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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며칠 뒤,

   사진을 찍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

 

   그곳엔 박지민, 그가 숲 깊숙한 곳의 이름 모를 새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감긴 두 눈과 세상을 잊은 듯한 그의 모습에, 난 조용히 카메라를 내렸다. 셔터 소리조차 내기 미안해서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바로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요 며칠 어쩌다 그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고요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태형 씨, 같이 사진 찍으러 가요.’

 

   그래, 그와 함께한 첫 시작은 그가 우리 집에 처음 머문 다음 날부터였다. 아침부터 따가운 햇볕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니, 눈앞에 마찬가지로 해와 같은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기 앞, 잣나무골에 절이 하나 있데요. 오늘은 거기 풍경 소리를 따러 갈까 해요.’

 

   그러면서 그는 아직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를 끌어당겼다. 순간 나는 피곤함에 거절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침부터 밝게 웃는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하루만, 단 하루만 쫓아다니자, 했던 것이 벌써 사찰, 장날, 계곡 등을 온통 헤매고 오늘이 사흘째였다. 하암, 난 작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 뻐근한 고개를 풀고 곧 턱을 괴었다. 햇빛에 너울거리는 박지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 특이한 남자다. 밤에는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술친구, 낮에는 저렇게 침묵을 지키며 세상의 소리를 따는 남자. 더군다나 말랑한 얼굴에 술이 저렇게나 세다니. 난 그의 이중적인 모습이 적응될 법도 하면서도 또 매우 낯설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찰칵.

 

   그는 어느새 내 안에 들어오기 충분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이 프레임 안에서만….

 

   난 다시 카메라를 내렸다. 그리고 그를 따라서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자 이 자연의 소리에 조금씩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아, 이게 이런 기분인 건가. 난 박지민처럼 저멀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흔들려 부서지는 나뭇잎들의 파도 소리도 또 그 속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소리도……. 덕분에 마음이 같이 자연에 감화되는 기분이었다. 아, 이게 당신의 세상이었나. 새삼스레 박지민이 하는 일이 실감 났다. 나 역시 그처럼 입술에 잔잔한 웃음이 고였다. 소중한 찰나를 잡는다고. 며칠 전 밤,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래, 진짜 그럴 수 있겠다. 진짜 이 순간만큼은 내가 가진 것 같았으니까. 손에 들린 내 카메라도 무언가 묵직해졌다. 나도 그를 따라 어떤 직업의식마저 생긴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태형씨?”

 

   박지민이 갑자기 나를 불러왔다. 난 이 숲에서 어쩜 가장 예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슬몃 떴다. 그러자 커다란 헤드폰을 낀 지민이 나를 향해 웃는다.

 

   “저 때문에 못 찍고 쉬는거에요?”

 

   그 말에, 또 저 예쁜 미소에 조금 심장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아, 요즘은 계속 이런 상태였다.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조금 졸려서요.”

 

   그러자 그의 발그레한 뺨이 더 봉긋 솟아오른다. 동시에 붉은 아침햇살이 내려앉아 그의 얼굴도 전부 물들였다.

 

   “그럼 또 거기 누워서 자요. 내가 깨워줄게.”

 

   평소에 그의 작업 중에 종종 낮잠을 자곤 하는 나를 위한 말이었다. 그리고 난 그의 별거 아닌 말과 웃음에 자꾸만 심장이 꿈틀거렸다. 내가 막아본다 한들 이젠 부정할 수 없을 것도 같았다. 박지민, 어쩌면 처음부터 거절해야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이미 이 짧은 순간에도 나를 흔드는 사람.

 

   “예쁜 순간이 나오면 말할게요.”

 

   그리고 그건…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첫사랑에 느꼈던 감정과 닮아 있었다.

 

 

 

 

 

 

 

집으로 (2/2)

물루

 

 

 

 

 

 

 

 

 

   “오늘은 아침노을이네.”

 

   박지민은 어느새 작업을 마쳤는지, 헤드폰을 목에 걸치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침노을?”

 

   난 생소한 그의 말에 꿈뻑, 꿈뻑 하늘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실은 자다 일어나서 아직은 멍한 상태였다.

 

   “네, 보통 이러면 비가 오던데.”

 

   그리고 그는 내 옆에 털썩 걸터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침인데도 마치 해가지듯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신기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비가 오려나. 난 카메라를 스윽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무 틈 사이로 빨갛게 들어오는 하늘을 찍었다.

 

   찰칵.

 

   그러자 오래된 사진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태형씨.”

 

   그때 그런 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카메라를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요즘은, 필름 카메라 찍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한때 꽤 유행했었는데?”

 

   그래, 한때 엄청나게 불었던 필름카메라 열풍. 그래서 고등학교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사놓았던 카메라 중에, 이 카메라만이 가격이 천차만별로 뛰었었다. 그래서 아마 소장한 사람들도 꽤 있을거였다. 새삼스런 질문이었다.

 

   “그런데 뭔가 특별해보여요.”

 

   특별? 난 내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그래도 잘 관리된 바디가 별다른 흠 없이 깨끗했다. 유행에 따라 샀던 사람들과는 달리 나름 각별한 애정을 주긴 줬던 것 같았다. 이런게 특별하다는 걸까.

 

   “편지 쓰는거, 이런 것도 좋아할것 같아.”

 

   그때, 그가 나를 보고 한마디 덧붙였다. 난 그 순간 난 멈칫했다. 편지? 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여전한 미소로 내게 말한다.

 

   “그냥 태형씨 감성들이 다 그렇잖아요. 사실 외모로 보면… 음… 완전 도시남자! 하는데도, 뭔가 속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것들을 되게 소중히 했을 것 같아서요.”

   “…….”

   “단 며칠 지켜본거지만, 길가에 놓인 돌멩이도, 작은 민들레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게 특별해보였어요.”

 

   난 가만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덧 먹구름이 조금씩 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비가 올지도 몰랐다.

 

   “저도 그런게 좋아요. 아, 그런데 편지는 진짜 못써. 하고 싶은 말 적으려면 진짜 오래걸릴거에요.”

 

   난 그의 조곤한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당신도 스쳐지나간 것들, 정성이 들어간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지만, 뭔가 당신은… 나보다 그 것들을 더 소중히 할 것 같아. 정말 특별한건 박지민, 당신일지도.

 

   “대신에 글로 표현하는거 말고, 다른게 발달했데요.”

 

   난 그를 향해 되물었다.

 

   “다른 거? 소리…?”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연다.

 

   “사실… 음… 먼저 얼굴이나 행동으로 표가 난다는 것 같아요.”

   “아….”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박지민, 이 남자는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고 웃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으니까. 잠깐본거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김태형씨.”

 

   그런데 그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온다.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난 그래서, 나름 표가 많이 났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평소와 다른 씁쓸한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제야 그의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본적 없던 저 진지한 얼굴…. 그동안의 모든 박지민의 예쁜 웃음이 단순히 그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결국 모르는 척 하려 했던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레 다가왔다. 우리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간에 후덥한 바람이 몇 차례나 스쳐 지나갔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할지 망설이는 시간동안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그가 갑자기 자리에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제 바지를 툭, 툭 털어내고는 내게 손을 내민다.

 

   “이해해요.”

 

   난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른이란 건, 엄청난 겁쟁이들이니까.”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작은 손을 잡았다. 한 손에 꽈악 잡힐만한 따스함이었다. 그리고 그래서였는지, 내 입도 조금씩 열리려했다. 그가 내게 보여준 이 따뜻함과는 별개로 내 속에 꿈틀거리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박지민씨.”

 

   나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떨린다. 아닌척해도 그 역시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이성이 나를 말리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한차례 스쳐 가는 감정임을 뻔히 알면서, 괜히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다시 망설여졋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투둑, 투둑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장비들이 또 젖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그리고 박지민은 갑작스런 비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향장비들을 우리가 있는 이 커다란 나무 아래로 치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난…

 

   “……!”

 

   그런 그를 확 끌어당겨, 키스하고 말았다.

 

   “……읍!”

 

   그러나 순식간에 세게 맞부딪힌 탓에 이가 먼저 부딪혀버렸다. 얼얼했다. 그 바람에 그의 미간도 찌푸려졌지만 그러나 난 입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입술을 누르자, 곧 그의 입술에서 조금씩 열기가 올라왔다. 난 따갑게 내리치는 비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더 세게 감아왔다. 그러자 그가 순간 아, 하고 입술을 연다. 그의 입술에서 축축한 비냄새와 함께 단 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를 틈타, 내 혀가 그의 웅크린 그의 혀를 감기 시작했다. 입술은 차가운데 안은 온도는 극명히 뜨거웠다. 난 그의 뒷통수를 부여잡고 그의 부드러운 점막을 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입안에서 신음을 흘린다. 순식간에 빗소리와 함께 혀를 섞는 소리도 커져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긴 키스 끝에 박지민이 먼저 입술을 떼어냈다. 붉게 달아오른 입술과 뺨 그리고 가쁘게 내쉬어지는 뜨거운 숨이 방금 우리가 했던 게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 결국 그에게 키스를 하고 말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그렇게 넘친 것이다.

 

   “왜….”

 

   그때, 어느새 숨을 고른 박지민이 내게 묻는다.

 

   “왜, 키스한 거야…?”

 

   마치 첫키스를 한 아이같은 질문을 하면서였다. 난 그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대롱대롱 달린 속눈썹이 연신 떨리고 있었다. 난 그의 눈 안에 흔들리는 나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장비, 고장났겠다. 물어줄게.”

 

   그러자 잠시 뒤,

 

   짝-!

 

   박지민 내 뺨을 쳤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뺨이 돌아갔다. 시선 끝에 박지민의 덜덜 떨리는 손이 걸렸다.

 

   “너, 비겁해.”

 

   분노에 찬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왜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거야? 키스쯤이야, 너도 나랑 같은 나이여서 알잖아? 마음 없이 할 수 있는게 키스랑 섹스라는거!”

 

   빗방울이 더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박지민의 얼굴이 더 젖어갔다.

 

   “난, 난 우리 둘다 조심스럽긴 해도, 천천히 함께하면, 그래도 곧 너도 이 감정을 받아들일거라 생각했어! 그건… 너도 느꼈잖아? 처음 우리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각자의 프레임 세상속에 너와 나를 담았다는걸!”

   “…….”

   “그래서 난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어! 순간과 관계를 소중히 하니까! 그동안 그걸로 마음에 상처를 받아왔으니까! 그래서 겁부터 낸다고, 난 널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내가 잠시나마 느낀 김태형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곧 그는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난, 이번엔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는데,”

 

   그는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닦아냈다.

 

   “그런데 너 때문에 이제 다시 겁이나. 나도 결국 너처럼 계속해서 무딘 어른으로 부정하려 들까봐. 이젠 아무것도 못 믿겠어.”

 

   그리고는 그는 저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순간 그의 팔을 잡아보려했지만, 이미 그는 어둠 속에 스며들어간 뒤였다.

 

   쏴아아---

 

   그러나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세차져서, 아까까지는 아름다웠던 풍경이 이젠 어둠에 덮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치 지금의 내 순간과 같아서 마음이 욱신거려왔다. 고개가 떨구어졌다.

 

   아, 찬란한 빛으로 프레임에 들어왔던 너인데, 사랑없는 섹스, 겁쟁이, 비겁함으로 끝내버리다니….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왜 나는 나 스스로 너를 담아내고서도 부정했던 걸까. 이미 너를 찍은 순간부터 내 마음은 널 선택했던 것인데.

 

   “하, 하….”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건 언젠가부터 늘 그래왔던 내 자신이 떠올라서였다.

 

   원하던 과를 포기하고 들어왔던 대학, 오래 사랑했던 연인과의 헤어짐, 직장에의 취업, 어머니의 죽음과 파혼.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지금의 내 프레임 속 풍경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고 늘 부정해왔던 것이었다. 소중한 순간? 그런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길가의 돌멩이에서도 가치를 얻으려는 나도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 내가 오히려 가지고 있던 현실에는 그 소중함을 몰랐다. 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를 삼켜버린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아,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그를 붙잡아야했다.

 

   이번에는 망설임보다는 움직임이 먼저 나갔다. 더 이상 내 것들 조차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박지민, 그는 이미 부정할 수 없이 내 마음 속 풍경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는 이미 없었다.

 

   “지민아…!”

 

   한편으로는 예상했던 결과였다. 난 의미 없이 방문들을 열어보고, 또 그의 이름을 연신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가 들고 왔던 짐은 전부 사라진 후였다.

 

   “하. 이 한심한 새끼.”

 

   난 집안을 헤매다 결국 털썩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허탈했다. 난 조금씩 멎어가는 비를 보며 연신 나를 자책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박지민, 그를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여기는 택시는 못 들어오니까,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가려면 아래로 걸어 내려가야 할 것이다. 아니, 아직 일이 남아있었으니 산 너머 잡았다는 그 숙소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뒤에 마을은 하나니까 찾아보면 또 그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었지만, 달려가면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툭-

 

   갑자기 내 발치로 무언가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내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카세트 테이프?”

 

   박지민이 항상 기대있던 그 자리에서 떨어진 테이프였다. 아… 나는 그 작은 사각형의 물체를 가만히 바라보다, 곧 그걸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물기를 닦으며 이것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장날에…!”

 

   난 급하게 그가 사용했던 방으로 들어갔다. 분명 할아버지가 듣던 라디오가 그 방 어딘가 있을거였다.

 

   “아….”

 

   그러다 발견한 탁자 위의 라디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게 너무 뻔할 정도로 그 위에 놓여있었다. 난 잠시 그 낡고 작은 휴대용 기기를 바라보다, 곧 그 안에 테이프를 넣었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조금 기익 거리는 소리는 났지만, 테이프가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조금씩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난 볼륨을 더 높였다.

 

   그러자,

 

   [장터에 가서 테이프랑 건전지를 사서 왔어요.]

 

   박지민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역시.

 

   [음, 그런데 사실 김태형 저 남자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계곡에 빠져서… 장비가 다 고장났는데, 아닌척 했거든요.]

 

   난 볼륨을 조금 더 키워보았다. 그러자 조금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순간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잘 몰랐지만, 저 남자와 술을 마시며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았어요. 음… 이런 떨림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바로는 눈치 못챘지만, 역시 마음은 먼저 알았나봐요. 그리고 전 그걸 부정하고 싶지 않았구요.]

 

   잠시 그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조용히 저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한데 들려왔다. 그 순간, 마치 그와 함께 그 밤에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저도 좀 많이 지쳤었어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공해처럼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하죠. 할아버지 손자를 딱 만났는데, 정말 세상이 고요해졌어요. 그냥 모든게 풍경이 되어버린거에요.]

 

   그러다 갑자기 지직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응? 이거 좀 너무 안썼나? 한번 만져볼게요. 아무튼 잘 사용하고 잘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그 후 갑자기 소리가 뚝, 멈춘다. 아, 이게 끝인건가. 이렇게 끝난건…. 난 마음이 초조해졌다. 분명 그가 전할 다른 말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때,

 

   찌르르르--- 찌르르르---

 

   이번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익숙한 소리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보았다.

 

   찌르르르—

 

   아, 오늘 아침에 들었던 소리. 바로 그 새소리였다.

   그리고 마침 그때, 박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진짜 자고 있네.]

 

   그리고 저벅, 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뒤에 이어지는 그의 말….

 

   [넌 카메라를 참 좋아하네. 자면서도 손에 꼭 쥐고 있어.]

 

   내가 잠든 동안, 그가 내 옆에 와서 한 말이었다.

 

   [요 며칠이지만, 난 널 보면 많은 생각을 해. 내 감정과는 별개로 그냥 네가 순수하게 궁금해지기도 한 것 같아. 그건 네가 너무 너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해서일까?]

   “…….”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굳이 여기까지 온 건 확실히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내가 보기엔 넌 외조부님들께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 같더라구. 곳곳에 남아있는 네 흔적이나 그림그리기 대상 이런 상장 붙어있는거 보고 전부 느낄 수 있었어. 여기가 네게 위로가 될 공간이구나. 하고 말야.]

 

   잠시 그의 침묵이 있었다. 난 그의 고요한 숨소리를 같이 눈을 감고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 행복이 과거에만 있는게 아닌데, 네가 왜 여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까 하고 말야.]

   “…….”

   [사실 그럴 땐 너희 할아버지한테 조금 일러주고 싶긴해. 할아버지, 용감하게 유원지를 뛰놀던 당신의 손자가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버렸어요! 하고 말야.]

   “하.”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난 사실, 이 장비가 고장 났을 때부터 서울로 돌아가야하긴 했어. 그런데, 너랑 있다보니, 네가 더 좋아지고 조금씩 더 기대가 되더라.]

   “…….”

   [그런데 넌 언제쯤 마음을 열래? 이 잠꾸러기 곰아저씨.]

 

   그리고 또 소리가 멎었다. 한참을 빈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슴이 찌르르 울려왔다. 그래, 그는 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우리가 같이 듣고 있는 소리 속에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를 기다리게 하기 싫었다. 그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따라오지마.]

 

   아직 끝나지 않은 테이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다시 뒤를 돌아 그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아마, 후회해서 따라오겠지 싶어서 남기는거야. 절대 지금은 따라오지마.]

 

   차가운 그의 말투. 그의 말 뒤로 마치 빗소리와 같은 소음이 들리는 게, 마치 우리가 아까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에 녹음된 소리인 것 같았다.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라디오를 들어올렸다. 내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다시 뚝, 뚝 떨어졌다. 그는 이 말을 위해, 테이프를 남겨놓았던 것일까. 내 생각과는 달리, 난… 너무 늦어버린 걸까. 그때, 다시 한 번 이어지는 그의 음성.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앞의 내용 다 지우고 이 말만 덮어 씌우려했었어.]

   “…….”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왜 너를, 이곳에서 나오게 하고 싶은지를.]

   이 곳…?

 

   [너희 외갓집, 분명 따스한 곳은 맞아. 그런데 김태형, 너 사실은 사진 찍고 살고 싶은거 아냐?]

 

   난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럼 여기는 안돼. 다 마음이 정리되면 서울로 다시 와. 그리고 네 진짜 집으로 가.]

 

   아, 그제야 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그가 있는 곳으로 부르려 한 것이다.

 

   [그래,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한테 전화해. 010-9595-.... 나… 기다릴거니까.]

 

   난 그제야 한 번도 그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그와 말도 먼저 놓으려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우리는 조만간 헤어질 사이라는 걸 암시하듯… 그렇게 아무것도 그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 하, 바보같기는. 난 얼른 그의 번호를 폰으로 옮겼다. 그리고 멈춘 테이프를 바라보았다. 저게 박지민,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난 손에 들려진 폰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오래 생각한다 한들 계속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내게 지금 주어진 것들을 이젠 밀어내지 않고, 또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것. 그러니 박지민 그를 얼른 다시 만나 그를 꽈악 끌어안아야겠다는 것. 오로지 그러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다시 옷가지를 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처음 왔을 때처럼 몇 개 없는 짐이었다. 그래, 여기가 진짜 내 집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

 

   어느덧 나는 집안을 다 정리하고,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들을 눈에 새기고 탁자 위의 액자에 인사를 했다. 원래라면 돌아갈 때 사진을 들고 가려 했건만, 저건 내 기억이기도 했지만 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소중한 순간이기도 해서 그냥 이 곳에 두기로 결심했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집과도 이별을 고할 순간이었다.

 

   찰칵.

 

   내 소중한 기억들. 그것들은 전부 사라지는게 아니라, 이미 내 자신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은 구름 사이로 햇살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를 지치게 했던 무더위도 어느새 한풀 꺾인 것처럼, 선선한 바람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 진짜 집으로 가자.

 

   박지민 덕에 진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마치 여름휴가를 보내고 난 기분.

 

   그래, 아득하고 답답했던 내 긴 여름, 그것조차 나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내 시선의 문제. 지나가면 그때도 소중해지건만 이제는 내가 미리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박지민의 목소리가 준 답이었다.

 

   난 오늘부터 사진기를 들 것이다. 그건 어릴적 포기해야했던 꿈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찍기 위한 내 선택이었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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