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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여름이 막바지를 달리는구나. 너를 닮은 여름이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찾아왔는데, 날 떠날 준비를 하는 여름은 여전히 그때 그 시간의 네 모습처럼 날 울게 만드는 구나. 너랑 분홍색 벚꽃 가득한 봄도 보냈고, 울긋불긋 마치 내 마음 같던 가을도 보냈고, 같이 있으면 대화를 나누느라 코가 빨개지도록 추운지 모르던 겨울도 같이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아니, 앞으로도 쭉. 나에게 여름이다.

 

   나의 사람아,

   넌 한여름의 열기만큼 나를 흔들어놓는다.

 

내가 내린 청춘의 정의

뉴로

 

 

 

 

 

   01.

 

   쉬는 시간의 종이 울리고 시려오는 듯한 팔을 비벼대며 김태형의 자리로 향했다. 한 교실인데 어떻게 이렇게 온도차이가 극명한지 내 자리에서 몇 발자국 떼자마자 더운 열기가 훅하고 끼쳐왔다. 아직은 조금 더 걸어야 위치한 김태형의 자리는 안 봐도 더울 것이 분명했다. 네 앞에 비어있는 자리의 의자를 빼어내며 엎드려 얼굴을 보이지 않는 네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어 내가 있는 것을 알렸다. 마치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책상에 축 늘어진 네가 내 손길에 고개를 살짝 돌려 날 올려다 보며 말을 꺼냈다.

 

   “아, 진짜 덥다. 여름도 다 끝나가는데 왜 이렇게 덥지? 자리 바꾸고 싶어 여기 에어컨 바람 하나도 안 와.”

   “나랑 바꿀래? 내 자리 완전 바람 제대로 와서 난 좀 추웠어. 으, 팔 차갑다.”

   “진짜? 그럼 이리 와봐.”

   “왜?”

   “너 껴안으면 시원할 것 같아서. 좀 안아보자 지민아.”

   “...야!”

   “춥다더니 얼굴은 왜 빨개져?”

   “아, 몰라... 너무 추워서 그런가 보지.”

   김태형이 더위를 먹은 게 분명하다. 원래 추위를 더 많이 타는 나와 더위를 훨씬 많이 타는 김태형은 같은 온도에서도 보이는 반응이 다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날 놀리려 짓궂은 반응을 보이는 김태형이 가끔은 괘씸했다.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어놓고선 혼자만 태연한 저 표정이 아주 조금은 얄미웠다. 그렇다고 부끄럽다 해서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뭘 친구끼리 껴안고 그래. 아, 그리고 껴안겠다 했을 땐 절대로 설레서 얼굴이 달아오른 게 아니다. 진짜로. 그냥 당황스러워서 후끈해졌을 뿐이야. 나는 원래 얼굴이 잘 빨개지니까. 이럴 땐 내 얼굴이 순식간에 열이 오르는 타입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것이 아닌데, 그런 것 같아서 창피하잖아.

   “다 됐고, 지민아 오늘 끝나고 뭐해? 독서실 가?”

   “응. 수능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 너도 갈래?”

   “음, 그럴까. 일주일만 끊어볼까?”

   “같이 가면 나야 좋지.“

   “나랑 가는 게 좋아?”

   “응? 응.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혼자는 심심한데, 김태형만 내 옆에 있으면 기분 좋은 일이 가득하다. 걔랑 있으면 마치 이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주변 모든 것들이 다 재밌어진다. 그러니까 난 그런 내 소꿉친구 김태형이 좋은 거다.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내 대답에 김태형은 계속 말을 꺼내던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나도 같이 입을 꾹 다물고 김태형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도 같이 말이 없는 나를 슬쩍 돌아보길래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을 꺼냈다.

 

   “...”

   “무슨 생각해? 왜 대답이 없어.”

   “아니야. 그냥. 가는 길에 베라 가자. 사줄게.”

   “헐, 완전 콜.”

 

   그냥, 네가 웃는 게 좋으니까 그걸로 된 거겠지.

   

 

 

   02.

 

   가방끈을 부여잡고 터덜터덜 걷던 텅 빈 그 길이, 김태형 하나 있다고 꽉 찬 느낌이다. 말 한마디 없어도 어색한 감이 전혀 없는 우리 사이가, 난 그렇게도 좋다. 맛이 다른 서로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길을 걷고 있다가,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빨리, 수능 끝났으면 좋겠다. 그럼 방학했는데 보충하러 학교 가는 끔찍한 짓은 안 해도 되잖아. 그렇지, 태형아.”

   “왜, 난 방학에도 너랑 만날 수 있어서 좋은데. 너 방학되면 집에서 안 나오잖아. 꼭 집에 찾아가야만 얼굴 보여주면서.”

   “남자들끼리 뭐가 좋다고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냐... 너도 참 이상해.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난, 그런 거 말고 그냥 좋은데.”

   “어? 크게 말해줘. 못 들었어.”

   “빨리 가자고.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

 

   지금처럼 많은 말이 목 너머로 삼켜진 그런 얼굴로 날 대할 때면 난 어찌해야 할 지를 몰랐다. 캐묻고 싶은데, 나의 호기심으로 널 건드리면 네가 무너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난 몇 년, 내게 이런 너는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아마 앞으로도 풀지 못할, 내 평생의 숙제. 말을 마치고 먼저 나를 앞서가는 널 바라보다가 이내 뒤를 돌아서 얼른 오라며 나를 부르는 너에 후다닥 네 옆으로 달려갔다.

 

   *

 

   독서실에서 공부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면 시간은 늘 1시였다. 차들도 잘 다니지 않는 도로를 보며 혼자 걸을 때면 무섭다는 생각보다도,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느낌이라서 지독히도 외로웠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혼자 걷는 길은, 참 차분하고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을 냈다.

   “아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 지민이 넌 옆에 있는지도 모르게 공부하던데? 혹시 잔 거 아니지?”

   “...자긴 무슨, 오늘 문제집 한 권 끝냈거든?”

 

   근데, 또. 너 하나 있다고 세상이 재밌어진다.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지금의 새벽처럼 고요해도 우리만 세상에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자꾸만 너랑 둘만 있으면 몽글몽글해지는 이 기분이, 너무 낯설다. 자꾸만 익숙해지려는, 내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이 감정이 너무 낯선데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 태형아, 나 묻고 싶어. 원래, 친구는 이런 거야? 난 정말 잘 모르겠어. 나만 이런 거야? 조용한 새벽 거리에 울려 퍼지는 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왠지 꺼내지 못 할 질문들을 속으로 삼켰다. 아직은, 아직은 이른 질문인 것 같아서.

 

 

 

 

   03.

 

 

   “이게 뭐야?”

   “그냥, 집에선 솔직히 머리에 아무 것도 안 들어오길래 그냥 산책이나 할 겸 나와서 간식 사다가 네 생각 나서.”

 

 

   여름의 끝자락에서 더위를 불평하던 날의 우리의 시간은 빠르게 달리고 달려 내일이면 벌써 수능이었다. 너의 말마따나 어떤 개념정리를 봐도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잠시 밖이라도 돌아다닐까 생각을 하던 중에 네가 내게 줄게 있다며 잠시 나와달라는 연락을 했다. 수능이 다가오긴 한 건지 생각보다 꽤 추운 날씨에 네가 기다릴까 싶어 얼른 집을 나섰다.

 

   아파트 동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너에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내 목소리를 들은 네가 휴대폰에 박혀있던 시선을 들어 날 보고 웃었다.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데 모른 척 같이 웃어 보였다. 그런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네가 건넨 것은 내가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집어먹던 젤리들이었다. 근데 그 젤리들보다 더 머릿속에 들어왔던 건 너의 다디단 말들이었다.

 

   “…내 생각이 왜 나?”

   “글쎄, 그냥 네 생각하면 잡생각 없어져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내가 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정의 내리지 못했을지라도 물어봐야만 했다. 그에 돌아온 답이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을지라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네가 내게 더 단 대답을 내놓았다면 나는 감당 못하고 내일 수능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깐. 그럼에도 이유 모르게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네게 들릴까 싶어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어쨌든 고마워. 안 그래도 산책이나 할까 싶었는데 잘 됐다.”

   “…그래.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난 수능 안 볼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그래도 뭔가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시험은 시작도 안 했는데?”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트집은.”

 

   너랑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꽉 막힌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각 잡힌 학교에서 12년 동안 해온 것이 내일 시험 하나로 평가 받는 것이니까. 그런 내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발견한 건지 네가 살짝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 열심히 한 거 내가 알아. 너 잘 할거야. 나도 잘 할거고.”

   “그렇겠지…?”

   “응. 항상 옆에 나 있잖아. 떨지마.”

 

 

   그 날의 우리는 오래되어 불빛이 희미해진 가로등 밑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줬고, 서로의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의 그 다정한 너를 난 여전히 가슴 속에 깊게 묻어두고 남몰래 꺼내보곤 한다.

 

 

 

   04.

 

   어떻게 보면 꽤 당연하게도 우리의 첫 술 상대는 서로였다. 예상외로 나보다 술이 약하던 너는 얼마 마시지 않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콜라로 대체해 나의 술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조절을 한 너와 달리 나는 꾸준하게 달렸고, 그렇게 제대로 취해버렸다.

 

   “지민아, 정신 차려봐. 괜찮아?”

   “으응.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이네… 근데 너 오늘 너무 잘생긴 거 아니야…?”

 

   분명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이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말을 뱉어낸다. 그런 내 말을 들은 네가 턱을 괴고서는 나를 천천히 살펴봤다. 무슨 용기가 난 건지 원래 사람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난데 그런 너의 앞에서 꽃받침을 하고 뚫어져라 마주보았다.

 

   “그러는 너는 오늘도 여전히 예쁘네.”

 

   너무 또렷하게 들려오는 네 말의 단어 하나하나가, 나를 구름 위로 올려놓았다. 다시 곱씹어보다가 화들짝 놀라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너 지금, 하며 어버버대는 나를 보더니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은 늘어져 있는 나를 잡아 일으키곤 집에 가자며 이끌었다. 언제 계산을 끝낸 건지 계산도 안하고 가면 어쩌냐며 카운터로 가려는 나에 넌 이미 끝냈으니 제대로 걷기나 하라며 나를 다시 붙잡았다.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한 나는 얼른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하곤 돌아서려는 김태형을 붙잡았다. 그다지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김태형은 마치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은 것 마냥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나와 완전히 마주보는 자세가 되어버리고 나니 술기운이 홀라당 날아가버린 나는 너를 다시 마주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내가 너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고선 우물쭈물 대자 네가 천천히 내 손을 떼어냈다. 힘없이 떨어지는 내 손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별안간 내 고개가 부드러운 손길이지만 단호한 힘에 의해 들렸다. 꼼짝없이 정통으로 눈을 마주하게 된 내가 눈을 굴려가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네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붙잡은 건 너면서 왜 피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러니까, 그게…”

   “응. 그게?”

   “아, 그러니까… 너 나 ㅈ..아해?”

   “크게 얘기해줘. 잘 안 들려.”

   “아, 씨. 너 나 좋아하냐고! 예쁘다는 말해서 사람 설레게 해놓고는 왜 넌 아무렇지 않은 건데!”

 

   집요하게 내 시선을 쫓으며 나를 놀리듯 말을 해오는 너에 순간 욱해서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모두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아차 싶은 내가 들려올 너의 웃음소리를 예상하며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근데, 생각과 다르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너에 의문이 들어 슬며시 눈을 뜨자마자, 네가 내게 닿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상관 없다는 듯이 추운 날씨와는 다르게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입술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나도 다시 눈을 감으며 너의 코트 끝자락을 꾹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웃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오는 네 탓에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자 그 안으로 부드럽게 네가 들어왔다. 미적지근한 살덩이가 내 치열을 고르게 훑고 입천장을 살짝 스치는 바람에 살짝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내 입안을 휘저어대던 네가 천천히 떨어지자마자 난 참고 있는 숨을 한 가득 쉬었다.

 

   “이게 내 대답이야. 대답이 좀 됐어?”

   “…응.”

 

   방금 전 그렇게 키스를 해놓고선 부끄럽지도 않은지 여전히 내 눈을 맞추며 나에게 말을 건네오는 너에 내 볼을 붙들고 있던 네 두 손을 떼어내고선 네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대답을 했다. 언제부터 네가 날 좋아했는지, 언제부터 내가 널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있었는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와 보낸 시간 중 지금이 가장 벅차고 설렌다는 것을.

 

 

 

   05.

 

   그 이후로 나란히 같은 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간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과의 공식적인 캠퍼스커플이 되었고, 남부럽지 않을 연애를 했다. 서로가 군대에 다녀올 동안에는 보고 싶어도 꾹 참고 휴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가 감격의 재회를 했다. 제대를 한 다음에는 처음으로 온전한 서로를 가지는 시간도 가졌었다. 잠자리를 가질 때조차도 다정한 네가 너무 좋아서 자꾸만 울어대던 나는 다음 날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일어났고, 그런 나를 보면서 너는 활짝 웃으며 그런 내 눈에 가볍게 입을 맞춰댔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신경 쓸 것이 바쁜 와중에도 넌 건축 쪽이 적성에 잘 맞는지 재능을 보였다. 교수님들도 너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이며 뭘 하든 칭찬을 해댔다.

 

   “너 교수님 추천으로 해외에서 배울 기회 생겼다며. 왜 말 안 해줬어?”

   “어? 아… 그거 안 그래도 오늘 안 한다고 말씀 드리고 왔어.”

   “뭐? 왜?”

 

   너 평소에도 더 심층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그렇게 말을 했으면서, 하고 말을 하려는 내 입을 네가 막았다. 말캉한 입술을 내 입술 위에 꾹 눌러버린 바람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슬쩍 노려보는 내 두 눈에도 넌 그저 내가 좋아하는 그 환한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

 

   강의가 언제 끝나냐는 네 연락에 곧 끝난다며 답을 하니 얼른 보고 싶다며 우는 모습의 이모티콘을 보낸 네가 귀여워 강의 중인 것도 잊고 웃어버릴 뻔 했다. 점심 뭐 먹을지나 생각하고 있으라는 답장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강의를 김태형 생각으로 가득 채웠다.

 

 

   “야, 너 그거 들었어?”

   “뭐? 아, 김태형 해외연수 물렀다는 거?”

   “응. 그거 박지민 때문이라며. 박지민이 장거리연애는 죽어도 못할 것 같다는 소리 입에 달고 다녀서.”

   “헐, 진짜? 그래도 걔랑 평생 만날 것도 아닐 텐,”

   “야야, 저기 박지민.”

 

   근데. 이렇게 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면 안되잖아, 너. 유일하게 김태형과 다른 강의를 듣고 나오는 길에 들어서는 안될, 아니 어쩌면 들었어야 될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얘기를 듣고 멍하니 서있는 날 발견한 동기들이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복도 한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멀리서 날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지민아,”

   “…태형아. 미안,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다음에, 다음에 보자.”

   “응?”

   “미안.”

 

   어리둥절해 보이는 너를 뒤로 한 채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 나왔다. 널 어떻게 봐야 할 지, 과연 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힘든 연애를 하는 친구들을 주위에서 겪어서 그렇게 말했던 건데, 그게 너에게 그렇게 큰 짐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꼬박 이 주 동안을 널 피해 다녔다. 계속해서 오는 연락에는 일이 있다는 말만 반복해댔다. 한없이 걱정할 너를 알지만, 난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네가 없는 날들을 견딜 용기를 길러야 했으니까. 내 모든 기억에는 너로 가득한데 앞으로의 나의 기억에는 내 인생을 가득 채운 네가 사라질 생각을 하니 너무 지독해서 널 나한테서 떠나 보낼 준비를 하면서 많이도 울었다. 널 위해 생전 안 하던 짓도 해봤다. 내 학점이 이상하게 떴을 때도 교수님 한 번 찾아간 적 없던 내가 널 위해서 교수님께 찾아가 네가 꼭 갈 것이니 절대 무르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말아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고 나오면서 많이 씁쓸했다. 그래도, 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넌 날 지키려 한 일이었겠지만, 이번엔 내가 제대로 널, 그리고 또 앞으로의 널 지킬게.

 

 

   06.

 

   “…헤어지자.”

   “…뭐? 지민아, 이 주 동안 얼굴 한번 안보이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니고 너 안 만난 이 주 동안 계속 생각해서 결정 내린 일이야. 그리고, 지금이 아니어도 난 앞으로 몇 번이고 너한테 이별을 말할 거야. 그러니까, 헤어지자.”

 

 

   떨려오는 동공이 네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어울리지도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가며 널 밀어냈다. 근데 이런 나를 보는 너의 시선이 너무 올곧아서 하마터면 내 진심을 다 털어놓고 이미 뱉은 말들을 다 물릴 뻔 했다. 왠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나를 제 품에 넣어서 토닥토닥 위로해 줄 것만 같길래. 눈을 세게 꾹 감았다 뜨고는 잠자코 너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못 헤어져. 난 너 못 놔. 너도 나 사랑하면서 괜히 그러는 거잖아.”

   “아니, 내가 널 놓을 거야. 이제 너 사랑 안 할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 놔.”

   “왜 이러는데. 이유라도 말해줘야 내가 납득을,”

   “지쳐. 초라해. 너랑 있으면 내 자존감이 바닥을 쳐. 너랑 연애하는 거, 나 이제 힘들어.”

 

 

   네 앞길에 방해가 되면서까지 너와 사랑을 할 이유가 없다. 널 너무 사랑하는 나 자신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널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결국 내가 우리 사이를 잘라버린 건데,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표정관리를 하지 못할 뻔 했다. 상처받았다는 눈으로 날 허무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네가 나한테는 너무 아파서 네 앞에서 주체 못하고 울 뻔 했다. 절대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테이블 밑에서 허벅지를 꾹꾹 꼬집어가며 눈물을 참으면서까지 너의 눈을 쳐다봤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손으로 덮어버린 너를 한참이고 눈에 담았다. 이럴 거면 네가 내 사진을 찍어댈 때, 나도 수천 번이고 네 사진을 찍어둘 걸. 네 두 볼이 눈물로 번져갔다. 닦아주고 싶은데, 위로하고 달래주고 싶은데 그러면 미련만 가득해질 것 같아서 잠시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했으니까, 이 연애가 너한테 아픈 연애라면 나도 여기서 끝낼게. 미안했어. 그리고, …난 아마 널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어쩔 수 없어. 난 너만 보면 아무 것도 못하는 호구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미안.”

 

 

   한참을 그렇게 눈물만 흘려대던 네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훨씬 더 무너진 모습이라서.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말을 끝낸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참고 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해. 나 사실 너랑 헤어질 자신이 없어. 다 거짓말이야. 네 뒷모습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와서 지금 무너지잖아. 이런 나 한번만 뒤돌아봐주라. 매번 날 뒤돌아봐주고 손 잡아주던 너였잖아. 한 번만 더 그렇게 해주라. 못 이기는 척 너한테 잡힐게. 아, 태형아. 나 두고 가지마. 넌 안 들리겠지만, 나 지금 수백 번이고 널 외치고 있단 말이야. 나보다 날 더 잘 알면서 왜 오늘은 날 외면해.

 

   네가 듣지 못할 수많은 말들을 속으로 했다. 네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혹시라도 내게 돌아올까 싶어서 그 자리를 지켰지만 넌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장마의 끝을 바라보고서, 서로에게 상처만 남은 아픈 이별을 했다.

 

 

   07.

 

   김태형과 헤어진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해외로 떠났을 너는 한국을 뜨면서 SNS도 모두 삭제한 건지 그 어디서도 너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마 그래서, 더 힘들었던 거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게 유일한 숨통은 너와 내가 했던 대화들이 담긴 메신저. 그 뿐이었다. 내가 지우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너와 나의 흔적들이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읽어대며 행복한 모습의 우리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대화를 다 읽고 나면, 많지 않은 네 사진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네가 없으면 한없이 초라한 나 자신을 나라도 지켜내야 하니까.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서 크진 않을지라도 어엿한 건축 회사에 입사했다. 그 회사에 입사한지 벌써 2년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여름은 돌아왔고, 또 그 여름은 빠르게 시간을 달려 어느새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팀장님이 육아를 핑계로 회사를 나가신 뒤로 팀장 자리는 잠시간의 공석을 가졌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회사 사람들은 새로 들어올 팀장에 대한 애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베일의 싸인 팀장의 첫 출근 날이었다.

 

 

 

   *

   “안녕하세요, 팀장으로 같이 일하게 된 김태형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는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열리는 유리문으로 들어온 너와 이사님을 보며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다행히 조금은 멀리 있는 네가 이 말을 듣진 못했겠지만. 괜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와 눈이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넌, 나 다 잊었을 텐데 나만 또 혼자 이러는 걸까 봐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눌러 담았다. 그래도 사람 욕심이란 게 참, 한 번 보니까 또 보고 싶어지더라고. 정말 조심스레 들어올린 얼굴이 파티션을 살짝 넘자마자 너랑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절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을 보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길래 눈을 피하려 했지만, 말하고 계시는 이사님에 모두가 집중해있을 때 네가 내게 입 모양으로 건넨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내 사랑.’

 

   “태형씨, 한마디 하세요.”

   “타지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약간 적응이 느릴 수도 있는데, 서로 도우면서 일 잘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데, 마지막 말이 네가 나한테 말하는 우리의 시작인 것만 같아서 마주본 얼굴에 대고 그냥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지을 수 있을 가장 예쁜 웃음으로. 나오려는 울음들은 모두 목 뒤로 넘겼다. 나 지금 행복하니까, 미칠 듯이 벅차니까. 오늘의 내가 앞으로 남은 날들의 나에게 외쳤다.

 

 

   잃어버린 내 청춘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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