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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훔치는​ 방법

봄제

(A)

 

   어느 정도로 못하는데요? 물은 말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가히 무식할 듯. 근데 깎아놓은 것처럼 잘생겼다는 정보는 사전에 들은 바가 없다. 이 아줌마 순 배신자 사기꾼이지. 맥이려고 작정했다가 되려 맥혀본 경험이 없나 봐. 원래 돈 많은 것들이 더한 법이다. 수중에 처음으로 흰 봉투가 들어왔다.

 

   "평소에 무슨 책 풀어?"

 

   김태형은 실실 쪼갰다. 내가 지 엄마한테 '것들'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인 것도 모르고. 영어 대가리만 없는 게 아니라 전체 나사가 지랄인 거다 얘는. 뭘 웃어. 이거나 읽어 봐. 우리 나이는 명백히 고등학교 1학년 17살. 엊그제 입학하고도 내일모레 졸업한다 싶을 정도로 세월이 조급하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이 전교 내에 나 하나뿐인 것 같아 참담하다. 맨몸에 내쫓겨도 저 받아줄 대학은 있는 줄 아나 봐. 여유란 것도 정도껏 가져야 하는 거다.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킨 'Information'을 '인포매티온'으로 발음하는 김태형을 보고 얼이 나갔다. 으리으리한 집안 아들이 명문대학 과탑 강사들을 놔두고 한낱 옆 반 학생을 과외 선생으로 두게 된 배경에는 필히 심상치 않은 사건이 있었겠지. 추측만 하고 접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강사들이 추노 찍고 도망친 거다.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하려던 충동에도 잠시, 백팩 안에 들어있을 흰 봉투가 아른거렸다. 그래, 단어가 너무 길었을지도 몰라. 프린트를 끈기 있게 뒤적거렸다.

 

   10분 뒤 나는 나가겠다 작정하고 짐을 챙겼다. 김태형이 'Bear'을 '비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미친, 다섯 살도 이건 알아. 머리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고 정말 개 같지만 가방 안쪽에서 급여를 도로 꺼냈다. 바닥에 던지듯 내려놨다. 내 행동을 캐치한 김태형은 살짝 정색을 했다. 경직된 상태로 그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어디 가?"

   "수업 끝났어."

   "원래 과외가 30분도 안 해?"

   "넌 나한테 수업 못 들어. 내가 안 해, 너랑은."

 

   가져왔던 교재는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다. 얘 수준 때문에. 잠글 지퍼도 다 잠그고 가방에 넣어 들고 갈 필기구는 전부 넣었는데도 걸음이 안 떨어졌다. 김태형이 내 손목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슬슬 풀었을 때는 정말이지, 눈 뒤집혀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놓기는 왜 놔. 그대로 질질 끌어서 문 바깥에 던졌어야지. 자유분방해진 내 손모가지는 방바닥에 놓인 봉투를 주우려고 본새 없게 안달이었다. 가느다란 이성으로 손동작을 막았다. 그럼에도 온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태형이 물었다.

 

   "왜?"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몰라서 물어."

 

   제가 모른다는 걸 과시하듯 긴 속눈썹이 몇 차례 깜빡였다. 그쯤에 잠시 넋을 놨던 거 같다. 내 주변엔 괴팍한 낯짝만 널려서 잘생기고 예쁜 얼굴에 내성이 없다. 몇 초 정도 멍 때렸단 사실도 쪽팔려서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네 엄마한테 물어봐."

 

   태형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응, 솔직히 너도 기분이 좀 나빠야지. 원래 본인 무식한 순간에 가장 불쾌할 건 그 본인이어야 맞거든. 만나서 면대 면으로 대화한 지 고작 23분 된 애가 '너희 어머니'도 아니고 '너네 엄마', '물어보던가' 식으로 받아쳤다면 나는 즉시 책상부터 엎었을 거다. 하지만 김태형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 태도에 기분이 더 상했다.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똑같이 입시하는 나더러 이 수준 밑바닥까지 떨어진 애를 가르치라고 고작 한 달 35만 원 돈을 줬단 말이야? 한 달 동안 얼마나 부릴라고. 사람을 낮게 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한쪽 어깨 위로 가방을 걸치듯 매고 바로 문손잡이를 틀었다. 김태형을 포함해 이 집안과는 아예 빠이빠이할 생각으로 그랬다. 과외가 암만 꿀 빤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이럴 바에는 내가 40만 원 돈 문제집 덜 풀고 밤새워서 입신양명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결론지었다. 발이 문턱에 반쯤 걸쳤을 때, 김태형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아."

 

   제 까짓 게 내 이름을 알면 언제부터 알았다고.

 

   "안 할 거면 돈은 놓고 가야지."

   "뭐?"

   "네 손에 그거."

 

   나는 김태형이 못 보게 뒤돌아서 얼굴로 쌍욕을 했다. 기어코 이걸 또 들고 나왔어. 내 손에 들린 건 아까 전 급여봉투였다. 구겨지게 잡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알아챈 쟤도 참 귀신같다. 분에 겨워서 발을 쾅쾅 몇 번 내딛다가 뒤를 홱 돌아봤다. 태형은 아직도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돈 봉투가 아니라.

 

   "눈깔 똑바로 해, 내가 도둑 새끼야? 너 말고 아줌마한테 직접 드리고 갈 거야."

 

   아니. 도로 못 드렸다. 걔 눈에는 내가 좀 우스웠을지도 모르겠다. 벽면 창이 통유리로 된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미닫이 이중 현관을 통해 걸어 나올 때까지 내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렇다면 훔쳤느냐? 이 또한 아니다. 왜 벌써 수업이 끝났냐고 묻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눈짓에 무턱대고 허리 숙여 인사부터 했다. "첫날이라 대화만 텄어요. 이제 수업계획 짜서 오려구요." 도망치듯이 걸었더니 거의 뛰는 속도였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그 집에 두고 오기에는 짧은 시간 동안 돈 봉투에 정이 들어서.

 

   솔직히 말해 나는 도벽이 있지만, 이 증세가 가난의 잔여물처럼 느껴져서 관두려고 다짐한 지 꽤 됐다. 다짐은 다짐이오. 충동은 충동이로다. 관두겠다 선언한 것이 곧장 내 도벽의 완쾌로 이어졌다 생각한다면 정말 오산이다. 여전하거나 혹은 심해졌다. 하지만 돈 없고 답도 없는 놈들과 나는 다른 부류이므로, 새로운 해소법을 터득했다. 뒷감당을 하는 거다. 매질을 맞든. 다 보는 앞에서 쪽을 당하든. 따지고 보면 오늘의 후환은 꽤 가벼운 축에 속했다. 매질도 쪽질도 아닌 김태형의 과외 선생 노릇. 일단은 한 달. 분명 짜증이 솟구쳤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집구석이 싫다. 얼마나 싫으냐면 아까 전 침이라도 뱉고 싶었던 김태형 면상이 그리울 정도. 차라리 수업을 당겨서 길게 할 걸 그랬다. 마당에 경찰차가 세워져 있었다. 옆집 대문을 열고 나오는 경찰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목례가 오갔다. 너무 자주 봐서 안면을 튼 거다. 옆에 앰뷸런스 하나도 주차된 걸 보면 또 술 먹고 싸우다가 깨진 모양이다. "그냥 이참에 아예 잡아가면 안 돼요?" 진심을 담아 물었건만 돌아오는 답은 네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네. 대체 누가 이걸 쉽게 생각해? 다리를 절며 말을 느리게 하는 아저씨, 그리고 그 뒤에 걸어 나오는 머리가 깨진 형. 그 뒤에 나오는 주책맞은 할머니. 차라리 싹수 노란 어린놈이라고 욕먹고 오래 사는 게 낫지 이웃이랍시고 인사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그 법칙을 싸그리 무시하는 동네다. 질량의 보존이 아닌 과다. 모르겠다, 이 표현이 맞는지.

   이상한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이상한 사람이 모인다. 요란 떨고 피까지 보는 저 인간들과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근데 그 동네에 내가 있다고. 장본인인 나조차 지겨운 도벽의 시작이 이곳이라고 확신하며 현관문을 땄다.

 

   "왔어?"

 

   다정한 목소리에 머리가 다 아프다. 다리 하나가 맛이 가서 흔들리는 밥상 위에 봉투를 던졌다. 집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과외한다고 했어? 지민아, 엄마 말 들어준 거야?" 기특함이 잔뜩 묻어나는 엄마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그걸 듣는데 너무 힘들어서 대답도 못하고 방문을 콱 닫았다. 

 

   등판이 문에 밀려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아직도 마당에선 정리되지 못한 소동으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켜지지 않은 불에, 환기가 불가능한 창 구조. 이곳은 유일한 나의 공간이다. 아무도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김태형 걔는 왜 하필 나를 골랐지? 혹시 여기를 들킨 걸까 봐 불안했다. 심호흡은 곧 한숨이 된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바스락하고 종이 접히는 소리가 난다. 봉투에서 슬쩍한 5만 원 지폐였다. 다음 달에 잘릴지 아닐지 모르니까 일단 월말까지는 아껴놔야지.

 

   "... 에, 에취! 아.. 목 아파."

 

   이어지던 두통은 엄마가 아닌 감기 때문이었나 보다.

 

 

(C)

 

   도벽이란 것도 결국에는 다 병이다. 착하게 군다고 해서 어디로 선뜻 달아나 줄 친구가 아니다. 나는 돈으로 잡힌 한 달 내내 김태형한테 몹쓸 짓을 했다. 성의 없게 알려주는 걸 넘어서서 틀리게 가르치는 거다.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싸우는 일도 없었다. 걔는 아주 유순하게 오답을 배워갔다. 바보, 그래도 너는 행운아야. 내 성격은 보통 여름에 가장 지랄맞다. 김태형은 더운 날이 적당히 느슨해질 2학기를 시작으로 나와 같은 책상 위에 앉았다. 그러니 행운일 수밖에. 이 과외가 여름에 시작됐다면 김태형은 괴롭힘을 못 견디고 창밖 매미와 함께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맴맴거리는 김태형을 상상하다 웃음이 삐져나왔다. 거의 책상에 코 박고 문제를 풀던 태형은 내 키득거림에 고개를 들었다. 뭘 봐. 페이지를 짚었다.

 

   "여기, 여기. 이 단어 읽어 봐."

   "둘 다?"

   "둘 다."

 

   김태형은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저렇게 꽉 막힌 표정이니까 나한테 욕을 얻어 가는 거다. 태형이 두 단어를 연이어 읽었다. 읽어 보라고 주문한 내가 쪽팔릴 정도로 기초였다.

 

   "아취비. (achieve)"

   "푸, 큽, 으응.... 다음 것도."

   "어콤플라이쉬. (accomplish)"

   "..... 너 이제 다 아네."

 

   웃겨서 울고 싶은 속을 감추고 진지한 척을 했다. 김태형은 내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 아는 것 같다는 나의 칭찬에 갑자기 얼굴빛이 살았다. 얘를 어떡하냐 정말. 의외의 연민이 들어 흠칫 놀랐다. 민망해서 걔더러 남은 공부 마저 하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목구멍이 간질거리더니 재채기가 터졌다. 간절기를 시작으로 가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건 머리털 날 때부터 그래서 큰 감흥이 없다만, 별안간 프린트물 위를 짚은 게 문제였다. 코끝을 문지르고 있는데 김태형이 중얼거렸다. 내가 손가락을 집은 곳엔 아프다고 쓰여 있었다. 나 혹시 무당으로 진로 갈아타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내 몸은 확실히 아픈 게 맞았다. 태형이 목소리를 냈다.

 

   "에취. (ache)"

 

   이게 진짜.

 

   "왜 웃냐?"

   "안 웃었는데."

 

   김태형은 웃는 얼굴로도 안 웃었다고 뻔뻔하게 사기를 쳤다. 나는 간만에 화를 누르는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굳이 힘 뺄 필요 없었다. 어차피 김태형은 9월 말부터 탈탈 털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엉터리로 배운 게 지금은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본격적인 시험기간에 제대로 터질 거다.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첫 단추부터 병신처럼 잘못 끼웠잖아! 첫인상에 수다스러운 다람쥐를 닮았다고 생각한 아줌마가 저 대사를 읊는 상황을 떠올렸다. 봐줄 만하겠지. 악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진작 까먹고 날렸다. 저번 주에 타이밍이 절묘하게 겹쳐서 마주쳤던 김태형네 아저씨는 불곰을 닮았다. 다람쥐와 불곰 사이에서 태어난 호랑이라. 뭐 그렇다. 나는 습관성으로 사람을 종종 짐승에 비유한다. 내게 있어 김태형의 첫인상은 호랑이였다. 이빨은 안 빠졌는데 나사가 빠진.

 

   "발음 맞았어?"

   "... 어?"

   "방금 말한 거 맞았냐고."

 

   흑갈색으로 진한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걔랑 수업하면서 한 번도 제 발 저린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조금 찔렸던 거 같다. 원래 대답이 나왔어야 할 시점보다 살짝 뒤처지게 대꾸했다. 어어. 맞았어. 네 말이 곧 정답이지. 비웃음이 또 터지려고 했다. 그때 김태형이 대책 없는 말로 내 즐거움을 뚝 잘라먹었다.

 

   "중간고사 잘 보면 나 생일선물 주라."

   "생일, 뭐.. 내가?"

   "응."

 

   저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 잇는 철판 좀 봐. 잠시 할 말을 잃고 헤매다가, 웃던 짓을 계속했다. 나는 걔가 선물로 뭘 원하는지 보다 먼저 이상적인 커트라인을 물었다. 처음부터 줄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친구라도 되는 줄 알아? 네 생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김태형은 제 생일도 마침 9월이 끝난 뒤라고 능청을 떨었다. 코 한 대만 쥐어박아주고 싶었다.

 

   "잘 본다는 게 몇 점 기준인데?"

   "네가 정해."

   "너. 야, 와, 진짜 웃긴다.. 진심이야?"

   "해. 빨리. 자신 있어."

 

   무슨 보험을 들었는지 몰라도 김태형은 대담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빠른 계산을 마쳤다. 현재까지 파악한 태형의 영어실력으론, 50점 수준도 무리일 게 뻔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김태형을 처음 만났던 이후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을 지금에 와서 또 하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걔한테 무방비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60점."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김태형은 잠시 말을 안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 없으면 말해. 좀만 놀리고 관두게."

   "콜."

   "미쳤나 봐. 진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넘어가면서 막 웃어제꼈다. 김태형은 나 따라서 실실 웃다가 억척스런 내 손길 때문에 다시 책상에 코 박을 것 같은 자세가 됐다. "웃을 시간 있냐? 공부나 해." 저도 짜증 낼 줄 안다는 듯 목소리 깔고 응 하더니 태형이 다시 펜을 잡았다. 덩치 커다란 놈이 웅크리고 종이만 째리는 게 웃겨서 소리를 죽이고 좀 더 웃었다. 김태형은 나한테 더 맞을까 봐 그랬는지 더는 고개를 치켜들지 않았다. 기특하기도 해. 나는 맨날 저한테 이상한 것만 알려줬는데. 샤프를 쥐고 의미 없는 밑줄만 서너 차례 그었다. 중간중간 동그라미도 조금 치고. 부잣집 외동 호랑이가 곧 생일이래, 얘가 갖고 싶은 게 있기는 할까? 피식거리던 나는 급히 정색했다. 뭐 하러 이런 생각을 해? 살 생각도 없었던 선물을 여차하면 고민해서 사다 바칠 뻔했다. 하던 짓을 멈추고 뺨을 몇 번 때리자 마찰음에 김태형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뻔히 잘생겼다. 너 잘난 거 아니까 눈 그렇게 뜨지 좀 마. 무식하게 인상을 찌푸렸더니 태형의 고개가 다시 처박힌다. 우리는 다시 이 근본 없는 과외 시간에 집중했고, 나는 적잖게 놀랐다. 첫 월급으로 꽁쳐 둔 5만 원권을 월말에 깨버렸거든. 그것도 김태형 생일 선물을 사느라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여우들 사이에서 호랑이는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다람쥐 아줌마한테 개인적으로 쪼인 사정이 있는지 담임은 김태형의 영어시험 답지를 본 뒤 대놓고 화색을 띄웠단다. 김태형은 자기네 반 담임과의 상담에서 칭찬을 한 보따리로 받았고, 뭐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성의 없이 찍은 실력으로 20점 위아래를 돌던 걔가 처음으로 60을 넘긴 거다. 허탈했다. 이건 어디서 조작한 게 아니면 말이 안 되지. 내가 분명히 기억한다고, 걔는 곰탱이를 맥주로 읽던 멍청이란 말이야.

 

   김태형네 아줌마가 나더러 고맙다고 월급에 인센티브를 껴줬다. 더 받은 3만 원을 나는 쓱싹할 수 없었다. 내 공로로 보이지 않아서. 정직하게 대처했다기보다는 그저 그 돈을 더 받는 게 내게 적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엄마한테 다 드렸다. 다음 과외 시간에 만난 김태형은 애써 모든 걸 나의 공으로 돌리려는 것 같았다. 걔가 나더러 덕분에라고 빌빌대는 것은 좋았지만 왠지 우연하게 동정받은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누가 나 봐주는 게 죽기보다 더 싫어. 근데 김태형은 확실히 고단수다. 나의 찝찝함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태형이 대뜸 내 쪽으로 자기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

   "선물."

   "무슨 선물..?"

   "까먹은 척하지 마, 지민아. 네가 나 성적 잘 나오면 생일선물 준다며."

   "쩨쩨하게 그걸 기억하냐?"

   "둘 다 콜 했는데 까먹는 놈이 쩨쩨한 거지. 아니야?"

 

   눈치 빠른 게 이제는 말도 잘 하네. 푸석한 얼굴 위를 막무가내로 문질렀다. 대답을 기다리는 김태형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늘 내로 선물이란 걸 주지 않으면 나를 묶어서라도 잡아 둘 것처럼 보였다. 태형이 야무지게 제한선을 내걸었다. 예상도 못 한 거라 말이 버벅거렸다.

 

   "싼 거 아무거나 사 오면 무효. 최소 2만 원대."

   "미, 미쳤어?"

   "콜 안 하면 가격 올라간다."

 

   눈 질끈 감고 콜을 외치자 김태형은 턱 괴고 웃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사람이 아니고 웬 짐승 새끼를 가르쳤지 내가. 거래가 성사되고 또 한 번 도망치듯 뛰쳐나온 나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매대를 쭉 훑었는데 살 건 없었다. 사거나 주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나 소나 내 사정을 들은 뒤엔 촉촉한 시선부터 장착했으니까. 기특하다고 했던 거 취소하기로 했다. 그래도 자기 멘토인데 이렇게까지 봐주는 게 없다니. 같잖았고 썩 나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서 나와 다른 가게를 찾았다. 살면서 몇 번 안 가본 곳이었다. 선물할 거라고 하니까 예쁘게 몇 개씩 묶어 포장해줬지만 가게 주인은 내내 또라이 보듯 날 봤다. 과외는 일주일에 세 번이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성년자 착취 같은데 의뢰인도 미성년자라 내가 봐주는 거다. 가방 안에서 선물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김태형이 나를 봐주지 않아서 기쁘다면, 내가 좀 미친 걸까? 문을 열고 책상 자리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얼른 책 펴."

   "..."

   "아, 사 왔으니까 수업부터 해.."

   "진짜?"

   "너 때문에 거금 썼다. 가방 안에 있어."

 

   선물 내놔, 어디 있어? 안 보이는데. 이 느낌으로 나를 내내 쳐다보길래 생색을 좀 냈다. 김태형의 반질반질한 볼이 흥미를 못 견디고 위로 볼록 솟았다. 호랑이가 아니고 강아지였나. 좋냐고 물었더니 마구 끄덕거린다. 진짜 얘를 어떡하지 싶었다. 이 단순 멍청함에 적응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지만 이미 그른 것 같다. 침착한 척하며 내 노트를 펼쳤다. 잘못 알려줘도 결국엔 정답 적고 나오는 애를 뭐부터 다시 망쳐놔야 할지 고민이 됐다. 한숨을 푹 쉬었는데 걔 눈에는 내가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너 좀 멋있다, 지민아."

   "뭐가."

   "그냥. 여태 아빠 말고는 멋있는 사람 별로 없었는데."

   "너는 내가 네 아빠 같아?"

   "그런 느낌은 아니고."

 

   동갑짜리, 그것도 덩치 산만한 놈한테 아버지랑 비교를 당하다니. 조금 묘했다.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들어서 그런가?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요새 감기 막바지라고 열이 자주 난다. 김태형의 다음 말에 나는 이전과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문제에만 집중한 척 펜을 끄적거렸다. 갑자기 죽을 맛이었다.

 

   ".. 좀 이상해. 아빠 보고 예쁘다는 생각은 안 하잖아."

 

   저것도 분명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파악 못 하고 내는 소리일 테지. 나는 이후로 아무 말 없이 1시간짜리 수업을 꽉꽉 채우고 나왔다. 집에서 있는 대로 먹은 종합 감기약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 심박 뛰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머리로 열이 몰려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그래도 생일선물은 던져주고 나왔다. 김태형은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었다. 너무 빠르게 도망쳐서 듣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나서야 숨통이 트인 것처럼 웃을 수 있었다.

 

   달각거리는 매니큐어 열댓 개. 리본으로 이쁘게 포장된 걸 뜯으면서 걔도 실없이 좀 웃고 있을 거다. 제한선을 통 크게 넘겼다. 스무 개가 조금 덜 되려나 싶네. 뜯고 나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겠지? 다음 날 우리 반 주변에서 김태형은 한참 동안 얼쩡거렸다고 한다. 빨갛게 칠한 자기 새끼손톱을 보여주려고.

 

 

(H)

 

   내가 속는 것 같다. 60점 넘긴 김태형은 또다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영단어를 읽기 시작했다. 언제라고 제대로 읽었던 적도 없기는 해. 그때부터 좀 의심했어야 했다. 처음 슬쩍했던 5만 원에서 절반 이상이 김태형의 손톱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약값으로 증발했다. 그 덕인지 기침이 덜해졌다. 어지러운 미열은 여전하다. 보통 내 감기는 가을마다 찾아와서 한 해가 쫑나야 같이 사라진다. 따라서 지금은 꽤 양호한 상태인 거다.

 

   "야, 우리 시험 끝났으니까.."

 

   오늘 놀자는 소리만 하지 마라 제발. 내 책상 주변으로 여우 너덧이 모였다. 입학 초부터 같이 다니기 시작한 무리다. 우리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느낀 건 불과 3주가 지났을 때. 물론 나 혼자의 감상이었다. 해서 아직까지 붙어 다니는 거겠지. 얘들은 눈을 옆으로 쫙 빼고 겉보기만 좋은 웃음을 살살 흘린다. 처음 어울리게 되었을 때 이것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공감하는 척 듣더니 결과적으로 반은 연민, 반은 흥미였다. 내 기도는 보기 좋게 부서졌다. 놀자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익숙하게 대답했다.

 

   "... 너희끼리 놀아. 나는 집 갈래."

   "아, 왜! 맨날 너만 빼고 노니까 이상해."

   "돈도 없고, 오늘은 시간 안 될 거 같은데."

   "너무하다.. 이번 주에 박지민 네 생일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 생일이 있는 게 왜 너희가 너무하세요. 태어났다고 질책 받는 거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말없이 가방 안에 책을 챙기자 여우는 표정을 죽이면서 한숨만 쉬었다. 대체 학생이 어떻게 먹고 놀아야 하루에 인당 5만 원을 쓰는 거야? 이것들은 처음부터 잘 사는 집에 태어났다. 나라고 어울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루 다 같이 놀았다가 나온 값에 충격받고 무른 거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새 잃고 세세한 집안 사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생일 챙기는 것도 정말 싫다. 주면 주는 대로 나중에 싹 다 수금할 거 내가 모르냐. 결국에는 빚지는 개념일 걸.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했더니 김태형이다.

 

   '오늘 영작 숙제 끝.'

 

   첨부파일로 도착한 사진을 크게 키웠다. 문법에 스펠링까지 엉망이지만 대강은 알아먹을 수 있는 문장이 서너 개 적혀 있었다. '오늘 수업이 아니다. 너무 지루한.'으로 마무리되는 멍청한 일기를 보고 키득거렸더니 앞에 선 여우들이 야린다. 너희들 원하는 대로 놀아 줄 생각 없으니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주변이 한산해진 뒤에야 문자 입력창을 켰다.

 

   '나 보고 싶지?'

 

   재수 없게 구는 건 이 호랑이나 저 여우들이나 매한가진데 나는 왜 이런 장난이 치고 싶을까. 메시지를 전송하고 10분 넘게 답장이 없었다. 빨간 날이라고 수업 하루를 뺐다. 그 하루 때문에 이렇게 칭얼거리는 거다. 대놓고 징징댄 적은 없지만 나는 김태형이 상당히 짜증 난 상태일 거라고 확신했다. 잠시 후 답신이 도착했다.

 

   '절대.'

 

   절대로 아니란 거야, 절대 보고 싶다는 거야. 속 터져서 읽고도 답장하지 않았다. 이번 가을은 유독 느리다. 한 달 내내 빽빽이 놀려먹고 놀리는 족족 당해주던 탓에 김태형과 나는 살벌한 첫 만남에 비해서 꽤 많이 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 우리가 마주치는 장소는 태형의 방이 유일했다. 나보다는 김태형의 반응이 의외다. 나는 걔가 학교에서도 친한 척하며 끽해봐야 숫자 하나 차이인 우리 반에 들락날락하고 난리 칠 줄 알았다.

 

   근데 왜 안 그랬어?

 

 

 

   "그럼 너 싫잖아."

   "뭐가."

   "친한 척하면 한 대 칠 거잖아. 집에서 보는 것도 기겁하면서."

   "내가 언제 기겁을 했어?"

 

   궁금한 걸 못 묻고 지나가면 병 된다. 아픈 게 지긋지긋한 나는 되도록이면 직구를 때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때만큼은 자존심도 무시 까고 말한다. 어쨌든 아닌 건 아닌 거지, 내가 언제 기겁했는데? 김태형이 쥐고 있던 샤프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언제나 안정적이던 책상이 그날은 삐걱대는 비명을 질렀다. 태형은 낮은 책상을 짚고 상체를 들이밀었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기울인 각도로 까딱거리면서.

 

   "안 해?"

 

   0.1초 만에 얼굴이 한 뼘 더 다가왔다. 참은 숨을 뱉으면 김태형이 다 맞아버릴 것 같았다.

 

   "진짜 안 해?"

 

   억. 소리와 함께 김태형 고개가 돌아갔다. 말 그대로 내가 한 대 갈긴 탓이었다. 저 얼굴 때리는 건 정말로 반갑지가 않아서 애매하게 머리통을 쳤다. 태형은 오버하면서 자기 오른쪽 머리를 매만졌다. 수업 끝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얘가 자꾸 이상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한 번만 더 들이밀어라, 속으로 주문했다. 진짜 그러면 한 대 더 쳐주려고. 맞은 상태로 아파하던 김태형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고서는 물었다.

 

   "근데 너는 왜 그렇게 날 피해?"

   "씨, 방금 그 거리에서 안 피하는 새끼가 어디 있어?"

   "가만있을 수도 있는데. 함 해보고 알려줄게."

   "뭘, 뭐를 해."

   "다른 애한테 똑같이. 이거."

 

   눈 밑으로 속눈썹 떨어진 것까지 잘 보일 정도로 들이미는 짓, 남한테 또 해보겠다는 소리였다. 내가 유독 지랄인 건지 확인하려고 말이다. 우리 학교엔 죄다 여우 새끼들밖에 없는데. 나 혼자 돌연변이라, 그래서 내가 제대로 된 친구가 없지. 김태형은 한다고 하면 진짜로 할 놈이다. 어디서 괜히 싹수 노란 여우한테 걸려서 허덕댈까 봐 불안해졌다. 김태형은 학교 내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호랑이라고. 이쯤 되니 내가 우스웠다. 나사 빠진 호랑이 하나 때문에 불쾌하다니. 김태형은 아까부터 계속 내 표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유치하지만 그건 사냥하는 눈빛에 가까웠다.

 

   "하지 말까?"

 

   응. 싫었다. 김태형이 남한테 이런다고 생각하면 싫고, 이 감정에 솔직해지기란 더 싫었다.

 

   "... 아무한테나 들이대는 싼 놈으로 소문나고 싶으면 해."

   "알았어, 지민아. 안 할게."

 

   나는 김태형이 푸스스 웃는 소리를 무시하고 형광펜을 집었다. 단어 하나를 죽 긋고 읽어 보라고 던지면 세상 처음 듣는 식으로 발음한다. "맞았어?" 태형의 물음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너를 두고 뭘 하고 싶은 걸까. 훔치는 것엔 이유가 없고 결과만 있다. 보통은 갖고 싶어서, 탐이 나서, 반항하려고, 혹은 복수심이나. 이런 게 나한테는 없었다. 처음으로 문득 의문이 든다. 이 집안에 들어올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흰 봉투를 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네가 나한테 의존해서 성적을 깡그리 말아버리면, 난 어느 곳에서 만족감을 느끼려고 했던 건지. 한 번도 고민한 적 없었던 것들을 헤집자 머리가 아파왔다. 다시 미열이었다. 김태형이 물었다.

 

   "넌 이거 아니면 나랑 있지도 않을 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수업을 마쳤다. 김태형이 말하는 '이거'가 무슨 말인지 생각하느라. 과외일 수도 있지, 급여봉투를 훔친 대가일 수도 있고. 그 이유 안에 김태형과 나를 넣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멘탈을 반 토막 낼 수 있는 쉬운 길이었으니까. 예를 들자면 김태형이 나를 동정하지 않아서. 나는 그걸 좋아해서.

 

 

(E)

 

   생일이 되기까지 며칠 걸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소란할 줄 알았던 여우 친구들은 의외로 잠잠했고, 내 생일은 무난한 하루로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졸업하면 끝, 또 졸업하면 끝. 그렇게 주변 챙길 생각을 않고 지냈더니 낭만 청춘 열일곱에 벌써부터 자정 맞춰 축하해주는 지인이 만무하다. 열두 시 땡 하자 휴대폰이 조용했다. 생일 전날 밤에는 힘아리 없는 가을비가 내렸다. 서운했냐고 묻는다면 그다지. 나는 눅눅한 비 때문에 내 생일이 하나의 소동쯤으로 묻히길 바랐다. 엄마가 기억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열두 시 하고도 한참을 지나서 거의 새벽 한 시쯤이었나, 진동소리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엉터리 숙제를 검사할 때 빼고는 연락 한 통 나눈 적 없던 김태형 번호. 문자면 한 번 읽고 고민하는 시간이라도 있었을 텐데 이건 전화였다.

 

   "여보세요."

   ".. 야, 지민아."

   "응."

   "나인 거 알면서 여보세요는 왜 해."

 

   혹시 너 말고 다람쥐 아줌마가 건 걸까 봐 내 나름 신중했던 거지. 라고 대답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나이 먹은 어른들은 몸이 쑤셔서 그 시간에 잔다. 여보세요가 아니면 뭐라고 하면서 받는데? 이렇게 말했을 때 김태형이 조금 웃었다. 나는 이 전화의 용건이 제일 궁금했다. 그래서 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놨다. 원래 내 표현은 빙빙 돌아가는 편이다.

 

   "졸려. 끊는다?"

   "아... 잠깐만."

   "..."

   "나 네가 준 거 하나씩 다 써봤어. 하루에 하나씩."

 

   바보 같아. 집에 아세톤은 있고? 쪼아대고 싶은 말은 한가득이었지만 정말 졸린 것처럼 눈이 무거웠다. 소리 내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나는 태형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손가락에 그걸 다 발랐는지 알고 있었다. 며칠 내리 지독한 매니큐어 냄새 때문에 고문 받았을 김태형의 검지와 약지가 눈에 훤하다.

 

   "잘했네. 야, 근데."

   "어."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야?"

 

   김태형은 말을 미루는 것처럼 음, 어, 와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냈다. 뭔가 할 말은 있다는 건데 얘는 첫인상과 다르게 띨빵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한 3분 정도 말이 없었다. 더 지나고 나서부터 김태형은 '음..' 같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내가 얘랑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너 되게 착해졌다. 끊지도 않고."

   "잠이나 자."

   "지민,"

 

   너 되게 착해졌네. 착하네. 착하다. 비정상적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더워서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이마를 짚었는데 살짝 따뜻했다. 너야말로 왜 착하게 말하고 지랄이야. 김태형이 나를 다 부르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착해졌다고 한들 나의 참을성은 여기까지인 거다. 망할, 가을 감기 진짜로 독하구나. 명치가 콱콱 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 손에 쥔 폰 화면이 또 깜빡거렸다. 태형이 보낸 문자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이라면 고르고 골라도 넘칠 만큼 많았지. 의문도 있고 욕설도 있고 간추리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없어.'

 

   나만 네 생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그제야 떠올랐다.

 

 

 

   생일 아침. 그 하루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주인공은 꼭 마지막에 등장한다고, 늦게 도착하면 주목이라도 받을까 봐 일부러 꼭두새벽에 학교로 나섰다. 아침에 감은 눈으로라도 책을 살필 시간이 늘어서 썩 나쁘지 않았다. 등교한 여우들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매 쉬는 시간마다 나를 힐끗거렸다. 생일 축하한다는 흔한 축하말이 들리지 않는 건 조금 불안했으나, 나는 걔들이 전부 까먹었길 바라면서 책상에 코를 박았다.

 

   악인은 존나 많다. 자나 깨나 민폐만 끼치는 우리 옆집 윗집 사람들도 악인일 수 있고, 강약약강으로 살아가는 놈들도 악인일 수 있으며, 그 전부를 방관한 새끼들도 악인일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업 말아먹고 보증 하나 섰다가 죄책감이라는 수단으로 휙 날라버린 아빠도 악인일 거고, 혼자 남은 엄마한테 친절하지 못한 나도 악인이지. 해서 그 '나쁜 것'들과 직면했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 우리랑... 는데..... 까지 해야 돼?"

   "맞아. 굳이? 네 생일은.... 내년에 반 갈라지면...... 할걸. 입 씻고."

   "그냥 주자. 다 알면서 왜 그러냐? 박지민 불쌍하잖아."

 

   배신감은 다른 개념이다. 걔들은 가운데에 선물 몇 가지, 케이크를 몰아두고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다. 전체가 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지막 말도 못 들었으면 좋았을 걸. 저런 것도 깜짝 생일파티였을까, 놀래키는 건 성공했다. 불쌍하잖아.

 

   불쌍해. 내가 왜?

 

   집에 가려면 가방을 들어야 했고 내 책가방은 교실 안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몸 그대로 운동장까지 내달렸다. 어깨가 젖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휴대폰이 젖을까 봐 양손으로 가려서 꽉 쥐었다. 어쩌다 예보를 봐서 혹은 엄마가 미리 말을 해 줘서, 우산을 챙겼다고 해도 이렇게 도망쳤다면 똑같이 다 맞았을 거다. 얼굴이 계속해서 축축해졌다. 앞머리에서 물이 떨어질 때마다 눈앞이 흐려져서 이미 젖은 셔츠 소매로 아프게 문질렀다. 시발. 오늘이 뭐라고. 미친 듯이 달려서 집 마당까지 도착했는데 젖은 틈새로 쥐가 지나가는 걸 봤다. 안 슬펐는데 그때는 진짜 울고 싶었다. 비 오는 날에도 싸우는 소리는 여전했다. 뻑뻑한 현관문을 밀었지만 집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척척한 신발을 벗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축하라는 게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주고받는 거 좋아해. 줄 게 없어서 그렇지. 마른 수건으로 열심히 닦았는데도 몸이 계속해서 떨렸다. 무작정 받는 건 싫어. 근데 아무도 나한테서 뭘 받으려고 안 한다. 뭐 없는 걸 아니까. 동정과 더불어 받기만 하는 손이 창피해서 내가 직접 훔친 물건으로 그 안을 채웠다. 나도 작정하면 광적으로 퍼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아, 먼저 내놓으라고 독촉한 사람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 나는 호랑이굴에서 정신 차리고 호랑이와 독대했다. 굴 속에는 탐나는 게 많았다. 처음부터 그래서 들어갔다. 유일하게 젖지 않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늘 영작 숙제.'

 

   나는 엉터리 영어를 계속했다. want는 무조건 to가 붙는다고 가르쳤다. 김태형에게 '원하다' 이상의 해석은 알려주지 않았다. 걔는 자꾸 나한테 제가 착실하다는 걸 티내고 싶어 했다. 예쁨 못 받아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그 때문인지 첨부사진에는 want to만 세 번 적혀있었다. 'I want to be Jimin.' 문법적으로 맞았지만 너는 김태형이니까 마이너스 1점. 그리고 선생인 내가 불쾌했으니까 마이너스 2점. 'I want to make happy Jimin.' 이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김태형은 이상한 말로 자주 날 웃기니까. 그래도 문법이 이상해. 마이너스 3점. 잠깐이었지만 내가 먼저 끊어버린 어제의 통화가 생각났다.

 

   'I want to you.'

 

   엉망이다. 너는 대체 뭐가 문제일까? 김태형은 영작 숙제로 자주 헛소리를 했지만 문법과 별개로 전부 사실이었다. 게임 좋아한다는 말을 써놨을 땐 수업하자는 나를 붙들고 제가 좋아하는 게임팩 설명을 해댔으며, 콜라가 시원하다는 뜬금없는 문장 이후에는 물 맺힌 콜라캔 두 개를 들고 날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것도 사실이겠지. 마이너스 4점. 그리고 김태형의 영어 점수 63점. 두 점수가 이리저리 교차하다가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너는 김태형 하나를 바보 만들어서 훔치려고 그랬지, 걔가 그렇게 쉬운 놈 같아? 처음부터 손 위에 올려놓고 장난친 거야. 박지민 네가 속은 거라고. 새벽에 통화했던 기록을 그대로 눌렀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걸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거다. 김태형 귀에 대고 찢어지게 소리칠 생각이었다. 우선은 영작이 개판 난 것부터 언급하고 욕해줘야지. 그다음에는, 그다음으론, 내게 장난치지 말라고 선언해야지.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김태형 목소리가 들렸다. 걔는 '여보세요'라고도 안 했다. 사실 그때부터 내 기분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눌리고 쌓였던 둑이 무너져 축축하게 쏟아지려고 했다.

 

   "어."

   "... 김태형."

   "응. 지민아."

   "너... 너."

 

   뭐부터 화를 내줘야 하지. 숙제가 엉망인 것부터? 전에 선물 받았으면서 왜 내 건 없는지부터? 맞다, 내 생일은 말해준 적도 없지. 추위에 코가 꽉 막히려고 하는데 그럼 이상한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서러웠다. 머리랑 어깨만 닦아서인지 얼굴은 아직도 축축했다. 김태형은 계속 내 말을 이어 들으려고 했다. 응, 말해. 응, 지민아. 듣고 있어. 걔가 낮게 말할 때마다 머리가 띵했다. 감기가 다시 도지는 것 같았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느냐고 물었지. 김태형이 기다렸던 할 말은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

 

   "... 너, 그러니까.... 나.."

   "지민아."

   "그게, 오늘.... 생일."

   "..."

   ".. 나, 흐으... 생일이야.. 흑.."

 

   축하받고 싶어, 너한테는 준 적도 있으니까. 이 말은 안 했다. 건조했던 휴대폰 액정에 볼이 눌렸다.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속에 뭐 하나가 얹힌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 괜찮으냐고, 어디냐고 묻는 음성에 안심한 나머지 모든 게 일그러졌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호흡이 다 말려들었다. 다정한 위로를 못 이겨서 그렇지 슬픈 게 아니었다. 나는 애처럼 꺽꺽 울면서 집 주소를 얘기했다. 화는커녕 작은 신경질조차 낼 수 없었다. 금방 간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긴 다음에야 떠올랐다. 도망칠까 봐 무서워서 아무도 집에 초대한 적 없었다는 것 말이다.

 

 

 

   쏜살같이 달려온 김태형 손엔 우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마찬가지,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사복으로 갈아입다가 전화 받고 뛰쳐나온 건지 단추 하나 풀린 와이셔츠 말고는 위에 걸친 게 없었다. 교복 바지 밑단은 젖어서 색이 변했다. 나는 그걸 보고도 비웃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아니면 나랑 있지도 않을 거지?

 

   아니. 이제야, 아니. 태형의 집에는 온통 우리의 이유가 넘친다. 내가 너에게서 훔칠 것과 네가 내게서 훔쳐갈 것. 탐나고 탐을 내고, 근데 이곳에는 없다. 으리으리한 호랑이굴에만 살았을 김태형은 좁고 눅눅한 내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섰다.

 

   걔는 우리 집에 1초도 시선을 안 줬다. 젖은 나 하나만 쳐다봤지.

 

   좋은 것 투성이인 굴에서 김태형은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그 전부를 노리고 들어간 건데. 따지고 보면 김태형을 잘못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괴롭히지 않았던 건 가을이어서가 아니라 걔가 가진 게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해서 첫인상에 내 손에서 흰 봉투를 뺏겠다고 하는 걔를 죽어라 노려봤고. 근데 오늘은, 내가 부른단 말에 외투조차 못 입고 나온 그 애 빈손이 왜 그렇게 기뻤는지. 왜 울었는지 안 묻느냐는 질문에 김태형은 우는 날이 원래 생일이라고 대답했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태어난 날이 생일이니까 맞네. 다 생일이라서 그렇다. 김태형 앞에서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던 것도, 걔가 조금 달라 보였던 것도. 빈손으로 다가왔을 때 더는 기겁하지 않았던 것도. 되려 양팔을 벌렸던 것도 전부. ‘I want to you.’에 관한 내 대답은 말하지 않고도 들려줄 수 있었다.

 

   그날 본 김태형의 새끼손톱은 분홍색이었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골랐던 색. Happy Birthday는 더욱 나중의 일이다. 나보다 훨씬 심한 도벽을 찾았다. 가을 감기에 한참 앓고 다 나을 때가 되어서야 태형의 10월 생일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너는 훔치는 짓에 안달이 난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나 하나가 그렇게 탐이 나서 ache도 재채기로 읽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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