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퓨리파이
나한텐 그러니까…. 아니다. 평범하게 얘기하면,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김태형. 키는 178cm정도. 나보다는 5cm정도 더 크다. 그런데 어깨가 넓어서 나보다 훨씬 커 보인다. 눈은 얼굴 반만하다. 걔가 가끔 나를 쳐다보면, 눈 밑에 흰자가 보이는... 그래, 삼백안. 삼백안이라서 좀 무섭다. 운동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몸에 잡힐 근육은 다 잡혔고 군살은 없어서 교복을 입어도 태가 난다. 속눈썹은 눈을 감으면 애교살에 얹히는 게 보일 정도로 길다. 위 속눈썹은 저렇게 길 수도 있는데, 아래 속눈썹은 어떻게 저렇게 길지. 요약하면 잘생겼다. 좀 얼굴이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걔는 좀 그려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하느님이 미술에 취미를 들였나 싶을 정도다.
전학생이 왔는데 잘생겼으면 잘생겼다고 하면 될 일이지 무슨 속눈썹까지 따지냐고 묻는다면 그게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왜 전학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느냐면, 전학생이... 그러니까, 전학생이 계속... 쳐다본다. 내가 자의식 과잉인 게 아니다.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좀 노려보는 것 같다. 걔는 나만 쳐다보면 더 눈밑에 흰자가 넓어진다. 진짜 개무섭다.
김태형이 전학 온 지 ... 걔가 3월 중순에 전학을 왔고 지금이 8월이니까 5개월은 더 되었다. 이만하면 같은 반이니까 대화를 해볼 만도 한데, 내가 그렇게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익숙한 친구들과 돌아다니다보니 걔랑은 말을 나눠본 적이 잘 없었다. 이상한 건 걔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 나처럼 아는 애들과만 노는 것도 아니었는데. 진짜 가끔 뜬금없이 오늘 날씨 진짜 좋아. 이러고 날 노려보고 그런다. 대체 하늘이 맑은데 왜 날 쳐다보는거야? 거기다 왜 노려봐? 진짜 이해가 안 갈 일이다.
김태형은 워낙 잘생긴데다 성격도 밝고 친화력도 좋아서 걔 주변에는 사람이 모였다. 내 친구들도 걔가 그렇게 착하고 사람 좋다며 같이 놀자고 할 정도였으니 진짜 착하고 좋은 애긴 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학교 내 ‘인싸’가 되어서는 김태형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걔랑 나랑은 정말 이름만 알았다. 내 친구들과 김태형이 놀러나가도 나는 그냥 내 입시 준비를 하거나 엎어져서 잠을 잤다. 애들한테 걔 눈빛이 약간 이상하다, 노려보는 것 같다 그러면 애들은 자꾸 넌 눈치를 개밥에 말아줬냐고 물었다. 개 안 키운다고 하니까 말을 말잔다. 눈치 진짜 말아준 새끼들은 걔네들이다.
2019. 8. 1 점심시간.
밥 먹고 일찍 들어왔다. 너무 졸려서 이만 닦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아 엎드렸다. 김태형은 바로 내 옆자리다. 짝꿍 자리는 아니고, 분단이 하나 나뉘어져 있는 옆자리다. 졸려서 엎드렸다. 어제 밤에도 잠 안자고 괜히 웹서핑을 하거나 무협 소설 따위를 보다가 새벽 4시에 자서 아침 4교시 하는데도 버티는데 죽는 줄 알았다. 이제 수능 비문학 지문 읽듯이 수업도 중요한 부분만 귀를 쫑긋 세웠다가 필요 없는 부분에는 졸고 하는 식이다. 이거 내 일기인데 왜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 있지? 하여간 졸려서 진짜 눈 감고 잤다가 생각보다 얼마 못 자고 눈을 떴는데,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걔가 눈앞에서 커다란 눈을 뜨고 날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딱 분단 나눈 거리만큼만 떨어져 있을 뿐 정말 날 쳐다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뭔데? 뭐야?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걔는 날 쳐다보지 않은 것처럼 눈을 그냥 감았다. 그냥 졸려서 엎드려 있었고, 우연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처럼. 아니 근데 그게 맞긴 하겠지. 맘에 안드나? 때리려고 그러나? 원래 저렇게 생긴 애들이 사실은 일진이었다거나 그런 전개가 되는 게 보통이다.
손도 진짜 커서 내 두 배쯤은 될 거다. 저번에는 농구하는데 공을 잡은 내 손이 엄청 작다고 그랬다. 사실 그렇게 보면 걔 인성 좀 나쁘다. 자기는 손 크고 길게 쭉쭉 뻗었다고 내 손 무시하고 그랬다. 저 손으로 맞으면 진짜 아플 것 같았다. 그런 생각하고 있는데 걔가 갑자기 그 커다란 눈을 확 뜨더니 날 노려보는 거다. 난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도망갔다. 근데 애들이 나한테 오더니 김태형이 왜 저렇게 울상이냐는 거다. 교실에 둘 밖에 없었으니 내가 김태형 괴롭혔냐고. 김태형이 나를 패면 팼지 내가 김태형 팼겠냐고 하니까 애들이 갑자기 혀를 찼다. 왜 자꾸 날 한심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2019. 8. 3
김태형이 갑자기 엎드려있다가 나한테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다. 뭐라고 했냐면 ... 너 바디워시 바꿨냐고. 바디워시 바꾼 적은 없어서 아니라고 그랬더니 걔가 또 눈을 치켜떴다. 걔눈 밑에 흰자 면적이 넓어지면 나는 또 쫀다. 아니 그.. 바꿀까? 하고 물으니까 걔는 대답도 안했다. 그러고보니 샴푸를 바꿨는데 그걸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바디워시는 늘 레몬냄새 나는 거, 그것만 쓰니까 절대 안 바꾼다. 내가 쓰는 바디워시 추천해줄까 하니까 김태형 또 고개를 저었다. 싫으면 싫은 거지 그럼 왜 물어보는 걸까?
2019. 8. 5
주말 지나고 왔더니 걔한테서 레몬 냄새 난다. 내가 쓰는 거 알려준 건 아니니까 레몬에이드라도 먹었나 싶었는데 김태형한테 말 거는 건 무서우니까 말았다. 걔가 또 나 쳐다보고 있다. 내가 흘끔 쳐다볼 때마다 고개 돌린다. 왜 저러는 거야 진짜. 갑자기 재성이가 나보고 넌 눈치도 없냐고 그런다. 요즘 자꾸 얼굴만 보면 저 눈치 없는 새끼 하는 욕을 하는데 난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놈의 눈치는 왜 갑자기 등장해서 나를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다. 쟤가 바디워시 바꿀 때가 돼서 그냥 나한테 어제 그렇게 물어봤나 하고 재성이한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줬더니 박재성 도망간다. 바디워시 바꿔야겠다. 나 레몬 냄새 좋아하는데.
2019. 8.6 김태형은 오늘도 이상하다. 진짜.
갑자기 학교에서 방과후에 뒷산을 등산한다고 그랬다. 이 미친 날씨에 등산이라니, 선생님들도 단체로 미친 게 틀림없다. 고3을 햇볕에 굽는다니. 고등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진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등이 타는 것 같은데. 나는 운동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춤 추는 건 좋아하는데 그거랑 운동은 별개다. 아니 원래 등산하면 다들 그런다. 친한 친구들끼리 뭉쳐서 산 오르다가 누구는 빨리 가고, 누구는 느리게 가고 그러는데 힘들기도 하고, 너무 덥기도 해서 나는 지들끼리 신나게 뛰어올라가는 애들을 두고 좀 뒤로 빠져서 가고 있었다. 주변에 애들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뭐, 내가 꼭 필요하면 멈춰서 나를 부르거나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있었더니 혼자 남았다. 와, 이렇게 더운데 서로 뛰고 웃고 떠들고 그게 말이 되나. 아니 근데 내가 혼자 남은 게 아니었다.
나는 혼자 남은 줄 알고 천천히 걸으면서 풀냄새도 맡고, 숨도 좀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지민아! 하고 누가 부르는 거였다. 맨날 애들이랑 떠드니까 걔 목소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김태형이다. 여기 꽃 피었다고, 이렇게 햇살이 강한데 꽃이 핀 게 너무 신기하다고 무슨 10년지기는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걔는 평생 인싸로 살아서 남한테 그렇게 말 거는 게 쉬운 모양이었다. 근데 하도 갑작스럽고 일관성이 없어야 말이지.
나는 좀 얼빠지게 대답한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서로 대화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말을 걸면 나처럼 얼빠지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걸. 거기다 그렇게 노려보는데. 태형이가 꽃이 다쳐, 예쁜 건 그냥 거기 두고 봐야 해. 하는데 애가 착하다 하더니 진짜 착한 모양인가 싶었다. 아니다, 지금도 쪼그려 앉아서 꽃 보고 있는데 눈 치켜뜨고 보는 게 역시 속은 아주 날 패려고 작정하고 있을 거다. 그 어느 때보다 날 강렬하게 노려봤다. 나는 걔 눈에 좀 쫄았다. 걔 옆으로 가서 나도 꽃을 좀 볼까 머뭇대다가 말았는데 걔가 날 보는 얼굴이 되게 흔들렸다. 아니 걔가 흔들린 것 같다. 막 걔가 흔들리더니, 와. 사람이 그렇게 흔들렸는데... 걔가 갑자기 나한테 달려오는 거다.
너 더위 먹었냐고 자꾸 뺨을 때렸다. 손이 큰데 드디어 날 때리는구나 했다. 아니 근데, 걔가 가방에 넣어 왔는지 생수통을 꺼내더니 내 얼굴에 확 쏟는 거다. 코에 물 들어가서 기침하니까 김태형이 허둥지둥 미안하다고 했다. 근데 어쨌든 지금 생각나는 건 걔 등이 엄청 넓었다. 일기장에나 쓰는 말이지만 걔가 갑자기 날 업었다. 김태형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내가 흔들리고 있었던 거다. 걘 키도 크고, 일단 힘이 엄청 셌다. 은근 비실이처럼 구는 거 내가 다 보고 있었는데 역시 아니었다. 걘 선생님이랑 애들 따라 산을 올라가야 하는지, 내려가야 하는지 엄청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이 산 아래로 뛰었다.
경사가 완만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걔 날 업고 거길 굴렀을 걸. 걔는 좀 감정기복이 심한 편인지 양호실에 날 눕혀 놓고서 엄청 울상인데 이미 산 타고 내려온 애들이 걜 보고 지민이 괜찮으니까 그렇게 울지 말라고 했다. 걘 자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한테 자꾸 부채질을 했다. 양호실 에어컨 고장나서 여긴 또 찜통 같은데. 더워서 헥헥거리느라 나도 정신 못 차리고 있어서 애들이 왜 걔를 그렇게 위로하는지 잘 몰랐다. 목마르다 뜨겁다 하면 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찬물 가져오고, 자꾸 수건에 찬물 적셔서 얹어주는데 애들이 걔 왜 좋아하는지는 알겠다 싶었다. 맨날 노려보더니 좀 미안했나보다. 걔 집 갈 때 보니까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뒤처진 나를 때렸냐고 선생님이 혼이라도 냈나.
2019. 8. 8
김혜령이 나보고 그만하면 됐지 않냐고 그랬다. 요즘 애들이 갑자기 나보고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는데 내가 고등학교 3학년 8월이 되면서 다른 세계로 들어온 걸까. 김태형이 나한테 말을 걸고, 애들은 이상해지는 8월.
2019. 8. 12
김태형은 내가 더위 먹고 고꾸라진 날부터 계속 나보고 안 덥냐고 묻는다. 나 쓰러지고 나서 교실 에어컨 좀 빵빵하게 틀어줘서 그나마 좀 나은데. 걔는 딱 봐도 시원한 교실 안에서 자꾸 나한테 10분 간격으로 덥지? 역시 덥지? 하고 묻다가 가끔씩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재성이한테 네가 무슨 아이스크림 좋아하냐고 물어봤다고 하는데 대체 왜 물어보지? 내가 더위로 쓰러진 게 걔한텐 그렇게 충격인가 보다. 그래도 사주니까 잘 받아먹었다. 진짜 좋아하는 거긴 하니까. 근데 그걸 다섯 개 쯤 받아먹는데 배가 싸르르 아픈거다. 끙끙거리니까 걔가 또 더위먹었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그랬다. 찬 거 많이 먹어서 그런가보다 하니 자기 때문이라면서 낑낑거렸다. 대체 왜 똥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데 눈은 저렇게 날 노려보고 있는거냔 말야. 사람 착하다 싶으면 또 아니니까 구별이 안 간다.
2019. 8. 13
점심시간
김태형이 매점에서 꽝꽝 얼린 얼음물을 사와서 큰 손으로 감싸 녹이고 있는데 진짜 더운가보다.
수업 시작 전
그걸 날 준다. 나 이제 그렇게 안 쓰러진다고 해도 한사코 마시라고 한다. 참 이상해서 페트병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성준이가 날 쳐다보고 한숨 쉰다. 저 놈은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 근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19년 8월 16일
고등학교 2학년 중에, 전정국이라고 내가 귀여워하는 동생이 하나 있다. 이게 키티 일기장 3권이니까 1권 쯤에 써뒀을 거다. 걔가 축구공에 맞아서 좋아하는 애 앞에서 코피 흘리고 쪽팔려서 학교 3일 안 온 얘기... 하여간. 원래 내가 걔 반에 자주 찾아갔었는데 고3 되고 나서는 3학년이 2학년 교실에 자꾸 찾아간다고 담임선생님한테 혼나서 자주 안 갔었다. 복도에서 정국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누가 부르는거다. 난 무슨 전쟁난 줄 알았다. 돌아보니까 김태형이었다. 세상 잃은 억울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건 노려보는 건 분명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대답이 없었다. 불렀으면 대답을 하지 왜 말없이 또 뛰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2019. 8. 17
정국이도 갑자기 날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눈 뭐냐 그러니까 대답이 없다. 3학년 7반 눈깔이 정국이한테 옮았다. 날 한심해하는 병이 옮았는데 원인균이 뭔지 모르겠다. 2학년 4반에는 정국이 밖에 모르는데, 2학년 여자애들이 지나가면서 날 보더니 수근거린다. 김태형 이름이 들리는데 김태형은 원래 엄청 잘생겼고 방송부 아나운서도 하고 있으니까 걔네들이 말꺼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19. 8. 19
걘 주말 지나고 오는 월요일에 날 유독 노려본다.
8. 20
걔는 저번에 내가 배탈난 이후로 아이스크림을 주진 않는데 사놓고 손에 꼭 쥐고 있다. 결국 안 먹고 버릴 거면서 왜 사는지 모를 일이다.
19년 8월 23일.
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건지. 근데 덥기까지 해서 애들 다 미쳐가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휴교를 하는 게 맞다고 할 정도였다. 근데 재수없게도 그날 우산이 망가져 버린 거다.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데 우산을 안 들고 온 미친놈들도 있어서 서로 옹기종기 쓰고 가는데 나는 방송부 일 남았다고 또 혼자 남았다. 아니 결론적으로는 김태형도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아니 계속 이런 일기 남길 때마다 내가 혼자 있었다는 게 공통점인가? 아니 그 말은 김태형이 내가 혼자 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 아냐. 그게 더 소름이다. 애들이 가면서 김태형이랑 재밌게 놀라고 그랬는데 나는 김태형이 어딨냐고 그랬다가 걔도 남은 걸 알았다. 김태형도 방송부인데 걔는 나같이 장비 만지는 일 하는 게 아니라 아나운서였다. 아마 걔가 아나운서인거 잠깐 써놓았을 걸.
서울 학교에 나는 사투리 쓴다고 장비 일로 밀렸는데 걔도 왜 경상도 사투리 쓰면서 아나운서를 하는가 모르겠다. 다시 말했지만 걔는 잘생겼고 얼굴로 모든 불합리를 다 박살내는 놈이었다. 그런게 어딨냐 싶었지만 걔는 진짜 길거리 캐스팅 명함을 등교 때마다 열 장씩은 받아오는 애였고 그거로 애들이랑 딱지치기 하고 놀았으니까 아나운서 하는 건 인정해 줘야 한다.
하여간 땀이 축축해져서 장비 만지다가 몸도 다 젖고 더워서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내 땀으로 장비가 망가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난 땀이 별로 없는 편인데. 헥헥거리며 옆으로 푹 쓰러지니까 또 누가 얼음물 가져오는 거다. 그것도 김태형이었다. 걘 이번 여름에 무슨 내가 더위로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내가 더워서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옆에 나타났다. 넌 뭐하느라 지금까지 남아있었느냐고 하니까 대본 외웠다고 그랬다.
걔가 남아서 대본 외우는 애였던가? 원래 걘 보이는 것보다 머리가 좋아서 금방금방 외웠던 것 같은데. 말이 좀 어눌한데 걘 발음이나 말하는 게 원래 독특해서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얼음물 고맙다고 받았는데 내심 그거 빨리 마시고 싶다고 손을 확 내밀었더니 걔 손을 확 잡아서 김태형이 물을 놓쳤다. 페트가 떨어졌다고 걔가 갑자기 엄청 미안해하면서 지민아 미안해 닦아줄까? 하고 허둥거리는데 무슨 페트병 안에 물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유난이었다. 손이 하도 크니까 500미리 페트병인데도 손으로 다 감싸고 있고. 요즘 점심시간에 걔가 맨날 손으로 녹인 얼음물 주는데 그때마다 손만 보일 정도로 손이 크다. 어찌됐든.
오늘 진짜 할 말 많다.
우산이 망가질 거면 갖고 온 보람도 없다. 내가 한숨 쉬고 있는데 걔는 갑자기 또 어디 없어졌다가 내 옆에서 나타났다. 대본 다 외웠냐고 그러니까 응? 하고 묻는 거다. 대본 외우고 있지 않았냐 그러니까 아, 어. 다 외웠어. 했다. 하도 열심히 대본 외우느라 애가 얼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걔는 꼭 내가 우산 망가진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기랑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고 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는 그때 아니, 하고 대답했다가 우산 펴보고 망가진 줄 알았다. 오늘 아침엔 완전 멀쩡했으니까 들고 온 건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걔는 싱글벙글 웃는데 웃으니까 밑에 흰자가 애교살로 가려져서 좀 귀여워보였다. 애들은 쟤가 웃는 것만 봐서 무서운 줄 모르나보다 싶었다.
걔는 자꾸 나한테 우산을 씌워줬다. 오늘 비와서 추운 날이 아니라 비와서 더 훅훅 찌고 숨쉬기 답답한 날인데 왜 자발적으로 젖으려 드는 걸까. 자기 몸에 땀 난다고 비로 씻을 일이 아니었는데. 걔한테 자꾸 우산 미니까 자꾸 고개 젓는거다. 왜 우산 쥔 걔 손을 잡고 미니까 그때마다 속눈썹 긴 눈을 끔뻑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번 툭 밀면 한번 깜빡거렸다.
걔는 내 집 방향이 어딘지도 알았다. 나는 김태형 집 방향 몰랐지만 나랑 같은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니까 걔랑 집이 비슷한 곳에 있나보다 했다. 걔는 한참 걸어가다가 갑자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서 돌아보는데, 걔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거다. 우산 쥔 손만 그런가 했는데, 내 어깨 쥔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더우면 더운데, 걔는 이런 날에 비 맞으면 추워하는 편인가 해서 그 우산을 잡고 왜 그러냐고 걔 쪽으로 미니까 걔는 고개를 막 저었다. 완전 나한테 우산을 밀어줘서 머리카락도 푹 젖어있었다. 김태형 진짜 이상한 애였다. 비 맞는 걸 좋아하냐고. 내가 그렇게 물으니까 걔는 자긴 비는 싫다고 그랬다. 걔는 원래 말이 앞뒤가 안맞는 애긴 했지만 진짜 이해가 안 갔다.
뭐야 너, 하니까 걔는 한참 끙끙대다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지민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하는 거다. 김태형 그때 얼굴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걔가 뭐라는 건지는 사실 잘 못 알아들었다. 진짜 개미 기어가는 소리였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빗소리가 엄청 컸다. 걔 목소리 좀 큰 편인데 그게 묻힐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물어봐서 그때 뭐라 했는지 말해줬다.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니까 걘 거의 울상이었다. 눈이 엄청 축축해졌는데, 왜 우산을 써도 비가 다 안 막아지는 건지 걔나 나나 머리카락만 빼고 거의 다 젖어있었다. 그래서 난 걔가 비가 얼굴에 튄 줄만 알았다.
내가 앞으로 가는데 걔가 안 따라와서 돌아보고 왜 안 따라오냐고 그러니까 걔는 박지민! 하고 이름 크게 불렀다. 그건 똑바로 들었다. 거의 소리 질렀으니까. 걔 진짜 웃겼다. 아니... 나 그때 웃을 생각 없었고 웃기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겼다. 좋아해!!! 바보 멍청아! 나도 너 빡찌라고 부르고 싶고! 별명 부르고 싶다! 몰라! 진짜 좋다! 내는 더는 그냥 못 있는다! 이러는데 난 걔가 나 좋아하는 줄 진짜 그때 알았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걔랑 얘기한 적도 얼마 없는데. 근데 걔는 속 터진다는 얼굴 하고서 갑자기 우산 던지는 거다. 비가 하도 와서 옆에 강처럼 물이 흐르는데 우산을 던지니 그 우산이 막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다가 흘러가려 하는데 걘 그런거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오늘 처음 안 게 걔가 나 좋아하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난 걔 입이 그렇게 큰지, 내 입술보다도 큰지는 처음 알았다. 비에 젖었는데 그렇게 뜨거울 수가 있는지도. 더워서 그런 건지, 원래 비오는 날에는 좀 춥고 입술도 축축하고 차가워야 하는데 그냥 불덩어리 같았다는 거다. 걔는 더워 죽겠다. 나는 더운거 싫다. 이 소리만 반복하는데 나도 걔가 끈적거려서 진짜 싫었다. 걔는 덥다는 게 싫다면서도 더 덥게 굴었다. 나는 김태형 가슴팍이 그렇게 뜨거운지도, 우리 학교 교복이 그렇게 얇은지도, 살끼리 닿으면 심장 뛰는게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줄도 오늘 처음 알았다. 이거 그만 써야겠다. 이제 김태형은 멀리서 그냥 나를 지켜보질 않는다. 내가 뭐 하고 있으면 이상한 거 하고 있을까봐 무섭다면서 자꾸 쫓아온다. 이 일기도 들키면 큰일 날 것 같다. 책상 밑에 숨겨놔야지.
19년 8월 31일.
하필이면 토익 시험이었을 게 뭐람. 애들이 책상 속까지 치우다가 이거 발견했다. 애들이 낄낄거리면서 박지민 눈치 엄마 뱃속에 두고 태어났다고 놀린다. 김태형도 이거 봤다. 김태형이 이거 보고 엄청 서운한 얼굴 한다. 모르겠다. 김태형이 날 좋아한다고 말한 건 비오는 날이 처음이었는데 왜 나보고만 그러는지. 김태형이 이거 가지겠다는 걸 애써 뺏었다. 진짜 이게 마지막이다.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