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다새
매일 밤 꾸는 꿈에는 항상 네가 담겨있다. 꿈속의 나는 너와 벚꽃이 낭자한 길을, 햇빛이 따사로운 해변을, 붉은 나무 아래를, 또 하얀 풍경 속을 거닌다. 그러나 나는 네 얼굴을 볼 수 없다. 매번 고개를 돌릴 너를 기다리다 찰나의 순간에 잠에서 깨곤 한다. 오늘도 역시나 훤칠한 키와 곧게 뻗은 손가락만이 기억에 희미하게 남았다. 파릇거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안겼을 때의 깔끔한 향도 생생했다. 너의 얼굴에만 구멍이 난 듯하다. 문득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너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나에게 네가 꿈속의 허구로만 남는다면. 나는 기꺼이 너와 함께하기 위해 영원한 잠을 청할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고등학생인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두려움조차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덧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를 부여잡는 꿈속의 너 때문에 학교에 가서도 책상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사랑인지 모르겠다. 아, 이런 걸 짝사랑이라고 하는가 보다. 너는 날 알까. 우리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쓸데없는 생각들과 지겹게 맞붙었다.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나는 8시가 다 되어서야 초췌한 몰골로 집을 나섰다. 길을 걸어가면서 네 생각을 하느라 횡단보도에서 멍하게 서있다 신호를 놓치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나를 낭비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시험지에 왜인지 너의 얼굴이 비칠 것만 같아 문제를 다 풀고도 뚫어져라 글자를 한참 쳐다봤다. 새벽 내내 너를 보려 잠에 들었다 깼다 했더니 하품이 났다. 하루가 다르게 꿈속의 너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가장 처음 너를 보았을 때는 네가 내 코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안아주고 등을 돌려 도망치듯 걸어가기만 한다. 내심 서운한 마음에 이번에는 붙잡지 말아야지, 따라가지 말아야지 다짐하고선 따뜻이 데워진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하지만 제법 잎들이 풍성해진 나무 아래서 나를 안아준 너는 뒤 돌아 걸어가는 대신 나에게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이 순간이 나의 마지막이래도 행복할 것 같았다. 마주했던 입술이 떨어지자 태양보다 더 빛나는 너의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촘촘한 속눈썹, 오똑한 코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눈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했다. 옅은 체리향이 나던 입술로 시선이 옮겨갔다. 먼저 입을 뗀 건 너였다.
“내가 꼭 갈게. 사랑해.”
인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네가 뒤돌아 흔들던 손을 거두고 다시 걸어가는 소실점의 언저리까지 시선이 다다르고 나서야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잠에 들 준비를 했다. 너에게 받은 첫 키스를 생각하며. 꿈만 같았던 그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줄 전혀 모른 채.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잠드는 것에만 몰두했다. 끼니를 계속 거르나 보니 볼이 홀쭉하게 패였고 입술은 쩍쩍 갈라져 핏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 갔다. 태형이가, 태형이가 보이질 않아요.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아요. 제발 태형이 좀 보여주세요, 네? 제발, 태형이 좀, 태형이 살려주세요. 진정하라는 의사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형식적인 말만 늘어놓고 나가라고 했다.
내가 한참 동안을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교무실에서 공문이 왔다. ‘박지민 학생, 귀하는 수업일수 부족으로 유급 위기에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긴 설명을 다 읽지도 않고 북 찢어 쓰레기통에 찔러 넣었다. 흰 알약 3알을 삼키고 불편한 잠에 들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너의 뒷모습이 보인다. 지겨운 악몽의 시작이다.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너는 결코 뒤 돌아보지 않는다. 태형아, 김태형, 나 여기 있어. 어디가. 태형아… 제발…… 나… 흐으, 너 가버리면…. 흑…. 나는, 나는.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깬 것이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미친 듯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 몸을 덜덜 떨면서 약통을 찾았다. 그 많은 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멀건 위액까지 토해내고 나서야 비로소 체념했다. 태형이는 떠나갔으니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영원히 이별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다 네 생각이 나 밤 새 꺽꺽 괴로운 소리를 내며 울다 잠에 들었다.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진즉에 포기할 걸 그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에 갔다. 교실에 크게 걸린 달력의 6이란 숫자가 눈에 띄었다. 오늘 날짜에도 크게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나는 학교에 도착해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행정실, 교무실, 하다못해 보건실에도 들러 면담을 했다. 같잖은 말로 둘러대고 나서야 겨우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사이에 해가 지고 야간 자율학습 1교시가 끝나가고 있었다. 끈적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가의 내 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경쾌한 종이 치자마자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오늘부터 우리 반으로 교생 실습을 오게 된 선생님이다. 들어오시면 박수 치고.”
복도 쪽에 앉은 애들이 밖에 서 있는 교생이란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멀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이 들어와 교단에 섰다. 창밖의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잘 생겼다는 감탄사 따위 관심도 없었다. 나를 부르는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찮아하며 고개를 돌렸다. 칠판에 크게 써진 ‘김태형’ 그리운 이름이 눈에 익음과 동시에 태형이, 아니 교생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나 안 반가워?”
온전히 나를 향해서 인사를 건넨다. 뜨거운 여름날의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한 여름 밤의 꿈.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