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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우울증, 자해 등 트리거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BGM : dosli - 고열

그 소년의 본질적인

우울에 대하여上 

길봄

   1. 장마

 

    습했다.

   진즉에 회색으로 변해 울먹거리던 하늘이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회색 하늘이 흘리는 연기 냄새 밴 눈물방울이 태형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무심하게 하늘을 올려다본 태형이 시큰거리는 어깨를 한번 돌리고는 좁은 골목을 오르기 시작했다.

   갈라진 아스팔트의 틈 사이로 퀴퀴한 냄새가 비집고 올라왔다. 반쯤 무너지고 시멘트 칠이 벗겨진 벽에는 떨어지다 만 유흥주점 전단지와 빌린 돈을 되찾아준다는 사무실의 번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시선의 구석에는 날파리가 들끓고 반쯤 피부가 벗겨진 쥐 시체가 있었다. 며칠째 아무도 치우지 않고 있는.

   피곤했다. 새벽 내내 술이 가득 든 무거운 유리잔과 안주를 나르고, 동이 틀 무렵에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신문을 배달했다. 지저분한 골목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잠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이미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런 데다 비까지 내리다니. 힘 빠진 다리가 후들거렸다. 빌어먹을 오르막. 아무리 속으로 욕을 짓씹어도 이 오르막 끝에 존재하는 집이 그의 앞으로 와줄 리는 만무했다. 마른 입술을 깨물며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빗줄기와 땀으로 까만 앞머리가 잔뜩 젖어 있었다. 스치듯 보았던 일기예보에서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태형이 커다란 손으로 젖은 앞머리를 털며 문을 열었다. 끼긱-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며 퀴퀴한 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이 동네의 모든 집에서 나는 냄새였다. 퀴퀴하고 습한, 가난의 냄새.

   현관에 젖은 운동화를 벗어둔 태형이 마찬가지로 반쯤 젖은 양말을 벗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딱히 방이 구분되어 있지 않을 만큼 작은 집안의 한가운데에는 이불이 펼쳐져 있었고, 이불 위에는 희고 마른 몸이 섹스의 흔적을 가득 품고 구겨져 있었다. 저렇게 자면 목에 담 올 텐데. 지민은 꼭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어깨에 비정상적으로 힘을 준 채 잠들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 작은 어깨는 늘 딱딱하게 뭉쳐 있었다.

   태형이 붉은 반점들이 가득 남은 나신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고는 옷장을 열어 눅눅한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며칠 동안 날이 흐려, 잘 빨아서 말린 옷인데도 불쾌한 냄새가 났다. 칠이 벗겨진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다. 전기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점퍼를 입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날씨가 되자마자 두 사람은 자연스레 보일러를 꺼두고 생활했다. 태형 자신은 몸에 열이 많아 괜찮았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지민은 샤워를 끝마칠 때마다 입술이 보라색으로 물들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태형은 지민이 씻는 동안에는 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보일러를 틀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화장실의 얇은 벽을 뚫고 지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태형은 가볍게 무시했다. 태형이 지민의 말을 무시할 때는 그때가 유일했다.

   욕실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 머리에 가득한 물기를 털어내며 나온 태형이 여전히 이불 속에서 구겨져 있는 지민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성큼, 성큼, 성큼. 고작해야 세 걸음 정도면 충분했다. 작은 집안에는 부엌과 거실의 경계가 없었다. 윙-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작은 냉장고를 열어본 태형이 텅 비어있는 내부에 다시 문을 닫고는 찬장에서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 그때쯤 태형의 뒤에서 싸구려 원단의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지민이 드러누운 채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라면을 끓이는 태형의 젖은 뒷머리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

   “응.”

   태형이 지민을 바라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냄비 안에서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작게 하품을 한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목과 어깨를 돌리며 여전히 붉은 반점이 가득한 나체인 상태로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히자 그제야 냄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태형이 걸음을 옮겨 보일러를 켰다.

   그 순간 발화점을 넘은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냄비 앞으로 간 태형이 라면 두 개가 들어가기엔 조금 작은 냄비에 착실하게 면을 네 등분으로 부수어 욱여넣었다. 면이 뜨거운 물에 모두 풀어졌을 때쯤 욕실 안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형이 그 목소리를 익숙하게 무시하며 스프를 풀고 기다란 나무젓가락으로 팔팔 끓어오르는 라면을 휘저었다. 면이 팔팔 끓는 물에 금세 풀어지자 태형은 냉장고에서 계란 하나를 꺼냈다. 차마 두 개는 넣지 못했다.

이불이 거실 한쪽으로 치워지고, 낮은 책상이 방 한가운데 놓이고, 계란을 푼 라면이 오래된 신문지 위에 올려 졌을 때,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보일러를 끈 지민이 안 그래도 튀어나와 있는 입술을 더욱 삐죽 내민 채로 말했다.

 

   “내가 보일러 틀지 말랬지.”

   “응.”

   “전기세 아끼자니까.”

   “으응.”

   태형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접시에 제 몫의 라면을 덜곤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지민 몫의 그릇은 태형의 그릇이 채워지기 전에 이미 채워져 있었다. 옷을 갖춰 입은 지민이 태형의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라면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삼킨 지민이 피곤해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은 손이 접시에 코를 박은 잘생긴 얼굴로 뻗어졌다. 태형은 움찔, 놀라면서도 얼굴을 물리지 않았다.

   “오늘도 고생했다, 태태.”

   “……우응.”

   “얼른 먹고 자.”

   태형이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을 씹어 삼켰다. 허기에 허겁지겁 식사하면서도 제 말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는 그의 모습에 지민이 눈매 끝을 휘며 웃었다. 강아지 같아. 지민의 웃음을 시선으로 덧그리던 태형이 다시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의 작은 손이 아직 물기 어린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져갔다.

   태형의 시선이 제게서 멀어져가는 뭉툭한 손끝을 덧그렸다가 가는 팔을 타고 올라가, 흰 목덜미에 난잡하게 남아있는 붉은 자국들에 머물렀다. 피곤함에 반쯤 내리감긴 태형의 눈꺼풀 아래로 풍성한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시 열심히 움직이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태형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태형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챈 지민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시선으로 묻는 지민에 우물거리던 태형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지민아.”

   “응.”

   “……아냐.”

   “뭐야.”

 

   싱겁게. 지민이 웃음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엷은 점이 있는 입술을 꾹 내리닫고 있던 태형도 다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면은 이미 한참 전에 잔뜩 퍼져 있었다.

 

 

 

   설거지는 지민의 몫이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태형을,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이불을 끌어와 눕혀준 지민이 겉옷을 걸쳤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태형이 졸음이 한가득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 와. 우산 챙겨.”

   “응. 고마워.”

   “잘 갔다 와.”

   “응. 이따 봐.”

   덤덤한 인사를 끝으로 끼익, 다시금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하루 중 두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끝났다. 지민은 동네의 편의점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저녁부터 자정까지는 식당에서 일했다. 그리고 태형은 근처의 술집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고,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다. 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태형이 귀가하고 지민이 잠에서 깨는 아침 시간이 유일했다. 태형은 고된 노동에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지민의 흰 나신을 떠올렸다. 울긋불긋한 섹스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는, 마르고 흰 몸.

   지민은 자정에 일이 끝나면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골라 섹스를 했다. 아침에 들어올 태형을 배려하여 집에서 관계를 맺는 날이면 항상 관계가 끝나자마자 그들을 집 밖으로 내모는 모양인지, 지민의 상대들을 태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유독 지민의 몸에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격렬했던 간밤의 시간들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태형은 그런 지민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아 꾹꾹 내리눌렀던 화를 참지 못했던 날을 기억했다. 태형이 없는 시간들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엄연히 이 집은 둘이 함께 사는 집이었고, 적나라한 섹스 흔적이 가득 찬 몸을 보는 것은 민망하고 불편한 일임이 맞았으니까. 이것은 태형이 지민의 애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공동 공간에서의 예의가 지켜지지 않음에 화가 났다기보다, 그저 지민이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태형은 더 화가 났던 것 같았다.

   태형의 성화에 지민은 순순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형은 바로 다음 날 자신이 내뱉은 말들을 후회했다.

   붉은 반점 대신 손목에서 붉은 피를 흘려대는 지민을 보며, 태형은 무엇이라고 했던가. 눈물을 흘렸나. 사과를 했나.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었다.

   박지민은 섹스를 하지 않으면 꼭 제 몸에 칼을 댔다. 흰 몸을 뒤덮은 붉은 반점과 가는 손목에 그어진 붉은 상처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태형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김태형과 박지민의 인연은 불행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채 여물지 않은 열네 살의 겨울, 방학 동안 쌓인 먼지의 냄새가 가득한 교실에서 처음 마주했다. 태형은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서늘함을 머금은 교실 안의 공기와, 품이 큰 교복 속에 파묻히듯 앉아 있던 왜소한 소년을 떠올려냈다.

 

 

   2. 겨울

 

   새 학기가 으레 그렇듯, 이름 순서대로 매겨진 번호를 따라 자리가 배치되어 태형과 지민의 자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김, 에서 박, 까지. 나, 다, 라, 마, 네 자음과 그보다 많은 모음을 지나 그들의 시선이 간간이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품이 큰 교복 안에 파묻힌 듯 앉아 있던 작은 지민은, 솔직히 말해 그다지 눈에 띄는 인상이 아니었다. 소년은 그저 낯선 환경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로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낯선 환경이 두려운 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무리에서 도태되면 고통받으리라는 사실을.

   마르고 작았지만 어릴 때부터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졌던 태형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가 자주 내뱉는 엉뚱한 말은, 그를 향하는 호기심을 호감으로 바꾸기에 아주 좋은 요소였다. 태형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새로운 아이들과 무리를 형성해갈 때, 지민은 태형의 무리보다는 조금 덜 소란스러운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둘은 그렇게, 전혀 다른 무리 속에서 서로의 존재만을 인식한 상태로 일 년을 보냈다. 해가 바뀌고 나서는 반이 갈라졌고, 헤어짐에 대해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다. 가끔 복도를 지나치다 마주쳤을 때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사이. 김태형과 박지민은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서로의 존재가 조금 더 선명해졌던 것은, 이제는 딱 맞는 크기의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약 칠백삼십팔일 전과 같이 먼지 쌓인 교실에서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을 때였다.

   학기 첫날에는 기대감인지, 불안감에서인지 꼭 눈이 일찍 떠지는 편이었다. 때문에 태형은 꽤 이른 시간에 아직은 얼어붙어 있는 공기를 가르고 일 년을 지냈던 교실이 아닌, 낯선 숫자의 표지판이 걸린 나무문을 밀고 들어갔다. 적막한 교실의 책상 위에는 작은 인영 하나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아직 날이 채 풀리지 않은 삼월 초반이었는데도, 그 애는 교실의 난방을 틀어놓지 않고 있었다. 코끝에 닿는 공기가 냉했다.

   태형은 한눈에 그 애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지민이었다. 아무리 데면데면한 사이였어도 일 년을 한 공간에서 지냈던 터라 뒷모습이 눈에 익어 있었다. 교실 안의 찬 공기를 가르고 들어간 태형이 부르르, 몸을 떨며 곧장 히터로 다가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삑, 작은 기계음이 적막의 수면을 잘게 두드렸다. 히터의 날개가 열리며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발갛게 언 손을 대고 녹이던 태형이 여전히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지민에게로 다가갔다. 지민은 태형이 교실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로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잠든 건가. 미동도 없는 지민을 보며 볼을 긁적이던 태형이 지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에 딱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민과 떨어져 앉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준 규격에 맞게 제작된 책상은 삼 년 사이 덩치가 커져 버린 태형에게는 몹시 작았고, 좁은 책상과 의자가 채 담지 못해 삐죽 튀어나온 팔꿈치가 지민과 닿았다. 그리고 그제야 태형은 들을 수 있었다. 잠들었다기엔 불규칙한 지민의 숨소리를. 꼭 우는 사람처럼 축축하게 젖어버린 희미한 숨소리.

   태형은 당황스러웠다. 지민은 울고 있는 듯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곧 교실은 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었고, 새 학기 첫날부터 울음을 보였다간 지민은 별난 아이로 소문날 것이었다.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타고 지민이 울음을 보인 이유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댈지도 몰랐다. 학교란 그런 곳이었다. 늘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작은 사회에서는 소문이 빠르게 번졌고, 진실이 아닌 어떤 것은 곧잘 사실이 되어버리곤 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태형의 가방은 묵직했다. 학기 첫날이라 들어 있는 새 교과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 태형은 가방 속에 온갖 것들을 넣고 다녔다. 남들이 다 들고 다니는 지갑이나 핸드폰뿐만 아니라, 손전등이나 반짇고리, 무거운 보조 배터리, 물티슈, 휴지 같은 것들까지. 심지어는 언제 쓰일지 모를 나무젓가락이나 손톱깎이도 있었다. 소년의 가방의 무게는 그가 가진 불안의 무게와 같았다. 가방 안에 가득 찬 물건들을 뒤적거린 태형이 교과서 밑에 뭉개져 있던 물티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파묻은 고개 아래로 빼꼼 튀어나와 있는 지민의 손으로 그것을 슥 내밀었다. 바스락, 오동통하고 작은 손가락에 물티슈가 가 닿았다. 내내 미동이 없던 지민이 낯선 감촉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형이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할 것 같아서.”

   “…….”

 

   지민은 대답이 없었으나,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태형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가 건네준 물티슈를 바스락거리며 얼굴을 닦아냈다. 태형은 짧고 통통한 손가락들이 꼬물꼬물 움직여 물티슈를 꺼내는 것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민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나, 젖살을 가득 물고 있는 볼이 봉긋하게 태형의 시야 앞에 드러나 있었다. 지민은 빼빼 마른 몸을 가지고선 얼굴에는 아직도 젖살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세 번의 해가 넘어가는 동안 진즉에 빠져버린 것을. 태형이 몇 분 동안 지민을 바라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의 행동이 느린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젖살도 남들보다 느리게 빠지는 건가. 태형이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지민이 운 이유가 궁금했으나 그들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지민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태형에게 순순히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고, 다른 생각들로 머릿속을 부러 채우고 있었다.

   한참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내던 지민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태형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톡 튀어나온 입술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머뭇거리던 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입술 부리 같아.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태형은 말없이 작은 지민의 손에서 물티슈를 건네받았다.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향했다. 드르륵, 낡은 나무문이 열렸다가 닫혔고, 지민의 작은 뒷모습이 태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히터의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돌기 시작한 먼지 쌓인 교실 안에 태형 혼자 남았다. 태형은 차가운 책상에 볼을 기대며 지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태형의 옆자리는 한참동안이나 비어 있었다. 지민의 가방이 걸려있는 탓에 하나둘 교실로 들어오는 다른 아이들은 그저 태형에게 인사하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언제 오지. 태형이 엷은 점이 있는 입술을 삐죽일 때쯤, 종이 치기 직전에 수십 번도 더 열렸던 교실 문이 다시금 열렸다. 태형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눈이 조금 부은 듯했지만 많이 진정되어 보이는 지민이 앞머리에 물기를 달고 서 있었다. 아마 화장실에 있다 세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닦을 것이 없어 물기를 대충 손으로 훔치며 자리에 앉는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이, 다시금 가방을 뒤져 이번엔 휴지를 꺼냈다. 그 순간 종이 쳤고, 지민은 단정하게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태형이 그런 지민의 어깨를 톡톡 쳤다.

   지민의 붉게 충혈된 눈이 태형을 비추었다. 태형이 말간 얼굴로 지민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제게로 내밀어지는 휴지를 빤히 바라보던 지민이 태형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마치 두 번이나 이어진 대가 없는 친절의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이. 하지만 태형에게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물티슈와 휴지가 있었고, 지민은 그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뜻 자신에게 있던 것을 내민 것이었다.

   아무런 의도도 담기지 않은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한 지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가로로 길게 그어진 눈이 휘어지고, 도톰한 애교살이 만들어지고, 광대가 봉긋 솟아오르고, 도톰한 입술이 호를 그렸다. 지민이 웃으며 태형의 손에 들린 휴지를 받아들었다. 한참 전의 물기 어린 인사와 달리 화사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제법 날카로워 보였던 인상이 웃음을 짓자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 웃으니까 되게 떡 같다. 또 들어버린 엉뚱한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리곤, 태형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새로운 담임은 조금은 무신경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보통 아이들의 이름을 빨리 외우기 위해 학기 초에는 번호순으로 앉히는 다른 선생들과 달리, 너희들 좋을 대로 하라며 첫날 앉았던 자리 그대로 자리가 굳어졌다. 청소 당번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형과 지민은 본의 아니게 함께 다닐 일이 많아졌다.

   습한 장마가 시작될 무렵, 그때까지도 늘 나란히 앉아 있던 둘은 각자가 속한 무리와 관계없이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민은 태형을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민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유형의 인간이었다. 태형은 얼핏 가벼운 듯 보여도 무거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다. 그는 학기 첫날 지민이 울었던 일에 대해 그때까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지민에게 관심이 없어서, 라는 이유는 아닌 듯 보였다. 태형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막 말문이 트인 아이처럼 자주 지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으니까. 그런데도 태형은 지민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그날의 일을 둘만의 기억 속으로 묻어버렸다. 그 침묵 속에 섞인 배려에 지민은 편안함을 느꼈다. 사람을 잘 곁에 두지 않는 지민이었으나, 늘 말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태형에 지민 또한 곁을 내어 주고 만 것이었다. 어느새. 그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옷자락에 스며든 빗물처럼 그렇게.

 

 

   지민은 저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태형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 주, 청소 당번을 맡게 된 둘은 쓰레기통을 함께 나누어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가고 있었다. 지민의 시선이 저보다 높이 있는 둥근 정수리로 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저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칠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태형은 혼자 훌쩍 커 버렸다. 그의 성장한 신체를 따라가지 못한 교복 바지 끝자락이 올라가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태형은 항상 그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로 자신에 비해 여전히 작고 마른 지민을 오롯이 담아내었다. 그 심연의 온도는 언제나 낯선 기분을 불러일으켜서, 지민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의 시선에서 낯섦을 느끼곤 했다. 지민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태형은 지민에게 언제나 조금 이상하고, 낯설고, 그렇지만 싫지 않은 어떤 것이었다. 지민이 느릿하게 내딛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와 태형이 함께 들고 있던 쓰레기통이 당겨져, 앞서 걷던 태형도 걸음을 멈추었다. 태형이 뒤돌아 지민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던 지민이 말했다.

 

   “넌 진짜 이상해.”

 

   잔잔하고 커다란 눈동자에 지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민의 뒷말을 기다리던 태형은 그가 말이 없자 엷은 점이 숨겨진 입술을 열었다. 변성기가 찾아와 제법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렇게 질문하며 태형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조금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그가 고개를 기울인 방향을 따라 흘러내렸다. 까만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호기심을 한가득 담고 지민에게로 향했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작게 침을 삼켰다. 태형은 지나치게 예뻤다. 그 이유 때문에 지민이 태형을 가까이 두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태형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지민은 괜히 그 까만 눈에서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왜 울었는지도 안 물어보고.”

 

   말을 내뱉고 나서 지민은 후회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꼭, 물어봐달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사실 태형이 딱히 그를 배려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관심이 없어서 물어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당황해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나간 것이었다. 사실 그게 늘 마음속 깊은 곳에 담겨 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고 지민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민의 대답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던 태형이 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고 싶어?”

   “…….”

   “그럼 물어볼래.”

 

   너무도 태형다운 대답이었다. 잠시나마 들었던 불안감이 녹아내리며, 지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민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자 태형이 이번에는 큰 눈에 의아함을 가득 담고 지민을 바라보았다. 나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는 눈이 순한 빛을 띠는 것이 또 좋아서, 지민은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이래서 네가 좋아.”

   3. 악취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민은 먼 곳의 학교로 진학했고 태형은 중학교 근처에 있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이제 더는 한 공간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연락했다. 서로 맞는 취미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태형은 제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지민과 대화하는 것이 좋았고, 노래를 듣거나 가끔 책을 읽는 것 외에 별다르게 취미랄 것이 없는 지민도 태형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태형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지민이 먼지 냄새 나는 교실에서 혼자 눈물을 보였던 이유를 몰랐다. 태형은 굳이 물어보려 하지 않았고, 지민도 그에게 그날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지민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결핍이었으므로.

 

   *

 

   계절의 틈새에서는 늘 악취가 났다. 벚꽃잎의 시체가 한가득 쏟아진 비에 쓸려 내려갈 동안에는 내내 습한 악취가 풍겼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에어컨을 틀어 차가운 카페 안의 공기와 밤의 색 같은 것들이 어쩌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싸구려 음료 두 잔을 시켜놓고는 오랜 시간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그렇게 흥미진진한 주제는 없었음에도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평화롭게 조곤조곤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진 것은 지민의 휴대폰에서 울린 진동 때문이었다. 우우우웅- 카페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에서 시작된 울림이 가벼운 소재의 나무 탁자를 사정없이 울려댔다.

   태형이 무심코 지민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신자는 ‘형’이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잠시 바라보던 지민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태형이 곧잘 귀여워하는 그 작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응? 태형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형과 단둘이 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도 아니었고, 가족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라면 받아도 될 텐데. 태형이 큰 눈을 깜빡이며 질문했다.

   “왜 안 받아? 받아도 되는데.”

   “……아니, 별로. 안 받고 싶어서.”

   “그래?”

   “응.”

 

   그렇구나. 태형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를 말하는 지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며 미간 사이를 좁히고 있던 지민이 시선을 올려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남은 음료를 쪼르륵, 빨아 마시며 순한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이 편안해하는, 또 무척 좋아하는 ‘네가 말하기 싫으면 안 물어볼게.’ 표정이었다. 태형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감을 알았다. 휴대폰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은 지민이 턱을 괴고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페 안은 적당히 시끄럽고, 조금은 추웠고, 비가 내리는 어두운 창밖은 그를 조금은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지민이 문득, 제 결핍을 그에게 내보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태형은 그저, 이제 반쯤 녹은 얼음만이 남아 있는 잔을 무의미하게 빨대로 쪼르륵 소리를 내며 빨아올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시선을 옮겨 탁자의 무늬만 한참 바라보던 지민이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있잖아, 태형아.”

   “응.”

   “……난, 우리 형이 부끄러워.”

   “왜?”

   “우리 형 장애인인 거, 너도 알잖아.”

 

   태형의 까만 눈이 느리게 깜박이며 지민을 담아냈다. 지민은 그 시선이 또다시 낯설어, 음료가 반쯤 남은 제 유리잔으로 시선을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

 

   지민은 결핍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그 결핍은, 그가 자라날수록 점점 더 커다란 허무로 변하여 그를 집어삼켰다. 그것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민은 늘 불행했고, 자신의 불행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난도질했다.

   지민은 가난하지는 않았다.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하게 살아계시며, 직장이 있었고, 그들은 늘 소년에게 친절했다. 운이 좋게 전기가 끊이지 않고, 깔끔히 샤워를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문제는 그의 형이었다.

   그의 형은 심장에 구멍 두어 개가 뚫리고 정신이 조금 돈 채로 태어났다. 지민의 부모는 맞벌이를 하며 둘 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형의 병원비를 부담하며 지민의 대학 학비까지 벌어놓기에는 벅찼다. 부모가 자신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이 없다는 것을 지민은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는 최선을 다했으나,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늘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런 말들로 자신의 결핍을 자위하며 지민은 어린 나이에 일찍이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에 유리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지민은 착한 아들이자 착한 동생이었다. 이미 아픈 형 때문에 힘든 부모님에게 저라는 짐까지 지워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민은 부모를 사랑했고, 형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한 번 있는 외식에서 형이 돌발행동을 보여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거나, 특수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반 학교에 저와 함께 진학해 아이들의 시선이 형과 저에게 몰릴 때도. 지민은 형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족인 우리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가 네 형을 이해해주겠니.’

 

   언젠가 어린 마음에 형이 싫다며 어머니에게 고백했을 때, 곤란한 표정 이후에 나왔던 어머니의 말씀을 지민은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그녀로서는 지민이 그의 형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아는 데도 방치한 것일지도 몰랐다. 지민이 그의 형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사실 취업뿐만이 아니라, 또 형과 같은 학교에 가게 될까 봐 부러 더 먼 곳에 있는 학교를 선택한 것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그의 형을 괴물 취급하며 괴롭혔고, 지민은 괴물 동생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다. 지민은 이미 초등학교 때쯤부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대놓고 조롱하는 아이들은 없었으나 공공연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쟤가 걔 동생이라며?’ ‘장애인 동생인데 멀쩡하네?’ ‘신기하다.’

   그 악질적인 호기심이 담긴 시선이 싫었다. 형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형을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됐다. 형이 장애인인 것은 형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렇다면……그럼 내가 받은 상처는 대체 누가 책임져 주지?

   태형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날은, 새벽 내내 형이 아팠던 날이었다. 형을 간호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지민은 문득 두려웠다.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을 책임져야 할 자신이. 그리고 영원히 형을 등에 지고 살아야 할 자신의 미래가. 그것이 문득 너무나 뼈저리게 실감 나고 두려워서, 지민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일찍 집을 빠져나와 텅 빈 교실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

   그때 누군가 교실로 들어와 지민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히터를 틀고, 그의 곁에 앉았다. 낯선 기척의 등장에 지민은 눈물을 멈춰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이나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가방을 정리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 후에 다정한 기척이 지민에게로 와 닿았다. 태형이 건넨 물티슈였다. 곧이어 낮고 느린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필요할 것 같아서.

 

   태형의 그 까맣고 깊은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를 마주한 날 이후, 그는 지민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근데 난 우리 형을 미워하면 안 돼.”

 

   지민이 빨대로 녹은 얼음을 휘저으며, 긴 이야기 속에서도 언급했던 말을 다시금 되뇌었다. 마치 자신에게 세뇌하듯.

 

   “그건 형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냥 싫어하면 안 돼?”

 

   내내 얌전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조금은 어린아이 같은 물음이었다. 지민이 컵에서 시선을 떼고 태형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태형은, 지민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울먹이거나 혹은 동정을 담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그저 순수한 의문과, 또 이유 모를 분노 같은 것이 느껴졌다. 태형이 말을 이었다.

 

   “왜 형을 싫어하면 안 돼? 형이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너는 형 때문에 상처받았잖아.”

   “……하지만.”

   “자식을 이해하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이 아냐. 네가 그렇게 상처를 달고 성장하게 한 것도, 네 부모님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지.”

   “…….”

   “싫어해도 돼, 지민아. 너는 너무 치사량의 이해를 하고 있어.”

 

   낮고 느린 목소리가,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늘어놓았다. 지민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태형의 말을 되뇌었다. 치사량의 이해. 어쩌면 지민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뿌리 깊게 박힌 이타심.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타인에게 적당히 착하고 친절한 것은 지민에겐 무기와 같았다. 그가 먼저 친절하게 대하면 웬만한 또라이가 아니고서는 대개 마찬가지로 그에게 적당한 친절을 되돌려 주곤 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싫은 것도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든 부모님에게 저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지민은 항상 적당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으며 교우관계에서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평범하고, 친절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회성을 배운 인간이라면 마땅히 타인에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지민이 생각하는 ‘적당한’ 친절이 남들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상당한’의 기준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지민은 그랬다. 제가 조금 손해를 보는 일이라도,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편했고, 괜히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 지민 입장에서는 더욱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지민의 손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생겨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민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확실히 지민에게 저들이 생각하는 최선을 다했으나, 그것은 최고가 될 수 없었고 장애를 가진 형에 대한 지민의 희생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민을 자식이라기보다 저들과 가정이라는 짐을 나누어 들어야 할 하나의 구성원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지민 또한, 그의 형과 같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는데.

   하지만 지민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던 부모를 ‘이해’했다.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런 삶의 방식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았는데. 긴 생각을 마친 지민이 조금은 처참해진 심경으로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때 그의 눈치를 보던 태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기분 나빴으면 미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제야 지민이 고개를 들어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태형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지민의 말을 듣는 동안 솟아오른 감정에 의해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지민이 굳은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저를 바라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민은 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태형이 사용한 단어가, 지금까지 지민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되짚어보는 충격적인 어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민은 한참의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처 그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야. 기분 나쁘지 않았어.”

   “…….”

   “그냥……조금 놀랐을 뿐이야. 지금까지 나한테 그런 말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아무도 지민에게 착한 아이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착한 아이는 어른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었고, 사랑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기에 지민도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마음이 지민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민은 지금껏 괴로워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그를 사랑해주는 부모가 있었으며, 그 부모는 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몸을 눕힐 집이 있었고 매끼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없었고, 교우 관계는 원만했으며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라 성적도 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는 형의 일만 아니라면 삶에 있어서 그다지 커다란 불행을 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민은 늘 불행했다. 자신이 불행을 느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다. 남들보다 나은 것을 손에 쥔 채 불평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스스로를 폄하했다.

   지민이 태형과 지그시 눈을 맞추며 말했다.

 

   “고마워. 내 얘기 들어주고, 좋은 말도 해 줘서.”

 

   태형은 지민의 진심 어린 감사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민의 생각과는 달리, 태형의 말은 완벽한 선의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저 지민의 사정에 대한 감정이입과 약간의 답답함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남아 있는 얼음을 모두 입안으로 들이부어 아득아득 씹어 삼킨 태형이 말했다.

 

   “그거 너 좋으라고 한 말 아냐.”

   “그럼?”

   “……답답해서 그랬어. 네가 그런 상황에서도 네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게. 물론 넌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태형의 말에 지민은 그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불행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태형은 결코, 가볍게 지민에게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형 스스로가 느꼈던 어느 감정에 대한 오버랩이었다. 지민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태형은 지민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어찌 보면 냉소적이기까지 한 말투로 말했다.

 

   “난 내 부모가 싫어, 지민아.”

   “…….”

   “그 사람들을 원망해.”

 

   저를 숨 쉬게 만든 부모를 원망하노라 고백하는 소년의 말투에서는 어떠한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민은 그가 어째서 또래 아이들보다 무거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바로 그의 삶 자체가 무거운 불행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어느 삼류 소설에도 쓰이지 않을 만큼 흔해 빠진 이야기였고, 흔하게 불행의 소재로 사용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가장 정석적인 환경이라는 이야기였다.

   태형은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멀쩡하고 바르게 살아가던 여자의 인생을, 봐줄 만한 것이라고는 얼굴뿐인 남자가 완전히 망가뜨렸다. 덜컥 아이가 들어섰으니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별다른 밑천도 없이 결혼했고 늘 가난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은 두 사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모이는 돈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점점 원망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의 잘못은 그 어디에도 없었음에도, 아이가 생겨남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일이 너무도 괴로워 아이에게로 탓을 돌리게 되었다.

   미움받는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태형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남들과 자신의 차이를 눈치챘다.

   태형이 아주 어릴 적, 명절에 모든 가족들이 모였을 때였다. 사촌 동생이 울음을 터트리자 당장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큰아버지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은 태형이 기억하는 첫 충격이었다. 태형은 놀이터에서 놀다 무릎이 깨져도, 같이 놀던 아이가 저를 때려도 언제나 울음을 꾹 참아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태형은 어렸지만, 그보다 더 어릴 적에 자신이 울음을 터트릴 때마다 부모님이 저를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했다. 그들은 절대로 우는 자신을 달래주지 않았으며, 그저 귀찮은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태형은 울지 않았다. 그런 태형에게, 당장 우는 아이에게로 달려와 번쩍 안아 들어 주는 부모의 광경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태형의 부모는 우는 그를 달래주지 않았을 뿐이지, 그를 굶기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태형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태형은 자신이 당한 것이 학대였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태형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와 태형을 버렸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배가 다시금 불러오기 시작했다. 곧 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홀로 태형과 동생을 키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돈을 벌지 못했다. 세 사람은 태형의 이모의 집에 얹혀 들어가 간신히 삶을 이어갔다.

   태형에게는 마땅한 꿈이 없었지만, 목표는 있었다. 어서 빨리 독립 자금을 모아 이 집을 나가는 것. 단순히 부모가 원망스러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태형의 이모는 꽤 괴팍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기분이 나쁠 때마다 태형과 그의 동생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폭력을 당하는 태형을 늘 묵인했다. 이모가 저를 향해 가시 같은 말을 내뱉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제가 당한 폭력을 무시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태형은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그의 인생이 그가 예상한 대로 착실하게 불행으로 향하는 데에 대한 감정이었다.

 

   *

 

   지민이 따스한 갈색 눈동자로 담담하게 태형을 담아내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더 거세지고만 있었다. 내일인가, 모레쯤에 태풍이 온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지민은 제 결핍을 메마른 눈으로 털어놓는 태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태형에게 느꼈던 편안함이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태형은 지민에게 아주 익숙한 것 안에 잠겨 들어 있었다.

   불행이었다.

   어쩌면 불행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4. 구원

 

 

   둘의 관계는 각자의 결핍을 쏟아내었던 어느 비 오는 저녁 이후 조금 변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모든 기준에서의 예외로 여겼다. 지민은 ‘그렇게 하는 게 이득이어서’가 아니라, 태형과 함께 있는 시간이 진심으로 즐거워 그의 앞에서 자주 웃었고, 가끔 흘러나오는 울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은 상대였으니까.

   그래서였다. 지민이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에 한달음에 집을 뛰쳐나간 것은.

 

   *

 

   새벽 세 시가 한참은 지난 시간, 지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간을 좁히고 몸을 뒤척이던 지민이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야. 확인도 하지 않고 실눈을 떠 초록색 버튼을 누른 지민의 도톰한 입술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

   “……태형아?”

 

   저 먼 상대방에게선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숨소리 위로 드리워진 조금은 낯선 물기. 수화기 건너편에서 태형이 울고 있었다. 게다가 밖에 있는지 간간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 지민이 벌떡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곧 새벽 네 시였다. 그러니까 태형은 이런 시간에, 밖에서 혼자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민은 보통 바른 행실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다. 이 시간에 집 밖에 있던 적은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옷을 챙겨 입으며 수화기 너머에서 아직도 말없이 훌쩍이고 있는 태형에게 물었다.

 

   “어디야?”

   -……너희 아파트, 놀이터.

   “갈게.”

   -……지민아.

   “응.”

   -끊지 마.

   “……알겠어. 안 끊을게.”

 

   이렇게까지 불안정한 태형은 처음이었다. 태형은 언제나 차분하고 덤덤한 눈빛으로 지민을 바라봐주었다. 덩달아 지민의 가슴도 불안한 고동으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지민이 정적에 휩싸인 집을 조심스레 가로질러 밖으로 향했다. 태형이 있는 곳으로. 마음이 급해진 지민이 걸음을 재촉했다.

놀이터에 도착한 지민은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의 벤치에 앉아 있는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커다란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휴대폰이 들려 있는 커다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민이 아직도 이어져 있던 통화를 끊고 조심스럽게 태형을 불렀다.

 

   “태형아.”

   “……지민아.”

   “응.”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민은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태형의 반듯한 얼굴과 목에 새겨진 푸르른 멍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할 말을 잃은 지민을, 물기 어린 눈으로 한참 바라보던 태형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맞았어. 이모부한테.”

   “…….”

   “미친 새끼가, 태현이를 때리려고 하잖아. 그래서 대들었더니 목을 조르더라고. 아주 죽이라고, 창문에서 밀어 버리라고 하니까 그렇게는 못 하더라. 뺨 몇 대 때리더니 나가버리더라고.”

 

   태현은 태형의 동생이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어린 동생. 태형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메마른 어투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커다란 눈에서는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바싹 말라버린 사람처럼 말하면서, 태형은 지민의 앞에서는 차마 눈물을 숨길 수 없었다. 가만히 태형의 앞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지민이 다시금 숙여지는 태형의 고개에 맞춰 몸을 구겨 앉았다. 태형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은 지민이 그의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계절은 여름이었으나, 얼마나 새벽의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있던 것인지 늘 따스했던 손에 냉기가 감돌았다. 따스한 갈색 눈동자가 태형의 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동정이 아닌, 걱정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시선이 태형은 싫지 않았다.

 

   “많이 아파?”

 

   지민은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당연히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고, 괜찮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느꼈을 아픔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얼굴과 목에 가득한 푸른 멍과 생채기에, 다시 집에 들어가 약을 챙겨 와야 하나 싶기도 했다. 지민의 물음에 잠시 대답이 없던 태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한 태형의 반응에 지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밤에 사람을 불러낸 데에 대한 골치 아픔에서 나온 한숨은 아니었다. 그저 태형의 처지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에 흘러나온 한숨이었다.

 

   “집에 가서 약 챙겨 올까?”

   “……아니, 가지 마.”

   “그래.”

 

   태형이 제 손바닥에 얹어져 있던 지민의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지민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태형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태형의 고개를 제 어깨에 부드럽게 기대게 만들었다. 태형의 머리가 지민의 손길을 따라 저보다 낮은 곳에 있는 지민의 어깨에 기대졌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지민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체향을 들이마시며 태형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울음이 진정되니 사방이 고요했다. 자세한 사정도 듣지 않고 그저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제게 달려와 준 지민 덕에 태형은 차츰 불안하게 뛰어대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저에게 고함치던 이모부의 목소리도, 겁에 질린 어린 동생의 울음소리도, 무심한 어머니의 눈빛도, 모두 희미해져 갔다.

   지민의 어깨에 닿아 있는 귀에서는 두근두근 하는 작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그 단순하고 작은 고동이, 태형은 어째서인지 잔잔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새벽 새가 울었다.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태형은 문득, 세상에 지민과 저 둘만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했다.

   태형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민아, 우리 도망갈까.”

   “…….”

   “지금 당장은 말고……우리 졸업하면. 지금부터 돈 모아서, 우리 둘이 작은 집 구해서 같이 사는 거야. 가족 같은 것은 다 잊고.”

 

   사실 방금 문득 든 생각은 아니었다. 태형은 지민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 때마다 지민과 함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태형 자신은 원래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갈 생각이었고,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떠나 멀리멀리, 주변인들과의 연락도 아예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민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형은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함께 돈을 모은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태형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어놓고는, 대답 없는 지민에 걱정스럽게 커다란 눈을 도륵도륵 굴려 댔다.

   지민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민은 아직도 완전하게 가족을 원망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고통받으면서도 가족을 사랑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에게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지민의 감정을 존중했다. 게다가 태형은 제가 내놓은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철없는 마음에 내뱉은 제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집으로부터 받는 지원은 의무교육을 마칠 수 있는 학비가 고작이었다. 대학을 붙는다 해도 전액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 그러나 태형은 공교롭게도 그렇게 머리가 좋지 못했다. 어차피 집에 붙어 있어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저를 향한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민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태형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다 결국 지민의 어깨에서 제 고개를 떨어뜨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어차피 난 대학도 못 갈 거고……바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 이 동네를 떠날 생각이었거든……그래서, 그래서…….”

 

   태형의 말은 길어져만 갔다.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태형은 채 문장을 끝내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며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또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지민의 앞에만 서면 태형은 자꾸만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것은 지민도 마찬가지였고, 서로이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음 약한 지민은 분명 곤란해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형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삐져나오는 울음을 꿀꺽, 삼켜내었다.

   그때 작고 다정한 손길이 태형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를 제 어깨 쪽으로 끌어당겼다. 태형이 지민이 이끄는 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작은 심장 소리에 태형은 그만 씹어 삼키던 울음을 그대로 토해내고 말았다. 지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

   “같이 가자, 태형아.”

 

   어차피 지민의 집에도 지민을 대학에 보낼 돈은 없었다. 그것을 일찍이 알고 있던 지민은 취업에 유리한 학교에 진학했으니 졸업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졸업 후에도 바로 돈을 벌면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마음속에 체한 것처럼 걸리는 것은 부모님과 형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언제나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상상을 하곤 했으므로, 태형의 제안에 약간의 고민 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달이 밝지 않은 밤이었다.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풍경 속에서 그들은 서로 영원히 곁에 있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태형의 마음속 깊은 어느 곳에 지민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우정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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