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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 생각해라

엠냥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더위다. 지민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창문을 내리면 더운 기운이 자신을 덮칠 것이라 믿었다. 조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지금 극심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위에 대한 한 가지 예시를 들자면 일전에 집 앞 편의점에 간 이야기가 있었다. 분명 걸어서 2분 거리인데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입에 물었던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아스팔트에 그림을 그리더라. 또 뭐였더라, 저가 친하게 지내던 동생과 간만에 만나기로 했는데 글쎄, 당일 열사병으로 쓰러져서는 응급실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너무 더워서 일도 제대로 안 되는 판국이라 지민은 미루고 미뤄두던 휴가를 이제 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연말에 왕창 몰아서 쓸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며 홀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래서 지민이 곧바로 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나 하면은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당히 쉬다 오겠다고 말했으나 돌아오는 편집장의 답변은 엉뚱하게도 인터뷰 일정이었다. 아, 제발요. 사정을 해도 돌아오는 답변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민 씨가 일을 너무 잘해서 그래. 내가 능력이 좋은 거랑 당신네들이 나한테 휴가를 주지 않는 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지민은 하는 수 없이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편집장과 합의를 보았다. 이것만 따면 정말 휴가를 허가하겠다는 편집장의 농간에 또 놀아나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민이 이 인터뷰가 너무 하기 싫은 이유에는 휴가 외에도 또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우선 지민이 인터뷰를 해야 하는 상대였다. ‘김태형.’ 세상에. 언제 이렇게 큰 존재가 된 건가 싶으면서도 뭐, 자신이 아는 태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얘는 아닌 척 하면서도 항상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태형은 현재 헐리웃 배우로서 한국에서는 거의 금의환향 수준의 찬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세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미국으로 떠나 배우의 일을 하기 위해 발 벗고 뛰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다. 영어는 또 언제 배운 거래. 지민은 단지 그런 생각만 했을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태형의 꿈이 헐리웃 배우인 것도 몰랐다.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구나. 지민은 퍽 속이 상했다.

 

   그러니까 지민은, 이 인터뷰로 그를 자각하기 전에는 완전히 그를 잊고 살았다. 한 때 친했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완전히 멀고도 먼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괜히 꽁해지는 기분에 가는 길에 연달아 3개 정도 태워야 속이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차 안에서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더워서 창문을 열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지민이 차근히 정리를 해보려 애썼다. 자신은 휴가를 가고 싶었던 것이고, 편집장은 그런 지민에게 이 인터뷰만 받아오면 휴가를 보내준다 하였고, 그 인터뷰라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나게 팔린 헐리웃 영화의 2번째 편의 주인공, 그 비슷한 역할을 우리나라 사람인 김태형이 맡은 거고, 그래서 그 김태형이 내한을 ㅡ한국인에게 내한이라고 하니 웃기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태형의 거주국은 미국인 걸.ㅡ 한 김에 인터뷰를 따야 하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민은 이제 미치겠는 거다. 왜냐고 묻는다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과연 그가 지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한낱 고등학생 때의 좀 친했던 친구 즈음이었던 관계라고 치부한다고 하면, 그래 그런 관계를 뭣 하러 기억하고 있을까. 지민은 태형이 저를 완전히 잊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번째. 만일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딱 그 정도의 감정일터. 지민은 딱히 그에게 소중하다거나, 중요하다거나,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열등감 따위는 아니었고, 그냥 현실을 잘 아는 것일 뿐이었다. 세 번째. 지민에게도 태형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냥, 아직까지 생각나는 어렴풋한 학창 시절의 기억 정도였을 뿐, 마냥 소중하다거나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벌써 십년이 넘은 일이다. 기억나는 것으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하여, 지민은 그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만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그가 미치도록 껄끄러웠다. 인터뷰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한 장소는 웃기게도 한적한 동네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태형은 이 집 텀블러 많이 들고 다녔었지. 지민이 쓸모없는 낡은 기억을 떠올리며 카페 문을 열었다. 이미 몇 차례 인터뷰가 진행 된 것인지 북적북적했고, 심지어는 촬영도 하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지민은 관자놀이 부근을 만지며 제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 공간은 어수선했고, 지민의 심정은 그보다 배는 더 어수선했다.

 

   유독 길었던 지민의 앞 순서가 끝나고, 드디어 지민의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어쨌든 한 두 장의 사진을 찍어야 함으로 옷을 갈아입는 태형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래서 슈퍼스타 인터뷰 따기는 괴로운 법이다. 기다림의 시간도 길고, 묶어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는 스타가 되면 올챙이 적 기억 못하고 기자들을 홀대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집장은 꼭 지가 안가고 저를 시키더라고. 지민은 막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상사 욕을 한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태형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긁어댔다. 아, 아닙니다. 지민이 예의를 갖추어 자리에 일어나 옅게 인사했다. 일순 그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내 예의가 가득한 미소로 바뀌었다.

 

   인터뷰는 별거 없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쨌든 전날 급하게 보고 온 영화의 내용에 대한 생각들을 주고받고,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의 진부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오늘 잡힌 인터뷰 스케줄은 지민의 잡지사가 마지막이었는지 카페 내에 기다리는 다른 기자는 없었다. 몇 안 되는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였다. 지민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의 순서가 있는 상황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 있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평범하고도 진부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지민은 인터뷰를 끝냈다. 어서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빨리 회사로 넘기고 지긋한 더위에서 벗어나서 휴가를 즐기고 싶었다. 어쨌든 간에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세상은 그런 지민에게는 알짤 없다는 듯 굴었다. 적당히 널브러져 있던 제 짐을 챙기고 일어선 지민에게 날아 들어온 뜬금없는 한마디가 그랬다. 지민 씨. 저를 부르는 익숙한, 그러나 어딘가 낯설기도 한 음성에 지민이 뻣뻣하게 고개를 꺾었다. 아, 네. 왜 그러시죠. 목구멍 안쪽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카페 안은 현장을 정리하느라 분주했고, 각자 일이 있는 모양인지 이 순간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고개를 돌린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역시나 태형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함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지민 씨. 참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이었으나, 둘 사이에 이보다 더 절묘한 호칭도 없을 것이었다. 지민의 안구에 압박감이 올랐다.

 

   “지민 씨.”

   다시 한 번 태형이 제 이름을 불렀다. 왜 자꾸 이름만 부르고 그러냐. 이 상황이 여간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닌지라, 지민의 표정이 결국엔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대놓고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은 아니었고, 그냥, 그래 그냥 조금 어긋난 표정이었다. 예의는 지키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다는 그런 의미의 표정.

 

   “네. 문제 있으세요?”

 

   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그것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했던 관계. 딱 그 정도로 선을 긋고 싶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 나이는 한참 지나지 않았나 싶다. 지민의 대외용 미소에 태형은 또 한참 말이 없었다. 그냥 그 크고 깊은 눈동자로 지긋이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나 견디기 힘든 것은 저 눈이요, 그렇지만 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것도 저 눈이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공간 안에서 저와 태형만이 정적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정적 안에서 지민은 일련의 과거들이 떠오르는 것을 구태여 참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정적과 그의 눈동자. 그리고 하필이면, 짜증나게 후덥지근한 여름. 짜고 치는 고스톱만치 똑같은 상황에 울컥,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첫사랑이라는 건 덧없다. B급 로맨스 영화나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인터넷 소설, 혹은 싸구려 감성의 로맨스 소설을 보면 꼭 비슷한 표현이 등장한다. 처음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인간들은 이렇게도 집착한다는 말인가. 열여덟 소년의 지민으로서는 짐작조차 못할 집착이었다. 첫사랑의 버거움을 알기에는 아직 지민은 친구들과 PC게임을 하고 게임방에 가고 노래방에 가는 것이 즐거운, 어린 나이었다.

 

   친구들은 다들 첫사랑, 첫사랑 노래를 부르며 있는 척을 하던데 지민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대부분 들어보면 그냥 중학교 시절, 혹은 초등학교 시절 잠시 거쳐 갔던 소꿉장난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도 진심인 녀석들이 섞여 있었지만 흔치 않았다. 청소년이라는 건 그런 나이 대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환상으로 가득 차있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은 쌓이고 또 쌓였다. 그렇게 쌓이다보니 어느새 지민에게는 첫사랑은 비단 가슴 절절할 뿐만이 아니라, 설렘도 가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드라마나 영화 같은 일이 펼쳐질지도 몰랐다. 지민은 보기 드물게 감성적인 소년이었다.

 

   감성 넘치는 문학소년 치고는 평범한 하루들이 반복됐다. 그 날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하루였다. 여름방학은 곧 이었고, 매미는 벌써부터 온몸을 다해 울고 있었다. 날이 더워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땀으로 몸을 한 번 씻을 수도 있을법한 온도였음에도, 공립이었던 지민의 학교는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주는 자비는 베풀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고등학교의 일상이었다.

 

   식중독으로 문제가 생겨 당분간은 급식이 없다는 학교 측의 공지를 받은 지 어느덧 3개월이 넘었다. 이쯤 되니 학부모들도 꽤나 지쳤는지 학급에서 제대로 도시락을 챙겨오는 이는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지민 역시 도시락을 잘 챙겨오지 않는 편이었다. 편의점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부러 부모님에게 용돈으로 대신 달라고 했다. 그냥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먹으려고요. 그게 더 좋아요. 어머니의 밥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민이 삼각 김밥이나 편의점 샌드위치, 혹은 간혹 부리는 사치로 편의점 도시락. 그것들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주류였다. 그러나 지민은 홀로 밥을 먹는 시간이 즐거웠다. 결코 친구가 없어서도 아니었고, 친구들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 시간이 즐거웠을 뿐이었다. 조금 덥지만, 학교 뒤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가끔 날아 들어오는 벌레들을 휘휘 내쫓고 아침에 사온 밥을 우물거리고 있으면 퍽 기분이 상쾌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유영하는 구름을 구경하는 맛이 있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천막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를 듣는 맛이 있었다.

 

   그 날은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심각하게 화창해서 내리 쬐는 해가 조금 뜨거워 땀이 삐질 나오는 날씨였다. 아침에 산 ‘더 커진’ 삼각 김밥 하나를 들어 포장지를 벗겨내었다. 대충 간이 된 밥알이 이상하게도 맛있었다.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 최근 꽂힌 고전 영화의 주제곡을 틀었다. 시야에는 운동장이 들어찼다. 괜한 곳에 돈을 쓰는 학교인지라 운동장은 인공잔디로 이루어져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애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지 참 열심이었다. 항상 밥을 먹던 학교 뒤편이 아닌지라 지민은 이 광경이 조금 낯설면서도 새로웠다. 매일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형을 만난 것은 그런 날이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장소에서 평소와 같은 밥을 먹었던 날. 한참 삼각 김밥을 먹던 지민이 시선을 돌린 끝에는 운동장을 향해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던 처음 보는 녀석이 앉아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목울대가 잘생긴 사람이었다. 명찰의 색이 지민과 같은 것을 보아 그와 동급생일 터였다. 지민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그는 지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움찔. 눈이 마주치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서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괜한 오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눈을 피하면 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대략 그렇다. 피하면 지는 것으로 여긴다. 이상한 바보 같음이었다.

 

   이상한 순간이었다. 분명 운동장에서는 서로 소리를 지르면서 패스를 하라든가 공을 차라든가 하는 말들이 오가고 산책을 하는 선생님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오고 복도에서 뛰노는 음성이 창문을 통해서 들려와야 정상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정적에 휩싸인 기분이 들었다. 서로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는 민망하게도 명확하게 초점이 서로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 상대의 눈동자는 맑고 깊었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수령했다. 신비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던 행위는 그의 입모양에 의해서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안녕’ 씩 웃으며 입모양으로만 제 의사를 전달하는 모양새가 퍽 이상했지만 지민은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입모양으로 ‘안녕’ 따위를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 순간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떠올리던 지민은 그렇게 치부했다. 사랑이면 한 번에 알아 볼 수가 있다는 말이 있다. 지민은 무의식중에 알아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랑인지 자각하는 것에는 어언 10년 가까이 걸렸다는 것이 조금 흠이었다.

 

 

   어찌됐건 그런 과거의 이야기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지민은 그런 것은 이제 어찌되든 상관이 없는 껍데기만 어른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사진을 좋아하던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같은 것은 기억하기도 아까울 사건으로 치부할 여력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지민은 이 정적을 못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지민은 아직은 연약한 부분이 남아있어서,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무의식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양 굴었다는 것이다.

 

   지민은 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태형의 안녕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너져버렸다.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에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연한 목소리로, 지민 씨라고 부른 이후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던 지민에게, 안녕이라고 말해버리면 도대체 지민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한다는 말인가. 눈가가 발간 지민을 보며 태형은 조금은 당황한 듯 반응이 굼떴다.

 

   지민은 후다닥 제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내고는 웃으며 태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민은 그 안녕에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태형도 알고 한 인사임이 틀림이 없었다. 애초에 필사적으로 대면하게 대하는 지민의 태도는 아무리 눈치를 말아먹은 인간일지라도 저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태형은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가 피하지 못할 이야기부터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태형은 간만에 만난 지민과의 관계가 흐지부지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데일리 비티 측에서 이전에 화보 촬영에 대한 제의가 있었는데 스케줄을 잡고 싶어서요. 자세한 일정은 검토 후에 연락 드려도 될까요? 연락처 알려주시면 먼저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태형이 웃으며 예의바르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너도 나도 어른이 됐구나 싶어 지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민의 연락처를 원하는 그에게 어림도 없다는 심보가 들었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지민의 그런 심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스케줄 건은 편집장님이랑 연락해보시는 게 좋겠네요. 편집장님 연락처 드릴게요. 직접 연락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엄연한 거절의 대답에 태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화보 촬영 스케줄은 편집장님이랑 연락하는 게 제일 좋고요. 원래 절차가 그렇다는 듯 구는 지민에 태형은 다시 한 번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박지민이랑 데이트하는 스케줄 잡으려면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죠?”

   “... 그 스케줄은 소화하기 힘드실 것 같네요.”

   “오, 그래요? 제 스케줄을 꽤 잘 아시나 봐요?”

 

   전혀. 전혀 모른다. 태형의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저가 알게 뭔지. 보통은 스케줄을 꿰고 있거나, 꼭 그렇지 않더라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법도 하지만 애초에 지민은 이곳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고 당장 내일 휴가를 갈 사람인지라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슈퍼스타이자 제 고등학교 동창의 스케줄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그쪽 스케줄이랑 상관없이, 박지민은 당분간 시간이 없어서요.”

 

   이정도면 단호하게 쳐내다 못해 아주그냥 철벽인 것 같은데. 태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못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럼 또 봐요.’라는 말만 남기고 등을 보였다. 보긴 뭘 봐. 앞으로 지민은 그를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인터뷰가 잡혀도 절대 저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절대. 절대로. 편집장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앞으로 태형을 마주하는 일은 만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생각보다 더 고역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옛날일은 계속 생각나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정신없는 감정이 마구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지민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서 태형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지민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고, 어쨌든 지민의 인생에서 최악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top5안에 들었을 것이었다.

 

* * *

 

   처음부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냥 한국에 가서 영화 홍보를 하고 한국을 조금 즐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간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뭐,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서 일을 하겠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어찌 보면 안일했던 것이다.

 

   그렇게 잘 흘러가던, 그 안일한 생각과 별거 없던 일정은 지민을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었다. 얼마만이지. 12년만인가. 정확한 횟수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꽤 오래된, 고등학교 졸업 이후 우연히 지나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이를 간만에 마주한 것이었다. 친구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옛 애인이냐고 묻는다면 또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형과 지민은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옛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그냥 정의하지 못할 이상한 감정의 관계였다. 지민은 그마저도 과거의 일인 듯 굴었으며, 태형은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좀 막무가내로 굴었다. 인정한다. 어린애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태형은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약 십년만의 기회를 그냥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예정에도 없던 화보촬영을 하겠다고 나섰다. 데일리 비티 측은 신이 나서 일정을 잡았다. 화보촬영 한 번 정도야 큰일도 아니었다. 별 신기할 것도 없이 촬영지는 제주도였고, 여름이니 바다에서 찍자는 의견이 오갔다. 그러려니 했다. 놀라울 것도 없는 촬영 콘셉트이었다. 편집장이라는 자는 태형이 기꺼이 화보촬영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분위기에 힘입어 태형은 지민이 제 화보촬영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슬쩍 꺼내들었다. 저번에 인터뷰 하셨잖아요. 마음에 들었거든요. 뭐 그런 뉘앙스의 말들을 흘렸다. 편집장은 원래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며 지민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책임자로 오시는 건가요? 태형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게 좀...

 

   “지민 씨는 지금 휴가를 써서요. 다음 주 까지는 휴가입니다.”

   세상에. 갑자기 무슨 휴가야. 난대 없는 휴가 발언에 태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 진짜 반드시 지민 씨여야 하는데요. 그렇게 내뱉지는 않았어도 이미 표정으로 충분히 전달이 된 것인지 편집장의 얼굴이 난감함 그 자체였다. 우물쭈물 대답이 없는 상대에게 태형이 강력한 한 수를 두었다. 유치할지라도 태형은 다시 지민을 만나야만 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다음 영화가 개봉하면 반드시 한국에 와서 데일리 비티와 가장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를 하겠어요. 데일리 비티에서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도 있죠? 거기에 올리게 아예 인터뷰 촬영을 하죠.”

 

   이정도면 파격적인 제안 아닌가요? 태형의 눈이 반짝였다. 태형은 안타깝게도 제가 가진 파급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태형은 싫든 좋든 세계적인 슈퍼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였고, 모든 매스컴은 그의 소식을 세상에 발 빠르게 전하는데 혈안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태형이기에 자신이 낸 카드가 상대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지민 씨 건은 제가 열심히 불러보도록 하죠.”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겠지만. 어쨌든 지민의 성격을 알고 있는 그가 휴가 중인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의 반응을 예상하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엔 그냥 얌전하기만 한 애였는데. 성질내는 지민을 상상하며 태형은 쿡쿡 웃었다. 변한 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운동장 앞에서의 첫 만남 이후, 이상하리만치 서로가 잘 보였다. 태형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고, 지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앵글에 나타났다. 편의점 음식을 좋아하고 구름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하는 아이였다. 한 열댓 번 그가 태형의 앵글 안에서 숨 쉬는 것을 발견했을 때, 태형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을 보고 목소리를 내었다. 안녕. 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민이 귀엽다. 너도 날 알고 있잖아. 이상한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응, 안녕.”

   “밥 항상 혼자 먹어? 같이 먹어도 돼?”

 

   그러면서 이미 지민의 옆에 앉아버린 태형은 지민의 의사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었다는 듯, 아침에 빵집에서 사온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지민의 손에는 편의점 샌드위치가, 태형의 손에는 빵집의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처음으로 함께한 밥이었다.

 

   둘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오래된 영화를 좋아했고, 그 영화의 주제곡을 좋아했으며,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공부는 싫지만 시와 소설은 좋아하는 것도 똑 닮아있었고 치킨보다는 피자가 더 좋은 것도 그러했다. 이만치 닮아있어서, 이야기도 잘 통했다. 서로가 좋아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눈부시도록 하얗고 선명한 구름 낀 하늘을 등지고 웃고 있는 지민을 보자면 가슴 언저리가 시큼한 게 흔히들 말하는 사랑인가보다 했다. 태형은 자각이 빠른 아이였고, 생각도 깊은 아이였다. 아이라고 하기엔 조금 성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떠한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이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도 있었거니와, 지민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따위의 걱정 또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간질거리는 상태가 좋았다. 둘은 무엇이든지 가장 먼저 서로를 찾았다. 좋은 영화를 찾으면 상대를 찾았고, 맛있는 샌드위치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상대에게 알려주었으며, 좋은 노래를 알게 되면 꼭 들려주었다. 서로의 손이 맞닿았을 때 느꼈던 간질거림도 좋았다. 붉어진 볼을 더위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고 화끈거리는 손끝을 괜히 꾹꾹 눌러보는 행위가 설렜다. 서로가 이 감정은 특별하다고 느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조심스러움도 좋았다. 그냥 태형은, 그 상황의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냥 그 상황 자체로 다 좋았으며 더 이상 무언가 변화를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태형은 저 대신 차를 운전하던 제 형에게 물었다. 뭐가. 뜬금없이 날아 들어온 질문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태형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그런 건가 싶고, 그냥 심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름 제일 친한 친구였고, 분명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임이 분명한데 그렇게 매몰차다니. 태형은 어느덧 과거의 저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때 뭐라도 엮어놓고 서로 멀어졌으면 지금처럼 매몰차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호텔에 들어선 태형은 들어가자마자 맥주를 깠다.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더운 날에는 이만치 시원한 게 없었다. 한국에서도 결국 입에 익숙해진 버드와이저였다. 마트나 편의점에 파는 익숙한 맥주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탓이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카스나 그 외의 한국인의 맥주는 조금 낯설었다. 겨우 10년이어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한국에 거의 없었던 탓이다.

 

   차디 찬 맥주가 제 목을 긁고 지나가자 또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냥 다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못 본 새 지민은 조금 더 복잡한 어른이 되어 있었고, 어찌 되었든 간에 저 또한 단순하게 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태형은 여전히 옛날 영화를 좋아했고, 올드팝을 즐겨 들었으며,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그럼에도 지민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었다. 왜? 어쩌면 그 의문도 우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답은 알 수 없었다.

 

   촬영은 이틀 뒤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태형이기 때문에 조금 급하게 일정을 잡았다. 남들 모르게 비행기를 타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 겨우 제주도로 가는 길인데도 인파가 대단했다. 이건 조금 피곤하기는 하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던 태형이 문득 그렇게 느꼈다. 빨리 지민이 보고 싶어. 뭐,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다. 아니, 조금 많이 들었다.

 

* * *

 

   지민은 지금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휴가 중인 저에게 다짜고짜 전화해서 뭐? 저가 아니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지민 씨, 내가 이런 부탁 잘 안하잖아. 김태형이 지민 씨 아니면 안하겠다는데 어떻게! 참. 별 지랄도 다 있다.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럼에도 지민이 현재 제주도에 있는 이유는 원체 마음이 약한 인간이기도 하거니와 편집장 이 인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대서, 이거는 휴가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친히 행차를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지민은 최악의 기분으로 태형을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우선 만나면 한 대 갈겨줄 생각인데, 과연 괜찮은 방법인 걸까. 뭘 모르는 지민도 그의 얼굴이 꽤 비싸다는 건 알아서 얼굴을 피해서 가격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설마 고소하지는 않겠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촬영지에 도착한 태형과 지민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대화는 무슨 마주서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일하는 태형을 보는 건 나름 처음이라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촬영 중간 중간 눈이 마주치는 듯 착각이 들어 괜히 애꿎은 사이다 캔만 구겼다. 결국 지민은 촬영 도중 몰래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작은 마트에 들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대충 아이스크림 하나를 계산한 지민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신발을 질질 끌듯이 걸었다. 이가 시려올 정도로 깡깡 얼어 있었다.

 

 

아직은 태형과 지민이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 방학이 코앞이던 시기였다.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와서, 그 날은 다음날이면 방학식이라고 다들 들떠있던 때였다. 고등학생의 방학은 너무나도 더워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때 하는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민은 그 말에 백번 찬성할 수 있었다. 더워도 너무 덥다. 이건 매미가 울다가 더워서 말라 죽을 정도의 더위였다. 내일이면 방학식이었고, 방학을 하면 에어컨을 틀어가면서 집에 누워 하루 종일 뒹굴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러면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금방 화를 내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겠지만.

 

   방학은 내일인데 그 전날인 오늘도 학교는 일찍 끝났다. 선생님도 일하기는 싫은 날씨인가. 그런가 싶었다. 종례가 끝나자 덥지도 않은지 우르르 몰려 나가는 급우들을 보며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활발해지기에는 지민은 더위를 너무 많이 탔다. 어느덧 반에는 저 혼자였고, 청소 당번인 녀석들도 다 도망가고 난 뒤였다. 부러 더 느릿하게 가방을 챙겼다. 사람이 많이 빠진 시간에 여유롭게 나가고 싶었던 탓이다. 가방의 지퍼를 닫고 책상을 똑바르게 정리했을 무렵 복도 쪽에 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이 창문을 두드리며 지민이 있는 반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뭐야.”

 

   뜬금없는 인사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며칠 시간을 보냈다고, 어느덧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태형이 망설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어... 저기,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덥고 짜증나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민은 태형이 제안한 아이스크림 타임을 거절할 수 없었다. 딱히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땀을 흘리고 찝찝함을 느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태형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간은 꽤 즐거울 것 같았다.

 

   태형의 주머니에는 항상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있었고, 꼬깃꼬깃해진 지폐 두 장을 꺼내어 슈퍼 아주머니에게 건네면 다음날 지민이 태형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방학이 되어도 아이스크림 타임은 계속 되었다. 그냥 서로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라고 했다. 그게 다였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한 것도 없었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 것이 전부였다. 태형이 지폐 두 장을 가지고 나오면 다음번 지민이 천 원짜리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돈이 있어도 지민이 나누어 내는 법이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유치한 규칙이었다.

 

 

   촬영이 한참인 장소로 다시 돌아오니 거의 다 끝나가는 와중이었다. 오기 전에 태형의 화보를 급하게 찾아봤지만 대부분 양복을 입고 있거나, 뭐 엄청 어두운 느낌이던데. 상큼한 것도 나쁘지 않네. 지민이 거의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에 후루룩 넣어버리고는 나무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터덜터덜 걸었다. 정정한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흡족한 화보였다. 확실히 이 새끼는 잘생겼다. 지민은 사진감독이 보여주는 화보들을 살펴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뭘 지적할 게 있기는 할까? 저런 얼굴인데? 굳이 책임자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까지 한 화보들이 이어졌고 지민은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좋네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촬영은 끝났고, 지민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로 순탄한 촬영이었다.

 

   “지민 씨.”

   “...네.”

 

   왜 안 오나 했다. 어김없이 들리는, 태형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대략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떠나라는 의미였다.

   “음... 앞으로 스케줄이 어떻게 되세요?”

   “글쎄요. 일단 서울로 올라가서 누구 때문에 못 누린 휴가를 마저 누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의도가 다분한 말에 태형이 머쓱한지 볼을 긁적였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안하면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태형에게는 나름 간절한 문제이기는 했으나, 지민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정도로 속 깊은 성미는 못 되었다.

 

   “그게 할 말이면 이만 가볼게요. 방해받은 휴가를 즐겨야 해서.”

   “아, 잠깐!”

 

    다급하게 붙잡은 손바닥에는 미미하게 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민이 갑자기 잡힌 제 팔꿈치 언저리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그만 귀찮게 하세요.

 

   “난 그쪽이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는 척하는 사이도 되고 싶지 않거든요.”

   “... 대체 왜?”

   “왜라니... 내가 그냥 그러기 싫다고 하잖아.”

   “지민아, 제발. 난 너랑 잘 지내고 싶어. 오랜만에 만났잖아 우리.”

 

   하아. 지민이 다 들리도록 한숨을 내뱉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민은 아직 그 시절의 감정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라고 잡아 땔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태형의 인사에 눈시울이 붉어졌겠는가. 태형 또한 감정에 엮여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지민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좋아. 그런 걸로 하자.

 

   “...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휴가는 어쩌고?”

   “먹고 나서 생각해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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