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방금 제 눈앞을 빠르게 지나간 이정표로 인해 부정하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초록색 바탕에 선명하게 적힌 '경주'라는 글씨는 분명 지민의 고향인 부산 근처의 도시를 의미하는 게 맞았다. 도시 이름이 어찌나 독특한지 다른 이름이랑 착각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정녕 내 여름휴가는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지민은 울컥 올라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씨. 어디 불편해요?“
지민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뒷자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지민의 안부를 물었다. 지민이 여름휴가 때 경주를 가게 된 원흉이자 절대 갑인 태형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태형의 질문에 지민이 파드득 놀라며 안 그래도 곧게 피고 있던 허리를 더 바짝 세워서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뒷좌석에 앉아 있는 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물론 비지니스 미소는 장착한 채로 말이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사님은 어디 불편하신 곳 없으십니까?"
"네. 지민씨가 괜찮다니 저도 좋네요.“
또다, 또야. 과하게 다정한 태형의 말에 지민의 입꼬리는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넘칠 정도의 다정한 말을 하는 태형이 지민은 이제 무서울 지경이었다.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등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덥힌 지민의 얼굴과 대조되게 태형의 얼굴은 티 없이 맑았다. 싱그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해맑은 태형의 얼굴을 가림막 없이 직접 마주한 지민은 건조한 자신의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출장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연꽃이 피는 곳에서
오렌지
태형은 오직 지민에게만 방금과 같은 남사스러운 말들을 주저 없이 하곤 했다. 연인. 그래, 마치 연인들끼리 주고받을 만한 간지러운 말들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지민을 향해서 남발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태형이 지민을 좋아한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태형이 지민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사실 전자는 지민이 주장하는 내용이었고 후자는 지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었다. 성격 나쁜 또라이 김태형이 새로 들어온 비서를 내쫓으려고 지민에게 창피를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질 정도였다. 실제 지민은 입사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지민을 응원하는 사원들의 모임'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지민의 고통에 동감하고 태형의 악마 같은 성질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태형이 지민을 싫어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태형이 지민을 싫어한다? '지민을 응원하는 모임'의 존재를 알고도 너그럽게 넘어간 태형이 지민을 위한 모임이 앞선 소문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을 치고 뒤로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김태형은 박지민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
지민이 태형을 처음 만난 곳은 회사가 아니었다. 지민은 태형을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그것도 소개팅으로 말이다. 대학생 시절에도 소개팅의 '소'자도 관심 없었던 박지민이 직장인이 되고 갑자기 뜬금없이 소개팅에 나간 이유는 간단했다. 주선자가 석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은 지민의 친한 대학교 선배로 유머러스하지만 진중하고 나이스 한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 석진이 자신의 사촌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을 때 지민은 특유의 단호한 미소로 석진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석진은 포기하지 않고 지민에게 끈질기게 권유했고 결국 지민은 소개팅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소개팅 자리에 나온 석진의 사촌 동생이 바로 김태형이었다.
태형에 대한 지민의 첫인상은 '잘생겼다'였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표정이 어딘가 긴장이 여려 있어 외모답지 않게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석진에게 소개팅을 안 받겠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태형은 지민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았다. 태형에게 소소한 호감을 가진 지민이 자리에서 굳은 채 아무 말도 없는 태형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의 이름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태형은 내밀어진 지민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 때문에 자주 놀림 받던 지민은 태형의 시선이 부끄러워져 손을 다시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민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태형이 재빠르게 지민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태형의 행동에 놀란 지민은 태형의 얼굴을 보고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형이 지민의 손을 바라보며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많이 그리웠어요."
한참을 울던 태형은 안절부절못하며 휴지를 건네는 지민의 반대쪽 손마저 붙잡고 '그리웠다'라고 했다. 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때 지민은 태형의 손을 뿌리치고 미쳤냐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어야 했다. 사실 자신의 손을 보고 펑펑 우는 남자를 옆에서 달래주는 모습도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때라도 태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를 빠져나왔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민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민은 태형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몰랐던 그리움이 샘솟는 기분에 지민은 앞서 태형이 그러했듯이 펑펑 울었다.
눈물에 콧물까지 쏙 뺀 지민은 태형이 휴지를 건네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돌아온 정신이, 본능이 지민에게 말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도망치라고. 그 뒤는 뻔했다. 본능에 따라 지민은 황급히 태형에게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지민의 등 뒤로 태형의 목소리가 지민을 붙잡았지만 지민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택시로 황급히 달렸다.
지민이 태형을 만나고 도망쳤던 그날 밤. 지민은 꼬박 하루를 앓아누웠다. 같이 사는 동생인 정국에 의하면 지민이 앓는 동안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민은 앓아 누었을 때 꾸었던 꿈들 중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지민은 자신이 꿈을 꿨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정국의 말에 꿈을 꿨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잠에서 지민이 깨어났을 때 알 수 있었던 것은 땀으로 축축해진 온몸과 퉁퉁 부어있는 눈이 전부였다.
병상을 털고 일어난 지민이 휴대폰을 확인했을 땐 석진과 태형에게서 나란히 메시지가 와있었다.
석진이 형
[ 태형이랑 잘 만났어? ] 오후 8:31
[ 사실 태형이가 너랑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해서 ] 오후 8:32
[ 둘이 만나는 자리 주선한 건데.... ] 오후 8:32
[ 혹시 김태형이 불편하게 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돼서. ] 오후 8:32
석진의 메시지를 읽은 지민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지민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태형을 만난 적이 없었다. 석진의 가족들은 대대로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밟고 한국으로 들어온 다고 했으니 태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태형과 대학교 이전까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지민에게 연결고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학교 때 석진을 만나다가 지민을 봤을 수도 있지만 지민은 어딘가 태형이 꺼려졌다. 보통 스치듯 만난 사람에게 그리웠다는 말은 안 쓰지 않나? 지민에게 태형의 말은 어려웠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민은 복잡하고 어렵고 어딘지 모르게 꺼려지는 태형과의 인연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태형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삭제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는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었다. 지민에게 V 뷰티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지민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비상한 머리와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마케팅 부서의 우수 사원 자리를 꿰찬지는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또래 사원들에 비해 승진도 빨랐던 지민은 직급도 높은 편에 속했다. 그런 지민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V 뷰티에서 한 제의가 지민이 회사에서 했던 일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직책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케터에게 대표이사의 비서직이라니... 짬뽕 국물에 시리얼을 말아먹는 것처럼 해괴한 일이었다.
처음 지민이 남준에게 자신이 스카우트된 자리의 이름을 들었을 땐, 지민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섯 번이나 남준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어디에 스카우트되었다고요?
"비서요? 아니 왜 저를...“
지민이 마침내 자신의 귀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황당한 제안의 이유를 묻자 남준은 태연하게 "강아지를 잘 다루실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 황당한 제안보다 더 황당한 남준의 대답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남준은 지민의 연봉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민이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주던 연봉의 2배 가까이 되는 돈이었다. 그 뒤는 앞선 상황의 반복이었다. 또다시 자신의 귀를 의심한 지민이 남준에게 끊임없이 되물었고 남준은 태연하게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결국 돈에 눈이 먼 지민은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싸인과 지장을 남준에게 내어줬다. 사실 회사 계약서에 지장까지 내어준 적은 처음이라 지민이 아주 잠시 망설이기는 했다.
"굳이 지장을 찍어야 하나요?"
"확실한 게 좋잖아요.“
남준은 지민의 질문에 대답하며 연봉이 적힌 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부린 듯 지민의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여 계약서에 빨간 자국을 남겼다. 지민은 일주일도 안돼서 이 날을 엄청 후회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날 기분 좋게 출근한 사무실에서 맞닥뜨린 이사님은 그 누구도 아닌 김태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준이 말한 강아지의 이름이 김태형이라니. 아마 지민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말이다. 지민이 이사님인 태형을 바로 수긍했는 가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민은 태형을 마주치자마자 계약을 무르겠다고 했지만 그러한 소동은 지민이 직접 지장을 찍은 계약서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지민의 소중한 엄지손가락 자국이 나있는 계약서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1년을 채우지 않고 일을 그만두게 될 시 을은 갑에게 배상금 10억 3000만 원을 지불할 것이며, 이 조항에 대한 법적 효력은 오직 갑만이 을에게 행사할 수 있다.'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으며 대기업을 상대로 불공정 계약을 소송할 용기도 없었다.
지민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다니게 될 수밖에 없었다. 태형과는 비지니스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며 1년을 채우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꿈을 지닌 채로 말이다.
지민의 원대한 꿈은 입사 한 달째, 태형의 도가 지나친 다정함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지민의 곁에는 늘 태형이 따라다녔고 태형의 곁에는 태형의 또 다른 비서 남준이 항상 따라다녔다. 지민에게는 상사나 다름없는 남준의 시선 아래에 지민은 절대 갑 태형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태형의 돌발적인 행동 또한 지민의 '비지니스 관계 유지'의 어려움을 주었다. 당장 경주 출장건만 해도 그랬다. 스카웃 당시 남준은 지민에게 그 당시 지민이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여름휴가 일정을 V 뷰티에서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둔 터였다. 그런데 지민의 휴가 일정 날 갑작스럽게 태형이 잡은 경주 출장건에 의해 지민의 소중한 여름휴가가 사실상 잠정 연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다. 지민은 감정 없이 일적으로만 태형을 대하려던 처음의 마음과 다르게 태형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이사님.“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남준의 목소리에 지민은 황급히 상념에서 벗어났다. 태형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 또한 재빠르게 원래의 상태로 원상복구시켰다. 허둥거리는 지민의 행동에 태형이 작게 웃는 것이 들렸지만 지민은 룸미러로라도 태형을 돌아볼 수 없었다. 뻔뻔함이 부족한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빨리 이 지옥 같은 주행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태형이 제게 신경을 꺼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호텔로 바로 갈까요?"
"음... 지민씨 배 안 고파요?“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태형의 말에 푹 숙여져 있던 지민의 고개가 벌떡 들어 올려졌다. 하필이면 태형이 질문 한때가 빨간 불로 차가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태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민은 남준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태형의 시선도 부담스러운데 남준의 시선까지 더해지니 지민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힐 지경이었다. 지민은 남준이 불편했다. 태형과 다른 의미로 불편하고 어려웠다. 지민은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태형이 미웠다. 아까까진 그냥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미웠다. 그것도 엄청. 남준 쪽으로도 태형 쪽으로도 시선을 두지 못한 가련한 지민의 시선은 자신의 작은 손으로 향했다.
"살짝 허기가 진 것 같아요...“
직장 상사와 절대 갑. 지민은 절대 갑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1년 뒤 그만 둘 것이라고 해도 자신이 맡은 본부는 다 해야 한다는 지민의 철칙 또한 '갑'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준의 헛기침 소리와 태형의 맑은 웃음소리가 동시에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지민은 어려운 남준에게 미움을 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데 그런 자신의 속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 태형이 얄미웠다. 원망스럽고 밉고 얄미운 김태형. 지민은 룸미러로 태형을 몰래 째려보았다. 그러다 곧 태형과 눈이 마주치고 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말이다.
"김비서. 거기로 가지."
"네.“
태형의 말에 고급 세단은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브를 도는 남준의 운전이 평소보다 거칠게 느껴진 것은 아마 지민만의 착각일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도시의 전경을 벗어나더니 이윽고 작은 산길로 들어섰다. 아까부터 남준을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고 있던 지민은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한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지민의 시선이 닿는 곳곳을 수놓고 있었고 태양빛을 받은 초록 잎들이 반짝거리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지민은 그림 속에서 나 볼 것 같은 풍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쁘죠?"
"네. 와... 진짜 너무 예뻐요.“
지민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룸미러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이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지민의 생각과 달리 태형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던 지민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가셨다. 태형의 얼굴이 비친 감정은 지민과 태형과 처음 마주한 날의 것과 같았다. 깊고 깊은 그리움과 이유 모를 슬픔. 지민 또한 그날 태형을 보면서 겪었던 감정들이었다.
태형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조금도 그립고 아플 이유가 없는 서로를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행복감에 차올라있던 지민은 태형의 얼굴을 보자 어딘지 모르게 슬퍼졌다. 태형의 감정이 공기로 전이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없이 태형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지민은 창밖에서 서서히 지민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묵직했던 그날의 태형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지민의 심장 근처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웠어요.' 태형을 피해 도망쳤을 때처럼 지민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작은 숨을 내쉬는 것마저 힘들어진 지민이 급하게 심장 부분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이자 차가 빠르게 멈췄다.
"지민아!“
지민은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차 안에 울려 퍼지는 태형의 다급한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태형이 외치는 자신의 이름이 비명이나 절규와 같은 종류의 것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민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지민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지민은 세 명의 남자를 만났다.
첫 번째는 긴 하얀 소매에 푸른 휘장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나왔다. 하얀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소에서 남자는 지민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얼굴은 하얀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콱 막힌 것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지민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면, 그냥. 자신을 잡고 있던 손이 너무 떨고 있어서. 그 남자를 마주 보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지민은 마음으로 알았다. 그 남자의 눈물을.
손을 들어 남자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하자 하얀 빛이 퍼지며 다른 장면으로 변했다.
두 번째 남자는 주변이 연꽃으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정자 밑에 홀로 있었다. 붉은 옷에 검은 띠를 두른 남자는 자신의 머리 장식이 위태롭게 떨어지려고 하는 것도 모르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지민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서서 남자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닥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소리를 지르며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남자는 그만 정자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져 앉았다. 멀리서 남자를 지켜보던 지민은 그제야 다리를 움직여 남자에게 달려갔다.
주져 앉아 있는 남자에게 몸을 숙여 시선을 마주하려 하자 누군가 지민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갑작스러운 암전에 지민이 바둥거리자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내가 도착할 때까지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궁금해도 조금만 참거라.“
낮은 목소리와 함께 풍겨져 오는 은은한 꽃향기에 지민은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둥거리던 몸을 멈췄다. 그러자 남자는 '착하다.'라는 말과 함께 지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남자의 행동에 지민의 양볼에는 발갛게 열이 올랐다. 조심스럽게 지민의 몸을 잡고 움직이던 남자는 이윽고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는지 자리에 멈춰 섰다.
"내 이 천을 풀어줄 테니 마음속으로 석 삼까지 세고 눈을 뜨거라. 그렇지 않으면 숫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 녀석으로 알고 평생을 놀려줄 것이다. 알겠느냐?“
남자의 장난스러운 협박에 지민은 가볍게 웃었다. 맑은 지민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웃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 지민이 얄미웠는지 남자는 손가락으로 지민의 옆 허리를 콕콕 찔렀다.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남자의 행동에 지민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도 손을 멈추고 해맑게 웃었다. 마침내 지민의 시아를 가리고 있던 천이 걷혔다. 남자와 약속한 것처럼 숫자를 센 지민 또한 눈을 뜬 뒤였다. 지민의 시야에는 흰 연꽃과 지민이 서있는 정자를 채운 촛불,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있는 남자가 들어찼다.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지민이 입을 막고 가만히 서있자 남자는 지민에게 손을 뻗었다. 지민은 홀린 듯이 그 위로 자신의 작은 손을 올려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작은 사랑아. 아주... 많이 그리웠다.“
남자는 울었다. 그리고 웃었다. 마주 잡은 지민의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가지고 간 남자는 지민의 손등을 소중히 쓰다듬더니 곧이여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 대었다. 남자의 행동에 지민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웃으며 우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지민이 입을 벌리자 세상이 검게 변하며 남자는 사라졌다. 당황한 지민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통 암흑뿐인 공간 속에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지민은 오직 어둠뿐인 공간을 돌아다니며 남자를 찾았다.
......아!
....형아!
"태형아....!“
비명처럼 태형의 이름을 내지른 지민은 발작하듯이 몸을 바르작 거리며 눈을 떴다. 헉헉, 지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얼굴을 축축이 적시고 있던 눈물을 닦아 내었다. 눈물을 훔쳐내는 손마저 땀에 젖어 축축한 상태였다. 손을 대충 바지춤에 닦아낸 지민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암흑뿐이었던 꿈과 다르게 지민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차 안에 홀로 누워있었다. 잠깐, 홀로? 지민은 그제야 태형과 남준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왠지 급해지는 마음에 지민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차 문을 열었다. 비틀거리며 차를 빠져나온 지민은 익숙한 향기에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거리를 수놓던 하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마지막 남자에 의해 눈이 가려졌을 때 맡았던 향기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이제 혼란스러워졌다. 생생했던 꿈이 꼭 현실인 것만 같았다. 지민에게 실제 벌어졌던 일들인 것만 같았다. 그것도 태형과 함께.
지민은 세 명의 남자의 얼굴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세 명의 사람이 모두 태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지민은 태형을 만나야만 했다. 꿈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던 꽃향기가 똑같이 재현된 이곳에 자신을 데려온 이유, 자신의 꿈속에서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 그리고 태형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픈 이유 같은 것들을 물어봐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민은 일단 사라진 태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태형은 어떠한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있었다. 자동차와 지민만을 남겨둔 채 말이다. 어떠한 흔적조차 없지만 지민은 태형이 있는 곳을 알 것만 같았다. 꽃을 따라가면 있던 작은 정자와 흰 연꽃밭. 그곳에 태형이 서있을 것만 같았다.
길게 펼쳐진 꽃길로 발을 옮기려던 지민을 뒤에서 누군가 붙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지민의 몸이 거칠게 돌려지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에 부딪혔다. 지민을 돌려세운 누군가는 지민의 팔목을 세게 붙잡아 올렸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어떠한 제지도 하지 못한 지민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몸을 따라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얼굴에까지 시선을 올린 지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의 손목이 끊어져라 붙잡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뿔테 안경과 단정한 복장을 고수하던 남준은 검은색 와이셔츠 차림에 안경이 없는 맨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고스란히 들어낸 남준은 지민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민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남준은 이내 지민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남준에게 붙잡혔던 손목은 짧은 시간 사이에 벌써 검붉은 색의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려움과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벌벌 떨던 지민은 손목을 부여잡은 채 남준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가득 찬 지민의 눈을 마주치자 남준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지민에게서 두어 발짝 물러섰다.
"여기까지 온 것은 너의 선택이었어."
"......."
"물론 김태형의 고집이 99%를 차지하지만... 1%라도 너에게는 책임이 있어.“
남준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형의 고집? 책임? 지민은 남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무서운 심정과 대비되게 지민은 남준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남준이 언젠가 제게 이런 말들을 한 적이 있는가. 지민은 자신을 책망하듯이 바라보는 남준의 눈빛이, 자신의 책임을 묻는 남준의 목소리가 꼭 어디선가 겪어본 적이 있었던 일인 것만 같았다.
"너에게 다시 한번 선택권을 주겠다. 나를 따라간다면 너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김태형을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말이야. 하지만 네가 만약 나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 따라가지 않는다면요?“
남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떨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남준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면서도 가장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변하지만 지민은 늘 변하지 않았었다. 변함없이 항상 같은 선택을 하는 지민에게 남준은 악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지민이 이번 생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지민은 남준의 말에 자신의 꿈속에 나왔던 태형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아프게 울고 있던 태형. 무언가에 열중해있던 태형. 그리고 아름답고도 슬프게 웃던 태형. 그 모든 태형이 지민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찾아달라고. 하지만 지민은 태형을 깊은 기억 속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찾기는커녕 첫 만남에 도망이나 쳤었지. 그래서 지민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태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사인을 보내는 태형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설령 두 번 다시 태형을 안 볼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일단 태형을 찾은 뒤에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이사님은 어디 계시나요.“
남준은 지민의 대답에 작게 웃었다. 지민의 말은 지긋지긋한 운명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남준의 마음 한편에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태형이 향후 70년 정도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더 지속될 수도 있고. 남준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지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지민의 눈 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덮었다.
지민이 눈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감겼던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남준도, 지민의 몸을 지탱해주던 차도 없어져있었다. 그저 환한 달빛과 하얀 꽃들만이 지민과 함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지민은 홀린 듯 달빛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민이 걸음을 한걸음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지민은 태형과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늘 다이나믹 했던 태형과의 첫 만남들.
그리움에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울면서 나누었던 태형과의 짠맛 나는 입맞춤.
다친 머리를 매만지며 지민의 손에 옥가락지를 끼워주던 예쁜 태형의 웃음.
그리고 지민의 전장 출전 직전에, 마지막 만남에서 태형과 했던 약속.
"연꽃이 피는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 난 변함없이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던 지민은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에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뛰기 시작했다. 꽃길의 마지막 종착점, 연꽃이 피는 곳을 향해서.
한참을 달리던 지민은 마침내 마주한 연꽃밭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정자 속에서 홀로 연꽃을 바라보며 서있는 낯익은 뒷모습 때문이었다. 벌써 수백 년도 더 된 약속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태형의 모습에 지민의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 생이 반복되는 동안 얼마나 두려웠을까.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태형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연꽃과 함께 이 장소에 봉인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지민은 아름다운 풍경들이 마음이 아팠다. 그제야 지민은 흰 꽃들이 핀 거리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짓던 태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민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태형이 있는 정자까지 몸을 움직였다. 태형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지민은 그 뒷모습에서 푸른 휘장을 두른 모습, 붉은 옷을 차려입은 모습, 흰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까지 다 느낄 수 있었다. 지민에게 모든 세월을 담고 있는 태형의 뒷모습은 외롭게만 느껴졌다. 자꾸 흐르는 눈물을 대충 훔친 지민이 태형의 안쓰러운 뒷모습을 품에 껴안았다.
"태형아.“
갑작스러운 반동에도 의연히 자리를 지킨 태형이 지민의 부름에 천천히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민아.“
지민을 부르는 태형은 늘 그러했듯이 울고 있었고 웃고 있었다. 그런 태형을 바라보는 지민은 이미 눈물이 가득 찬 채였다. 지민의 눈물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지은 태형은 지민의 작은 손을 풀고 몸을 틀어 지민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큰 손으로 지민은 눈물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울지 마, 지민아."
"늦어서 미안해. 몰라봐서 미안해.“
자신의 얼굴에 닿는 태형의 온기에도 지민은 쉽사리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태형에게 미안했다. 미안한 게 너무 많아서 지민은 다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지민의 마음을 알았는지 태형은 자신의 긴 손가락을 지민의 이마를 향해 약하게 튕겼다. 자신의 얼굴로 전해지는 작지만 알싸한 통증에 놀란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민의 표정에 큭큭거리며 웃은 태형은 고개를 숙여 지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난 미안하다는 말 싫어. 그냥 사랑한다고 해줘. 나 그거 듣고 싶었어, 지민아.“
가볍게 입도장을 찍은 태형이 지민의 볼을 쓰다듬었다. 태형의 말에 다시 눈물이 차오른 지민은 고개를 숙여 빠르게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리고는 태형을 마주 보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태형아. 진짜 많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지민아.“
따뜻한 온기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태형의 손길을 느끼던 지민은 손을 들어 태형의 볼을 쓰다듬었다. 지민의 손길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태형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얼굴에 닿는 지민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태형의 큰 손과 지민의 작은 손이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그 완전함에 태형은 비로소 제 슬픔이 담긴 연꽃밭에서 진심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오랜 슬픔을 떨궈낸 채로 말이다.
가을에 져서 겨우 내 죽어있던 연꽃이 봄을 지나 여름을 마주하여 마침내 다시 싱그럽게 피어올랐다. 두 사람이 생을 지나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듯이, 연꽃 또한 꽃이 지고 피는 것을 반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다시 끊어진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피어나는 꽃들처럼 오랜 시간 뒤에 다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연꽃이 피는 곳에서, 찬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