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준 - 노래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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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야, 내가 좋아하는 애 얘기 해줄까.
"아저씨, 오늘 많이 기다려야 돼요?"
"어어. 태형이 왔냐. 보자...한 20분은 있어야 될 거 같은데.“
이 앞 사거리에 생긴 코노 있잖아. 아니, 거기 말고 새끼야. 유가네 건물 3층, 1,000원에 4곡 주는. 어, 내가 거기 아저씨랑 친하단 말이야. 저번 달에는 진짜 거의 맨날 갔는데, 그 때마다 인제 맨날 오던 애가 있었어. 남서고 교복 입고 있는데 무슨 아직 젖살도 하나도 안 빠져서 애기 같은 거야. 아,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너네 둘 혼자 온 거지? 같이 들어 가면 5분이면 될 거 같은데. 어떡할래?"
금요일이었나 그랬는데. 사람이 존나 많아서 오늘은 안 되겠다 싶었지. 무슨 코노를 2, 30분 기다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갈려고 했는데 인제 거기 아저씨가 나랑 걔한테 물어보는 거야. 둘이 혼자 왔으면 그냥 같이 들어가서 노래 부르면 안 되냐고. 야, 솔직히 약간 모르는 애랑 같이 들어가는 거 좀 쪽팔리잖아. 내가 됐다고 하려고 하는데 그 애가 존나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고? 심지어 걔가 나보다 먼저 온 거라 걍 까버리고 혼자 들어가면 됐는데.
"나 먼저 한다."
"어? 어, 그래."
어쨌든 나는 노래 부르고 싶었으니까 천 원 짜리 바꿔서 따라 들어 갔지. 솔직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인제 그 애는 관심도 없는 거 같더라. 솔직히 좀 자존심 상하는 거 뭔지 알지? 아, 시발. 더 들어 봐봐. 아니 인제 내가 김태형인데. 남서고 애들 중에서도 나 좋아하는 여자애들 꽤 많은데 내 이름 한 번도 못 들어봤나, 인스타에서 얼굴 본 적도 없나 뭐 그런 생각이 든 거지. 근데 관심도 없는 애한테 그걸 먼저 떠벌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닥치고 걔가 예약하는 거 구경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야. 야, 근데 걔가 뭐 예약 한 줄 아냐.
45151 버즈 - 겁쟁이
버즈! 씨바, 나 버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잖아. 어, 1집부터 쭉 메들리로 달리면서 목 풀고 그러는 거 알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제 습관적으로 무선 마이크 전원 올렸다가 걔랑 눈이 마주친거야. 그래서 아, 이거 내 노래 아니었지. 하고 머쓱하게 웃었는데, 그 때 걔가 이렇게 물어봤어.
"너 버즈 좋아해?"
어, 존나 좋아해. 대가리에 모터 달고 존나 끄덕 거렸더니 그 애가 웃었다? 아, 야. 니가 그걸 봤어야 되는데. 아니다, 안 보는게 나았음. 나 말고 그 애한테 반하는 새끼 있으면 진짜 다 죽여 버릴 거거든. 그 좁은 방 안에 걔랑 나랑 단 둘이 있다는 게 갑자기 실감이 나면서 약간 심장이 커피 마신 것처럼 발작을 하는 거야.
"같이 부르자, 그럼."
거짓말 좀 보태서 300번은 넘게 부른 노래인데, 자다가도 누가 반주 틀어주면 벌떡 일어나서 바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존나 병신처럼 반주가 흐르는 데도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3, 2, 1까지 뜨고 첫 소절 시작하는데. 불러야 되는데 그냥 마이크만 잡고 앉아 있었어. 그 애 얼굴만 보면서.
미안합니다 고작 나란 사람이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합니다
가사가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더 빨리 뛰어서, 약간 나는 솔직히 처음이었어 이런 거. 서율이랑 사귈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거든. 그 때는 걔가 뭐냐, 인제 나를 더 좋아했던 거니까. 뭐? 첫사랑? 그런가. 그런가 보지. 근데 내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 게 있으니까 노래를 못할 리가 없는데, 사실 이 노래 부르면 여자애들 100이면 100 다 뻑 갔는데 그 애가 내 쪽으로 쳐다 보지도 않는 거야. 심지어 앞 부분은 나 시켜주고 싸비는 자기가 부르더라. 약간 걔가 예약한 거니까 할 말 없긴 한데 그래도 나 1절 좋아하니까. 그 때 또 한 번 자존심이 존나 상했어. 에코랑 마이크 볼륨 세팅까지 제대로 하고 2절을 불렀지. 또 싸비 안 줄 까봐 긴장 했는데 이번엔 시켜 주더라.
날 사랑 해줘요 날 울리지 마요 숨 쉬는 것보다 더 잦은 이 말 하나도
내가 목소리가 좋으니까 더 '잦은-' 이 부분 또 킬링 파트잖아. 마이크 조절을 무슨 랭겜보다 신중하게 했다니까. 아무튼 서로 모르는 사이끼리 몇십 곡씩 부르고 있을 건 아니니까 얼마 안 쓰고 노래방을 나왔어. 사거리까지 같이 걸어 나오는데 학원가 따라서 벚꽃이 존나 예쁘게 핀 거. 인제 약간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길 아래를 그 애랑 걷는데, 나한텐 관심도 없어서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그 옆모습이 이미 너무 좋더라고. 쟨 이름이 뭘까, 몇 학년일까, 아까 내 노래 별로였나? 나랑 친구 할 생각 없나, 입술 되게 예쁜데 뭐 바른 건가? 찐따 새끼처럼 막 한 마디도 못하고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그 애랑 눈이 마주쳤어. 와, 근데. 근데 있잖아.
"갈게. 우리 집 이 쪽이라."
"저, 저기 잠깐!"
".....?"
아, 좆됐다. 휙 돌아서는 그 애 손을 묻지도 않고 덥석 붙잡은 거야. 살짝 놀라면서 뒤로 돌아 본 그 애 눈이, 말도 안 되게 예쁜 거야. 내가 약간 충동적인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또라이는 아니지 않냐? 아, 또라이라고? 그래? 뭐 아무튼. 그 애 투명한 눈동자 안에 벚꽃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아서. 아니면 공기가 너무 따뜻해서, 학원 보충 없는 날이라서, 내일 토요일이니까, 뭐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랬던 거 같은데.
"왜?"
혹시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너는 이름이 뭐야? 너 되게 예쁘다. 혀 끝에서 너무 많은 말이 간질거려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생각이 죄다 뒤죽박죽 엉켰어. 그래놓고 결국 한다는 말이.
"내일도 코노 올 거야?"
"뭐?"
존나 병신 같아 보였을 거다 아마. 김태형 열여덟 인생 통틀어서 제일 쪽팔린 경험 탑 쓰리 안에 들 것 같음, 진짜로.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찐따처럼 어버버 하고 있는데 그 애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는 거야. 야, 인제 그런 말 있잖아. 간절히 원하면 온 은하가 도와 준다며. 아 이거 아니야?
"나 김태형. 여기 현대 아파트 살아. 너 혹시 여자친구 있어?"
"말을 되게 두서 없게 하는 편이구나."
걘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아. 나는 인제 뭐 하나 진득하게 할 줄 모르고 이것 저것 관심 많아서 결국 좀 어정쩡하게 되는 편인데, 걔는 되게 차분하더라. 석식 쳐먹으러 급식실 뛰어 가다가 운동장에서 굴러서 얼룩덜룩 더러워진 교복 바지도, 남승현 그 새끼가 잡아 당겨서 다 구겨진 셔츠도 걔 앞에서는 약간 민망해 지는 거야. 깨끗하게 잘 다려진 셔츠랑 단정한 스니커즈, 가로등 아래서 약간 짙은 밤색이 도는 머리카락이랑 순한 눈매, 떡 같이 말랑말랑한 볼이랑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다 너무 예뻐서 내가 되게 하찮게 느껴졌다고. 어? 그거 첫사랑 맞다고? 근데 나 여자친구 많이 사겨 봤는데?
"박지민이야. 저기 래미안 살고."
아니다, 인정. 걔 내 첫사랑 맞아. 집에 돌아 와서도, 샤워를 해도, 불닭볶음면 끓여서 컴퓨터 앞에 앉아도, 문제집을 펴도 그 애. 아니 지민이 얼굴이 둥둥 떠다녀서 미친놈 처럼 웃었다니까. 근데 인제 웃기만 한 건 아니야. 야,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야 되는 거 모르냐?
"남자친구 있어."
그 순간 내가 무슨 기분이었냐면. 천국에서 자이로드롭 타고 지옥까지 내려 갔다가 염라대왕이랑 하이파이브 한 판 때리고 다시 지상 언저리로 돌아온 것 같더라. 뭔 말이냐고? 일단 사귀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런 거, 우린 또 그런 짓은 안 하잖아.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약간 병이라니까, 나 그런 거 취미 없어. 그래도 지민이가 '여자'친구가 아니고 '남자'친구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마음이 아, 되게 복잡했어. 미안한데 한 번만 더 번복할게. 그러니까 지민이는 내 첫사랑이 아니고, 내 실수야.
"나 내일부터는 시골 내려가야 해서, 다음에 보자."
"어? 어, 그래."
"아, 노래 잘 하더라 너. 나 버즈 진짜 좋아하거든. 너처럼 잘 부르는 사람 처음 봤어."
그 뒤로 매일 코인 노래방에 갔어. 지민이가 시골 간 거 알면서도 그냥 혹시나 싶어서 몇 시간 동안이나 기웃 거리면서 출석 도장을 찍은 거야.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보기 싫어서 구라라도 친 거였으면 좋겠어서. 근데 이건 좀 반칙 아니야? 그런 식으로 칭찬 잔뜩 해주고서 사람 마음 들뜨게 해놓고 눈 앞에 안 나타나면 나는 어떡해. 매일 노래방에 가서 버즈 노래만 불렀어. 지민이도 버즈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다시 만나면 그 때보다 좀 더 잘 불러주고 싶어서. 야, 혹시 아냐? 내가 얼굴로 못 꼬신 사람 처음인데. 노래로라도 꼬셔볼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안녕!"
지민이를 다시 본 건 몇 주 뒤였던 거 같아. 보충 끝나고 명랑 핫도그에서 모짜렐라 하나 조지고 있었거든. 근데 언제 왔는 지도 모르게 곁에서 어깨를 톡톡 치더라. 요즘 날씨가 좀 지랄이잖아. 약간 더워서 땀 흘리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입가에 설탕 잔뜩 묻히고 있을 때 만날 건 뭐냐고.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쳐다보니까 지민이가 웃었어. 그 애가 웃는 걸 본 건 고작 두 번째 였는데, 그 웃음에 말도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약해지는 거야. 자꾸 보고 싶다, 예쁘다, 귀엽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말들을 다 해주고 싶은 그런 느낌. 내가 뭐라고, 그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코노 갈래?"
"어?"
몇 주 만에 만나서 안부도 안 묻고 한다는 소리가 코노 갈래? 라니, 시발. 내가 생각해도 존나 병신이다. 여자 애들 앞에서는 존나 TV 드라마 뺨 치는 멘트도 척척인데 왜 지민이 앞에서는 병신 되는 거지... 진짜 코노에 환장한 새끼인 줄 알았을 거야. 근데 가방 끈을 붙잡고 선 지민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아, 귀여워 가지고. 키도 손도 발도 얼굴도 다 나보다 작아서 건드리면 비눗방울처럼 톡 하고 터질 것 같아서 좀 무서운 느낌까지 들더라. 아 왜 때리는데. 나 김태형 맞거든? 아, 대가리 멀쩡하다고. 아니다, 맞아. 나 대가리 어떻게 됐나 봐. 지민이 때문에.
수없이 어긋난대도 기다릴게 아무리 가슴 아파도 웃어볼게
"아, 뭐야 그게. 완전 웃겨.“
어차피 지민이는 애인이 있다고 했으니까. 애인 있는 애한테 치근덕 거리는 게 얼마나 추한지 정도는 아니까 걍 나는 그 애를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 코노 아저씨가 인제 그만 오라고 할 정도로 몇 주 동안 갈고 닦은 실력 아니겠냐? 내가 노래 부르다 쌈자 모창까지 했더니 지민이가 그게 뭐야 이상해 하면서 막 웃는데, 가오 다 죽는 거 알면서도 인제 너무 기분이 좋았어. 내가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지민이가 리듬에 맞춰서 발을 까딱 거리거나 몸을 살짝 흔드는 게, 가끔 내가 쥔 마이크를 쳐다보는 게, 이건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더 가끔은 내 얼굴을 힐끔 거리는 게.
니 맘에 누가 있든 괜찮아 한 번쯤 못 이긴 척 돌아봐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너무 나만 부르는 것 같아서. 마이크를 내리고 지민이를 쳐다봤는데. 반주 소리만 들리는 조그만 방 안에서 벽에 기댄 지민이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거야. 이건 착각은 아니었어, 우리 계속 그렇게 노래가 끝날 때까지 눈을 맞추고 있었거든. 다음 손님을 위해 빨리 선곡해 달라는 기계음이 몇 번이나 나오는 데도, 미러볼이 멈추고 조명이 켜져서 방이 환하게 밝아졌는데도, 옆방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오는 데도 그렇게 한참 동안.
"나 잘생겼어? 왜 자꾸 쳐다 봐."
내가 안 그래 보이겠지만 남의 감정에 약간 예민한 편이라서, 가끔 눈동자만 봐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이 읽힐 때가 있는데 그 때가 꼭 그랬어. 나를 바라보는 지민이의 눈빛에서 읽힌 건 약간의 답답함, 복잡함, 슬픔 같은 감정이었다고. 버즈 성대모사까지 했는데, 싸비랑 킬링 파트 전부 지민이 줬는데 소용이 없었어. 조용한 방 안에서 마이크를 만지작거리니까 심장 박동이 더 크게 느껴졌어. 괜히 다른 생각을 했어. 진짜 충동적으로 이상한 짓 할 것 같아서. 아 그러니까. 뽀뽀라도 하면 어떡하냐? 남자친구 있는 애한테. 씨발, 근데 왜 지민이는 남자친구가 있는 걸까. 내가 좀 더 일찍 지민이를 만났어야 했는데. 아, 나도 남서고 다닐 걸.
"니가 계속 보니까 느낌 되게 이상해."
"......"
"아무렇지 않지가 않아. 이거 맞나?"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을 안 하길래 순간 얘가 홀로그램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지민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꿈이라도 꾸나 싶어서 볼이라도 쳐볼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제야 지민이가 대답을 하는 거야. 야, 뭐라고 한 줄 아냐.
"나도 그래."
"어?"
"이상하다."
"뭐가?"
"나도 아무렇지 않지가 않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물어보고 싶었는데 차마 못 했어. 지민이가 노래방 기계 쪽으로 손을 쭉 뻗어서 패드를 보지도 않고 숫자를 눌렀어. 45151, 버즈의 겁쟁이. 이젠 그 때보다 훨씬 더 익숙해진 반주가 흐르는 방 안에서, 우리는 정확히 4분 42초 동안 서로를 봤어. 아무렇지 않지 않게, 고작 두 번째 만남이라기엔 너무 깊은 거 아닌가 싶은 마음으로. 그 때 알았어. 지민이는 아마 내가 평생 저지른 제일 큰 실수가 되겠구나.
"너희 집 저 쪽이야."
"알아. 데려다 주려고."
"왜?"
지민이랑 걸었던 길에 이제 벚꽃이 다 떨어져 버려서, 봄이 끝나는 기분이라 괜히 약간 아쉬웠어. 호구 같다고? 어, 나도 내가 존나 호구 같아.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그 날처럼 지민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길래 무작정 데려다 주겠다고 했어. 솔직히 지민이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뻥 아니고 진짜 마음이 시큰거렸다니까. 인제 진짜 첫눈에 반했던 건가봐. 아, 나 금사빠 절대 아닌데.
"버..버즈 노래 번호까지 외우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지민이가 또 웃었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긴가.
"나도 번호 잘 외우는데.."
".....?"
"약간 전화번호 한 번만 가르쳐 주면 안 돼?"
인제 지구 온난화가 너무 심해져서 매년 날씨가 더 극단적으로 변해 가잖아. 여름도 너무 길고, 겨울도 너무 길고. 지난 겨울도 진짜 존나 추웠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가고 찾아온 봄이라 그런가. 따뜻한 공기에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녹아 내려서 다른 계절보다 좀 더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민이는 가을에 태어났대. 나는 또 혼자 약간 의미 부여를 했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계절은 봄, 그 애의 생일은 가을. 앞으로 점점 짧아만 질 계절들인데, 언젠가는 그 두 계절이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르는데.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지민이를 떠올리면 되니까 다행이라고. 언제든 그 애만 생각하면 벚꽃이 엄청나게 흩날리는 그 거리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일 테니까.
"어...그러면.."
지민이네 아파트 단지에는 그 골목보다 벚나무가 훨씬 더 많더라. 인제 약간 벚꽃 보다는 초록 이파리만 무성해서 벚나무라 부르기도 민망하긴 했는데. 래미안 입구 앞에서 지민이가 나를 올려다 보고 손을 흔들었어. 이대로 헤어지긴 좀 아쉬워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괜히 뒷머리만 긁고 있었어. 이제 지민이 번호도 받았으니까 카톡 보내면 되는데 그래도 뭔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내일은 몇 시에 갈 거야?"
"어? 어디를?"
"코노."
지민이가 물어 봤어. 이제 지민이 서울 왔으니까 굳이 코노 갈 필요 없는데, 싶어서 안 간다고 고개를 저었더니 지민이가 되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거야.
"왜? 너 코노 좋아하잖아."
그 때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거든. 지민이랑 처음 봤던 그 밤처럼. 그 바람에 얼마 안 되던 벚꽃 잎들이 지민이 뒤로 흩날리는데, 지민이를 실수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너무 예뻤어. 그래서 그랬어, 진짜로.
"나 코노 안 좋아해."
야, 요즘에 유행하는 노래 들어 봤냐? 장범준 노래 중에 노래방에서 라고 있거든? 넌 하여튼 그게 문제야. 존나 뒤쳐지는 새끼, 아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아무튼 오늘 집에 가면서 들어 보라고. 어? 거기 가사가 완전 내 얘기라니까? 무슨 노래냐고?
"나는 너 좋아하는데."
그렇게 노래방을 나오고 그 애를 집에 데려다 준 뒤 무슨 일인가 괜찮은 건가 멍해 버렸네.
"나도 코노 별로 안 좋아해."
핸드폰도 없는 늦은 새벽 집에서 계속 잠은 안 오고 그 애가 좋아하던 노랠 흥얼거렸네.
"너 좋아서 물어본 거야."
완전 내 얘기지. 야, 잠시만. 나 지민이한테 전화 온다. 어, 지민아, 알았어. 지금 데리러 갈게. 야, 나 가야 돼. 지민이 학원 끝났대. 나 간다, 내일 보자. 어? 그래서, 지민이랑 나랑 사귀냐고? 새끼가 센스가 없어. 안 사귀면 내가 이 얘기를 너한테 왜 했겠냐. 궁금하다고? 다음에 보여 줄게. 진짜 존나 예뻐. 서여고 여신 동여고 여신 다 갖다 놔도 지민이한테 안 돼. 지민이는 그냥 봄 그 자체야. 4월 둘째 주, 여기 앞에 있는 벚나무들 제일 예쁘게 피었을 때. 딱 그 만큼 예뻐. 근데 지민이가 다 이겨. 봄은 잠깐 머물다 가지만 지민이는 1년 내내 예쁘거든.
"우리 내일도 볼 수 있을까?"
당연하지 지민아. 내 내일, 모레, 1주일 뒤, 여름, 가을, 겨울 인제 다 니 거야. 45151 눌러 놓고 아무렇지 않지 않게 쳐다 보고 있을 때부터였나, 명랑 핫도그에서 내 어깨 톡톡 치던 때부터였나, 그것도 아니면 코인 노래방에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였나. 그 모든 순간 순간의 니가 너무 예뻐서, 나는 이 짧은 봄을 너한테 다 주기로 했어.
지민아. 나 이제 버즈 안 좋아해. 너 좋아하기도 바빠서.
45151,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