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수화
3
<BGM : Chord overstreet - Hold on(Lyric video)>
轉(전)
시간이란 건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야속해져서 더 더디게 또는 더 빠르게 흘러간다. 주로 지루하거나 달갑지 않은 시간을 보낼 때는 세월아 네월아 기어가면서, 설레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마치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뛰어가는 게 시간이었다. 그리고 요 몇 주 태형의 하루하루는 후자에 가까웠다. 어느덧 지민과 은밀한 동거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벌써 이만큼,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느닷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끼어든 삶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정도였다.
태형은 습관처럼 또 깨버린 새벽에 천천히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가위에 눌리지도 않는데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웠다. 늘 강제로 기상하며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니 알람 소리 하나 없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하기사, 거진 이년 반을 그렇게 살았는데. 여전히 사위는 고요했고, 천장은 푸릇푸릇 한 하늘로 밝아져 가고,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달싹거린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옆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낯설지도 않는 그 온기. 이제는 낯설지도 않는 체향. 태형은 옆으로 돌아 누우면서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손을 뻗어 보았다.
“......”
이마를 만지고 싶었는데, 여전히 만질 수가 없다. 손가락이 허공을 가른다. 익숙했다. 서른 밤이 다 되어갈 동안 단 한 번도 닿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착잡했다.
낯 뜨거운 꿈을 꿨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지민과 하반신을 겹치고 있는 그런 꿈. 연인처럼 입을 맞추는 꿈. 꿈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현상이라고 한다. 그저 밝혀진 거라고는 무의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라는 추측 정도. 현실에서는 닿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 꿈에서라도 만지고 싶던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겠지. 환상 속에서 지민은 연신 수줍게 웃고 있었고, 태형도 그런 지민을 끌어안으며 다정한 미소를 드리웠다. 행복한 꿈이지만 좋았다기보다는 슬펐다. 불가능함을 더 현실적으로 자각하게 된 이유였다.
태형이 조심스럽게 팔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지민의 얼굴로부터 멀어진다. 한 번 망설이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가까워진다.
“......”
아무것도 모르는 무방비한 입술 근처로 제 엄지손가락을 대고 입술을 포개본다. 손톱의 딱딱한 표면이 마찰된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온기에 입술을 벌려본다. 긴장으로 침이 고였다. 시큼한 레몬을 깨문 것처럼 타액이 터진다. 다 부질없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닿고 싶어 간절해진다.
원래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그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향이든 그렇지 않은 방향이든 한 번 형태를 가지기 시작한 마음이란 것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께는 콩알만 했던 것이 하루 만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기도 하고,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숨긴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묻어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아주 조금은 새어나가기 마련이었다. 제아무리 노련한 항해사일지언정 모든 기상과 항해에 초연하고 능숙하지는 않다. 그렇게 노련한 항해사도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서툴게 배를 모는데, 나는 어떻겠어.
새벽녘에 반사되는 속눈썹이 파들거렸다. 가느다란 떨림이 심장을 동요시킨다. 마음이 자꾸 심지를 키운다. 그 심지가 짧게 타들어가기 전에 태형은 얼른 입술을 물렸다. 손가락마저 내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착잡한 얼굴로 내려보고 있자 그림자로 덮인 눈이 서서히 뜨였다. 마주치는 동공. 몽롱한 눈. 찰나의 시간이 영겁과도 같다. 가능하다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태형아?”
태형은 제 연애 감정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땀 좀 봐...... 또 악몽 꿨어?”
아무리 꾹꾹 누르고 또 눌러도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후회할 만큼 터져버리고 만다는 것을. 번지는 마음을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다시 묻는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 대신 거짓말을 흘린다.
“그냥 더워서 깼어. 다시 자.”
“......응. 너도.”
“응.”
그래서 더 단단히 주먹을 쥐어보았다. 형태가 없는 마음을 쥘 수는 없으니 주먹이라도. 손톱이 손바닥 표면을 꾹 파고든다. 그렇게 또 하루를 견뎌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다름없는 척 또 하루를 연기해본다.
나를 바라보다 이내 닫히는 눈. 아래로 촘촘하게 깔리는 속눈썹이 너무 예뻐서, 그 위로 입술을 누를 수가 없어서, 그래서 조금 울고 싶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목적’이라는 요소는 인간의 삶 전반적으로 아주 많은 의미를 부여해준다. 누군가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꿈. 누군가에게는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 또 누군가에게는 도달하고자 하는 낙원. 대체로 현시점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하루를 연명해갈 수 있도록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런 목적을 잃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부랑자는 삶이 무기력해지기 마련이었다. 목적이 있다 한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이 그랬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태형과 이곳저곳을 쏘다녀봤지만 전부 허사였다. 제 정체성을 떠올릴만한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도 모아지지 않았다. 간혹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조각들마저 어떤 장소나 어떤 대화가 아닌 그저 감정 덩어리였다. 그것도 한낱 부정적인 감정들.
지민은 본능적으로 제가 이렇게 된 사고의 전말이 어두울 거라는 걸 짐작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무엇이든 도태되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모르는 척 외면해도 그 당시에만 잠시 안도할 뿐, 결국은 불안에 떨거나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마음만 앞서고 쉽게 전진하지 못하는 발걸음이 자꾸 지민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지난주에도 허탕, 엊그제도 허탕, 어제도 허탕. 그래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태형이 제안했다.
「너가 처음에 눈 떴던 장소 있잖아. 거기 갈까?」
「어?」
「...아직 기억하고 있지?」
「......」
「가보자.」
당연히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이 기억을 찾기 위한 여정에 가장 큰 일조를 할 장소일 테니까. 다만 지금까지 구태여 걸음을 물렸던 이유는 아직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홀로 푹 떨궈져 온통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를 낯설게 배회했던 그 두려움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던 지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다음 날 태형의 강의가 끝나는 즉시 약속이라도 한 듯 이동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때 그 붉은 다리로.
덜컹거리던 버스가 끼익 멈추었다. 도착한 버스정류장에 태형이 먼저 내렸고, 그 뒤를 따라 지민도 내렸다. 조금 걷다 보니 붉은 다리가 나왔다. 드넓은 강 위에 유유히 떠오른. 타오르는 노을이 잔뜩 내려앉아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다리가 아주 절경이었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끼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어느 순간부터 걸음을 멈춰 세운 지민에게로 한 번 시선을 던진 태형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런 태형의 날갯죽지로, 주먹으로, 허벅지로 선명한 노을이 내리쬐었다. 마치 노을을 등에 업은 사람처럼. 조용히 그 등을 관조하는 지민에게 다정한 위로가 건네져온다.
“네가 무서워하니까 내가 먼저 걸을 거야.”
규칙적인 보폭으로 앞서가던 태형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무서워서 네가 부르면 난 돌아볼 거야.”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그래도 무서우면 내 손 잡아. 넌 잡을 수 있잖아.”
“......”
“그럼 이제 안 무섭지?”
주홍색으로 덫 칠해진 동공이 천천히 휘어진다. 천천히 입꼬리가 말려 올려가며 볼이 볼록해진다. 그렇게 다정하게 번지는 미소. 그 미소 위로 쏟아지는 황금 물결. 똑같은 색으로 물든 뺨을 한 지민도 이내 눈이 부시게 웃었다. 움츠렸던 꽃망울이 달싹거리다 활짝 피어오르듯. 경이롭게, 아름답게. 발목을 아프게 채웠던 족쇄가 파스스 부서진다. 움직이지 않던 걸음이 그제야 한 보 전진한다.
결과적으로는 이번에도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무려 한 시간을 넘게 왕복하며 걸었는데도. 지민보다도 더 시무룩해진 태형이 아까부터 말수가 줄어들자 되려 안절부절 해지는 건 지민이었다.
“태형아. 나 진짜 괜찮다니까?”
“그래도 기대했을 거 아니야.”
“아니야. 별로 안 했어.”
제가 말하고도 뜨끔했지만 태형 역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더니 들은 척도 안 하고 고개를 돌린다. 볼을 긁적거리던 지민이 얼른 뛰어가서 태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좋았어.”
“뭐가?”
“너랑 같이 와서.”
“......”
“너가 손 잡아 줘서 하나도 안 무서웠거든. 그게 어디야.”
지민이 소소히 웃었다. 노을을 가득 품은 미소는 지나치게 황홀했다. 그래서 심장을 덜컥 쥐고 흔들기에 충분했다. 새벽녘에 부랴부랴 가둔 마음이 샐까 황급히 고개를 돌린 태형이었고, 제대로 오해한 지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말이라니까? ...어. 정말이래도! 그래. 너 또 안 믿지? 믿는다니까. 단단히 토라진 지민이 볼을 부풀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태형과 반대 방향으로 홱 몸을 돌린다. 당황하며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간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얼른 태형을 피해 아까부터 밟고 싶었던 난간 위로 올라가는 지민이었다. 며칠 전 태형과 함께 감상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유자적하게 팔을 벌리고 걸어본다. 온몸으로 바람이 나부껴서 상쾌했다. 금세 풀린 지민이 미소를 그리면서 태형을 내려보았다. 태형도 그제야 안심했다.
“......사람 놀래키기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들어주면 좋았잖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위험하니까 내려와.”
“조금만 더 걸으면 안 돼? 여기 바람 엄청 불어서 짱 좋아. 되게 시원...!”
“박지민!”
위태롭더니 결국 휘청거리는 지민에 태형이 확 소리쳤다. 헛디딘 발에 중심을 잃은 몸이 난간 바깥쪽으로 아찔하게 흔들린다. 심장이 쿵 곤두박질친 태형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잡히지 않았다. 이번엔 마음이 무너졌다. 그다음에는 절망이 덮쳤다. 무서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쫙 올랐다. 지민을 그대로 통과한 손바닥이 붉은 난간을 짚었고, 동시에 반사 신경을 발휘한 지민이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지민보다도 태형이 더 놀랐다. 그제야 깨달아서. 새삼 깨달아버려서.
......맞다. 얘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지.
“아... 위험할 뻔했다.”
인간이 아니었지.
동시에 깨닫는 것이었다.
“......태형아. 미안. ...화났어?”
지금의 이 생활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는 지민이 떠나리란 것을.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느닷없이 홀연 사라질 지민을 제가 붙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보다 더 한 절망에 사로잡히리란 것을.
“...태형,”
“일어나.”
“어?”
“빨리 일어나라고. 이리 와.”
“......응.”
갑자기 굳은 얼굴을 하는 태형에 지민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당황해서 그런지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두 사람처럼 다리를 거닐던 몇몇 사람들이 태형을 흘끔거려도 태형은 아랑곳 않고 손을 내밀 뿐이었다. 본능이었다. 잡아달라는 본능. 금방이라도 구차한 말을 쏟아낼 것 같은 마음 대신 간절하게 건네는 손. 만질 수는 없어도 내게 매달리게 할 수는 있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린 지민이 얼떨떨해하며 손을 잡으려 할 때, 갑자기 시끄러운 바퀴 소리가 꽂혀들었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노선을 이탈한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당황한 운전자가 연신 브레이크를 밟아보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죽음을 직면하기 직전의 인간의 시간은 아주 느려진다. 묵혀두었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찰나에 태형이 지민을 보았다. 지민도 태형을 보았다. 귀청을 찢을 듯한 크락션 소리가 지저귀는 까마귀들을 내쫓았다.
초 단위로 느려진 시간을 깨부수며 뚫고 들어온 것은 기억의 파도였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파도의 잔재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파헤치기 힘들었던 과거를 울컥 토해낸다. 조각조각 난 유리가 하나로 모여지며 거대한 거울을 만들어낸다. 거울 너머로 반사되는 빛이 모든 것을 지민에게 밝혀주었다. 왜 도로 한복판에서 눈을 떴나 싶었더니 지금과 비슷하게 차에 들이 받쳐져서 그런 것이었다. 추락하는 폭격기에 튕겨져 나온 사람마냥 몸이 붕 떴었다. 그대로 지저분한 도로를 나뒹굴었다. 피가 불꽃처럼 튀겼다. 끔찍한 통각이 신경세포를 갈기갈기 찢었다. 거기서 눈을 감았다. 지민이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꼼짝없이 얼어버린 지민을 다시 현실로 잡아끈 것은 비명처럼 부르짖는 고함소리였다.
“안 피하고 뭐 하는 거야!!!”
다시 지민이 태형을 보았다. 떨리는 시야 안으로 달려오는 태형의 걸음이 아주 느리게 비쳐진다. 태형의 바로 대각선으로 차가 지척이었다. 지민이 황급히 일어섰다. 이 바보야! 네가 날 구하려고 하면 어떡해. 넌 진짜 죽을 거란 말이야. 죽는단 말이야! 저에게로 뛰어오는 지민에 태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지민이 온몸으로 태형을 밀었다. 젖 먹던 힘 다해 아주 세게 밀어붙였다. 동시에 고장난 차가 광음을 내며 붉은 다리에 처박혔다. 다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태형이 시멘트 바닥을 마구 굴렀다. 비명을 내지르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부서진 차의 파편이 잿더미가 되어 흩날린다.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을 못 차리던 태형이 핑핑 도는 시야에 고개를 내저었다. 바닥을 구르기 전 사이드 미러에 부딪친 갈비뼈로 총성 같은 통증이 격렬하게 휘몰아쳤다. 기도를 침투한 잿더미에 숨이 막혔다. 콜록! 콜록!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토할 것처럼 기침하던 태형은 퍼뜩 주변을 돌아보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가로막는 사람들을 쳐냈다. 정면에 보이지 않았다. 양옆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또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박지민?”
찾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동공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마구 뛰어댔다. 어디에도 그 작은 몸이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
“너 어딨어?”
걔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장난치지 마. 빨리 나와.”
원래 어디에서 살았는지
“...지민아?”
진짜 이름은 뭔지
“......지민아.”
나이는 뭔지, 원래 성격은 어떤지, 뭘 하며 살았던 앤지, 가족이나 친구는 누가 있었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박지민!!!”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나는 너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기본적인 신상조차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하라고. 정말 어떡하라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뜨거운 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범람한다. 막연히 두려워하던 일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지도 않을 통증이 총알처럼 심장을 관통한다. 그 존재하지도 않을 총알이 심장을 산산조각 낸다. 뒷걸음치며 비틀거리자 놀란 사람들이 태형의 어깨를 잡아챘다. 흔들리는 세상 속 눈이 아플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홀이 하얀 폭죽을 튀긴다. 하얗게 번쩍이는 섬광이 서서히 눈을 멀게 한다. 자동차의 범퍼가 쾅 터지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덮쳐오는 노을과 매캐한 연기가 태형을 삼켰다.
「태형아.」
세상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런 얼굴 하게 해서 미안해.」
하늘이 여러 개로 갈라지다 다시 하나로 모인다.
「너한테 사랑받는 남자는 되게 행복할 것 같아. 진심이야.」
천천히 의식이 멀어져 간다.
「너 되게 다정해서 난 네가 좋거든.」
...나도 네가 좋아.
정말 좋아.
몰래 입을 맞출 만큼 좋아.
나보다도 너를 먼저 챙길 만큼 좋아.
너무 좋아해, 박지민.
그러니까 다시 나타나주라. 제발. 제발, 제발......
「잘 자. 태형아.」
다리가 꺾였다. 몸이 주저앉는다. 그렇게 태형의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