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김탁구
“태형아, 우리 오....”
“..............”
언제부터였더라. 멀어진 것이.
“너 김태형이랑 싸웠냐?”
“......그러게. 나 싸웠나?”
“뭔 소리래.”
나도 무슨 소린지 알았으면 좋겠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스쳐 지나가버리는 태형이의 뒷모습에 결국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함께 서점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먹으러 가고, 그리고 그 보건실에서의 짧은 시간이 마치 먼 추억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시간들도 다 망상이었을까. 실제로는 없었던 일인데 너무 간절해서 있었던 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언성을 높여 싸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혹 큰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서 최근에 있었던 일을 곱씹고 곱씹어 봤는데도 기억에 남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갑자기 태형이 왜 나를 피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요즘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우리 사이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고 이것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그 기로에 서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는 터라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뭘 하면 안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날의 가벼운 뽀뽀와 그 후에 사라진 거리감만으로 태형이와 나 사이를 애인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늘 내가 먼저 그 애에게 다가가곤 했는데 단 한 번도 먼저 다가와준 적 없는 태형이를 보면서 나는 우리가 친구는 맞는 건지도 의심해야 했다.
조금 더 노력하다 보면 우리를 정의내릴 수 있겠지, 막연히 생각했고 그 애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정말 갑자기 나를 피하고 멀어지는 태형이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멀어졌느냐고 물어봐야 할지, 우리 사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봐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너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다가서는 나를 거절할 수 없어서 얼떨결에 휩쓸렸던 거냐고 해야 할지, 겁이 나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 애 앞에서 늘 웃고 있었지만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뜨겁게 햇살이 내리쬐는 초여름의 어느 날부터, 김태형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태형이를 속절없이 놓치고 있었다.
***
“아니, 처박혀서 글이나 쓰랬더니 어디 가서 이제 오는 건데? 어?”
“..............”
지민은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소파에 다이빙하듯 털썩 쓰러져 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정국이 걱정을 담은 타박을 뱉어냈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계속 재생되는 것은 태형의 서늘한 눈빛, 그리고 경멸이 담긴 시선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저를 대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태형과의 사이에 뿌리 깊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그리고 그게 오해가 맞는지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태형이 저러는 이유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한 지민은 하염없이 기다리던 태형이 끝끝내 사라지고 만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형, 뭐야. 왜 그러는 건데. 그 남자랑 관련 있는 거지?”
“정국아.”
“어.”
“나 진짜 좀 억울해.”
“뭐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억울하다. 지민은 억울했다. 그때 그렇게 갑자기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태형이었고 그런 태형을 붙잡으려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어떻게든 이유를 알려 노력했던 것은 지민이었다. 그런데 태형은 단 한 번도 속시원히 얘길 해주지 않았고 마지막을 통보 했을 때도 그렇게 떠나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태형을 떠올리며 중학교 시절은 온통 눅눅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법 미화되긴 했지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가울 거고 그때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적대적인 태형을 보며 지민은 속상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해서, 또 물어볼 수도 없게 해서 말이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주면 되는데 말도 안 해주고 멋대로 사라져놓고 아직도 나를 보면 화를 내.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해?”
“근데, 형. 왜 그렇게 신경 써. 다시 잘해보게?”
“뭐? 무, 뭐, 먼 말도 안 되는!”
화들짝 놀란 지민이 정국을 보며 흥분했다. 정국은 지민의 앞에 가지고 온 서류를 툭 던지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수년 동안 박지민을 알아왔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잘 웃고, 잘 울고, 또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지만 지민은 보기완 다르게 외유내강이라 무엇에도 쉽게 흔들리진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쉽게 생각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 지민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일을 목전에 두고 김태형이란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흔들리고 있었다. 작업을 할 땐 그 무엇에도 흥미도, 관심도 주지 않던 박지민이 말이다.
“그럼 작업이나 해. 오해든 뭐든 그냥 냅둬. 오해하고 살게. 형 놓치면 지 손해지, 형 손해는 아니잖아.”
“..............”
지민의 대본이 나와야 캐스팅에 들어갈 수 있고 촬영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미 검증받은 작가라 시나리오만으로도 투자와 배급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지만 다음달까지 3부 이상의 대본이 나오지 않으면 스케줄이 꼬일 판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이 불안했다. 첫사랑에 대해 간혹 지나가는 말로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 감정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이야.
“다시 잘해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 사람 사정 들어서 뭐 하게? 어차피 상관없잖아. 지나간 인연이야. 붙잡으려 애쓰지 마. 형 원래 그런 성격도 아니잖아.”
“..............”
지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나간 인연인 건가. 상관없는 건가. 다시 잘해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을까. 답은 하나도 내지 못한 채 지민은 뜨겁고 눅눅했던 어느 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와, 이 땡볕에 윗몸 일으키기 실화냐? 아, 진짜 체육 미쳤나봐.”
“날씨가 미친 거지.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벌써부터 죽겠다니까.”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반팔 체육복을 입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정해진 교과 수업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강당도 없는 작은 학교였기에 체육 시간은 고스란히 극기 훈련처럼 변해갔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체력 평가에 반영할 거니까 지금 서 있는 대각선 사람들끼리 한 조로 한다. 자, 정렬해.”
대각선에 누가 있나, 고개를 들어서 보는데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애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앞줄부터 매트 위에 누워서 준비하고. 잡아주는 사람은 몇 개 하는지 정확히 세고. 개수 부풀렸다 걸리면 둘 다 점수 안 줄 거니까 그렇게들 알아.”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하필, 너야, 또. 풀리지 않는 의문과 풀지 못한 관계의 어정쩡함이 나를 굳어버리게 만들었고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상관이 없는지 태형이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앞줄이던 태형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매트에 누웠다.
주춤주춤 다가가 태형이 발등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우리는 그때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 서로에게 닿아있어 본 적도 없었고 가깝게 바라본 적도 없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태형이는 단 한 번도 내 쪽은 바라보지 않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 애의 다짐 같아서 왠지 모르게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태형이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고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를 해서라도 말이다.
“꽉 잡아줄게. 걱정 말구 힘내.”
“...............”
대답 없이 다물린 입매가 매서워 보여서 무슨 말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필사적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점점 멀어지는 태형이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우리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은,
‘우리, 도대체 뭐야?’
도저히 건넬 수 없는, 무서운 말이었다.
“있잖아, 태형아. 우리 오늘 서점 안 갈래? 나 사야할 문제집 있는데 같이 골라주면 안 돼?”
“..............”
“어, 그러니까....내가 떡볶이 쏠게. 순대도 먹을래?”
“..............”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는 태형이를 보면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방과 후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꼭 사과하고 전처럼, 우리가 서로 마주 보면서 웃었던 그때처럼 되돌려놓고 싶었다.
“자, 시작!”
체육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일제히 윗몸 일으키기가 시작됐다. 온몸에 힘을 줘 태형이의 다리를 단단히 붙들고 몸이 흔들리지 않게 애를 썼다. 태형이가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하나, 내 구호가 시작됐고 우리는 서로가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이 마주보게 되었다. 서늘하게 치켜뜬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점점 멀어져간다.
“..............”
“..............”
두근두근. 심장이 눈치도 없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들리진 않을까. 느끼진 않을까. 가슴과 맞닿은 태형이의 다리가 빨라진 내 심장을 알아채진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처음,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오르던 태형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빨려 들 듯 마음에 담아버렸다. 친해지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홀로 걸어가는 태형이의 뒤에서 마음을 친구를 통해 들려주기도 했고 아픈 태형이를 파고들어 입도 맞췄었다. 그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 믿었는데, 우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두울.”
“...............”
다시금 가까워진 우리를 나는 어쩌지도 못한 채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땀냄새와 태형이의 체취, 그리고 뜨거운 햇빛, 톡, 하고 팔뚝으로 떨어진 땀방울이 마음을 온통 적셔버리고 말았다. 결국 눈을 뜬 내 앞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져버린 네가 있었다. 보건실의 그날처럼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을 어쩌지도 못한 채로 있는 동안 태형인 훌쩍 멀어져갔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세엣....”
“...............”
태형이와 닿아 있는 모든 곳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고 나는 이 뜨거움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지금 태형이의 앞에서 울어버리면 이 애가 영영 멀어져버릴 것만 같아서.
“....네엣.”
“...............”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왜 틀어진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맞았던 적이 없었던 걸까. 우리의 마음이 이어졌었다는 건 전부 다 내 착각이었을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우리 사이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땀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오래도록 흩어졌다.
***
“후우.....”
한 번 흐트러진 집중은 다시 되돌리기가 힘들었다. 태형은 의자에 몸을 묻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떠오르는 말이 태형을 계속 괴롭히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떠올려 봐도 그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왜 그 날, 안 나왔어?’
그 날이, 대체 뭘까. 기억을 되짚어 봐도 지민이 말한 그 날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왜 나오지 않았냐는 말은 태형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민의 말처럼 멀어진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지민이었다. 그때의 대답, 친구를 향한 그 대답이 지민에게 다가가던 태형을 멈춰 세웠고 태형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용당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을 놓지 못한 스스로가 비참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전학의 기회가 왔고 태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지민과 멀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 응했을 것이다. 전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말이다.
고집을 부렸다면 전학은 가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가게 됐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통학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민은 전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랐다. 어차피 깊게 친했던 친구도 없었고 여름 방학도 시작하기 전이라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날의 그 대화를 듣지 못했더라면, 지민이 제 친구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전학은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너 그 자식 좋다는 티 좀 그만 내. 소문 돌더라니까. 너랑 그 자식 게이라고. 성격 마음에 든다고 친해지고 싶다 그래서 물꼬까지 터줬더니만 연애라도 하려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 그냥 걔 공부 되게 잘하니까 도움 될까 싶어서 그런 거지. 성격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잘해주는 건 그냥 그 정도 이유야. 나한테 도움 안 되면 내가 왜 그런 애한테 잘해주겠냐?’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소문 이상하게 나면 골치 아파져.’
‘어....’
차라리 몰랐더라면. 못 들었더라면. 그러면 그런 채로 상처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학교를 일찍 가서, 그 대화를 들어버려서, 못 들은 척도 할 수 없고,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태형은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비참했다. 별 의미 없이 던졌던 말 한 마디로 지민을 좋아하게 되고, 그렇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지민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땐 그것이 가장 힘들었고 또한 가장 고통스러웠다.
언젠가는 잊고 지냈고, 한 번씩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져서 견딜 수 없을 때도 많았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이 사람은 무엇을 바라기에 이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끔은 관계를 망치기도 했다. 어릴 적 단 한 번 받았던 상처가 깊이 각인이 됐던 것은 태형이 누구에게도 먼저 마음을 건네거나 누군가와 깊이 인연을 맺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기가 어떻든 지민은 태형이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배신을 당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처음이 붙는 유일한 사람, 그것이 지민이었다.
망쳐버린 처음. 망가진 마음. 이 모든 것이 더욱 더 태형을 괴롭히는 이유는 다시 만났을 때, 그 호텔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지민을 봤을 때, 이 마음이 또 다시 떨렸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던 남자와 테이블 위에 놓인 호텔 키가 김태형을 또 한 번 가슴을 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잊고 살았던 것은 지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이었고 여러 번 망쳐버린 관계 속에서 진짜를 찾는 능력을 키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도 됐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에 가슴이 떨린 것이, 태형은 미치도록 비참했다.
그 날, 그 호텔에서 만나던 여자에게 물세례를 받았던 것은 태형이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태형은 여자를 사랑하려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고 마음을 쏟으려 애썼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순간을 봤을 때도 태형은 최선을 다해 화내려 했다. 그리고 여자는 그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는 것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도 억지로 화내려 했다는 것을.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던 말이 깊이 박혔던 것은 태형이 누구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형은 지민이게 느꼈던 그 떨림과 설렘 같은 마음은 두 번 다시 받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관심이 간 적은 있었지만 가슴 떨리게 저릿한 감정은 그때가 유일했었다. 지민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어째서 그때도 박지민이고, 지금 이제 와서 또 다시 박지민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날’을 알면, 이 어지러운 마음도 깨끗이 정리가 될까. 태형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그러나 지민의 기다림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대화를 없앨 수는 없다. 그때의 대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마음은 점점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했다.
“얘기 좀 해.”
“...............”
찾아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이렇게 와 있다. 지민은 늘 이렇게 한 걸음씩 빨랐다. 그리고 그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 달리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더는 다가갈 수 없도록 가슴에 상처를 잔뜩 내놓고서 말이다.
“얘기 좀 하자구.”
“.....들어 와. 동네방네 떠들 거 아니면.”
“어? 어어.”
태형은 지민을 두고 먼저 앞장섰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지민을 보는 순간 다시금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누군가가 있는 지민을 두고 이제 와서 심장이 뛰어대는 것이 미치도록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지만 자의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오하고 온 듯 지민의 두 눈이 단호했고 태형도 오늘의 이 대화를 끝으로 지민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오고갈 대화가 밖에서 할 법한 것들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새까만 어둠에 덮인 거실이 드러났다. 불을 켜고 신발을 벗어 안으로 들어서자 주춤거리며 지민이 따라 들어왔다. 거실로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태형을 닮아 깔끔하고 서늘한 분위기였다. 지민은 두리번거리며 태형의 집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집에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저 답답한 마음에 담판을 지을 생각에 무작정 찾아온 거였는데. 집까지 들어오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앉아. 마실 건 필요 없을 거고.”
“어...”
지민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태형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낯선 곳, 낯선 모습. 태형은 중학생 때와는 아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호텔에서 만나게 됐을 때도, 집 앞으로 찾아가 소리를 쳤을 때도, 태형은 지민이 알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땐 덥수룩한 머리에 두툼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한눈에도 범생이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몸에 꼭 맞는 슈트, 그리고 그때보다 한층 단단해진 모습. 두툼한 안경 너머로 보이던 얼굴도 그렇게나 빛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짙게 풍기는 남자의 냄새와 말끔한 모습은 지민이 낯설게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일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는 것은.
“할 얘기가 뭐야.”
“................”
“뭐냐고.”
“................”
그때는 하지 못했던, 차마 물을 수가 없었던, 어려서 용기가 없었고, 두려워서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그 질문을 10년이 넘어 이제야 묻는다.
“그때 우리,”
“...............”
“뭐였어?”
“...............”
먼저 다가섰던 박지민은 김태형이 나란히 걷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말도, 그 어떤 표현도 없이 나눴던 첫 입맞춤을 받아주었던 것처럼, 그때의 박지민은 김태형이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 뭐냐고. 우리, 뭐였느냐고.
“나는 우리가 같은 마음인 줄 알았어. 그래서 갑자기 네가 날 피했을 때 상처 받았었어. 내가 뭘 잘못했나,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모르겠어서, 근데 그렇게 멀어지는 너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막으려고 했는데 그때도 넌 날 모른 척 했어.”
“...............”
“호텔에서 다시 만났을 때, 속상했던 마음 말고 서운했던 마음 말고, 난 반가웠어. 10년이 지나도 한 번에 널 알아봤어. 그때의 네가 아프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넌.....넌 나한테 첫사랑이었고, 처음이었고, 난....”
“...............”
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민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태형의 앞에서 울고 싶진 않았다. 원망을 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네가 반가워서, 그때 왜 그랬는지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인데, 대체....대체 네가 왜 이렇게 나를 대하는 건데?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나만 원망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
“나한테 도움 안 되면 내가 왜 그런 애한테 잘해주겠어.”
“뭐?”
“잘해주는 건 그냥 그 정도 이유야.”
“.....무슨....”
“도움 될까 싶어서 그런 거지.”
“..............”
태형이 늘어놓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지민이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태형은 피식 웃었다.
“너는 기억도 못하는 말들을 가지고 상처 받았던 내가 좀 우습다.”
“..............”
“눈이 일찍 떠져서 학교에 좀 빨리 갔었는데 네가 친구랑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게 보였어. 창틀에서 자전거 대는 널 계속 보고 있었거든. 내 얘길 하더라고, 그 친구한테. 그때 네가 날 두고 한 말들이었는데, 여전히 기억 안 나는 얼굴이네.”
“.....설....마....”
오래된 기억 하나가 깊이 묻혀 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 기억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봄의 끝자락에,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 태형과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투르게 둘러댔던 몇 마디가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그 즈음부터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던 태형이 떠올랐고 싸늘하게 식었던 눈빛도 떠올랐다. 잘못한 일이 있었나, 막연히 생각만 했었을 뿐인데 지민은 정말로 김태형을 상처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건, 태형아, 그건 그러니까.”
“쪽팔려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더라고.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면서 물어야 할지 감도 안 왔어. 내가 어려서. 그런 일은 경험해 본 적도, 책에도 없는 일이라서. 못하겠더라. 그렇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거든.”
“...............”
“사과 같은 건 됐어. 그때도 말했지만 필요 없고 상관없어. 이제 그만 일어나지? 호텔에서 너 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릴 애인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돌아가.”
“...............”
지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은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배웅할 사인 아니니까 알아서 가라. 이제 마주치지 말자, 좀.”
“...............”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태형을 차마 돌아보지 못한 채 지민은 집을 빠져나왔다. 그 눅눅하고 축축했던 여름은 결국 자업자득이었던 것이다.
***
「할 얘기가 있어. 우리 전에 갔던 서점 앞에서 기다릴게.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꼭 와줘.」
차마 얼굴을 보고 말을 걸 용기가 없어서 문자를 남겼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유도 모른 채로 그 애를 영영 잃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는 협박 아닌 협박도 해놓았으니 늦더라도 와주겠지 싶어서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점으로 향했다. 여름 방학을 하루 앞둔 오늘, 하늘은 흐렸고 날은 더웠다.
분명 얼마 전에는 이 서점에서 같이 책도 고르고 함께 웃었었는데. 씁쓸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서점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흐린 날씨 덕에 따가운 햇볕은 없었지만 눅눅한 습기가 숨이 막힐 것처럼 더위를 몰고 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더워서 금방 갈증이 났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분명 태형이 올 테니까.
“.....진짜 덥다.”
해도 없는데 이렇게 더울 일인가. 다리도 슬슬 아파오는 것 같다. 목도 마르고 땀은 흐르고 그래도 움직일 수 없는 건 잠깐 움직인 사이에 그 애가 왔다가 내가 없는 걸 보고 가버릴까봐. 그렇게 어이없이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꼭 용기 내어 이유를 묻고 들어야겠다. 혹여 그 애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내 마음과 같았던 적 없었다는 말이 나온다면....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형이를 잃는다면 내내 후회할 것 같다. 상처 받더라도, 나는 알아야겠다. 그래서 기다렸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하염없이, 그 애를.
투둑, 투둑,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이내 쏟아져 내렸다. 살짝 물기만 머금었던 머리와 옷이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고 나는 그러는 동안에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과 우산 하나 없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그 긴긴 시간 동안 나는 오지 않는 그 애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올 거야, 오고 있을 거야. 나를 이렇게까지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믿고, 다시 믿고, 또 믿으면서 나는 그렇게 몇 시간을 태형이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학교가 끝나면서부터 서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렇게. 그러나 끝내 너는 오지 않았고 수많은 땀을 흘리고 수많은 물줄기를 맞아낸 내 몸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집을 찾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진 내가 눈을 뜬 것은 방학이 모두 끝난 다음 날 저녁이었고 개학을 하고나서야 그 애가 전학을 가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도 없는 열병에 나를 파묻은 채 끝나버렸고 기어이 나타나지 않은 그 애를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쓰며 추억을 고스란히 어딘가에 묻었다. 한 번만이라도 그 애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수도 없이 빌며 내 마지막 청소년기까지 그 애를 떠올렸고 미성년자의 신분을 떼어버림과 동시에 나도 서서히 그 애를 잊어갔다.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막연히 떠올리면서.
***
“스시 먹을래?”
“아니....”
“아씨, 그럼 굶어 죽을 거야?”
“그럴까봐, 그냥.”
“허어.”
며칠 째 제대로 먹지 않는 지민이 걱정 되어 이것저것 사왔는데도 불구하고 음식엔 눈길도 주지 않는 지민을 정국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노트북 앞에 얌전히 앉아서 열심히 대본을 써대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지만 먹지도 않고 정신없이 원고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영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 호텔에서 만났던 남자와 관계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남자를 건드려도 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자칫하면 대본에서 또 손을 놔버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 여기 김밥도 사왔는데. 김밥 먹자. 형이 좋아하는 참치로 사왔어, 내가.”
“생각 없어. 아, 2부 초고 나왔는데 한 번 훑어봐.”
“봐 뭐해. 어차피 잘 썼을 텐데.”
“너무 믿지 마. 나 되게 별로인 애야.”
“......뭔 소리래.”
“..............”
그 날, 태형의 집에서 그렇게 돌아온 날 지민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것은 여태껏 지민에겐 치부랄 수도 없는 아니, 기억이 거의 날아간 시덥지 않은 대화였다. 마음에도, 머리에도 담아둘 가치가 전혀 없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생각 없이 내뱉은 그런 말 말이다. 태형이 말해주기 전까진 그런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고 그 대화로 인해 그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의 대화는 말 그대로, 태형이나 저나 그런 소문에 휩싸이게 둘 수 없어서 허둥지둥 쏟아낸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다. 태형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게 진심일 리는 결코 없었다. 그저 친구의 관심을 돌려놓기 위해 뱉어냈던 별 의미 없는 그런 말이었는데, 그것이 태형의 귀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지민은 그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을 뿐이지만 그것이 태형에겐 마음을 다 접어버릴 만큼의 큰 상처였으니 말이다. 고작 그까짓 걸로 저를 못 믿은 거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지민 역시 태형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으니까. 그때는 모두가 어렸고, 서툴렀고, 경험이 부족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는 이야기도 그때는 꺼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때문에 지민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고,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정국아.”
“어.”
“나 호텔 옮겨줘.”
“갑자기 왜?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어?”
“그냥. 그런 건 아니고, 여긴 좀....”
“흠....알았어. 적당한 데 있는지 알아볼게.”
“고마워.”
대본 작업에 들어가면 일상생활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며 꼭 호텔을 고집하던 지민을 알기에 정국은 별다른 말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아마도 그 남자도 이유 중 하나겠거니, 생각하면서.
“아, 다른 부탁할 일은 없어?”
“어? 어....”
“있을 거 같은데.”
“어, 없는데?”
“마지막이야. 없어? 지금 안 하면 3개월 동안은 형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지?”
“.............”
지민은 잠시 고민했다. 대본 집필이 시작됐으니 본격적인 캐스팅이 진행되면 촬영까지 진행되는 동안 꼬박 3개월은 대외활동은 거의 전무할 것이다. 기본적인 인간관계부터 사소한 생활까지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드라마 작가의 삶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민이 무언가 결심한 듯 끄적이기 시작했다.
“저, 혹시 김태형씨 되십니까?”
“..............”
박지민에 이어 박지민의 애인까지 등장이라. 태형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지민이 다녀간 그 날, 오랜 악몽이 이어졌다. 자는 내내 그 찬란했던 봄 햇살을 받으며 함께 웃어야 했다. 깨어났을 땐 이제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태형은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지민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땐, 그저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픔이 너무 컸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사로 이루어진 전학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버린 것은 어쩌면 충동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전학을 가고서도 한참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고 지민의 번호도 지우지 않았었다.
정신을 좀 차린 뒤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를 바라보는 지민의 눈빛이 거짓이라기엔 그때 우리의 눈빛은 너무나도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진심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위안하려 했지만 그 입술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음은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이었다. 처음 스스로 잡은 손이었고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사람이었다. 지민의 모든 것이 다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살아가면서 그 날의 기억은 알게 모르게 태형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순수하게 다가오는 의도를 오해하고 곡해하기 일쑤였고 별 뜻 없는 말에 의미를 파헤치며 알아내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 망쳤던 인간관계에는 소중한 사람들도 많았고 결국 그때보다 나아질 것 없는 방어 기제만 강한 어른이 되고 만 것이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때를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일이었고 어렸고 우린 모두 서투르고 엉성했다. 그래서 그때의 박지민도 그랬던 게 아닐까,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만난 지민의 밝은 얼굴이 태형을 엇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지민의 곁에 있던 이 남자도 크게 한 몫을 했다.
“김태형씨 맞.”
“그렇습니다만.”
“아, 우리 초면은 아닌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호텔에서, 지민이 형과.”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아, 예, 뭐...”
되게 까칠하네, 생각하면서 정국은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 태형에게 내밀었다. 작은 편지봉투였다.
“지민이 형이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꼭 손에 들려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구요.”
“뭡니까, 이게.”
“아마도, 러브레터?”
“.....예....?”
정국의 말에 태형이 편지와 정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러브레터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붙여가며 왜 이 편지를 정국이 들고 왔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3개월 동안은 그 형이 꼼짝도 못할 거거든요, 호텔에 갇혀서. 다른 건 몰라도 사과는 꼭 해야겠다면서 전해 달라더군요. 얼굴 볼 용기는 없다고 하면서. 제가 3개월 동안은 지민이 형 심부름꾼이거든요. 담당자라.”
“...............”
“근데 그 형이 뭘 그렇게 크게 잘못할 형이 아닌데,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주눅 들어요? 김태형씨가 첫사랑이라던데 웬만하면 용서해주면 안 됩니까? 식음도 전폐하고 글을 쓴다고 생난리를.”
정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형은 정국에게서 편지를 낚아채 바로 뜯었다. 봉투에 들어 있던 편지지를 꺼내 펼친 태형이 잠시 내용을 읽더니 이내 정국에게 물었다.
“지금, 지민이 어딨습니까.”
“호텔에 처박혀서 글 쓰고 있죠, 당연히.”
“혹시 저번에 봤던 그 호텔입니까?”
“그렇, 죠? 글 쓰라고 제가 잡아준 곳이니까요.”
“몇 홉니까.”
다급하게 묻는 태형을 보며 정국이 입을 다물었다. 만나게 해, 말아. 선택의 기로에 선 정국이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 태형은 조금 더 초조해졌다.
“지민이 지금 몇 호에 있습니까.”
“설마 가서 지금 한 판 붙으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니까 당장 말해요!”
“...............”
정국은 호텔 측에 받아두었던 카드키를 태형에게 건네주었다. 설마 지금보다 멘탈이 더 갈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
정국이 얘는 잘 전달해 줬으려나.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혹시라도 태형과 함께 있을 때 전화를 걸까봐 지민은 몇 번이나 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사과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제 마음 편하자고 전하는 편지는 아니었다. 그저, 그때의 감정 그대로를 태형에게는 꼭 말해주고 싶었다. 상처 난 자리를 이제와 말끔하게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 감정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해서. 어쩌면 그마저도 태형에겐 그저 민폐가 아닐까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 순수했던 김태형을 박지민은 하나의 거짓 없이 좋아했다는 사실만큼은 전하고 싶었다. 두 번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편지라는 형태로 전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받지 않는다면....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고도 없이 정국이 들이닥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어서 별다를 건 없었지만 이렇게 돌아오기 전에 편지를 전해줬단 말이라도 먼저 좀 해주면 덧나나, 하는 마음이 들어 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서 노트북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사실은 김태형이 편지는 받지도 않더라, 는 말을 들을까봐 좀 겁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너느은, 어? 심부름을 갔으면 무슨 보고가 어? 있어야 될 거 아냐. 편지는 줬지? 안 받는다고 포기하고 막 그냥 온 거 아니지? 야, 형아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 못 주고 왔으면 냉큼 가서 얼른,”
“받았어.”
“받았.....!!”
“...............”
앉아 있던 지민이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정국이어야 맞는데, 정국이어야 하는 건데, 태형이 있었다. 여기에 있어서도 아니, 있을 수도 없는 김태형이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너 어디 있냐고 물으니까 키 주던데.”
“뭐? 미친....전정국 이거 완전 돌았나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던 지민이 아찔한 얼굴을 했다. 뭐가 뭔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애인, 아니더라?”
“어? 애인? 무슨....정국이?!”
“..............”
“걘, 아니, 정국인 내 담당, 비즈니스 파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호텔에서 룸 키 꺼내놓고 만나길래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
“뭐어?”
“그래서 온 건 아니고.....”
“..............”
이해되지 않는 일들에 애인으로 오해 받은 정국까지 겹쳐 지민은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편지를 받았다고 했으니 읽어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태형으로부터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 전정국 이 망할 놈이 먼저 연락이라도 줬더라면 좋았겠지만. 확실히 운명도, 하늘도, 지민의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지민은 혼이 날 준비를 다 마친 것 같은 얼굴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때의 실수가 태형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상처를 지울 수는 없을 테니 태형으로부터 듣게 될 그 어떤 말도 다 수용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지민은 태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나도. 나도 그랬다고.”
“..............”
“이 말 해주려고.”
“.............”
“그리고, 박지민.”
“......어?”
“나는 너랑 영원히 친구는 안 될 거 같은데.”
“.............”
“다른 걸로 알아가 보는 건, 싫어?”
“.............”
지민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오른 너 봤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까지, 내 학창시절 내내 나한테 넌 사랑이었어.]
***
“지민아, 나 핸드폰 좀 빌려줘.”
“가방에 있어. 꺼내 써.”
“땡큐.”
책상에 걸려 있는 지민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선규가 문자함을 열었다. 늘 보이던 화면과는 달리 문자함은 전송 실패한 문자가 있다는 알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규는 뭐야, 하며 재전송을 누르지 않은 채 화면을 나가 새 문자 작성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간단한 문자를 작성해 전송하고는 다시 폰을 지민의 가방에 넣어두었다.
「엄마, 이따 비 온다는데 우산 안 가져왔어요. 이거 친구 폰 빌려서 문자하는 거예요.」
전송되지 못한 문자가 결국 태형에게 닿지 않았다는 것을 지민은 1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