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어릴 적엔 항상 여름 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곤했었다.
“이쯤이었던가…?”
하지만 대학에 들어갈 만큼 머리가 자라고, 몇 차례의 연애와 실연, 군대, 취업 등 내 인생에만 집중하는 동안, 난 이곳을 등한시했었다.
“아…!”
그래서였을까. 이 산속 깊숙한 마을을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발견한 나의 어린 시절의 보물…. 그래, 비록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아 먼지가 자욱한 곳이지만, 나의 따뜻한 기억이 있는 곳.
“이제야, 돌아왔네.”
바로 우리 외할머니집….
나, 김태형. 평범한 삼십 대의 남자. 회사를 그만두고 긴 방황을 정리하러, 이 여름, 시골 깊숙한 산골짜기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으로(1/2)
물루
이 집으로 들어와,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먼지 쌓인 집안을 닦는 것이었다.
“후….”
오 년 전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는 그 누구의 발걸음이 없던 집이라 사실 폐가나 다름이 없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정성 들여 청소하는 건, 이곳엔 내 어릴 적의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어서였다. 내 키가 표시되어있는 낡은 서랍장, 안테나가 잘 안 잡혀서 여러 번 다이얼을 돌려야 했던 옛날 티브이 그리고 내 전용이었던 코알라 베개…. 그러니 이것들을 그저 먼지에 덮어두고, 다른 숙소에 가서 자는 건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 그 어릴 적 외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걸레에 물을 쭈욱 짜, 간만에 정말 청소다운 청소를 하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그런데 여기가 이렇게 작았었나.”
그런데 청소를 다 끝내고 마당에 나와보니, 그렇게 커 보였던 집이 이렇게나 작을 수가 없었다. 천장도 낮았고, 신발을 벗고 낑낑거리며 올라갔던 대청마루도 지금은 내 무릎밖에 오질 않았다. 그때보다 내가 컸다고 생각하면, 뭐 새삼스러운 발견이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없어서…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버려서…. 난 집의 전경을 바라보다, 곧 눈부신 태양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참 이 쨍한 햇살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 그때는 이 때가 오히려 밖으로 나가 놀 기회였지. 잠자리채를 들고 마당을 빙그르르 돌아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아,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사실 난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에서부터 이곳으로 도피를 했다. 작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와도 파혼하며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때 제대로 기워지지 않은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올해 유독, 이 더위가 버티기 힘들었던 것 같았다. 이제 난 어디를 가야 할까. 아니, 어디에 머물러 살아야 할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던 걸까. 어쩜 그동안은 덮어두었던 내 마음이 실은 망망대해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과거를 돌이키며 내 삶을 찾기로 결심을 하게된 건. 그러다 고심 끝에 생각난 게… 바로 이 외갓집이었다. 가장 순수하고 걱정이 없던 어릴 때,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며 새롭게 삶을 돌이켜보고자 서둘러 내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밥은 어떻게 해먹나.”
그래도 너무 성급하게 온 것이었을까. 지금 내 손에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하하, 역시 배달은 안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한심하기는 김태형. 이렇게 대책 없이 오다니.
“에라,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난 그냥 다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던 자유였으니까. 난 결국 다 포기하고 대청마루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자 코안으로 오래된 나무 향이 잔잔히 스며들어왔다. 그리웠던 외갓집 냄새였다. 아 아, 그래, 오늘은 이걸로 충분한 거다. 이 그리웠던 향이라면 내 마음을 충분히 채우고 배부르게 할 것이었다. 난 곧 잔잔한 여름의 미풍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젖은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 여름, 어릴 적 우리 외할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어쩐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진짜… 너무, 오랜만에 오니까.”
내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산길을 채웠다.
“하, 계곡이, 어디, 었었는지,”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소리가 그동안 나름 관리 한다고 했는데, 실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체력의 끝을 보이는 것 같았다.
“진짜, 기억이 안나네.”
더군다나 이 거친 길을 오르다 보니, 모처럼 가지고 온 카메라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정말, 이 무게감과 더위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 제길. 진짜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던 탓일까. 회사 일에 운동할 시간은 없다면서, 대신 그 시간에 술만 냅다 들이켜서 이렇게 체력이 더 깎인 것도 같았다.
“하아, 하아….”
결국 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후…. 그제야 산 깊숙이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하, 이렇게 시원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왜 걸을 땐 하나도 안 느껴지는 거냐.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괜히 주변 탓을 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여름 산행은 고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뭐,
“스읍… 하….”
그 고생 끝에, 어느 정도 근처에 도착한 것 같았다. 어느덧 주변이 축축한 풀냄새로 덮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조금 숨이 진정되었을 무렵, 스윽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물소리를 찾아보았다.
솨아아-
그제야 매미소리 속에 조금씩 거친 계곡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아, 저쪽이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러자 눈앞에 낯이 익은 커다란 바위가 들어왔다. 맞아, 저기가 이정표였지. 사촌 형들이 계곡에서 찢어졌던 내 상처를 봐주었던 곳, 바로 그 바위였다. 난 이끼가 무성한 바위를 잠시 바라보다, 곧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기질의 사각형 안에 작은 피사체가 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셔터의 소리.
찰칵.
하나의 풍경이 어느새 기억으로 바뀌어 다시 수집되었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하…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난 그 일환으로 계곡을 향해 얼른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가장 즐거웠던 추억의 장소를 빨리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계곡이, 그래, 그 얼음장 같이 차던 거친 물줄기가 바로 저 나무와 풀숲 뒤에…!
그런데,
“…….”
무성한 나무를 해치고 나오니, 그곳엔 예상 밖의 존재가 있었다.
솨아아--
거칠게 흐르는 물, 커다란 바위 그리고 그 위에 한 남자…. 그는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마치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채로 바위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 그리고 난 전혀 상상하지 못한 광경에 그저 넋을 놓고 말았다.
솨아아---
그사이에도 거친 물살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너무 사람 같지 않아서, 아니, 이 풍경 속에 그냥 그가 하나로 녹아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떤 움직임이나 반응을 취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나무 그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반짝임이 그의 얼굴에 너울거렸다. 그가 있는 풍경이 더 신비롭게 변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카메라를 들어 올린 건. 난 앵글 안으로 그의 모습을 조금씩 고정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사각형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찰칵.
난 그런 그의 모습을 조용히 담고 말았다.
그런데…
“……!”
그때 갑자기 남자가 내쪽을 향해 고개를 확 돌린다. 아, 들켰나. 난 민망함에 카메라를 내렸다.
솨아아아----
“…….”
“…….”
세찬 물소리 속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크게 뜨인 그의 까만 눈동자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저 약간은 날카로운 선을 덮은 하얗고 몽글거리는 느낌에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저 남자가 그만큼 아름다워보여서였을까.
“저기.”
그런데,
“아…! 조심…해…!”
내가 입을 떼자마자, 갑자기 남자가 순간 바위에서 미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난 다시 다급히 그를 불러보았지만…
풍덩-
그는 이미 미끄러져, 완전히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아, 제길. 이게 무슨. 그리고 나 역시 서둘러 카메라를 버려두고 물로 뛰어 들어갔다.
풍덩-
아마 그때는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 그리고 그게, 박지민,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따뜻한 물, 더 필요해요?”
난 가마솥안의 물을 떠와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덜덜 떨며‘네, 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목욕 대야에 따뜻한 물을 섞어 부었다.
“옛날 집이라 기름 보일러라서요.”
그리고는 그의 물에 젖은 까만 머리카락부터, 기다란 목선 그리고 하얗고 둥그스름한 어깨를 천천히 시선으로 쫓았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섞인 물의 온도를 살짝 재보았다. 이제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오래 안 쓰던 곳이거든요. 그래서 좀 지저분해요.”
괜히 내가 변명처럼 말하자, 그는 천장과 주위를 훑어보던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하긴 좀 닦았다한들 아직도 빈집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아무튼 난 그런 그의 얌전한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갈아입을 옷은 밖에 두겠다고 일러두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후….”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게 답답한 게 맞는 건가. 이 묘한 기분은 뭐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직 얼떨떨해서 그런가. 난 가만히 가슴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축축한 옷 위로 뜨겁게 뛰는 박동이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젖었었지. 나 역시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젖은 옷가지들을 들고 마당으로 향했다. 오늘 정도의 햇빛이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마를 것 같았다.
“저기.”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어느새 목욕을 마친 남자가 뒤에서 불러왔다.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옷이 좀 컸는지 어깨까지 훌렁 다 드러낸 그가 마루 위에 서있었다.
“저기요.”
난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의 어깨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약간 새침한 눈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맑고 까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계곡에서 봤던 그 시선 그대로였다.
“다 씻었어요?”
난 몸을 완전히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간결하게 끄덕인다.
“넵.”
넵. 이라니,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살짝 강아지 같은 대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난 마당을 가로질러 그가 있는 마루로 향했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평상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거, 저 음향 장비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일단 저렇게 뒀어요.”
그러자 그가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한참을 바라보다 곧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방수라서 괜찮긴 해요. 별거 아니에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난 그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태평하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장비들인데. 저거 그냥 저렇게 둬도 되는 건가, 이젠 내가 더 염려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근데 계곡물 차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입을 연다.
“완전히 빠지니 진짜 차네요!”
환한 미소와 함께 어린애처럼 신나하며 말이다. 하?
그런데,
“여기가 여름의 경상도가 아니라, 겨울의 바이칼인줄 알았다니깐요?”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같이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진짜 특이한 남자. 신비롭다 생각했는데, 엉뚱하고. 차가운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몽글몽글하고. 대체 갈피를 못잡겠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숙소는 어디에요?”
나 답지 않게 그의 행방을 물은건.
“저 산 너머요.”
원래라면 그를 바로 보내려했는데, 마음의 변덕이 일은 것이다. 난 그의 시선을 따라 기울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마 산 저 너머로 가려면, 여름 산이라도 밤엔 저체온으로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난 다시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거.”
“네.”
“밥, 먹고 갈래요?”
“아….”
그러자 그가 잠시 뜸을 들인다.
“마땅한 건 없지만. 어제 시장에서 전 사온거랑 막걸리는 있어서요.”
그러자 그가 잠시 망설이는듯, 다시 한번 '음….' 하고 눈을 접고 웃는다. 말갛게 올라가는 두 뺨이 석양빛을 받아 예뻤다.
그리고 조금 뒤,
“그렇다면 신세진 김에 완전히 그래도 될까요?”
라며, 그가 예쁘게 웃는다.
그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간질거려왔다. 하, 신세라, 그의 상냥한 말 덕분에 서울 생활 중에는 제일 원치 않았던걸, 지금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집은 넓고, 시골의 밤은 기니까.
난 그렇게 산으로 온지 이틀 만에, 의도치 않게 특이한 존재인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아, 우리 동갑이네요!”
남자의 이름은 박지민. 그는 이름도 생소한 사운드 엔지니어가 직업이라 했다.
“정말 깊은 곳에 들어온거라, 저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게 소리를 동시 녹음을 하는 거라는데,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남자주인공의 직업이 바로 딱 자기 일이라 했다. 그래서 종종 자연의 소리를 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그러다 이번에 해야 할 작업은 계곡 소리라 이 깊숙한 산속에 왔다고 했다. 난 재잘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의 일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던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켰다. 오늘따라 술이 참 잘 들어갔다.
“그런데 계곡소리 속에 갑자기 뭔가 인위적인 소리가 들리잖아요.”
“네.”
“처음엔 동물? 했는데, 아핫!”
아핫? 갑자기 신기한 웃음소리에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예쁜 두 뺨을 봉긋 올려가며 웃고 있었다.
“근데 너무 잘생긴 남자가 딱! 나뭇가지 사이에서 나오잖아요!”
아아…. 그 말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진짜 그때는 응? 저거 그림이 아니고 실제 사람 맞는 거야? 하고 놀랐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바로 얼굴을 맞댄 칭찬은 민망했다. 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막걸리 사발에 얼굴을 묻었다.
“딱 처음 보는 순간, 목소리는 어떨까 궁금했어요. 얼굴과 같은 목소리일까.”
그러나 그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너무 딱 맞아서 놀랐어.”
“…….”
“더군다나, 내 취향이라서….”
술이 들어가서 일까. 박지민, 그는 처음에 비해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 마치 이 밤의 고요 속에 연신 들려오는 귀뚜라미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태형씨.”
하지만 난 그의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네.”
아니, 오히려 듣기 좋았다고 해야겠지.
“근데 나 막걸리 한 병만 더.”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는데도 매우 솔직했다. 난 말랑하게 생겨서는 답지 않게 주당인 그에게 마저 남은 병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잔을 받아든다. 약간 애교 섞인 콧노래와 함께였다. 웃음이 나왔다. 박지민, 당신 역시 재미있네.
“아, 좋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다시 술을 한잔 마시고는, 살짝 흐트러진 자세로 마루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는 밝은 달을 조용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정적 속에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반질거렸다. 그 모습이… 조금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곧, 나도 반대편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서늘한 나무의 느낌이 볼에 닿았다. 저 풀어진 그의 표정만큼이나 내 기분도 좋아졌다. 모든 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 정말 이렇게 타인과 경계심 없이 지내본 게 언제였던가. 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더군다나 낯선 사람과 이런 정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이 흔한 일이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의 만남,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조금 신기했다.
“태형씨.”
그런데 조금 뒤, 한참을 정적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떼어냈다. 난 천천히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태형씨는 무슨 일 하세요? 사투리도 안 쓰시고, 원래가 여기서 사시는 것 같진 않은데….”
어느샌가 그의 다정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또 한 번 심장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만난 이후부터 아까부터 연신 느끼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는….”
그런데, 이번엔 무언가 이 기분의 정체를 알 것 같은 느낌…. 아… 취기가 올랐나. 난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떼어냈다. 아무래도 이 묘하게 들뜬 감정을 털어내야겠다 싶어서였다.
“서울에서 회사 다니다 그만뒀어요. 그리고 뭘 하고 사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여기가 외갓집이라 어릴 때 생각이 나서, 한번 와봤어요.”
“아….”
“그런데 진짜 폐가가 따로 없어서, 조금 마음이 그랬어.”
그러나 생각보다 말이 주절주절 나왔다. 역시 취한 게 맞나보다.
“네, 저, 아까 잠깐 방 좀 둘러보다가,”
그러자 그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걸친 뒤 말한다.
“거기 있는 사진 봤어요. 액자에 있는 거요. 그 할아버님? 손을 잡고 있는 어린애가 태형 씨죠?”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걸 봤구나. 분명 티브이 탁자 위에 있는 낡은 액자, 아마 처음으로 유원지에 같이 갔던 날에 찍었던 그 사진을 말하는 것일 거다.
“눈이 커다랗고 눈썹도 긴 게, 딱 어릴 때 그대로 자랐구나했어요.”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를 보겠다고 서울에 오셨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사탕이 녹아내려 끈적거리는 손이었어도 고목 같은 단단함으로 따스하게 잡아주셨던 바로 그날….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소중히 하지 못하고, 그저 스쳐 보내야만 했던 추억들이 죄송스러워서였다.
“전 사진도 좋아해요.”
그런데 갑자기 박지민, 그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한다. 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웃 는다.
“사진도 그렇고 제 소리도 그렇고,”
“…….”
“흘러가서 다시 오지 않을 찰나를 잡는다니, 정말 멋있지 않아요?”
아….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 싱긋 웃으며, 술을 한 입 더 마신다. 그리고는 촉촉이 젖은 입술로 다시 말을 잇는다.
“사실 전 이 직업 생각하게 된 게 되게 계기가 불손해요.”
“…불손?”
“아, 전 남들보다 소리에 민감해서요, 그래서 세상에 들려오는 잡음들이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오히려 귀를 닫기 위해 한 가지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해야할까요.”
“…….”
“그래도 지금은 태형씨한테 말씀드린 것처럼, 소중한 순간을 잡아내는 거라 생각하게 됐어요. 조금 욕심도 생기고.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저한테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아요.”
난 다시 한 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가 왠지 내 분위기를 바꾸려 애쓰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맞춰주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잠시 뒤, 그가 늘씬한 다리로, 끄아! 하고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마치 꿈결에 혼잣말하듯 눈을 감고 조곤거린다.
“깊은 산 속 한 여름에도 차가운 물소리, 이름 모를 새 소리, 도시의 소음, 그리고 유원지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세상에 같은 소리도 순간도 존재하지 않잖아요.”
“…네.”
“그래서 그런 걸 듣고, 또 내가 가진다는 게 좋아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아서요. 그리고 음… 아마 태형씨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해요.”
“…….”
“어떤 사진을 찍으실지 궁금해요. 어떻게 세상을 보고 계실지, 어떤 순간을 기록하실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난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의 감겨진 까만 속눈썹이나 앙증맞은 코 그리고 그의 통통한 입술, 또 취기에 살짝 달아오른 뺨만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참 이상했다. 난 당신을 오늘 처음 본건데 당신은 왜 내 마음에 갑자기 이런 떨림을 주는 걸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난 잠시 정적을 지키다, 조금 뒤 무거운 입술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전…”
그러자 그가 눈을 떠 나를 돌아다본다. 까만 눈동자에 내가 전부 담겼다. 목구멍에 울컥임이 걸렸다.
“그냥… 단순히 취미로 하는 거에요.”
“…….”
“별 의미 없이 찍는거요. 당신처럼 어떤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그리고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내 움직임을 따라 올라간다.
“미안해요.”
“네…?”
“저 조금 취했나봐요. 먼저 가서 잘게요.”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렸다.
그때, 그런 내 등 뒤로 그의 인사가 건내져왔다.
“네, 잘자요, 태형씨.”
“…….”
“오늘 고마웠어요.”
“…….”
“만나서 또 반가웠고.”
난 방문을 열다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러자 캄캄한 방 뒤로 모든 소리가 닫혔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난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어야했다. 간만에 느껴본 울렁임 탓에 기분이 이상해서였다. 난 이불 위로 넘실거리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게 마치 내 마음 같아서, 그동안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들과 같아서 이 밤이 조금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