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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go 

포크

*여우비*

; 맑은 날 잠깐 내리는 비. 호랑이 장가가는 날.

 

   “습하네...”

 

   6월초. 여름의 시작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구교사 음악실은 선풍기조차 킬 수 없어 8월이 온다면 찜통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지민은 손부채질을 하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태형을 바라보았다. 입을 우물우물 대는 게 귀여워 소리 없이 웃었다. 지민은 팔을 괴곤 태형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에 높은 콧대. 짙은 눈썹과 입술 밑의 점마저도 사랑스러워 지민은 킥킥대었다.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던 지민은 태형이 자신의 손을 머리에서 잡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태형은 지민의 손을 내리고 나서도 놓지 않았다. 지민은 심장이 간질간질 거렸다. 그렇게 있기를 몇 분. 태형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오늘 왜 이렇게 졸아?”

 

   지민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태형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혹시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닌가싶어 퍼뜩 일어나 소매로 입가를 닦아냈다. 태형의 그런 모습에 지민은 배를 잡으며 웃었다. 태형이 머쓱하게 웃다가 자신의 손에 잡힌 지민이 손을 급히 놓았다. 태형은 자신이 왜 지민의 손을 잡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공부 좀 했어요...근데 손은,”

   “공부? 공부? 정말로?”

 

   지민은 태형이 공부했다는 말에 깜짝 놀라 태형의 말을 끊었다. 심지어는 마주잡지 않은 반대쪽 손까지 붙들곤.

 

   “이번에는 내기도 안했는데 대단해. 태형아. 난 널 믿고 있었어.”

 

   태형은 지민이 잡은 자신의 손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잠시. 지민의 말에 자신이 그 정도로 공부에 소홀했나 싶어 어색하게 웃었다. 지민 또한 기뻐하다가도 자신이 잡은 태형의 손에 놀라 부자연스럽게 놓았다. 지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태형을 보곤 물었다.

 

   “근데 갑자기 웬 공부?”

   “그냥...선생님 때문에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

 

   태형은 자신이 고백이라도 한 것 같아 심장이 두근대었다. 심장이 목에 턱 막힌 기분이었다. 지민은 태형의 동기가 자신이라는 것이 귀여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동기가 너무 불순해도 되는가싶어 웃음이 나왔다.

 

   “태형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너가 공부를 한다는 게 진짜 기뻐. 어떡하지. 정말.”

   “왜요?”

   “내 제자가 너무 귀여운 것 같아서.”

 

   지민이 태형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태형은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런 태형에 지민이 미소 지었지만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태형이 저를 좋아하고, 자신이 태형을 좋아하는 건 알았다.(태형은 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겠지만.) 그럼 뭐하나. 자신은 남자고, 태형보다 나이도 꽤 많고. 태형은 유명한 성악가가 될 테지만 자신은 그저 장애물. 지민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 덧없이 나쁜 생각만 들었다. 알고 보니 태형이 저를 좋아하는 건 착각이라던가, 그런 류의 생각들. 지민은 태형을 안은 자신의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까 수행평가 종이 교무실에 놓고 왔네. 비 올 것 같으니까 먼저 가. 나 기다리지 말고.”

 

   그렇게 지민은 음악실을 떠났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형은 가방을 싸면서도 머릿속에 떠도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는커녕 구름 한 점 없는데...쌤 수행평가도 아직 안 내주셨고...이상해.”

 

   태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파래. 태형은 자신이 이상한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래도 하늘은 파랬다. 물론 해가 지고 있어 파랗고 불그스름한 게 이쁜 하늘이었다.

 

   “쌤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태형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구교사를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지민은 교무실 창을 통해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태형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리가 둥글둥글한 게 귀여웠다.

 

   “차 끌고 다녀야지...”

 

   학교가 집에서 가까운 탓에 걷거나 버스를 타던 지민은 곧 장마도 올 테고 더불어 태형과의 하교를 피하기 위해 차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지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태형과 자신에게는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고마운 일인지는 지민 자신도 명확히 알 길이 없었다.

 

 

 

 

 

 

   태형은 기분이 몹시 심란했다. 수업을 듣다가도 한숨. 밥을 먹다가도 한숨. 노래를 부르다가도 한숨. 요즘은 매일 한숨만 쉬어댔다. 이유야 하나 뿐. 지민이 저번 주부터 태형을 피하기 때문이다. 바빠서, 다음 수업 준비, 교직원 회의 등등의 갖가지 이유로. 물론 어쩔 때는 정말로 바쁘긴 했다. 정말 ‘어쩌다가’. 태형은 지민이 요즘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것도 자신을 피하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했다.(정답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태형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참 더럽게 맑네,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태형은 책상에 엎드렸고 잠에 들었다. 공부를 해서 지민을 놀라게 하자는 작전은 점점 잊혀져가고. 그렇게 태형이 다시 눈을 뜬 건 점심시간이었다. 그것도 끝나기 10분 전.

 

   “이 새끼들...”

 

   태형은 창으로 운동장을 보며 내뱉었다. 자는 태형을 놔두고 가버린(정확히 말하자면 깨웠지만 태형이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고개를 괴곤 감흥 없는 표정으로 축구경기를 바라보던 태형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공을 열심히 몰고 가는 사람들 중 하나가 지민이었으니까.

 

   지민은 꽤나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잘하기도 했고. 요즘, 태형을 피하느라 생긴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운 참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함께 축구를 하자며 권해 신나게 뛰고 있었다. 지민은 혹시 태형을 마주치면 어쩌나 싶었지만 아쉽게도 태형이 없었다. 태형이 있었다면 또 피했겠지만 아쉬운 건 아쉬우니까. 한참을 태양 아래에 있으니 지쳤던 지민은 스탠드로 가선 물을 들이켰다. 물을 건넨 건 지민의 반 학생으로 태형과도 곧잘 어울리던 남학생이었다.

 

   “태형이는 어디서 뭐해?”

   “저기 있잖아요.”

 

   남학생이 자신의 반 창문을 가리키자 지민은 마시던 물을 뿜었다. 근처의 학생들은 지민을 놀리며 도망갔지만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민은 자신을 보고 있던, 아마 지금도 보고 있는 태형을 생각하니 뒤통수가 따가웠다. 아까 스치듯 보았던 눈빛에 지민은 소름이 돋았다. 삐졌겠지. 지민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태형에게는 바쁘다며 말조차 걸지 않던 지민이 다른 아이들과 열심히 놀았으니. 지민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태형은 물을 뿜는 지민을 보며 걱정부터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배신감은 있는 대로 느끼고 있는데 막상 지민의 모습을 보니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엇보다 운동을 하며 웃고 땀을 흘리는 지민의 모습은 처음 보니까. 하지만 태형은 정말 삐졌다. 솔직히 화는 안 났다. 지민의 얼굴을 보면 화가 나질 않으니. 어쨌든 태형은 창문에서 떨어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엎드렸다. 피해야지. 얼굴 맞대지 말아야지. 인사하면 무시해야지. 태형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을 세운지 1시간도 되지 않아 태형은 지민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다음 교시가 지민의 담당 과목이었으니까. 태형은 최대한 지민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지민은 열심히 태형을 바라봤고. 오죽하면 태형은 옆자리 친구가 수업에 집중하라며 면박을 주었고 지민은 한 여학생이 ‘쌤 어디 봐요!’라고 하며 놀리었다. 그덕에 반 아이들 전체가 웃었고. 거기서 웃지 못한 건 지민과 태형뿐이었다. 태형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뛰어나가 연습실로 향했다. 대기자가 많긴 했지만 이름을 못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태형은 종례시간에도 지민을 바라보긴 커녕 고개도 들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고 나서, 뒤도 안 보고 뛰어나간 태형에 말을 붙이려 했던 지민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태형은 연습실에서 죽치고 앉아 연습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릴 비우고 연습해도 실수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머리도 지끈지끈하고. 태형은 이렇게 연습할 바에야 나중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연습실을 떠나 정문으로 향했다. 태형이 학교에서 나와 한발 짝을 내딛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맑은 걸 보니 여우비였다. 금방 그칠까 싶었지만 기다리는 것조차 힘들었던 태형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그냥 걷기엔 많이 내리는 비에 가방을 머리에 쓴 태형은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시각, 교무실에 있던 지민은 창문 밖을 본 순간 태형이 비를 맞으며 집에 가는 것이 눈에 밟혔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태형이었다. 지민은 바로 뛰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내려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우산을 꼬옥 붙들었다. 하지만 태형이 비를 쫄딱 맞고 가는 모습이 계속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지민은 결국 자신이 쓸 노란 우산과 태형에게 줄 여분 우산을 들고 뛰어 내려갔다. 태형이 막 정문을 나설 때 쯤, 지민이 태형을 부르며 뛰어갔다.

 

   “김태형!! 김태형!! 야!!”

 

   지민의 소릴 들은 태형이 고개를 돌리자 눈이 동그래졌다. 지민이 갑자기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태형은 이때 도망갈까 조금 고민했다.) 태형은 지민이 반가워 바로 다가가려다가도 가만히 서있었다. 지민을 모르는 척 하기로 했으니까.

 

   “왜요?”

 

   태형은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웃지 마라. 웃지 마라. 김태형 웃지 마. 넌 여기서 웃으면 호구야. 태형은 그렇게 자신을 세뇌시켰다. 지민은 태형의 굳은 표정에 덩달아 표정이 얼어붙었다.

 

   “태형아. 이 우산 쓰고 가. 감기 걸려서 목 나가면 안 되잖아.”

 

   태형은 지민이 내민 우산을 꼬옥 쥐었다. 지민은 좋지 못한 태형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민이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고 말하자, 태형은 내적갈등을 시작했다. 잡아, 말아. 잡으면 뭘 말하지? 태형은 머릿속에서 대폭발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모 아니면 도. 태형은 지민이 준 우산을 다시 돌려주곤 말했다.

 

   “차 태워주세요.”

   “뭐?”

   “차 태워줘요.”

 

   지민은 몹시 당황했다. 갑자기 웬 차? 지민은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그 표정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빗방울 때문인지 뭔지 태형의 눈이 그렁그렁한 게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화룡점정으로 태형이 입술을 짓이겼다. 지민은 결국 태형을 1충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곤 교무실로 올라가 퇴근하기 위해 짐을 쌌다. 애초에 할 일은 태형을 피하는 동안 다 했기에 태형의 하교를 기다리며 농땡이를 피우던 참이었다. 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타. 태형아.”

 

   지민이 말하자 태형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태형은 횡재했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지민은 한숨을 내쉬곤 운전대에 잠시 기댄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이 입을 열었다.

 

   “쌤 저 왜 피해요?”

   “뭐?”

   “저 왜 피하냐구요.”

 

   지민의 표정은 당황 그 자체였다. 피하는 것 자체를 모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구로 물어볼지는 몰랐으니까. 지민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알만 굴리자 태형은 하던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저를 피하신다면 저야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이유라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녜요?”

 

   태형은 울컥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아까만 해도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작스레 흐려진 시야에 손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모습에 휴지를 건네었다. 지난 번 버스정류장에서 지민이 태형의 물기를 닦아준 그 휴지였다. 태형은 더 울컥해서 코를 먹었다.

 

   “저만 불안하죠? 처음부터 제가 선생님한테 앵긴 거잖아요. 저한테 관심도 없죠? 난 선생님 진짜 좋아하는데. 진짜 진짜 좋아하는데!”

 

   태형은 겨우 울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끅끅거리는 소리에 지민은 움찔했다. 미안해서 어떡해야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팬심은 개뿔! 이거 그냥...그냥 쌤이랑 사귀고 싶어요! 사귀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피하지만 마요. 그것도 안돼요?”

 

   태형은 휴지로 눈을 꾹꾹 눌렀다. 코는 빨갛고 딸꾹질마저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서 당장이라도 차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가는 순간 진짜 지민이 저를 무시할까 무서워 손잡이에 손만 올릴 뿐이었다.

 

   “태형아. 나 좀 봐줘. 태형아. 응? 내가 다 미안해. 나 좀 봐봐.”

 

   태형은 지민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서서히 들었다. 그 순간 지민이 태형의 멱살을 잡고 잡아당겼다. 태형은 상황파악이 안됐다. 갑자기 뭐지? 태형은 제 앞에 있는 것이 지민이 맞기는 한 건가 싶었다. 제 입술 위에 있는 것이 지민의 입술이라는 것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지금 쌤이랑 뽀뽀한 거야?

 

   태형은 지민이 저를 놓아주고 운전하여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멍하니 있었다. 주소를 물으면 주소를 답하고 지민이 무언가를 물어보면 그저 ‘네.’라고 답하는 것이 다였다.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일 봐.”

 

   그리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 자신의 방에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형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태형은 웃기 시작했다. 웃으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창밖을 보니 비는 그쳐있었다.

 

   “조만간 김태형비 내리겠다...”

 

   태형은 여우비를 생각하며 말했다.

 

 

 

 

 

 

   “쌤. 우리 사귀는 거예요?”

 

   기말고사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다. 구교사는 너무 더운 탓에 요즘 지민과 태형은 잘 이용되지 않는 음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태형은 문제집을 풀다가 문득 물었다. 당연히 해볼 만한 질문이었다. 한 쪽이 고백을 했고, 고백을 받은 쪽이 있는 힘껏 입술박치기를 행한 게 일주일도 훨씬 더 됐으니. 지민은 피아노 건반을 툭툭 건드렸다. 미♭의 소리가 여러 번 음악실을 채웠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재촉하지 않고 팔을 괸 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지민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감정보단 이성적으로 대답해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지민은 태형이 또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할까 피아노에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태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지민의 옆에 앉았다. 좁은 피아노의자가 참으로 좋았다. 붙어있을 수 있으니까. 지민은 태형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커져가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옆에 앉자 움찔하는 지민의 모습에 태형은 살풋 웃으며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머리를 기대었다. 이런 건, 지민이 상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요?”

 

   태형이 작게 속삭였다. 태형의 입이 지민의 귀에 가까웠다. 그만큼 태형의 소리가 지민의 귀를 간질였다. 지민은 예상 외로 차분한 태형의 모습에 안도했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근데 우리 키스 했잖아요.”

   “그런 건 키스가 아니지...”

   “그럼 뭔데요?”

 

   태형은 오른손으로 지민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분명 고백은 태형이 했는데 마치 자신이 한 듯 지민의 얼굴은 빨갛게 타올랐다. 태형은 지민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지민의 손이 얼굴처럼 뜨거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뽀뽀...?”

 

   태형은 지민의 대답에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었다. 너무 귀여워. 태형은 속으로 이 말을 계속 되뇌었다. 두툼한 입술 사이로 작게 튀어나온 단어가 너무 귀여웠다. ‘뽀뽀’가 나온 그 입술에 그 행위를 그대로 해주고 싶었다. 열 번이든 백 번이든. 지민은 영문도 모른 채 웃어대는 태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쌤 진짜 귀여워요.”

   “뭐래.”

   “근데요. 저번에 한 게 뽀뽀면, 우리 키스할 날도 올까요?”

 

   태형은 지민을 한껏 끌어안곤 물었다. 묻는 순간 목이 메여 침을 삼키곤 문장을 이어갔다. 부정한다면 절대 안 놔줘야지. 그렇게 생각한 태형은 지민의 입에서 긍정에 대답이 나와도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꽈악 끌어안았다.

 

   “올 것 같아...”

 

   지민의 얼굴은 익을 듯 뜨거웠다. 지민은 이 정도면 고백이라고 해도 무방한 거 아닌가 싶어 창피했다. 부끄럽고. 태형이 놓아주질 않으니 얼굴은 더욱 더 뜨거워져갈 뿐이었다. 태형은 그대로 지민의 볼에 뽀뽀했다. 키스 안했으니 이 정도면 양반이지. 암. 태형은 자신의 절제력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지민은 태형의 볼뽀뽀에 얼굴을 가리곤 바로 피아노에 기대었다. 불협화음으로 섞인 여러 음들이 음악실로 퍼져나갔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목도 빨개졌네. 그렇게 생각한 태형의 손이 지민의 뒷목에 닿기 전에 지민이 일어났다. 지민은 태형이 그랬듯 볼뽀뽀를 했다. 충동적으로. 참기가 싫었다. 그 이후 바로 음악실을 빠져나갔다. 지민은 태형도 했으니 자신이라고 못할 건 없고 생각했다. 그런 것치곤 얼굴이 붉다 못해 타올랐지만.

 

   음악실에 남겨진 태형은 지민이 입 맞춘 볼을 부여잡고 피아노 위로 쓰러졌다. 얼굴이 아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차가운 피아노 덕에 뜨거운 자신의 얼굴이 식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눌린 피아노 소리가 그 어느 사랑의 세레나데보다도 더 듣기 좋았다. 적어도 지금의 태형에게는.

* 여름방학 *

 

 

 

   “이게 무슨 일이야.”

   “에헴.”

 

   지민은 반 아이들에게 꼬리표를 나누어주는 도중 태형의 것을 들고 경악했다. 무려 평균 52점. 내기를 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점수였다. 반 아이들은 성공 실화라며 태형을 추켜세웠고 평소 태형을 잘 알고 지내던 선생님들은 태형이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했다. 지민은 태형에게 정말 잘했다며 반 아이들 앞에서 한껏 끌어안았다.(안은 것치고 안겨진 것처럼 보인 것은 지민 빼고 모두가 알았다.) 태형은 얼굴이 빨개졌고, 아이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방학식인 만큼 학교의 모두가 흥분해있었다. 지민은 조금 아쉬웠고. 그야 방학을 하면 태형을 자주 못 볼 테니. 물론 방학 자체는 무척 좋아하지만.

 

   3교시가 끝나는 종이 치는 순간 아이들은 모두 반에서 나갔다. 지민이 미리 종례를 해준 덕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곤 킥킥대며 출석부를 챙기던 지민에게 태형이 다가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피시방 이야기를 하며 한껏 들떠있던 태형이 활짝 웃더니 지민에게 물었다.

 

   “쌤 어디 살아요?”

   “왜?”

   “여기 적어주세요.”

 

   태형은 지민의 물음에 답하지 않곤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지민은 빨리 쓰라며 재촉하는 태형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태형은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태형이 지민의 손을 감싸며 볼펜을 쥐어주자 지민은 자신의 손이 괜히 더 작아 보여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지민이 집주소를 적어주고 나서야 태형은 반에서 나갔다. 신경 쓰이는 인사를 하곤.

 

   “쌤 내일 봐용.”

 

   설마. 지민은 설마 했다. 설마 오겠어? 하지만 괜한 기대감에 찬 지민은 방 구석구석까지 청소했다. 다음 날. 지민은 단정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에이 안 오겠지, 하면서도 지민은 한껏 태형을 기다렸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사실 오전에도 초인종이 울렸었는데 지민은 태형인 줄 알곤 뛰어나가다가 새끼발가락을 방문에 찧었다. 그리고 힘차게 현관문을 열자 그 앞에 있는 건 택배아저씨였다. 지민은 오전의 민망한 기억을 되짚으며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가선 물었다.

 

   “누구세요?”

   “...”

   “누구세요?”

 

   지민은 벨튀인가 싶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자 그 앞엔 태형이 있었다. 밖이 많이 더운지 태형은 땀을 삐질 흘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쌤. 놀랐죠?”

   “어...어. 들어와.”

 

   지민은 급히 신발장 앞 거울로 머리를 다듬었다. 태형은 지민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지민은 그런 태형이 귀여워 말리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혹시 몰라 에어컨을 틀어놓은 덕에 태형의 땀은 금방 말랐고 지민은 얼음물을 태형에게 건넸다.

 

   “이거 마셔.”

   “감사해요!”

 

   태형은 목이 말랐던 것인지 멈추지 않고 벌컥벌컥 단번에 다 마셨다. 태형은 컵과 함께 자신이 들고 온 쇼핑백을 지민에게 건넸다.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라며.

 

   “비싸지 않아? 그냥 마트 같은 데서 파는 것처럼 안 보이는데...”

   “그보다 빨리 뜯어봐요!”

 

   태형은 지민의 물음을 어물쩍 넘기곤 포장을 뜯어보라며 재촉했다. 그야 조금 비쌌으니까. 쓸데없는 걸 왜 사냐는 어머니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구매했던 태형은 지민이 좋아하는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지민은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눈을 감고 귀 기울였다. 태형은 무심코 지민의 귀를 막을 것 같았다. 황홀하다는 표정은, 제 노래를 듣고서만 지어주길 바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에 들어요?”

   “응. 진짜 고마워. 진짜 너무 좋아.”

   “좋으면 볼뽀뽀!”

 

   태형은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지민에게 내밀었다. 눈까지 감고. 태형은 지민이 금방 밀어내지 않을까 하여 살짝 실눈을 떴다. 근데 웬걸. 귀까지 빨개진 지민의 입술이 쪽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의 볼에서 떨어졌다. 태형은 지민보다 더 붉은 얼굴이 되선 어버버거렸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웃으며 바라보다 소파에 앉혔다. 문득 지민은 태형과 사귄다면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까 싶어 미소 지었다.

 

   태형의 고백 전에는 불안하고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면, 고백을 받은 후에는 그저 긍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너무 낙천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뭐 하러 온 거야?”

   “글쎄요. 쌤이랑 둘이서 오붓한 시간보내기?”

 

   지민은 웃으면서 태형을 툭 쳤다.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었다. 사실임을 알아서 더 좋았고. 지민은 어제 태형이 올 것을 대비해 산 아이스크림을 꺼내었다. 태형이 쉬는 시간마다 입에 달고 살던 멜론 맛 아이스크림과 자신이 먹을 초코 맛 쮸쮸바였다.

 

   “태형아 이것 좀 뜯어줘.”

   “선생님은 손이 작으셔서 못 뜯으시나보다.”

 

   태형이 네모지게 웃으며 말했다. 지민은 말하는 게 아주 얄미워 꿀밤이라도 먹여주려다 말았다. 웃는 걸 보니까 그냥 손이 안 올라가서. 지민은 아이스크림을 태형에게 넘기곤 자신의 손을 접었다 피길 반복했다. 내 손이 그렇게까지 작나. 지민이 심란한 마음으로 손을 이리저리 보던 찰나 퍼억, 하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지민이 고갤 들자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태형이 보였다. 그보다 당황스러운 건 지민이었지만.

 

   “옷 줄 테니까 화장실에서 대충 초코 닦아내고 갈아입고 나와. 초코는 옷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으니까 닦아놓을게.”

   “네에...”

 

   태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한 입에 아이스크림을 다 넣는 걸 보곤 지민은 경악했다. 머리 아플 텐데. 지민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화장실에서 으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쿡쿡 웃으며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옷 가져가.”

 

   태형은 지민의 말에 자신의 얼룩진 옷을 건네곤 새 옷을 집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지민은 그런 태형에게 그저 웃어주었다. 그렇게 지민이 옷에 주방세제를 바르고 있는 도중, 태형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어...쌤 옷이 너무 작아요.”

 

   지민이 덩치를 생각하곤 조금 큰 옷을 줘야하는 것을 깜박하곤 평소 저가 입던 옷을 준 탓이었다. 작은 옷에 꽉 끼여 있는 태형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지민은 마냥 웃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많이 작은 것같이 느껴져서. 지민은 평소 태형이 작다며 놀리던 나날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하하하. 지민은 인조적으로 웃으며 조금 더 큰 상의를 가져다주었다.

 

   “걱정 마세요, 쌤.”

   “뭐가?”

   “쌤이 작은 게 아니라 세상이 큰 거니까요.”

 

   태형은 그렇게 말한 뒤 지민에게 딱밤을 맞았다. 태형은 딱밤을 맞으면서도 그냥 웃을 뿐이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고개를 젓곤 소파에 앉았다. 태형은 굳이 넓은 옆자리가 아닌 좁은 지민과 팔걸이 사이에 앉았다. 지민은 작게 웃었다.

 

   “근데 우리 진짜 뭐하지?”

   “영화 볼래요? 제가 USB에 다운 받아 왔어요.”

   “어떤 건데?”

   “‘말할 수 없는 비밀’이요. 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그래? 나도 본 적 없으니까 같이 보자.”

 

   거짓말이었다. 지민은 그 영화를 정확히 3번이나 봤다. 집에서 다운 받아서 보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틀어주셔서 보고, 친구가 같이 보재서 보고.(친구와 볼 때는 잤다.) 하지만 태형과 보는 거라면 분명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태형을 보게 될 테니 괜찮았다. 지민은 태형의 USB를 티비에 꽂곤 태형의 옆에 앉았다. 영화는 시작도 안했는데 태형은 손부터 잡았다. 땀이 날 것만 같았다.

 

   지민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예상대로 영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형을 힐끔힐끔 보았다. 진짜 너무 잘생겼다. 지민은 자신이 작곡가고 태형이 뮤즈였다면, 베토벤 뺨치는 명곡들을 써내려갔을 것이라 다짐했다.

 

   “왜 자꾸 쳐다봐요?”

   “잘생겨서.”

 

   시선을 느낀 태형이 묻자 지민이 답했다. 겉으로는 당황하지 않은 듯 보인 태형이었지만 지민은 마주잡은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민은 속으로 태형을 귀여워하며 웃었다.

 

   영화가 후반부에 이를 때 즈음, 지민의 고개가 태형의 어깨로 떨어졌다. 졸음과 싸우던 지민이 결국 져버린 것이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보며 키득거리더니 이내 손을 더 꽈악 잡았다.

 

   “쌤. 영화 끝났는데요.”

 

   태형이 지민을 흔들어 깨우자 비몽사몽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나 잤어??”

   “완전 렘수면하시던데요.”

 

   태형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지민이 침이라도 흘렸나싶어 입가를 닦던 도중 태형이 지민의 손을 잡곤 빤히 바라보았다.

 

   “쌤 손톱 기시네요.”

   “깎을 때가 되긴 했어. 피아노 치려면 짧은 상태여야 하니까.”

   “제가 깎아드릴까요?”

 

   태형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손톱이라...손톱...지민은 태형이 자신의 손톱을 깎는다면 분명 엄청나게 부끄러울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태형이 ‘제발 깎게 해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손톱깎이를 가져왔다.

 

   “손톱도 귀여워요.”

   “그래그래.”

 

   지민은 자신의 왼손에 집중한 태형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쌤 몇 살이세요?”
   “맞춰봐.”

 

   지민이 다리를 접어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태형은 지민의 키득거리는 소리에 자신도 미소 지었다.

 

   “27살?”
   “땡.”

   “28?”
   “틀렸어.”

   “26.” 

   “정답!”

 

   지민이 태형의 머리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태형은 생각보다 젊은 지민의 나이에 놀랐다. 물론 얼굴만 봐서는 대학생이라 해도 믿겠지만 군대도 갔다 왔으니 나이가 꽤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태형은 지민의 왼손을 놓곤 오른손을 쥐었다. 지민은 자신의 손을 펴서 손톱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깎인 게 이쁜 모양새였다. 태형은 또 다시 톡, 톡, 지민의 손톱을 자르며 물었다.

 

   “아까 영화 왜 같이 보자고 했는지 아세요?”

   “왜?”
   “거기 장면 중에 듀엣 하는 거 있잖아요. 주인공 두 명이서. 쌤이랑 해보고 싶어서요.”
   “할래?”

   “네?”

   “내가 가르쳐줄게. 가르치는 거야 뭐 원래 선생님이고.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하니까 너랑 쳐도 재밌을 것 같아. 대신 엄청 빡세게 가르칠 거야?”

   “저야 좋죠.”

 

   태형은 웃더니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은 태형의 네모난 웃음을 따라했다. 소파에 기댄 지민은 태형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멋져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혹시 개학하고 나서부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뭔데?”
   “정기연주회 때문이요.”

   태형이 다니는 학교는 매년 봄방학 때 정기연주회를 연다. 음악과의 성악 전공 학생들과 악기를 다루는 모든 아이들이 참가하는데, 특별한 게 있다면 바로 독주. 피아노 한 명. 바이올린 한 명. 성악 한 명. 그리고 ※콰르텟을 위한 성악 전공 학생 네 명. 마지막으로 ※퀸텟을 위한 바이올린 두 명, 비올라 두 명, 첼로 한 명. 순서와 구성은 매년 비슷하긴 했지만 마지막 무대만큼은 변함없이 합창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이 되어 음악의 중심을 잡는 역할인 만큼 독주, 콰르텟, 퀸텟을 하게 될 학생들은 11월 축제 때 개최되는 교내 대회에서 선발된다.

 

   ※콰르텟 : 4중창(연주)이라는 뜻. 네 사람으로 편성된 밴드 또는 그 연주

   ※퀸텟 : 5명의 연주자를 위한 실내악. 현악 5중주는 주로 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로 구성. 성악 5중주는 소프라노 2, 알토, 테너, 베이스로 구성.

 

   “보통 첫무대는 퀸텟이고 그 이후 학생들이 악기를 들고 들어와요. 중간에는 독주도 있고 오케스트라도 있고.”
   “내가 도와줄 게 있어?”

 

   지민은 작년도 ※솔리스트를 떠올렸다. 분명 이미 졸업한 3학년 학생이었다. 성악 독무대를 한 것은. 태형은 아마 퀸텟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년에는 성악 5중주를 했으니까.

 

   ※솔리스트 : 음악이나 발레 공연을 단독으로 하는 사람.

 

   “대회가 아닌 제가 서는 첫무대니까 꼭 솔리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작년에. 재작년에도 그랬고. 그래서 올해는 열심히 연습해서 뽑히려구요. 근데 학원에서는 대학 입시 연습하니까...시간 나실 때 반주해주실래요?”

   “나야 언제든지 좋아.”

 

   태형은 손톱깎이를 내려놓았다. 오른손까지 반듯하게 잘 잘랐으니까. 태형은 지민의 양손을 고이 잡고 입술을 맞췄다. 지민은 깜짝 놀라 손을 빼려했지만 태형이 꼬옥 쥐고 있는 탓에 쉬이 빼지 못했다.

 

   “갑자기 뭐해?”

   “선생님 손 진짜 이쁘다. 눈도 이쁘고. 코도 이쁘고. 다 예뻐요.”

 

   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지민은 갑작스런 태형의 말에 귀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보며 키득키득 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아니에요. 맨날 생각하는 건데 말만 안한 거지.”

 

   태형은 지민의 이마에 쪽하곤 입술을 대었다 떼어냈다. 지민은 그 찰나의 순간이 아쉬워 이마를 문질렀다. 태형이 화장실 변기에 손톱을 버리고 온 사이 지민은 악보를 뒤적였다. 지민은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오는 연탄곡의 악보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유명하기도 하고, 평소 이 악보 저 악보하며 여러 곡들을 연주하길 좋아하니까. 태형은 지민의 옆에 기대어 앉았다.

 

   “내가 이 주 만에 마스터하게 해줄게.”

   “저 매일 와야 해요?”
   “...안 오면 어쩔 수 없지.”

   “장난이에요. 장난. 꼭 와야죠. 가끔은 못 올수도 있어요. 학원 땜에.”

 

   태형이 지민의 입에 뽀뽀를 하며 말했다. 지민은 당황한 나머지 악보로 태형을 흠씬 때려주었다.

 

   “크흠. 오늘은 간단하게 손만 풀자. 어렸을 때 피아노 배웠어?” 
   “체르니 30까진 했어요. 초등학교 때 끊긴 했지만.”

   “간단하게 칠 수 있는 곡은 있어?”

   “...젓가락 행진곡?”

 

   지민은 태형이 자신을 슬쩍 바라보더니 자신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에 빵 터졌다. 태형은 얼굴이 벌게져선 지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그제서야 웃음을 멈추고 태형을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다.

 

   “내가 반주 쳐줄 테니까 멜로디 쳐볼래?”

 

   태형은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지민의 신호와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태형은 엉성했고 버벅댔지만 지민이 태형의 템포에 맞추었다. 분명 많이 듣던 곡이었다. 어디에서든 피아노가 있다면 한 번씩 흘러나왔으니까. 들어보지 못 했을 리도 없고. 하지만 분명 아는 곡이었지만 낯설었다. 지민과 태형 모두. 피아노가 닿는 손끝이 간질였다. 연주 도중 가끔씩 스치는 팔이 후끈대었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주가 끝나갈 즈음, 지민이 고개를 살짝 돌려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사실 연주 중반부부터 지민을 힐끗대고 있었다. 그렇게 지민이 태형을 응시한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지민과 태형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웃었다. 아무 말 없이. 그리곤 얼굴을 맞대었다. 뽀뽀도 키스도 아닌 입맞춤이었다. 그저 입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연주는 끝난 지 오래였다.

 

   지민의 눈꼬리가 휘어짐과 함께 둘의 얼굴 간격을 벌어졌다. 태형과 지민 모두 귀 끝이 타오르듯 붉었다.

 

 

 

 

 

 

   “쌤 자고 갈래요.”

   “안. 돼. 부모님도 걱정하실 걸.”

    “저 진짜 전화 해봐요? 우리 엄마 진짜 자라고 할 걸요?”

   “해봐.”

 

   피아노 연주 후, 둘은 예능을 보거나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었다. 저녁으로 배달음식까지 시켜먹고 밖이 어두컴컴해질 무렵. 지민은 태형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태형은 한 번만 재워달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태형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뼘 통화로. 지민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도록.

 

   “왜 아들.”

   “엄마. 나 쌤 네 집에서 자고가면 안 돼요?”
   “나야 상관없는데 선생님께 민폐잖아.”
   “쌤이 된다고 하면 상관없는 거죠?”

   “그래. 맘대로 해도 돼.”
   “이따 문자드릴게요!”

   “그래 끊어.”

 

   지민의 예상과는 달리 태형의 어머니께서 너무 흔쾌히 허락하셨다. 지민은 당연히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라는 생각에 태형을 집에 돌려보내려 했지만, 직접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이젠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고 가. 졌다. 내가.”

   “넴.”

 

   으휴. 지민은 피식 웃으며 바람 빠지는 소릴 내더니 옷장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었다. 그걸 본 태형은 지민에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곤 물었다.

 

   “그건 왜 꺼내요?”

   “넌 침대에서 자. 난 소파에서 잘게.”

   “엥 왜요? 같이 자면 되지.”

 

   지민은 태형의 말에 놀라 이불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급하게 주웠다. 물론 친한 사이에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하지만 지민과 태형의 경우엔 달랐으니까. 지민은 태형의 순수한 얼굴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같이 자려는 개수작일까, 그저 소파에서 잘 저를 걱정하는 것일까. 지민이 생각하는 사이 태형은 지민의 손에서 이불을 빼내어 다시 옷장에 넣곤 베개를 집었다. 태형이 불까지 끄고 침대에 눕자 지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빨리 누워요.”

   “진짜?”

   “진짜.”

 

   지민은 슬금슬금 태형의 옆에 누웠다. 싱글 침대라 좁은 감은 있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지민이 눈을 멀뚱멀뚱 뜨곤 태형을 바라보자 눈을 감고 있던 태형이 눈을 뜨곤 지민을 껴안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너가 개수작 부리고 있구나하는 생각.”

 

   지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형을 밀어내진 않았다.

 

   “개수작이라뇨. 추워서 그래요. 추워서.”

 

   지민은 태형의 말에 피식 웃곤 품속에 파고들었다. 개수작인 걸 알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피할 수 없음 즐겨라. 지민은 그런 마인드로 태형을 꼬옥 껴안았다.

 

   “에어컨 꺼줘?”

   “쌤. 여름에 에어컨을 왜 켜는지 알아요?”

 

   태형은 지민의 말에 급하게 말했다. 에어컨을 꺼버리면 붙을 이유가 없으니까.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웃었고 태형은 붉어진 얼굴로 하던 말을 이어갔다.

 

   “추우라고 트는 거예요. 더운 여름날 에어컨으로 춥게 해야 붙을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에어컨은 개수작하라고 만든 거예요.”

 

   태형은 키득거리며 지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눈을 감았다. 지민 또한 속으로 태형의 말에 동의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개수작이라면 몇 천 번이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BUSK *

 

 

 

   지민이 태형에게 연탄곡을 마스터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이주일하고도 4일이 더 지났을 때, 태형은 드디어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하루에 두 시간씩 연습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집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 와서도 피아노에 매달려있었는데, 태형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뒤늦게 피아노에 빠진 건 아닐까 걱정했다. 의미 없는 걱정이었지만 태형은 하나에 빠지면 집요하게 파고드니까.

 

   [쌤 저랑 어디 좀 가요. 지금 밑에 있으니까 내려와요.]

   [차키 필요 없음!!! 대신 버스 카드 챙길 것!]

 

   다음 날. 지민은 어김없이 태형을 기다리던 도중 문자를 받았다. 옷이야 태형을 맞이하기 위해 외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나가면 되겠지만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자신과 어딘가에 가려는 태형에게 의문을 품었다.

 

   “우리 어디가?”
   “가보면 알아요!”

 

   태형은 한껏 들떠서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지민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눈을 돌렸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태형이 가는 곳이 분명 나쁘지 않는 곳일 거란 걸 알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니, 심리적으로 불안한 건 당연했다.

 

   “쌤 다음 역에서 내려야해요.”

 

   다음 역은 신촌이었다. 지민은 신촌에 가볼만한 곳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일어났다. 지하철의 문이 열리고 태형은 지민을 이끌었다. 태형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3번 출구를 찾아 헤매더니 저쪽이라며 지민을 데려갔다.

 

   지민은 계단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쇼팽의 ‘추격’이었다. 아마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출구에 다다랐을 때, 연주자의 연주가 끝났다. 그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고 다음 곡을 이어갔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였다.

 

   피아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구경했고 연주자의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이 옆에서 킥킥대며 떠들었다. 태형은 지민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구석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거 보러 온 거야?”
   “이것도 좀 보고...다른 것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난 낯선 사람들 앞에선 연주 못하는 거 알잖아...”

   “치고 싶을 때 치면 되죠. 우리 같이 연습한 듀엣 치던가. 아니면 저 혼자 쳐볼까요?”

 

   태형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웃으며 바라보다 다시 피아노에 집중했다.

 

  연주자는 그저 피아노만 쳤다. 주변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민은 그런 그가 부러웠다.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고 싶었으니까. 라 캄파넬라의 연주가 끝이 나고, 연주자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의 친구들 무리에 있던 한 학생이 나와 그 자리에 앉았다. 입시 곡을 치던 전 학생과는 달리 드라마의 OST가 흘러나왔다. 그 피아노 소리는 사람들을 더 불러 모았고 많은 사람들이 넋을 놓고 보았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어진 다음 곡은 요즘 유명 가수 노래의 편곡이었다. 워낙 유명한 노래를 더욱 화려하게 편곡하니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지민은 손이 간지렀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지민은 손가락으로 태형의 손을 꾸욱꾸욱 눌러댔다. 앞에서 피아노를 치곤 싶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연주가 끝이 나고, 피아노를 치던 학생과 그의 친구들을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흩어져버려 제자리에 남은 것은 태형과 지민뿐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손을 놓곤 속삭였다.

 

   “쌤. 제가 곡 하나를 칠 건데, 쌤만 보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쌤만 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부담 없이 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태형은 그렇게 말하고 지민을 피아노 옆으로 이끈 뒤 의자에 앉았다. 지민을 보곤 씨익 웃더니 손을 이리저리 풀었다. 숨을 한 번 내쉰 뒤 태형의 왼손이 건반을 누르며 연주가 시작되었다. 한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는 요즘에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 사실 태형은 집에서 어머니께 일대일 레슨을 받으며 이 곡을 연습했다. 워낙 쉬운 덕에 금방 마스터 할 수 있었고, 연습을 거듭하여 악보를 다 외웠다.

 

   태형은 연주 중간 중간 지민을 힐끔댔다. 다른 사람은 몰랐겠지만 그 순간마다 태형이 조금씩 틀린 걸 지민은 눈치 채곤 미소 지었다. 기다란 손가락인 만큼 도에서 도까지 쉽게 닿는 덕에 깔끔한 연주였다. 태형은 간간히 틀리긴 해도 끝까지 연주했다. 연주가 끝이 나고, 태형은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지민에게 앉으라는 의미였다. 지민이 슬그머니 앉자 태형이 속삭였다.

 

   “쌤 네 집에서 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긴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알겠죠? 나만 선생님을 보고 있어요.”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였다면 시도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태형이 건반 위를 세 번 톡톡 건드렸다. 하나, 둘, 셋과 같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지민은 연주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너무 심장이 두근대는 탓에 갑자기 빨라졌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따랐고 점점 느려지도록 리드했다. 서로의 손이 교차되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며 멜로디를 완성해나가길 몇 번. 곡이 끝났다. 지민은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 너무나도 긴장되고 힘들었는데. 지민은 피아노 근처에서 자리를 떠났고 태형을 그 뒤를 따랐다. 무작정 걷는 지민에 태형은 그와 함께 카페로 들어갔다.

 

   “덥죠?” 

   “더운 것보다도 심장이 아파. 너무 떨려.”
   “그래서 안 좋았어요?”

   태형이 지민에게 아이스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지민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어. 틀리면 어쩌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해서. 근데 막상 치고 나니까 아쉽더라.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서 치니까 무섭지만 뭔가 왠지 모르게 좋았어. 너랑 있으니까 더 안심되고.”

 

   지민은 말을 끝낸 뒤 빨대로 커피를 쪼옥 빨아마셨다. 태형은 지민의 대답에 안심했다. 혹시라도 지민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니었나, 해서. 태형은 자신이 시킨 초코라떼를 들이키며 실실 웃었다.

 

   “가능하면 다음번에 또 올까요?”
   “응. 좋아. 같이 오자.”

 

 

 

 

 

 

   그 날 저녁. 집에 도착한 지민이 씻고 나오자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그걸 본 지민은 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했어?”
   “쌤 저희 피아노 친 거 누가 어디에 올렸나 봐요! 단톡방에서 애들이 뭐냐고 묻길래 같이 놀러갔다가 피아노 좀 쳤다고 했어요.”
   “애들이 뭐라고 더 안 해?”

   “자기들도 같이 가자나 뭐라나...그래서 저랑 쌤 둘이서만 갈 거라고 했어요. 잘했죠?”

   지민은 웃으며 태형을 우쭈쭈 해주었다. 태형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행여 반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했는데 다행히도 태형이 잘 수습한 후였다. 지민은 태형과의 전화 후 반톡방을 보며 아이들이 자신을 제외한 톡방을 하나 더 만들었구나 싶어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곤 태형이 보낸 영상을 보았다. 아까 태형이 말한 자신과 태형의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지민은 왠지 자신이 태형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것만 같아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지민은 머리 말리는 것도 잊곤 베개에 자신의 붉은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태형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간간히 찍혔는데, 마치 좋아한다는 게 다 드러나는 것만 같아 흐뭇했다.

 

   그 시각 태형 또한 영상을 계속 돌려보며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이 지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반 아이들이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눈빛이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다. 태형은 눈을 가리곤 앓았다. 하지만 가끔씩 지민이 저를 쳐다보는 모습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어댔다.

 

 

 

* Largo *

; 아주 느리게

 

 

 

   [태형아. 오늘 플룻 연주 보러갈 거니까 우리 집으로 4시까지 와.]

   [넴.]

 

   여름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 지민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했던 태형과의 약속을 기억하곤 유명 플루이스트의 연주회를 예매했다.

 

   지민의 문자를 받은 태형은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옷을 입었다. 차를 타고 달리기를 40분. 지민과 태형은 연주회가 열릴 공연장에 도착했다. 무대는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하기 10분 전. 지민과 태형 또한 착석했다.

 

   “플룻 연주회는 처음 와 봐요.”
   “그래? 난 플룻도 소리가 곱고 예뻐서 되게 좋아해.”

 

   그렇게 태형과 지민이 이야기를 나누기를 몇 분. 안내방송이 나온 뒤 무대의 커튼이 올라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두가 앉아있었으며 재치 있는 지휘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지휘자가 무대의 주인공, 플루이스트를 부르며 사람들의 커다란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형은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역시 학생들과 연주자들 사이에는 실력과 경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린의 활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마치 파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플룻 연주회는 처음이었던 태형은 눈을 반짝이며 무대를 보았다. 흔히들 말하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였다.

 

   지민은 무대보다도 팔을 괴곤 태형을 보았다. 피아노 연주회나 성악 공연도 좋겠지만 새로운 악기를 접해보는 것도 태형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지민은 귀로 흘러들어오는 커다란 음악의 소리보다 태형이 작게 내뱉는 감탄사에 좀 더 집중했다.

 

   연주된 곡들은 다양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클래식부터 세미 클래식까지. 2시간 동안 많은 곡들이 연주되었다. 태형은 연주회장에서 나오면서도 계속 귓가에 노래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제 목소리가 바순이라면 선생님 목소리는 플룻인 것 같아요.”

   “그런가?”
   “성악으로 치면 저는 알토, 선생님은 테너인 거죠. 말 나온 김에 저한테 성악 배워보실래요?”
   “내가 무슨 성악이야.”

 

   지민이 태형을 조금 밀면서 말했다. 태형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제안한 것이었지만 지민이 가르쳐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알려줄 마음이 있었다.

 

   태형과 지민은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탔다. 밤이라곤 하지만 한여름인 탓에 차 안은 뜨끈한 상태였다. 지민은 시동을 걸어 에어컨을 튼 뒤 태형을 바라보았다.

 

   “넌 어떤 곡들이 좋았어?”
   “음. 다 좋았어요. 기교를 부리는 곡도, 천천히 흘러가는 곡도.”

 

    지민은 태형의 말을 들은 뒤 안전벨트를 맸다. 손에 괜히 땀이 났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손을 두어 번 접었다 피기를 반복하는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은 물을 내밀었다. 땀에 절은 것을 보곤 더위에 약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지민은 태형이 건넨 물을 한 모금 입에 꽉 차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난 느린 곡들이 좋아. 헨델의 Ombra mai fu(그리운 나무그늘) 같은 거. 듣기도 편하고 되게 차분한 기분이 들거든.”

   “그래요?”

   태형은 지민의 말에 귀 기울였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민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했기 때문에. 태형은 지민을 빤히 쳐다봤다. 지민은 연신 혀앓이를 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도 그렇고, 태형이 바라보는 눈빛에 긴장되어 입이 계속 말라갔으니까.

 

   “Ombra mai fu의 빠르기는 라르고인데, 라르고는 아주 느리게잖아.”
   “그렇죠.”

   “평소 나를 보면 되게 느린 거 알지?”

   “맞아요. 조례에 늦은 적도 있으시고.”

   “어쨌든 나는 뭐든 느린 게 좋아. 내가 원체 느려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요?”

 

   지민은 서론을 늘어놓았다. 태형은 재촉하지 않고 지민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고. 태형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입을 열곤 뻐끔뻐끔 대었다. 태형은 왠지 다음에 지민이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태형은 지민의 한 쪽 볼을 살며시 잡곤 입을 맞췄다. 쪽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과 지민의 얼굴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지민은 방금 전 태형의 행동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은 숨을 한 번 내쉬곤 입을 열었다.

 

   “연애도 느긋한 게 좋아.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고, 스킨십도 빠르지 않게.”
   “그래요?”
   “내가 이렇게 느린데, 너는 내 템포에 맞춰줄 수 있어?”

 

   태형은 지민의 말에 씨익 웃었다. 그리곤 지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곤 눈을 감았다. 숨을 내쉴 때 코끝이 스쳤다. 지민은 태형이 받아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믿음과는 별개로 고백을 입 밖으로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눈가가 후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연하죠. 거북이만큼 느려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저는 다 맞춰줄 거예요.”

 

   태형이 눈을 떴다.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미소 지으며 눈가가 휘었다. 지민의 입술이 태형의 콧등에 닿곤 떨어졌다.

 

   분명 지민은 우리의 속도가 라르고처럼 아주 느릴 거라고 했지만 태형은 달랐다. 어쩌면 ※비바체보다도 빠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분명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비바체 : 매우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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