이 한입 먹고 남긴 펌킨 스파이시 라떼가 들려 있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시카고 강과 미시간 호수가 만나는 동쪽으로 하염없이 걷던 두 사람은 산책로의 가장자리에 나란히 걸터 앉아 바로 강물위로 다리를 달랑거렸다. 흔들거리는 컨버스 앞코를 툭 건들이자 지민이 고개를 돌려 태형을 마주봤다. 그러자 태형이 씨익 웃었다.
"왜?"
"좋아서 그래. 같은 행성에서 사는데 어쩜 그리 멀던지. 진짜 보고 싶어서 죽을뻔 했어. 미국에서 데이트도 하고 김태형이하고 박지민이 마이 컸다. 그치."
"...뽀뽀하고 싶은데 나 꾹 참는 중."
"박지민 아직 미국물 덜 들었네. 영화보니깐 미국애들은 아무데서나 쪽쪽거리더만."
강바람에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칼을 살살 넘겨준 태형이 드러난 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자신을 응시하는 태형의 올곧은 눈빛에 이미 식은 음료를 괜스레 다시 홀짝이기 시작한 지민의 귀끝이 붉었다.
"이건 예고편."
"뭔데."
"나머지는 집에 가서. 근데 지민아, 나 또 졸리기 시작했어."
안그래도 낮은 태형의 목소리에서 졸음이 서서히 묻어나기 시작하자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빨리 가자. 태형은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손을 올려다보다가 단단하게 맞잡았다.
추수 감사절 이브의 이른 오전. 지민의 부모님 댁이 있는 위스컨신 주에 가기 위해 미리 예약해둔 암트랙이라는 기차에 올라탔다. 둘의 백팩엔 여벌옷, 개인용품과 와인 스토어의 직원이 전통적인 추수 감사절 디너 메뉴들과 매치하기 좋다며 추천한 레드 와인이 들어있었다.
전날에 초저녁부터 연거푸 몸을 겹쳤기 때문인지 둘은 암트랙 스테이션에서 산 핫도그와 소다를 해치우고 금방 곯아떨어졌다. 먼저 눈을 뜬 태형은 어느새 제 어깨에 기대서 푸우우, 통통한 부리같은 입술을 내밀고 잠든 지민을 비스듬히 내려보다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켓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각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여니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 한쌍이 드러났다.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지민의 한쪽 손을 가져와 약지에 끼웠는데 다행히 사이즈가 맞았다. 자신의 손가락에도 스스로 반지를 낀 태형은 등받이에 몸을 똑바로 붙여 자신에게 기댄 지민의 편의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평온한 두 사람의 얼굴위로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