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몽
리리
퇴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집에 가서 밀린 만화책을 읽을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전화 한 통으로 깨졌다. 10년 지기 여사친 조수연 씨가 오늘부로 세 번째 잠수이별을 당하셨단다. 왜 헤어졌냐는 질문에는 답도 안 하고 울기만 했다. 울면서 지민이 알지도 못하는 전 남자친구를 욕하는데,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눈치 없이 쇼미더머니 나가보는 게 어떠냐고 물을 뻔했다. 그 후로도 현하지변으로 이어지는 육두문자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한참 뒤에 들리는 말이 그녀의 본론이다. ‘술 사줘.’
아침부터 고대하던 야심찬 계획은 단번에 무너졌다. 지민의 스케줄을 뻔히 꿰고 있는 수연에게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물론 거절하면 그만이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조수연에게만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게이인 지민을 그의 부모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게 그녀였기 때문이다.
여자친구가 없다고 했을 때 엄마는 수시로 모르는 여자들의 사진을 보냈다. 선을 보라고 내내 재촉했다. 그건 지민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게 누구냐는 물음에는 망설임 없이 조수연이라고 했다. 애초에 아는 여자라고는 조수연 밖에 없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어머. 그래? 그 말을 들은 엄마의 반응은 그랬다. 역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며 흥분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민은 맥없이 웃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소식을 전해들은 조수연은 소주병으로 머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 때 지민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한참을 빌고, 술 10번 사기로 약속한 걸로 겨우 용서를 받아냈다. 지금까지 총 8번 샀는데 그거 다 합치면 100만원이 넘는다. 전보다 곱절 오른 카드빚을 보며 지민은 경악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 데 후회는 없다. 지금도 엄마는 언제 결혼할 거냐며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전화를 했다. 다만 엄마에게 ‘수연이가 아직 좀 그렇대.’ 라고 말하면 그나마 조금 잠잠해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수연은 지민을 그의 엄마로부터 보호해주는 연막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게 지민이 지금 집 앞에 있는 술집에서 하릴없이 치킨을 뜯고 있는 이유였다.
“야이 씨발. 생각할수록 빡치네. 적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만나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내새끼가 존나 찌질하게.”
“내 말이.”
“뭐야? 너 왜 이렇게 성의 없이 말해?”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너 지금 말 다했냐?”
그러면서 또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어디서 말실수를 한 걸까. 잠깐 고민해봤지만 알 리가 없다. 지민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달랜다고 그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건 문제가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문제다.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꽤 적나라했다. 어머, 저 남자가 여자를 울렸나 봐. 세상에. 천하의 몹쓸 놈이다. 게다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앞담은 더 가관이다. 지민이 마른세수를 했다.
“저기요.”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며 소주를 홀짝일 때였다.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 둘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둘 다 잘생겼다. 근데 둘 중 한 명은 진짜 존나 잘생겼다. 헐. 대박 존잘. 넋을 놓고 올려다보자, 주위를 둘러보던 존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지민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반면 정신 놓고 울던 조수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눈물을 닦아냈다. 정갈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웃는다. 지민이 허탈하게 웃었다. 너 이번엔 진짜 좋아했다며. 죽어도 못 잊을 거 같다며. 이따 취한 척하고 전화해볼 거라며. 안 받으면 미친 척하고 집도 찾아갈 거라며. 아까 그녀가 울면서 했던 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합석해도 돼요?”
“아, 네. 그럼요.”
앉으세요. 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지민이 당황한 얼굴로 존잘을 쳐다봤다. 조수연 옆에 앉는 자기 친구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제 옆에 앉는다. 지민이 흠칫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서비스로 나온 뻥튀기를 스스럼없이 집어먹는 게 다였다.
“몇 살이야?”
남자가 친근하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뻥튀기에 가 있었다. 히야. 목소리도 좋다. 아니지. 이게 아니라. 초면에 왜 반말이세요? 이 반응이 먼저 아닌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뭐가 이상한지도 모를 뻔했다.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안 떨어져서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았다.
“불편해? 내 친구가 저 여자 마음에 든대.”
한동안 답이 없자 남자가 덧붙였다. 저 여자라면 조수연이다. 방금까지 울던 애가 맞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덜 잘생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술 따라드릴까요? 좋죠. 아, 진짜 잘생기셨다. 그쪽도 예뻐요. 정말요? 호. 호. 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 와서 한 거라곤 울고, 울고, 운 것밖에 없는데 뭘 보고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민이 존잘을 돌아봤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자신뿐인지, 계속해서 뻥튀기를 집어 먹는 남자는 마냥 무덤덤하기만 했다.
“28살….”
지민이 작게 말했다. 저 볼꼴을 보고 있을 바에는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게 백배 천배 낫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나돈데. 한참 때늦은 대답에도 남자는 즉각 대답했다.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안 그래보였다. 말한 것보다 3살은 더 어려 보였다. 지민이 의심쩍은 눈길로 남자를 흘겼다. 내내 뻥튀기만 보고 있기에 흘겨도 흘기는 줄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런데 남자는 곧바로 어이없다는 듯이 웃더니 지민을 향해 은색 물컵을 가리켰다.
“너 노려보는 거 이걸로 다 보여.”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금까지 저걸로 다 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무심하던 얼굴은 어느새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 믿나보네.”
지민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솔직히 저 얼굴에 28살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 지나가던 개새끼도 안 믿을걸.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뚱하니 입술을 내밀고 있자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남자를 힐끗거렸다. 남자는 자신의 지갑을 뒤적이고 있었다. 짜증나서 돈이라도 던져주고 가려는 걸까, 생각하는데 얼마 안 돼 제 앞으로 민증 하나가 내밀어졌다. 지민이 엉거주춤 민증을 받아들었다.
“맞지?”
맞다. 진짜네. 진짜 저 얼굴에 28살이구나. 그렇구나. 역시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시선을 강탈하는 사진을 봤다. 사진 속 얼굴은 지금과 다른 갈색머리였다. 그런데 지금과 다름없이 잘생겼다. 민증 사진이 이렇게 잘생긴 건 여태 본 적이 없었다.
“김태형.”
지민이 깜짝 놀라 태형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민증에 쓰인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있던 차였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어버린 줄 알고 발작 일으킬 뻔했다. 태형이 내 이름이라고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을 거다. 지민은 애써 아닌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마저 잘생겼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너는?”
“나 뭐?”
“이름.”
“박지민.”
“이름 예쁘다.”
지민이 민증을 돌려주며 고개를 돌렸다. 귀가 뜨거웠다. 이름이 예쁘다고 했는데, 머릿속에서는 예쁘다는 말만 축출해 재생시켰다. 드디어 미친 건가. 지민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근데 지민아. 너가 더 안 그래 보여.”
“뭐가?”
“너는 18살처럼 생겼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이게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 쳐다보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말투 또한 굉장히 진지했다. 그 반응을 보니 오히려 더 머쓱해졌다. 동안이라는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닌데 얘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건가. 잘 모르겠다. 괜히 민망해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앞에 있는 조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을 살짝 가리고 깔깔 웃고 있었다. 저러다가 뒤로 넘어가겠다 싶을 만큼 웃어젖히는데 과연 오늘 헤어진 애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네 친구는 오늘 헤어졌나 봐.”
지민의 시선을 향한 곳을 슬쩍 보더니 태형이 물었다. 어? 어어. 지민이 대답하며 얼굴을 붉혔다. 역시 다 봤구나. 쪽팔려 죽고 싶다. 쪽팔려야 할 건 쟤인데 내가 왜 대리쪽팔림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저 또한 반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게 반말인지, 존댓말인지도 몰랐다. 지금 와서 존댓말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만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긴 했다. 원래 이렇게 친화력이 뛰어난 애인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수연만큼이나 편했다.
이야기는 제법 천연하게 흘러갔다. 김태형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정말 별거 아닌 정보까지 다 알아냈다. 일단 김태형은 현재 백수다. 이직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쫓겨나듯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그렇지만 퇴사를 후회하진 않는다고 했고, 나올 때 부장 얼굴에 침 한 번 못 뱉고 나온 건 조금 후회된다고도 했다. 군대는 육군 출신, 광개토부대라고 했고, 주특기는 탄약병이라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라고 했는데 롯데리아에서는 불고기버거, 맥도날드에서는 상하이스파이스버거, 버거킹에서는 통모짜와퍼만 먹는단다. 주량은 글쎄. 자칭 알쓰라고는 하는데 들어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소주 프레쉬 세 잔, 과일소주는 한 병, 맥주는 거의 못 마신다고 했지만 섞어 마시면 네다섯 잔 정도. 이 정도면 평타 아닌가. 지민이 맥주잔에 소주를 붓고 숟가락으로 쾅쾅 내려찍으며 생각했다.
아무튼 김태형과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이렇게 재밌는 대화를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재미있었다. 친구라고는 고작 조수연뿐이라 군대의 기역조차 꺼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신이 나서 나불거리는 나를 김태형은 뻥튀기를 씹으며 얌전히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얻어낸 정보보다 내어준 정보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았지만 별로 억울하진 않았다.
물론 취한 건 별개였다. 안주로 나온 얘깃거리가 이렇게 맛있는데 안 취하는 게 이상한 거라고, 지민은 애써 합리화했다. 퍽퍽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간 토할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이 물컵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물컵이 4개로 보였다. 진짜 물컵을 찾기 위해 잠깐 고민해야 했다. 결국 한 번 헛손질을 하고 나서 물컵을 잡았다. 태형의 시선이 느껴졌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보란듯이 물을 마셨다. 옆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한층 커졌다는 게 부디 착각이기를 바랐다.
“태형아.”
“응.”
“너 친구는 내 친구 어디가 좋대?”
다만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 가난. 둘째, 사랑. 셋째, 만취. 지민은 자신이 취했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말투부터가 이미 명백한 확증이다. 태형이 웃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표정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애를 쓰는데, 그런데도 잘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딱 웃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알 정도였다. 지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는 게 예쁘대.”
“미친. 너 친구 혹시 변태야?”
그 와중에도 덜 잘생긴 태형의 친구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훅 낮추었다. 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민이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둘 다 존나 꼴아있다. 한창 김태형과 얘기를 나눌 때,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내기하자는 말이 얼핏 들리는 것도 같았는데 그게 진짜였나 보다. 지민이 혀를 내둘렀다. 내가 보기에 저 둘은 서로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기보다 그냥 말술 동무가 필요했던 거 같아. 아니라면 초면에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나 내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조수연 같은 애가 또 있다는 사실에 지민은 새삼 감탄했다. 그 순간 태형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고 하나. 또라이 친구를 둔 친구의 친구 모임으로 아주 제격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민이 소주잔을 집어 들었을 때 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지민의 소주잔을 빼앗아갔다. 지민이 태형을 돌아봤다. 뭐야. 너 왜 내 거 뺏어?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시무룩하면서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왜. 뭔데 뺏는데. 잘생기면 다야. 잘생겼다고 뺏어도 돼? 지민이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러나 총알을 장전한 부리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태형이 본인이 마시던 콜라를 제 손에 고이 쥐어주었기 때문이다. 지민은 컵에 담긴 콜라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지민아.”
“응.”
“또 궁금한 거 없어?”
지민이 콜라를 빨아마셨다. 콜라를 마시는 건지 컵을 빨고만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지민은 진지하게 태형에게 궁금한 것을 생각했다. 술을 빼앗겼다는 사실 따위는 금세 잊혀졌다.
“궁금한 건 없구,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있어.”
“뭔데?”
“너 진짜 존나 잘생겼어.”
“아, 그래?”
“응. 그냥 잘생긴 거 아니구. 진짜. 존나.”
그렇구나. 그러면서 김태형은 또 한 번 웃었다. 생글생글 웃는 게 기분 좋아보였다.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 저렇게 기분이 좋을까? 하긴. 그런 말이라면 오조오억 번을 들어도 좋을 것 같긴 했다.
“지민아.”
“응.”
“취했어?”
“아니.”
“그럼 술도 깰 겸 나가서 좀 걸을까?”
“응.”
대답을 하고 나서 아차했다. 얼떨결에 술 취했다는 걸 인정해 버렸다. 나 진짜 술 안 취했다고 사족을 덧붙일까 하다가 말았다. 그건 진짜 술 취했다는 걸 자백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였다. 지민은 먼저 일어나는 태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멀어지는 태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를 돌아 조수연을 확인했다. 헤롱헤롱한 얼굴 대신 동그란 두상 두 개가 보였다. 결국 같이 뻗었네. 10년을 봐왔지만 조수연은 역시 대단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 하나를 저렇게까지 조져놓다니. 지민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원래 자신의 역할은 술셔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더 이상은 알 바 없다. 10년 우정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지민이 휘청거리며 계산대 앞에 섰다. 그리고 종업원에게 여태 앉아있던 테이블을 가리켰다.
“방금 일행 분이 계산하고 가셨는데.”
“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 술이 조금 깬 것 같았다. 지민이 빠르게 술집을 나갔다.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태형에게 다가갔다. 비교적 또렷해진 눈을 보더니 좀 깼네? 하고 묻는다. 지민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실제로 흐릿하던 얼굴에 눈코입이 하나둘 눈에 들기 시작했다. 민망해서 뭘 말하려고 했는지도 까먹었다.
“가자.”
“으응. 근데 술값 네가 냈어?”
지민이 걸음을 맞춰 걸으며 물었다. 옆을 돌아보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왜?”
“우리가 합석하자고 했으니까.”
“근데 넌 별로 먹지도 않았잖아.”
사실 지민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김태형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가 먹은 거라곤 무료로 제공되는 뻥튀기와 천 원짜리 콜라 한 캔뿐이었다. 게다가 콜라도 반은 자기가 마시지 않았는가. 뿜빠이를 하자고 해도 제일 억울할 사람이 김태형이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지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있잖아.”
“응.”
“너 게이야?”
술집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은 걸 여태 참았다. 정작 궁금한 거 없냐고 물었을 때는 물어볼 엄두도 못 냈다. 왜냐하면 그 땐 김태형이 잘생겼다는 걸 진심을 다해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는 원수 같은 조수연도 있었고, 조수연과 같은 과로 보이는 변태도 한 명 있었다. 말하자면 물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말이 다르다. 지나는 길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그렇고, 술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묻지 않으면 평생 물어보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지민은 지금이 가장 시기적절한 때라고 판단했다. 지민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태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나도 게이야, 같은 환상적인 대답이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아마 지민에게 기적과 같을 터였다. 하지만 기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난다면 그게 과연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형의 대답은 제법 단호했다.
“아니.”
“으응. 그렇구나.”
“왜?”
“아니, 나는, 사실, 그, 게이거든.”
사실 게이라고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김태형이 게이가 아니라고 답한 마당에 그럴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나 얼떨결에 말해버렸다. 왜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어 무작정 내뱉은 말이 커밍아웃이었던 거다. 지민은 말하고도 당황스러워 태형을 표정을 살폈다. 호모포비아는 아니겠지. 갑자기 일절 생각해본 적 없던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태형의 말은 실제로 지민을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만 경악의 종류가 걱정했던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게이 아니면 너랑 못 사귀어?”
“뭐?”
지민이 걸음을 멈췄다. 한 발자국 앞서 나간 태형이 따라 멈춰 섰다. 태형이 뒤를 돌아봤다.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지민에게 왜? 하고 물었다. 왜냐고? 너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진 알아?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발도 바닥에 붙어 안 떨어지는 마당에 입이라고 떨어질 리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 남아있던 술기운마저 완전히 가셨다. 딱히 고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그랬다. 김태형이 나한테 사귀자고 했어, 뭘 했어. 그냥 물어본 거잖아. 정신 차려, 바보자식아. 머릿속에서 이성이 간신히 외쳤다.
하지만 매사에 이성적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있기는 한 걸까. 만약 있다고 해도 자기는 아닐 거라고 지민은 단언했다. 지민은 한동안 망부석처럼 굳어 서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모습을 그냥 지켜만 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지민에게 태형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손을 내밀었다. 지민이 시선을 내려 태형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왜인지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커피 마실래?”
김태형의 말은 생뚱맞았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카페 간판을 바라봤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다리가 풀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민이 태형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마나 큰지 거대한 곰돌이 손 위로 병아리 손 하나가 얹어진 것 같았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맞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잡아끌었다. 덕분에 다시 걸음을 맞춰 걸을 수 있게 됐다. 밤인데도 더위가 기승을 부려 온몸에 열이 나고 손에 땀이 차는데도 이 손만은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커피는 무조건 본인이 사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먼저 카드를 내밀었지만 결과적으로 계산은 태형이 했다. 태형이 도중에 지민의 카드를 뺏어버린 탓이다. 지민이 당황한 얼굴로 태형을 쳐다봤다. 자신의 카드를 내밀며 히 웃더니, 지민의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아니야.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근데 지민아. 너는 카드도 귀여운 거 들고 다닌다.”
지민의 눈이 커졌다. 제 카드는 며칠 전에 미미은행에서 출시된 카카오캐릭터 카드였다. 6개월 동안만 발급 가능한 스페셜 에디션이라기에 바로 신청했던 그거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라이언 빠돌이라 그런 게 아니고, 스페셜 에디션이라길래. 뭔가 특별해보이잖아. 스페셜. 젠장. 지민이 카드를 도로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럴수록 태형은 뒤로 물러나며 쉽게 잡혀주지 않았다. 지민이 씩씩거리며 있는 힘껏 점프했다. 하지만 태형은 그마저도 가뿐히 피해버렸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한 건데 결과적으로는 손끝 하나 닿지 못했다. 지민이 울상을 지었다. 조금만 더 놀리면 울 기세로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울려고 하냐기에 가뜩이나 늘어뜨린 눈꼬리를 더욱 끌어내렸다. 왜기는 왜야. 아무리 생각해도 28살 사내와 라이언 친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지민은 태형이 유치하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러니까 이거는, 며칠 전에 은행에서 전화가 와가지구,”
“왜? 귀여운데.”
한풀 꺾인 표정으로 변명하는 지민에게 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죽어도 안 돌려줄 것 같던 카드를 지민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어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는 말에 가지러 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걸 보는 심경은 그야말로 난잡했다. 모태게이로서 남자친구 한 번 안 사귀어본 것도 아닌데 지금 같은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지민은 컵 두 개를 들고 저기 앉자며 턱짓하는 태형을 힘없이 따랐다.
컵에 빨대를 꽂아주는 태형을 가만히 지켜봤다.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원래 이렇게 호기심 강한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았다. 그리고 지금 궁금한 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우리는 무슨 사이야? 뭐 이런 것들. 하지만 묻기 망설여졌다. 확실한 건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고 김태형은 게이가 아니라는 것, 그것 말곤 없었다. 다만 이게 전부였다면 의외로 포기가 빨랐을지도 모른다. 그래, 저런 존잘헤테로를 내가? 그런데.
‘게이 아니면 너랑 못 사귀어?’
지민은 아까 태형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 그게 무슨 뜻이냐구. 지민은 태형의 멱살을 쥐고 탈탈 털고 싶었다. 김태형의 그 한 마디가 희망이라는 싹을 틔운 것과 다름없다. 그 생각이 들자, 지민은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유를 태형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지민아.”
“…….”
“무슨 생각해?”
“태형아.”
“응.”
계속 입 다물고 앉아 있으면 멍청해 보일 것 같아서 일단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태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김태형이 대답했다. 그런데 할 말이 없다. 막상 부르고 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생각이라는 걸 하고 부른 게 아니었다. 지민이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빨간색 빨대만 잘근잘근 씹었다. 예상치 못한 때에 정적이 찾아왔다. 지민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눈을 굴렸다. 빨대가 점점 처참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말없이 빨대를 휘휘 젓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내일 연락해도 돼?”
지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든 잘 안 되든 해보기도 전에 모든 가능성을 닫아두고 싶진 않다. 내일 하루 연락하고, 그 후 바로 연락이 끊긴다고 해도 좋았다. 적어도 먼저 손을 놓기는 싫었다. 그랬다간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지민은 태형이 넘겨주는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그리고 내 폰에도 번호를 남긴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혹여 태형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집이 어디야? 데려다 줄게.”
지민이 멈칫거렸다. 왜 벌써? 문득 든 생각은 그거였다. 무심결에 고개를 떨어트리자 빈 컵이 보였다. 분명히 빨대 씹은 기억밖에 없는데 어째서인지 커피는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내심 당황했다. 언제 다 먹었지. 그제야 태형이 그 말을 한 이유가 납득이 됐다.
“내일 또 만날까?”
일부러 우물쭈물하는 지민을 보며 태형이 말했다.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의 표정을 확인했다. 태형은 웃고 있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은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자 민망하기는커녕 오기가 생겼다.
“억지로 만나주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스스로 말을 하고도 놀란 건 나중일이다. 동시에 진짜 됐다고 할까봐 겁이 났다. 그럴 만한 깡도 없는 주제에 왜 이딴 망언을 지껄였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저 여유로운 얼굴을 보자 평소 욱한 성질이 제멋대로 튀어나왔고, 그게 다였다. 지민이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무서웠다.
“지민아.”
“…….”
“나는 싫은 거 안 해.”
그럼 만나지 말자. 그래도 일단 만나보자. 뭐 그런 대답일 줄 알았다. 그러나 김태형의 말은 조금 오리무중했다. 지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짐작되기는 했다. 다만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어차피 저질러버린 거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는 태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김태형은 무표정이었다. 아까와 달리 조금의 미소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그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지만 지민은 일부러 더 어깨를 당당히 폈다.
“너 좋다고.”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다. 지민이 호들갑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 김태형은 덤덤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그걸 들은 지민은 그럴 수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이어가려 했던 인연이다. 첫날에 같은 마음을 확인 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걸 감격이라고 해야 하나. 표정을 다양하게 바꾸어 가는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민은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형을 따라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면 태형이 손을 내민다. 데자뷰였다.
“이제 가자. 사실 나 지하철 타고 왔어. 조금 있으면 끊길 거 같아서.”
지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집이 가까워서 태형의 집 또한 그럴 줄 알았다. 지민이 태형의 손을 맞잡으며 발을 동동 굴렸다. 전철 놓치면 어떡해? 그렇게 묻는 지민에게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택시 타도 되고. 너네 집에서 자도 되고.”
“뭐?!”
“농담이야. 왜 이렇게 놀라?”
그러려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나 보다. 굳었다기보다 사색이 됐다는 게 더 맞을 거 같긴 했다. 지민이 괜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태형이 웃는 게 보였다. 따라 웃음이 났다. 부끄러운데 좋았다. 뭔가가 끊임없이 벅차올랐다.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김태형을 겨우 뜯어 말렸다. 그랬다간 진짜로 지하철이 끊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지민이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태형 또한 됐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지민은 완고했다. 싫은 게 아니라면 데려다주게 해달라며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자 태형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신이 나서 걷는 길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태형이 가까스로 잡아준 덕분에 추태는 피했다. 정말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보며 지민은 그저 웃었다. 좋은 걸 어떡해.
“오늘 재미있었어.”
“나도.”
“우리 내일 언제 만나?”
“내가 내일 전화할게.”
“응.”
태형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지민은 그런 그를 보며 덩달아 조급해했다. 이제 빨리 가라며 손을 붕붕 흔들자 태형이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먼저 등 돌리라는 걸 꿋꿋이 서서 기계처럼 손을 흔들고 있자 태형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지민은 결국 먼저 뒤돌아 가는 태형을 보고, 그 모습이 면봉만 해질 때가 돼서야 손을 내렸다. 아쉬운 마음에 느릿하게 등을 돌리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지민이 핸드폰을 꺼내 방금 온 문자를 확인했다.
[조심히 들어가]
부재중으로 남은 모르는 번호였다. 지민이 문자를 확인하며 웃었다. 뭐라고 보낼까 답장을 고민하는 순간 어느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층 빨라져 있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그렇다고 저질체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지민은 어젯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시침이 1을 넘어가고 있었다. 집 안이 밝은 걸로 봐서 새벽 1시는 아닐 테고.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핸드폰부터 찾았다. 태형에게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아. 미쳤나 봐. 지민이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때마침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민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 여보세요?”
“너 내 전화 세 번이나 안 받았어.”
“미안. 나 지금 일어났어.”
“지금 1시인데?”
지민이 입을 다물었다. 원래 주말에는 3시 넘어서 일어나는 게 다반사라고 어떻게 말해. 핑계로 들릴지 모르지만, 주말이라고 해서 딱히 약속이 있거나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지민은 그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로 대신해 매듭을 지었다.
“그럼 오늘 못 만나겠네.”
“어? 아니. 아닌데. 만날 수 있어. 아직 시간 많은데?”
김태형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또한 완전히 잠이 깬 것 같지는 않았다. 무심결에 내게 전화를 걸고 안 받으니까 또 걸었던 게 아닐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잠시 했다.
“난 너가 일부러 안 받는 줄 알았어.”
“왜?”
“몰라.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그럴 일은 없어.”
김태형이 또 한 번 웃었다. 지민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 내가 좋아서 안절부절못하던 꼴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조금 속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어디서 만날까? 나 준비 한 시간이면 충분해.”
“근데 지민아. 그거 알아?”
“뭐?”
“어제 봤던 내 친구 있잖아.”
“으응.”
“걔 네 친구랑 사귀기로 했대.”
“헐. 진짜?”
지민은 통화 내내 만지작거리던 충전기 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술 마시고 같이 뻗더니 용케 술 깨고 나서 번호까지 교환했나 보다. 지민이 딱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었다. 그 미친년이 성공했구나. 앞에만 있다면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근데 아직까지 제게 일언반구 하나 없다니.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서운함과 거리가 멀었다. 평소의 조수연이라면 새벽이고 나발이고 바로 전화해서 알렸어야 했다. 여태 아무 말도 없는 게 이상했다.
“그리고 지민아. 나 또 할 말이 있는데.”
잔잔하게 뛰던 심장이 다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조수연은 머릿속에서 금방 잊혀졌다. 응. 뭔데? 지민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또렷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희미해졌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가 시끄러웠다. 뭐라고? 지민이 다시 물으며 핸드폰을 귀에 좀 더 바짝 가져다 댔다. 근데 태형아. 너 지금 어디야. 동시에 궁금하지 않던 게 궁금해졌다. 너 지금 어디야?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거기다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달팽이관을 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이 와중에도 지민이 기대하는 말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우리도 사귀자. 나 너 좋아해. 뭐 이런 거. 그러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래. 좋아. 나도 너 좋아해. 내가 더 좋아해. 이렇게. 모든 대답은 준비된 상태였다. 지민은 차분히 태형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김태형을 처음 만났을 때 감미롭게 귓가를 파고들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잔인하게 심장을 후볐다.
“나 다음 달에 결혼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우리의 첫만남은 진작 끝이 났다. 김태형의 한 마디에 끊임없이 땅속을 파고들던 뇌세포들이 하나둘 현실로 복귀했다. 까맣던 시야는 차츰 어둠을 받아들였다. 익숙한 공간 속 초록색 술병들이 눈에 들었다.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를 터트릴 것처럼 고막을 찔렀다. 지민이 마른침을 삼켰다. 소주병을 잡은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빈 잔에 떨어지는 액체는 투명하기만 했다.
“그렇구나.”
“…너가 와줬으면 해서.”
“어, 응. 가야지.”
지민이 출렁거리는 소주잔을 내려다봤다.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벌벌 떨리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면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김태형이 오기를 바란다. 지민은 단 한 번도 그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지민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무기력함을 느끼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문자로 청첩장 보내줄게.”
“응.”
“…끊을게.”
“태형아.”
“…….”
“결혼 축하해.”
더 이상 김태형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전화가 끊기고 검은색 바탕화면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지민이 핸드폰을 떨어트리듯 놓았다.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한참을 물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할 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집 나갔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퍼뜩 그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였다.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민이 문자를 확인했다. 그 문자의 첫줄을 읽는 순간,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은 일정한 기계음만을 남기고 싸늘하게 죽어갔다.
WEDDING INVITATION
여름의 싱그러움이 차오르는 이 날
저희 두 사람의 소중한 만남을
부부의 연으로 이어보고자 합니다.
귀빈들께서 바쁜 걸음 해주시어
저희의 앞날을 축복해주신다면
더없는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김□□ ‧ 박○○ 의 장남 김태형
이○○ ‧ 김△△ 의 차녀 이지희
2019년 8월 25일(토요일) 오후 2시
구오에비뉴 8층 아모르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