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는 우울증, 자해 등 트리거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BGM : MØ - Beautiful Wreck
그 소년의 본질적인
우울에 대하여 下
길봄
5. 다시, 장마
지민이 망가진 것은 그들이 집을 구한 지 일 년쯤이 지나고 나서부터였다.
지민과 태형 모두 졸업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해 조금씩 돈을 모았고, 졸업 후에는 모든 일상을 일에 매달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 결과 졸업 후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작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으나, 지긋지긋한 가족에게서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에 그들은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집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일매일 돈을 벌어야 했고, 그들은 늘 가난했다. 반복되는 일상에 그들은 금세 피폐해져 갔다. 그들은 서로에게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제 불행한 인생에 대해 늘 절망했다.
태형이 지민이 제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때쯤 지민은 다니던 회사에서 경영난을 이유로 해고당하고 급한 대로 편의점과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태형은 술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시간대가 서로 엇갈려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는 아주 잠깐의 시간 말고는 한집에 살아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드물게 태형의 몸이 좋지 않은 날이 있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출근한 가게에서 태형은 도리어 송장을 치우고 싶지 않다며 사장에게 빠꾸를 먹고 집에 돌아왔다.
착한 척하기는. 그래봤자 월급에서 깔 거면서. 태형이 어지러운 시야에 머리를 흔들며, 제 좆같은 몸 상태에 대해 이를 갈고는 집을 향해 꾸역꾸역 걸었다. 끼익, 대문도 없는 집의 철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고, 지민이 돌아와 있는지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신발을 벗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선 태형이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펼쳐져 있는 이불에 털썩 몸을 눕혔다. 어지러웠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 천정이 제 몸 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욕실의 문이 열리고 욕실 안에 가득 차 있던 습한 공기가 좁은 집 안으로 퍼져나갔다. 태형이 무심코 시선을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고,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오는 나신의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흰 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붉은 상처들을 태형은 볼 수 있었다.
자해흔이었다.
지민은 태형이 있을 줄 몰랐던 듯,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제 상처를 바라보는 태형에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옷을 챙겨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나신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흰 허벅지에 가로로 죽죽 그어진 붉은 상처들이 태형의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태형의 시선이 붉은 상처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내내 머물러 있었다. 이내 굳어 있던 지민이 수건으로 제 아래를 가리고 옷장으로 다가갔다. 검은 머리에서 떨어져 내린 물기가 움푹 파인 척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심장이 불안한 고동으로 뜀박질 쳤다. 왜 태형이가, 지금 이 시간에.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추한 꼴을 보여 버렸다.
지민이 원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우울증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 증세가 급격히 심해졌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 손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함께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가족의 일이나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우울증의 가장 안 좋은 점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절망적인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었고, 머리로는 그것이 제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정신병에 걸린 자신의 나약함을 탓했다. 저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나면 아주 잠깐이나마 기분이 나아졌기 때문에, 지민은 해고를 당했을 무렵부터 늘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상을 달고 다녔다. 이것은 아주 더럽고 추한 종류의 결핍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태형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은 제 추한 내면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이 상처를 발견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지민은 더욱더 비참함을 느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꿰어 입은 지민이, 태형이 있는 방향으로 차마 몸을 돌리지 못하고 옷장을 짚은 채 서 있었다. 돌아서기 무서웠다. 태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겁이 났다. 날 경멸할까? 혹은 동정할까? 함께 짊어지고 있는 불행을 제대로 견디지 못한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았다. 지민이 부러 밝은 목소리를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일찍 왔네? 아까 일 나간 거 아니었어?”
태형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옷장을 짚은 지민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 쿵, 쿵, 바로 귀 옆에서 울리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표정을 굳힌 지민이 서서히 뒤돌았다.
그곳에서 태형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지민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그 눈빛에 지민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태형이었다. 커다란 태형의 눈 안에는 경멸이나 동정, 혹은 한심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밀려드는 슬픔의 파도를 어찌하지 못한 채 지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간 지민은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왜……울어?”
네가 왜 우는 거야? 내가 불쌍해서? 우리가 불쌍해서? 우리의 불행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버거워서? 지민은 태형이 저리도 슬프게 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태형은 커다란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울음을 그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듯이 양손으로 제 눈을 꾹 누른 태형이 코가 막혀 뭉근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네 몸에 상처를 낼 수밖에 없던 모든 상황들이 너무 아파.”
“…….”
“그게 나는 너무 슬퍼, 지민아.”
태형은 그저, 지민이 아픈 것이 슬펐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 제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불행을 견뎌내야만 하는 이 현실이. 태형이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울어서 미안해. 그런데 지민아.”
“…….”
“나한테는 네가 너무 소중해.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야.”
출근하기 전부터 펄펄 끓어올랐던 열이 울음을 만나 더욱 달아올랐다. 열에 안압이 올라 눈까지 욱신거렸다. 얼굴을 가린 손에 닿는 이마가 뜨거웠다. 아마 아팠기 때문에 더 감정을 자제하기 힘든 걸 수도 있었다. 태형은 쉽사리 눈물을 그치기 어려웠다. 지금 가장 힘들 지민의 앞에서 울어버리는 것은 안 될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민의 몸에 그어져 있던 상처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라 슬펐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몇 겹이나 그어져있던 자상. 지민은 고독 속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괴롭혔을까.
태형의 눈물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지민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눈을 가린 태형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반듯한 이마와 콧날, 볼이 모조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민이 태형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제 둥근 이마를 그의 이마에 콩, 가져다 댔다. 역시. 울어서 홍조가 올라 온 것인 줄 알았더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지민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태형의 눈물을 작은 손가락으로 닦아내 주며 그를 끌어안았다. 이제 저보다 훨씬 커다래진 몸을 담아내기에 작은 품이 조금은 버거웠다. 싸구려 샴푸를 써서 푸석한 머리카락 위에 코를 묻으며 지민이 아기를 달래듯 몸을 좌우로 느릿하게 흔들어댔다.
“네가 뭐가 미안해.”
“……네가 제일 힘든데, 내가 울어버려서….”
“아니야. 고마워. 이제 안 그럴게.”
이제는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지민의 말에, 작은 품에 안긴 태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또 다른 불행의 서막인 줄도 모르고.
*
삑, 삑. 무기질적인 기계음과 비슷한 무기질적인 말투로 지민이 가격을 말하자 상대방에게서 슥, 카드가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 계산을 마친 지민이 물건들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 딸랑-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지민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에어컨이 틀어진 편의점의 내부는 습하고 꿉꿉한 밖과는 달리 냉했다. 잠시 비가 그쳤나 싶더니, 또다시 창밖에선 소나기가 기승을 부렸다. 창고에서 우산을 더 꺼내 와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는 달리 지민은 카운터에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금세 회색으로 변해버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보았던 태형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언제나처럼 피곤하고 다정하지만, 어딘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던 눈빛. 말이 느린 태형은 보통 말보다는 눈빛으로 먼저 감정을 전하곤 했다. 태형이가 괜히 눈이 큰 게 아니라니까. 지민은 태형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꽤 잘 알아맞히는 편이었지만, 오늘 아침의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 태형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제가 아는 그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일 수도 있었다.
지민은 무료하게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질척이는 어투의 메시지들에 연신 차단을 눌렀다. 몇 번 자 줬더니 제가 지민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귀찮은 사람들이었다. 멍-청이들. 나한테 특별한 건 우리 태형이 밖에 없는데. 언제나 커다란 눈에 다정을 한가득 담고 나를 바라봐주는 태형이.
지민과 태형의 관계는 친구라기에는 너무도 깊었고, 또 연인이나 가족이라고 표현하기엔 딱 들어맞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 힘들어, 지민은 그저 태형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정의 내리곤 했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귀찮은 연락을 모조리 차단한 지민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조금 있으면 저녁 타임 교대를 하고 고깃집으로 출근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는……아마 섹스를 할 것이었다. 상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방금 귀찮다며 차단해버린 누군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일 수도 있었다. 지민은 사람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면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지민은 섹스 상대를 구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자꾸만 태형의 눈빛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곧 저와 살을 붙일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 그것이 절망적이진 않았다. 지민의 목적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지민은 그저 상대가 누구든, 온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날의 잠자리를 데워 줄 온기와 섹스 후의 나른함.
태형이 제 상처를 보고 울었던 날 이후로 지민은 제 몸에 칼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저를 상처 입히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상처에서 구원받길 원하는 발버둥에 저 스스로가 맞은 것일지도 몰랐다. 칼날의 차가움에서 벗어난 지민은 사람의 뜨거운 체온을 필요로 했다.
지민은 얇은 여름 이불 속에 몸을 구기고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불안증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역시나 누군가와 몸을 겹치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지민은 허름한 집의 작은 창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처음 검은 손길을 맞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습한 여름의 공기와 푸른색의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약간의 알코올이 일으킨 일이었다.
*
지민은 술을 잘 즐기지 않았다. 주량이 센 탓에 취할 때까지 마시려면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갔고, 거의 유일한 인맥이다시피 하는 태형이 술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지민은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편의점 앞에 앉아 술을 마셨다. 마음이 심란했으나, 술집에 가서 안주를 시키고 제대로 술을 마실 돈은 없었다.
어젯밤에 봤던 태형의 눈물이 내내 지민의 숨구멍을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태형에게 제가 소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저에게도 태형은 소중한 친구였다. 하지만 어제 태형에게로부터 왈칵 쏟아져 내렸던 진심은 너무나 깊어서, 지민은 일을 하는 내내 무언가가 목 안쪽에 걸린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태형의 그런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태형은 지민의 상처에, 마치 제가 상처받은 사람처럼 울었다. 지민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그렇게 슬펐던 걸까. 자신에게 소중한 지민이, 정작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속상했던 걸 수도 있었다.
지민은 열이 펄펄 끓으면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태형에게 집안에 굴러다니던 약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이마에 수건을 올려 주었다. 그제야 태형의 눈물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리고 지민이 떠나는 것이 두려운 아이처럼 그의 손을 꼭 잡고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곁에 앉아 있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얼른 자야 낫지.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기려는 눈을 부릅떴다. 결국 지민이 함께 누워 그의 품 안에 안겼을 때에야 태형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며 잠들었다.
잠든 태형의 느린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지민은 옷으로 가려진 제 허벅지의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저를 걱정해 준 태형은 고마웠지만, 이제 자해가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안정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불안증은 날로 심해져만 갔고 회사에서 해고당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앞날이 막막했다. 돈이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두 번이나 뛰고 집에 들어오면 새로운 회사에 넣을 이력서를 쓸 시간도 없었다. 지민은 점점 지쳐만 갔다.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전날 밤을 떠올리며 지민은 변변한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불행에서 도망쳐온 그들의 앞에는 또다시 불행이 들이닥쳐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불행 속에서 호흡했던 이들이 행복의 뭍으로 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행복에 발을 디디는 순간, 아마 그곳에서 질식해 죽어가겠지.
지민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내뱉으니 취기가 훅 올라왔다. 담배도 가격이 오른 뒤로 돈이 아까워 잘 사지 않았는데, 취기가 오른 김에 괜한 객기를 부려 사 왔다. 지민이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깊게 눕히며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빛 때문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는 별은 보이는데. 가로등이 다 망가져서 그런 거지만. 취기에 볼을 붉게 물들인 지민이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제대로 안주를 챙겨 먹지 않은 채 술만 들이켰고, 너무 오랜만에 마신 탓에 금세 취해버렸다.
집에 가야지. 정신이 멍했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편의점인지라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와 고막을 찌르던 소음도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집에 어떻게 가더라. 지민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편의점 의자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지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의자가 한쪽으로 넘어지며 지민도 함께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 아 시발. 욕을 잘 하지도 않는 지민이었는데, 너무나 기분이 더러웠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왜일까. 태형에게 자해흔을 들켰기 때문에? 사실 들키고 싶었으면서. 사실 네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해서 그렇게 눈에 띄는 상처를 만든 거잖아. 지민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키득키득, 그를 비웃으며 속삭였다.
추해. 너무 추했다. 지민이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몸을 구겼다. 이대로 몸이 점점 작아져,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했다. 불행 속에 잠겨 죽고 싶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
그때, 그런 지민에게 검은 손길이 뻗어졌다.
안녕. 너 예쁘다. 괜찮아? 도와줄까? 왜 이런 데서 혼자 술을 먹었어? 걸을 수 있겠어? 저기 있잖아…….
검은 손이 내미는 검은 말들은, 불행에 잠긴 지민에게는 너무 달콤해 보여서.
우리, 저기서 잠깐 쉬다 갈래? 너도 좋지?
지민은 검은 손이 들이미는 불행을 꿀꺽, 삼켰다.
눈을 떴을 때 지민은 꽤 고통스러운 아래의 사정과 낯선 천장, 진동하는 콘돔의 고무 냄새, 정액 냄새 같은 것들로 자신이 섹스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은 이미 자리를 떴는지, 방 안에는 지민 혼자였다. 아, 걔 이름이 뭐였더라. 얼굴도 기억이 안 나네. 지민은 새벽이 지나가는 시간의 밝은 빛을 피해 한쪽 팔로 눈을 가리며 뒤죽박죽 섞인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상대방의 이름과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난생처음 받아들이는 타인의 성기에 쓸린 입구가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는 것과, 그 사이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던 쾌감, 그리고 뜨거운 열기와 같은 것뿐이었다. 허리 아래로 끔찍한 고통이 일었고, 몸이 아팠다. 몸살 기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지민은 문득, 저를 억압하고 있던 불안증이 조금 해소된 것을 느꼈다. 자해를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그래. 이거면 되겠다. 지민은 손을 내려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 허벅지의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대신하면, 적어도 태형이가 울진 않을 거야. 그거면 됐어. 지민은 정답을 찾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태형은 지민의 자해흔을 마주했던 날 이후로, 아침에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자고 있는 지민의 옷을 조심스레 걷어 올려 허벅지를 확인했다. 지민의 상처는 정말 점점 아물어가고 있었고, 태형은 그럴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지민에게서 붉은 색채는 점점 사라져가는 듯 보였다.
그 자리에 상처를 대신해 붉은 자국들이 새겨지기 전까지.
습관처럼 지민의 허벅지를 확인하려 옷을 걷어 올린 태형이, 허벅지 안쪽에 새겨진 자국을 보곤 그대로 숨을 멈췄다. 키스 마크였다. 누가 보아도. 붉은 자국은 지민의 허벅지뿐만 아니라 늘어난 티셔츠 때문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도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적나라한 섹스의 흔적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옷자락을 걷어 올린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형은 지민을 우정 이상의 감정으로 보는 것이 맞았지만, 지민은 어떤지 알 수 없었고 둘은 연인이 아니었다. 지민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했다고 해서 태형이 무어라 말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그때 지민이 눈을 떴다. 나른한 시선과 마주치자 태형이 흠칫 놀라며 잡고 있던 옷자락을 슬그머니 놓았다. 지민이 몸을 일으키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에게 인사했다.
“왔어?”
“응.”
“씻어. 아침 먹자.”
“……어. 근데 지민아.”
“응?”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민에게선 붉은 자국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확실히 그것은 태형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태형은 결국 입술을 우물거리다 질문을 건넸다. 지민은 태형이 말을 꺼낼 때까지 그를 기다려주었다.
“저, 그거……뭐야? 자국.”
“아, 이거? 신경 쓰지 마. 어제 했던 애가 남긴 건가 봐. 남겼는지도 몰랐네.”
태형이 그 말에 어떤 절망에 빠졌는지도 모르고, 지민은 해사하게 웃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태형은 깨달았다. 지민에게 섹스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육체적 관계일 뿐이며 그저 자해를 대신할 대체품이라는 것. 그리고 지민은, 결코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태형은 깊은 절망 속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태형의 인생이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형은 깊고 검은 절망 밑바닥에 가라앉아, 뻐끔뻐끔 호흡하며 말이 되지 못하는 물거품만을 내뱉었다. 그것은 채 지민에게 가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져버렸다.
지민은 그저 차가운 칼날 대신 사람의 온기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몸도 예민한 편이라, 금세 적응해 고통은 사라지고 쾌감만이 남았다. 그래서 지민은 제가 손해 보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몸에 상처를 내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으며, 태형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 아주 좋은 대체품을 찾았다고.
지민은 점점 섹스를 일과처럼 행하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민의 자해흔을 보고 견디지 못해 울어버린 것은 태형이었고, 태형이 지민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지민 또한 태형을 소중히 여겼기에 그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대체품을 찾은 거겠지.
하지만 태형은 점점 그런 지민을 견디기 힘들었다. 지민이 어느 새벽, 울고 있는 그에게 달려와 주었을 때부터 태형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지민이 있었다. 그래서 싫었다. 지민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흔적을 가득 달고, 다른 사람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는 것은. 지민은 그렇게 자주 상대를 바꿔 가며 섹스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태형에게 섹스를 하자고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꼭, 저를 절대 성적인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뜻 같아서 태형은 기분이 나빴다. 지민이 타인과의 섹스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태형은 매일 아침 집에 들어서서 붉은 흔적으로 뒤덮인 지민의 모습을 볼 때면, 질투심으로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어느 날 결국 참지 못하고 지민에게 화를 내 버린 것은.
-적당히 좀 해. 박지민.
-…….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야? 떡을 칠 거면 나가서 하든가.
그날 태형은 유독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손목과 어깨가 시큰해질 정도로 안주를 나르고 신문을 배달한 태형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제일 처음 본 것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정액 담긴 콘돔과 몸 곳곳에 흔적을 달고 있는 나신의 지민이었다. 그 순간 태형은 제 가슴께에 싸한 냉기가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두통이 일었다. 태형은 전에 없이 거친 손길로 지민을 흔들어 깨웠다. 잠들어 있던 지민이 놀라 눈을 떴고, 태형은 피곤함에 핏발이 선 눈으로 지민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며 거친 말을 쏟아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한 태형에 잠시 상황 파악이 어려운 듯 눈을 깜빡거리던 지민은, 곧 바닥에 굴러다니는 콘돔과 제 모습을 자각하고는 곧바로 태형에게 사과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섹스 후의 나른함에 까무룩 잠들어버렸을 뿐.
태형도 지민이 일부러 제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민의 사과를 받아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사과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태형이 곧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 버렸고, 지민은 그날 내내 불안증에 시달렸다.
태형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 많이 났겠지? 나는 왜 옷도 안 입고 자리도 안 치우고. 추한 꼴을 보여 버렸어. 어떡하지. 어떡해? 태형이가 이제 나 안 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를 혐오할까? 일을 하는 내내 손톱을 씹어대느라 손톱 주변 살이 뜯겨 피가 흘러나왔다. 그날은 섹스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형이 또 화를 낼까 무서웠다.
홀로 집에 돌아온 지민은 어둠 속에서 무력하게 몸을 웅크린 채 공포에 떨었다. 수십 번은 씹어댄 손톱과 입술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흘러나오는 것이 없었다. 언제나 울음을 꾹꾹 눌러 삼켜버리던 지민은, 어느 순간부터 정작 울고 싶을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지민은 제 안에서 무언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민이 멍하니 어둠으로 가득 찬 허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감각이 사지를 감쌌다. 검고 끈적끈적한, 자신을 하염없이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이 감각은, 우울이었다. 절대 끝나지 않을 장마처럼 지민의 전 생애에 걸쳐 비를 뿌려대는 그 본질적인 우울에서 지민은 자신이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절망적이었다.
텅 빈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지민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서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해 장마는 유난히도 길었다. 마치 지민의 인생에 드리운 회색의 우울처럼.
책상으로 다가간 지민이 태형 몰래 숨겨 두었던 커터칼을 서랍에서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서늘하게 빛나는 은색 칼날이 눈에 들어왔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민이 망설임 없이 손목을 향해 칼날을 그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흰 손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화끈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와 뇌를 울렸다. 아프다. 너무 아팠다. 그제야 지민은 제 사지를 옥죄는 우울 속에서도 제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그 순간 낡은 철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따뜻한 색의 가로등 빛이 어둠으로 가득 찬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지민이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우산도 없이 비에 잔뜩 젖은 채, 급하게 뛰어온 듯한 태형이 서 있었다. 분명 불안해하고 있을 저를 향해 달려와 준 것이었다. 지민은 진심으로 기뻐 미소 지었다.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미소 짓는 지민에,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한 태형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민을 끌어안았다. 지민아, 지민아…….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는 태형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지민이 축축하게 젖은 차가운 그의 몸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나 여기 있어, 태형아. 나 여기, 살아 있어. 어깨가 뜨거운 액체로 젖어 들어갔다. 태형은 또다시 지민 때문에 울고 있었다. 그 사실이 슬퍼서 지민은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우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언젠가 너는 우는 나에게 다정을 내밀어 주었는데. 나를 대신해서 울어 주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 미안해.
태형이 지민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나 두고 가지 마, 지민아. 내가 미안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그런데 제발, 나 버리지 마.
지민은 그 순간 안도감과 함께 절망감을 느꼈다. 태형 또한 자신과 같은 불안 속에 있었다는 사실과, 제가 태형에게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를 주었다는 것.
지민은 저를 향해 세차게 뛰는 고동을 느끼며 깨달았다. 태형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태형이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지민은 절망했다.
*
태형과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불안과 절망과 기쁨과 위안 속에서 비 오는 새벽을 우울함과 한 발짝 멀어진 채로 떠나보낼 수 있었다. 지민은 자신이 우울 속에 잠겨있던 어느 비 오는 새벽을 떠나, 오늘 아침 태형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제 붉은 자국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그 시선. 하지만 태형이 말하기를 원치 않아 보였기에 지민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역시 타인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니 잠은 오지 않았다. 지민이 잠을 자지 못해 띵하게 울려오는 머리를 느끼며 핏발이 선 눈으로 밝아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곧 태형이 올 시간이었다. 지민의 예상과 정확히 들어맞는 시간에, 저 멀리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발이 내딛는 느릿한 걸음걸이. 태형이었다. 그러나 곧 열리리라 생각했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발걸음 소리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대신에 부스럭거리는 소리 후, 치직- 하고 라이터의 부싯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피우는 모양이었다.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훅, 하고 비릿한 물비린내와 담배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집의 차양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태형이 놀란 표정으로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이 생긋 웃으며 문을 닫고 그의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태형이 느릿하게 말했다.
“일찍 일어났네.”
“안 잤어. 잠이 안 와서.”
그래. 태형은 의문형인지 수긍인지 모르게 말끝을 흐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지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태형의 입술 끝에 물려 있던 담배를 부드러운 손길로 가져와 입에 물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니 태형과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향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태형이 지민의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를 다시 가져와 빨아들였다. 축축한 필터 끝의 감촉이 불쾌하지 않았다. 지민이 태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회색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달동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집에서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도시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태형이 그런 지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목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팍에는 새로운 자국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아마 어제는 섹스를 안 했거나, 혹은 자국을 내지 않는 놈과 잔 거겠지.
태형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내 목구멍 안쪽에서 턱턱 걸렸던 물음이었다. 왜 그것을 하필 지금 꺼내는 것이냐 하면, 글쎄. 내내 온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할 정도로 그치지 않는 비 때문이거나, 혹은 오늘 올라오는 길에도 보았던 여전히 아무도 치우지 않는 쥐 시체 때문이거나,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지민의 모습 때문일 것이었다.
“너는 왜 나랑은 안 자?”
태형의 물음에 그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린 지민이 싱거운 물음을 들었다는 듯 픽,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친구랑 자냐?”
일부러,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사실 지민은 태형이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형은 지민을 사랑하고 있었다. 다시금 연기를 빨아들인 태형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우리, 친구야?”
그렇게 묻는 태형의 시선이 너무나 진득하고 어두워서, 지민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형이 깊게 들이마셨던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가, 금세 흩어졌다. 지민은 태형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
“……글쎄. 모르겠다.”
이미 온갖 감정이 뒤섞여버린 관계를 무엇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민에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태형은 자신을 사랑하면 안 됐다. 지민은 태형의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태형이 자연스럽게 쥐고 있던 라이터를 켜 불을 대 주었다. 담배 끝을 태우는 작은 불을 보며 숨을 들이켠 지민이 후- 연기를 내뱉었다. 몽롱한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지민은 또다시 부러 상처 주는 말을 내뱉었다.
“나랑 자고 싶은 거야, 나랑 사랑을 하고 싶은 거야?”
“…….”
“자고 싶어 해도 되는데, 나 좋아하지는 말아주라, 태형아.”
“……왜?”
너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태형이 커다란 눈에 가득 상처를 달고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회색의 도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민은 태형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일부러 그를 상처 주는 행동을 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자신에게 질려서 더 이상 저를 마음에 담을 수 없도록. 왜냐하면…….
지민은 타들어 가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는 웃음 섞인 어투로 대답했다.
“나 버려지기 싫거든. 난 분명히 너한테 상처를 줄 테고, 너는 날 버리게 될 거야.”
왜냐하면, 태형은 지민이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지민의 전 생애에 걸친 우울의 유영에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동행. 그러나 지민은 늘 태형에게 상처만 주었다. 그래서 지민은 태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태형에게 마음을 주었다간, 결국 언젠가 자신을 떠날 태형에 자신은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지민의 자조적인 대답을 듣고 가만히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태형이 지민의 손을 태울 것처럼 타들어 가고 있는 담배를 그의 손에서 뺏어 들어 불씨를 껐다. 정적이 내려앉은 그들 사이에 추적한 빗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태형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아.”
“…….”
“스스로를 불행에 가두지 마.”
태형은 파멸을 택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지민이 안타까웠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태형도 지민과 마찬가지였다. 늘 불행과 우울 속에서만 살아와, 조금이라도 삶에 행복이 찾아올라치면 덜컥 겁부터 났다. 행복을 한 번 맛보고 나면 곧 다가올 불행이 더욱 쓰게 느껴질 테니까. 차라리 계속 불행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삶을 견뎌내기에는 더 쉬웠다.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지민에게서 내뱉는 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나를 불행에 가둔 적 없어. 불행이 날 가둔 거야.”
지민이 본질적으로 우울한 것도, 불행을 안고 태어난 것도, 태형이 그로 인해 상처받은 것도, 모두 지민의 탓은 아니었다. 모두 지민의 발목에 채워진 빌어먹을 불행 때문이었다. 지민은 한때 그것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이제 그것이 무의미한 발악임을 깨닫고 그저 불행이 이끄는 대로 점점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지민의 잘못은 아니었다. 지민은 불행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시야가 흐릿해졌다가, 깨끗해지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정작 울고 싶을 땐 아무리 애를 써도 나오지 않더니, 이런 때에만 말을 듣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지민은 이런 때조차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입술을 깨물며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었다. 지금 가장 상처를 받을 것은 태형이었는데, 왜 저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해놓고 자신이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억울했다. 세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태형이 그런 지민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거칠게 비벼댄 탓에 여린 피부가 발갛게 일어나 있었다. 부어오른 듯한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태형은 지민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모조리 눈에 담고자 했다. 지민이 아무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애써도 이번만은 태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갸름한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지민을 향한 어느 손길도 거칠지 않았다. 결국 태형에게 졌다는 듯, 지민이 시선을 올려 저를 바라보는 태형과 눈을 맞췄다. 깊고 진한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아내고 있었다. 저 눈빛은 수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시선을 맞추고, 태형이 우는 저를 향해 작은 다정을 내밀었을 때부터.
기어코 지민이 저를 바라보게 만든 태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너의 불행이 될게.”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두렵다면.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익숙한 불행이 될게. 그러니까, 너를 사랑하게 해 줘.
지민이 태형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저를 온전히 끌어안아 주는 불행의 품으로. 평생을 함께할 소년의 본질적인 우울을 모조리 끌어안을 수 있는, 검고 깊은 심해 속으로.
그 소년의 본질적인 우울에 대하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