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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귀를

자른 까닭

김봄날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 단칸방. 꿉꿉하고 음습한 곰팡이가 사람의 우울을 먹고 자라날 것 같은 이런 곳에서 Vante는 그림을 그렸다. 작은 방 안에는 유화 냄새가 지독했다. 그게 얼마나 지독했냐면,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핑 돌고 돌아서 마치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빙글, 또 빙글…….

 

   Vante는 약에는 절대 손 안 댄다고 그랬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새끼 약했어, 무조건 했어. 그러지 않고서야 기껏 한다는 짓이 이 지독한 곳에서 캠퍼스에 붓이나 끄적이기? 반짝이고 화려한 것이면 사족을 못 쓰는 Vante가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버리고 다리 병신이 되어서는 한다는 게 고작?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싫지 않아. 코를 찌르는 유화 물감 냄새도, 걸을 때마다 병신 된 다리에서 나는 직직 끌리는 지저분한 소리도, 조금만 움직이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회색 먼지도 다 좋다, 이거야. 그야 Vante는 여기서 그림 그리고 사는 삶이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걸. 그래서 자꾸만 찾아오게 돼. 그때 내게 같이 가자고 내밀던 Vante의 손을 내쳐버린 게 후회가 돼 날 가위처럼 짓누를 때, 여길 찾아오면 해방감을 느껴. 네 손을 잡고 도망쳤더라면 나의 자리도 여기였겠지. 이 방 안의 유화 냄새보다 열 배는 더 지독한 현실이 아닌 Vante, 너의 옆.

 

  이따위 생각을 하는 중에도 Vante의 시선은 여전히 캠퍼스, 팔레트, 붓의 끝을 옮겨갔다. 그리고 시선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Vante의 손. 뭘 그리는 거야? 아니야, 들어도 뭔지 모르겠다. 그럼 있잖아. 나도 봐도 뭔지 모르는 네 그림 봐주고 있으니까, 너도 들어도 뭔지 모르는 얘기 하나만 들어주라. 그래야 샘샘이지, 안 그래?

 

   “그게 등가교환이 된다고 생각해? 난 내 그림 봐달라고 한 적 없는데.”

   “아, 좀 닥치고 들어봐.”

 

   킥킥. Vante가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여전히 얄미운 녀석. 어떻게 처음 봤을 때랑 달라진 게 없어. 물론 그래서 내가 Vante를 좋아하는 거기도 하고. 나는 Vante의 웃음을 무시하며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Vante, 있잖아.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길 좋아했어. 가령 일 처리를 마친 공사판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거. 아, 전에 내가 난간에서 바닥 보고 있을 때 네가 나 떨어지려는 줄 알고 놀라서 달려온 거 생각난다. 그때 진짜 웃겼는데. 덩치는 나보다 산만한 게 겁은 많아가지고.

 

   아무튼 말이야, 나는 그랬어. 나보다 더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보면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거든. 얼마나 밑으로 내려간 건지 차마 코앞도 보이지 않는 시궁창 같은 저 아래,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근히, 차분히 올라온 내가 나보다 아래에 위치한 무언가들한테 외치는 거야. 좆같은 것들아, 보이냐? 너희가 그렇게나 짓밟고 시궁창에 처박지 못해 안달이던 내가 내 힘만으로 이만큼이나 올라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생각해보니까 나는 하늘에 사는 것보다 땅에 사는 것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네 발로 걷는 동물들이나, 들가에서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란 야생화. 또는 가을이 되면 그 계절을 더욱더 쓸쓸하게 만들어주는 갈대 같은 것들. 맞아, 특히 나는 갈대를 좋아해. 전에 RM이 그랬거든. 거센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뚜기마냥 다시 꼿꼿한 자태를 유지하는 갈대가 자기는 참 우아해 보인다고. 그 말을 들으니 갈대가 달라 보이기 시작하더라. 갈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비록 저 아래에서 기어 올라온 불쌍한 천민 출신이지만 주변 그 어떤 것이 날 방해해도 꿋꿋하게,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았던 캔디처럼. 잠시 휘청거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렇게 갈대처럼 우아함을 간직하는 사람이고 싶었어. 캔디도 봐. 걔가 어떤 기구한 사연을 가졌는지 나는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름만큼은 깜찍하니 하나도 기구해 보이지 않잖아. 나도 그래서 지었어, KITY. 이름만 들어도 깜찍하잖아. 절대 저 시궁창에서 난 것으로는 안 보이잖아. 나는 다시는 그 바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근데 D는 나랑 좀 다르대. D는 아래를 보기보다는 위를 보는 걸 더 즐겼어. 가령 하늘 같은 것들 말이야. D가 그러더라. 푸르른 하늘을 바라볼 때면 그 하늘이 어찌나 화창하던지 눈이 따가울 때가 많았는데, 그런 하늘을 보면 세상의 좆같음을 느낀다고. 난 이렇게나 우울하고 울적한데 하늘 저 자식은 뭔데 그렇게 푸르르고 화창하냐? 웃기지? 배알 꼴리면 안 보면 될 거 가지고. D도 진짜 정상은 아니야. 싸이코지, 싸이고. 그래도 나처럼 하늘을 미워하지는 않더라. 욕은 하는데, 하늘을 보는 D의 표정은 화를 내는 표정이 아니었거든. D는 가끔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랬어. 어쩌면 과거의 자신이 하늘과 더 닮아있는 것 같다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때가 더 편안했던 것 같다고. 한 잔에 몇만 원은 하는 와인을 마시면서 그랬어. 모순적이지?

 

   “너도 알고 있었지? D 죽은 거.”

   “몰랐는데.”

   “웃기지 마. 나 말고도 여기 들락거리는 놈들 많은 거 다 알아. 그놈들 입 싼 건 더 잘 알고.”

   “네 입도 그닥 비싸 보이진 않은데.”

   “닥치라고 했지, 내가. JIN도 슬슬 눈치 까는 것 같으니까 놈들한테 발길 좀 줄이라고 그래.”

   “너나 조심해. 제일 많이 들락거리는 거 네놈이니까.”

 

   JIN이 왜 Vante한테 집착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Vante는 조직 내 몇 없는 B급의 가이드이기는 했으나, 고작 D, E등급의 센티넬만이 즐비 하는 곳에서 등급 높은 가이드는 그닥 쓸모가 없다. 애초에 그만한 가이딩이 필요한 센티넬이 없으니 그런 것도 있지만, 센티넬보다 높은 등급의 가이딩은 오히려 센티넬을 잡아먹을 가능성이 높았다.

 

   높은 등급의 가이딩이 주는 쾌락에 못 이겨 결국은 폭주해버린다는 경고를 누누이 들어온 바였다. 낮은 등급의 센티넬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구현해내기도 힘들고, E등급의 센티넬은 말이 센티넬이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미미한 능력이 겨우다. 이미 조직 내에는 센티넬을 일대일로 가이딩해 줄 수 있을 만한 인원의 가이드가 준비되어 있고,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Vante의 B급 가이딩이 탐이 난다 하더라도 다리 한 짝 병신 된 Vante가 현장에 투입될 수도 없을 텐데.

 

   회사에 도착한 KITY는 옷을 갈아입은 후, 곧바로 JIN을 찾아갔다. 옷을 갈아입은 이유는 혹여나 유화 냄새가 베었을까 봐. JIN이 Vante를 찾는다는 것을 안 이상, 일말의 의심 또한 JIN에게 남겨서는 안 된다. 다정한 얼굴에 숨겨진 냉철한 얼굴은 KITY도 잘 알았다.

 

   “JIN, 부르셨다고…….”

   “우리 회사의 귀염둥이, KITY! 직접 얼굴 보기는 오랜만이네.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젖살이 빠진 건가?”

   “JIN도 여전하시네요.”

   “그럼, 그럼. 난 여전히 잘생겼고, 말고.”

   “휴가를 내셨다, 들었습니다.

 

   하여간, 말이 안 통하는 아저씨. 분명 JIN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런 이미지일 줄 몰랐지. JIN의 가볍고 영양가 없는 말들을 항상 적당선에서 잘라주는 건 JIN의 비서, RM이다. JIN만큼이나 훤칠하고 JIN의 또래로 보이나, JIN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내는 사람. 말이 비서지 JIN은 바지사장이고 RM이 실질적 회장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리 말하는 것도 비단 틀린 말도 아닌 것이 JIN은 항상 일 처리를 감정적으로 하는 경향이 큰 사람이라 회사의 큰 결정이 있을 때면 JIN과는 다르게 객관적이고 냉철한 RM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있는 팩트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항간에 떠도는 말들과는 다르게 둘의 관계는 꽤나 돈독해 보였다.

 

   “좀 쉬고 싶어서요. 아시다시피 저 여기 들어와서 휴가 하루 안 쓴 거 아시잖아요. 쉴 때 됐다고 생각해요.”

   “그럼, 휴식도 중요하지. 그런 의미로 비서, 우리도 휴가 가는 거 어때? 한, 한 달 정도 뉴욕으로 떠나는 거지. 뉴욕 핫도그가 그렇게나 맛있더라고.”

   “휴가는 얼마든지 내셔도 괜찮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절 통해 연락 주시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긴 직원 복지가 참 좋네요.”

 

   괜히 긴장했네. 어쩐 일로 부르나, 싶었다. 혹여라도 제가 Vante에게 들락거리는 걸 알고 떠보기라도 하려는 심산인 줄 알았더니 그런 이유는 아닌 듯싶었다. D와 KITY가 연인 사이였다는 걸 조직 내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연애한다고 떠들고 다닐만한 성격들은 아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내연애를 하는 걸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그랬나. 지내다 보면 모두들 알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D가 죽고 나서 사람들의 걱정 어린 동정의 시선은 모두 KITY에게 쏟아졌다.

 

   KITY가 가장 싫어하는 건 동정이었다. KITY는 예민했다. 촉도 좋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시선에도 예민한 KITY였다. 그렇지만, D가 죽고 나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보다 당장 제 자신이 D의 죽음으로부터 버텨내는 게 우선이었다. D가 죽고 나서 며칠은 앓아누울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KITY는 그 전보다 더 열심히 현장을 뛰었다. 동정한 것과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KITY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찼다. 독한 놈. 이 단어는 어느새 KITY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D가 죽은 지 한 달여 정도가 되고 나니 KITY는 좀 제정신이 들었다. 문뜩, 정말 문뜩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는 아니고 한 삼일 정도만. 팀장은 더 오래 휴가를 내도 괜찮다고 했지만 KITY는 오래 쉬면 현장 감을 잃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숙소에 누워 쉬기만 했다. 배도 고프지 않아서 밥도 먹지 않았다. 사실은 D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휴가를 낸 거였지만, D를 보러 가는 것조차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그냥 자는 듯 죽어버리면 어떨까. 모든 게 무기력해졌다. 그러던 찰나에 Vante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망치자. 지금 네가 내 손을 잡으면 내가 널 여기서 도망치게 해줄게. 세상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유롭게 살게 해 줄게.’

   ‘…….’

   ‘넌 D를 포기 못 하지?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야. 그치만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 나는 네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릴게.’

   그 생각에 오랜만에 Vante를 찾아갔다 왔다. D가 죽고는 한 번도 Vante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티는 내지 않아도 속으로는 내 걱정을 많이 했겠지. 저를 동정 아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생각보다 든든한 거였다.

 

   그런 생각에 잠겼을 때, 다시금 JIN이 KITY를 불렀다.

 

   “농담 아니고 진짜 한 한 달 정도 휴가 내도 괜찮아. 뉴욕이나 이런 해외를 다녀와도 좋고.”

 

   별것 아닌 말인데도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항상 장난 같지 않은 얼굴로 장난을 치는 사람이라지만 사뭇 진지하게 들렸다. 저 말을 덥석 물고 해외로 휴가를 다녀온다고 하면 정말 보내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왜? 이유가 없었다. 원채야 직원들을 잘 챙겨주는 회사이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복지가 좋은 회사였나? 돌이켜보면 아니다. 아무리 좋은 회사라고 해봤자 기준을 이 바닥으로 한정 지었을 때의 이야기다. 결국에는 직원들을 굴리며 더러운 일만 골라 시키는 회사.

 

   D는 생전에 JIN을 믿지 말라고 했다. RM은 JIN보다 더 음흉한 놈이라고도 했다. 꼭 그 말이 아니었더라도 KITY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게 D였더라도 KITY는 D를 의심했을 거다. KITY는 Vante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Vante를 믿지는 않는다. Vante가 자신의 손을 잡고 도망치자 했을 때에도 Vante의 손을 잡지 않은 건 혼자 남을 D 때문이 아니었다. KITY가 Vante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KITY는 가이드와의 신체접촉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제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JIN. 내일까지만 쉬고 복귀할 겁니다. 걱정 마세요.”

    “KITY. 아니, 지민아.”

    “…….”

    “Vante가 회사를 나가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뭔지 알아?”

 

   갑자기 Vante 이야기는 왜……. 알게 모르게 사무실 안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Vante가 아닌 김태형으로 살고 싶다더라.”

   “……. 그게 왜요?”

   “넌, 박지민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어?”

   “JIN, 저는 KITY예요. 그리고 절 KITY로 만드신 것도 JIN이잖아요. 저 하수구 시궁창 밑바닥에서 구르던 박지민은 제가 KITY가 되는 날 죽었어요.”

 

   휴가 잘 보내고, 연장 신청은 팀장한테 해. 사무실을 나오면서 KITY는 JIN의 말을 곱씹었다. Vante가 아닌 김태형으로 살고 싶다, 라. 그러고 보면 D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지금보다 예전이 더 하늘에 닮아있었던 것 같다는 말. D도 Vante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까. JIN을 만나기 전, 자신이 무능력한 센티넬 또는 가이드인 걸 알고 국가로부터 버려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고작이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까. KITY는 과거를 곱씹었다. 과거를 곱씹을수록 KITY는 D와 Vante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민은 본인이 센티넬 발현자라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정부로부터 센터로 끌려갔다. 센터에서 시킨 사람들이 자신을 억지로 데려갈 때, 지민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납치당하듯 끌려간 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을 채 벗어나지 않은 지민에게는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을 뿐이다.

 

   한 달가량을 그곳에서 살았을까. 일주일은 부모님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고, 제 발악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이주일은 그저 밤새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울었다. 그렇게 겨우 센터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려는 찰나에 지민은 D등급이라는 통지표와 함께 다시 센터 밖으로 내보내졌다. 센터로 데려올 때도, 내보낼 때도, 모두 정부의 마음대로였다. 그래도 드디어 센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해방감에 지민은 곧바로 부모님을 찾아갔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였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지민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길바닥을 전전하는 게 고작일 뿐. 죽기에는 무섭고 살기에는 막막했다. 지민은 딱 이때 JIN을 만났다.

 

   ‘난 너처럼 돌아갈 곳 없는 센티넬들과 가이드들을 모아 정부에 대응하는, 일명 반란군을 키워내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돈 좀 버는 이름있는 기업이지만, 실상 그 사업도 반란군을 키워내기 위한 자본을 얻기 위해 만든 수단에 불과해. 정부에서 쫓겨난 센티넬 신세로는 대한민국에서 발붙여 살만한 곳은 없을 것 같은데, 나와 손을 잡아보는 건 어때. 원하는 건 최대한 맞춰주도록 할게. 우린 네 도움이 필요하거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지민이 JIN의 손을 잡게 하기에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기는커녕 어떻게, 어떤 경유로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센터에 있던 기간은 고작 한 달이다. 정부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지민을 센터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지민이 이렇게 혼자 버려지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겠지.

 

   지민은 정부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그 증오로 지어낸 이름이 KITY다. 박지민으로서의 신분을 버려야 한다는 JIN의 안내에 한참을 고민하다 지은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을 버리고 다시 박지민이라는 이름을 주워다 쓰라고? 아니. KITY는 절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KITY는 D의 유골함을 잠깐 보고 온 후에 곧바로 팀에 합류했다. 딱 삼 일의 휴가. 더이상 휴가를 연장하지도 않았다. 휴가 기간 동안 KITY가 할만한 일은 없었다. JIN의 말처럼 여행을 즐기자니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더 긴 휴가를 쓰면 몸이 근질거려 못 찾을 것 같았다.

 

   KITY가 팀에 합류하자마자 거물급 국회의원을 잡을 수 있다는 작전이 내려왔고, 팀원 모두가 그 작전에 투입됐다. 직접 고위직 간부를 만나는 일은 항상 팀장의 몫이었다. JIN과 계약해 회사에 들어온 지는 연차가 좀 되었지만, 훈련을 끝마치고 현장에 투입된 지는 고작 2년 조금 넘은 KITY는 신입들을 지휘하며 팀장이 타깃과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팀장이 타깃과 만나 어떠한 대화를 나누는지는 잘 모른다. 아직 그런 내부의 일까지 알만큼의 짭밥이 KITY에게는 없었다. 그저 팀장과 만난 타깃들은 어느 날 언론에서부터 조용히 사라진다는 사실만 알았다.

 

   작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지방의 한 호텔이었다. KITY가 팀장이 국회의원 Y와 접선할 수 있도록 호텔 내 경비를 무너트리는 일을 맡았다. 지방의 호텔이다 보니 서울의 오성급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국회의원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 호텔이나 묵을 리가 없지. 당연하게도 일반 호텔들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규모가 큰 호텔이었다. 주의해야 할 포인트들이 많았고 그에 비해서는 작전에 투입된 인원이 부족했다. 때문에 KITY를 비롯한 몇몇의 실력자들은 혼자 한 포인트의 전부를 맡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작전에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드네임, KITY. 포인트 B, 이상 없음. 중앙으로 합류하겠습니다.”

 

   KITY가 귀에 낀 무선에다 대고 말했다. Y가 묶고 있는 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어서 그런지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았다. 고작 두어명의 경호원을 쓰러트린 게 전부였다. 작전은 모두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KITY가 발을 돌려 작전의 주가 지점으로 합류하려는 찰나, 오른쪽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이 방은 체크인이 되어있지 않은 방인데.

 

   그 뜻은 사람이 없는 방,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야 옳다는 말이었다. KITY는 카운터에서 훔쳐 온 마스터키로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불이 깜깜하게 꺼져 있었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 고요했다. 방금 전 느꼈던 인기척이 기분 탓이었을지언정, 찜찜하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떤 작전인데.

 

   Y는 국민들에게 꽤나 신임받고 있는 국회의원인 동시에 국회의원들 중 센티넬 센터에 가장 큰 관심을 보내고 그와 비례하게 많은 지원을 쏟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Y의 신변은 센티넬 센터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이번 작전은 절대 실패시킬 수 없는 작전이었다. KITY는 좀 더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KITY의 주 포지션은 스나이퍼였으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뒷주머니에 숨겨둔 리볼버를 장전했다. KITY의 촉은 대체로 틀린 적이 없었다.

 

   “세상 어떤 경호원이 쥐새끼처럼 방 안에 숨어들어 숨바꼭질을 하려고 들지? 그러다 무섭다고 바지에 오줌이라도 질질 싸겠어.”

 

   KITY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구석을 향해 도발하듯 비웃음을 흘렸다. 죽음의 생사 앞에서는 모두가 겁쟁이가 되기 마련이었다. KITY는 이 일을 하면서 생사의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의 밑바닥을 많이 봐왔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일단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팀장도 팀원들에게 신신당부하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며 불필요한 희생은 옳지 않다, 고 했다. KITY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복수와 증오를 품었다 해서 무분별한 살인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팀원들 중에는 그런 팀장의 의견에 반하는 팀원들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조직에서 상사의 말은 절대적이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는 팀장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걸 안다. 필요한 희생에는 눈을 감아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세상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타깃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겠어. KITY도 언젠가는 사람을 죽여야 할 일이 올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왔다. 그게 지금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때 KITY의 인이어에서 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깃이 도망쳤다! 호텔 밖으로 도망치지는 못했을 거야. 모두 각자의 포인트에서 타깃을 생포하도록.”

 

   리볼버를 쥔 KITY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두 명심해라. 생포가 목표다. 생포를 목표로 하되 생포가 불가능할 경우……, 망설임 없이 죽여라. 이번 작전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두 알고 있겠지.”

 

   KITY는 조심스럽게 방 안의 불을 켰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숨기고 인기척에 다가갔다. 현재로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한 명뿐이지만 과연 Y가 혼자 도망쳤을까? 언제 어디서 기습공격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저 인기척이 정말 Y가 맞는지 확인하고, Y가 맞다면 팀장에 말에 따라 생포하자. 타깃을 직접 마주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KITY가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인기척 또한 느꼈다. 발소리를 숨긴다 해서 숨겨지는 거리는 아니었다. 인기척도 KITY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을 거였다. 인기척은 더이상 숨기를 포기하고 KITY 앞에 자신을 드러냈다.

 

   역시나, Y가 맞았다.

   “현재 이곳에는 나 말고 다른 경호원은 없네. 오늘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대충 예상했어. 경비가 삼엄한 곳에 티 나게 숨기보단 혼자 숨어있는 게 들킬 위험이 덜할 거라 생각했네. 물론 완벽하게 미스였지만. 날 죽일 건가?”

   “생포하라는 게 팀장의 명입니다.”

   “어차피 더이상 도망칠 구멍도 없어. 생포가 목적이라면 긴장을 좀 놓아도 되겠구먼. 저항하지 않겠네. 당신의 대장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도 좋네.”

 

   생각 외로 Y는 순순했다. Y가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KITY는 리볼버를 쥔 손에 힘을 놓지 않은 채 무전을 통해 Y의 위치를 알렸다. 코드네임, KITY. 포인트 B, 613호에서 타깃 생포 중. 지원 바랍니다. KITY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Y는 아예 소파에 편히 앉아 자리를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나랑 대화를 하겠다고?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나랑?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혹시 D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사람을 아나.”

 

   당신이 D를 어떻게……. Y의 이름에서 나온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KITY는 미간을 찌푸렸다. Y의 입에서 나온 D의 언급은 KITY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D와는 인연이 있지. 자네도 D를 아는 모양이군. 나한테는 그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와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어. 내가 오늘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나. 알지는 모르겠지만 KITY 당신과 같은 사람이 날 찾아온 건 처음이 아닐세. 그때도 지금처럼 D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내 이야기를 들은 D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는 날 살려줬었어. D 덕에 그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겠지. 그 후로 나는 그때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거라는 걸 알았고 항시 그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네. 내가 D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렇게 Y는 자신의 이야기를 KITY에게 털어놓았다. 마치 죽기 전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Y의 표정에는 편안함만 맴돌 뿐이었다. 정말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Y는 오늘 자신이 죽을 거란 미래를 암시하고 마음을 편히 놓은 것일까. 아니면 Y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D가 그랬던 것처럼 KITY가 자신을 살려줄 거라 확신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포커페이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D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던 작전.

 

   그래,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D가 JIN에게 호되게 혼이 난 날이 있었다. 워낙 막무가내였던 D였기에 JIN에게 혼이 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날의 D는 평소와는 다르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KITY는 부러 어떤 일로 혼이 난 건지 알려 들지 않았다. 필요한 이야기라면 때가 되었을 때 D가 이야기해주겠지. 그렇게 머릿속 뒤 저편으로 미뤄버린 기억이 Y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기는 한다.

  “J기업은 일명 정부의 개지. 여당을 굳건히 하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대신 처리해주는 일을 맡아서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아. 당신들이 날 죽이러 온 것도 여당의 의견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서가 아닌가. 그 거래로 J 기업은 여당의 손을 빌려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되었지. 당신 같은 센티넬들이 아무리 D, E등급의 낮은 센티넬이라 해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위협이 돼. 그런 당신들을 센터에서 그냥 내보냈을까? 국민의 안전이 흐트러지는 순간, 여당의 기세는 당연히 기울게 되지. 때문에 등급이 낮은 센티넬들을 센터에서 통제하지 않고 내보내는 건 당연하지 않은 일이야. 묘책이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 묘책이 바로 J기업에게 당신들을 맡기는 걸세. 일명 처리반이라고나 할까. 당신들은 이런 내막은 모른 채 정부에게 복수를 한다 믿고 나 같은 사람들을 처리해오는 거라 들었네. 자, KITY. 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나.”

 

   이게 바로 D가 Y를 살려준 이유. Y는 JIN이 KITY를 배신한 거라 말하고 있었다. KITY에게는 Y의 말이 절대 사실이어서는 안 됐다. KITY, 그리고 꼭 KITY가 아니더라도 JIN의 아래에 있는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모두 정부를 향한 증오로 뭉쳤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정부에게 복수를 하는 일. 정부를 무너트리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오는 일.

 

   Y의 말이 사실이라면 KITY가 지금까지 JIN의 밑에서 해온 일은 모두 KITY의 목적으로부터 제자리걸음은커녕 뒷걸음질을 쳐온 게 된다. 제게 가족을 잃게 만든 증오의 상대를 도와준 꼴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KITY는 Y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과연 Y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인 걸까. 그리고 드는 또 한 가지의 의문. D는 왜 Y의 말을 믿고 Y를 살려주었지? D 또한 KITY 못지않게 사람을 잘 믿지 않았고, 정부에 대한 증오가 컸다. Y의 말을 듣고 혼란스러울 수는 있었어도 Y를 온전히 믿지는 않았을 거였다. D가 Y를 믿을만한 증거가 되는 게 있었나? KITY가 Y의 말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에서 가장 변수는 D의 선택이었다. KITY는 불안해졌다. D는 생전에 JIN을 믿지 말라고 했다. 그건 어떤 의미였던 걸까.

 

   리볼버를 쥔 KITY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뜨거웠다. KITY의 센티넬 능력은 파이로키네시스. 파이로키네시스란, 쉽게 말해 아무런 연료가 없는 상황에서 불을 일으키는 초능력을 말한다. D등급으로서의 KITY의 능력은 미미해서 전투로 쓰기에는 애매한 힘이었다. 적어도 C등급은 돼야 넓은 범위에서 불을 다루지, KITY는 제 힘을 모두 쏟아부어도 고작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한 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게 한 번 불을 만들어내고 나면 모든 기력을 소진하기 때문에 실상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불의 크기는 성냥불 정도가 전부이다. 그러니까 KITY의 온몸에서 송골송골 피어나는 옅은 검은 연기는 KITY가 폭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KITY는 원체 능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폭주를 한다고 해도 흔히 생각하는 폭발 같은 건 일으킬 수 없다. 단지 자신의 몸만을 스스로 태울 뿐. 그렇다기엔 생각보다 피어나는 검은 연기가 조금 센 것 같기도 한데……. 곧이어 KITY의 온몸에는 불이 피어올랐다.

 

   KITY의 몸에 피어오른 불씨는 KITY와 호텔이 맞닿은 발아래로 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Y 또한 이런 전개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갑작스레 폭주하는 KITY를 두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채 방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그대로 마신 Y는 폐가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센 기침을 연달아 뱉었다. Y는 곧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기절할 테였다. 어쩌면 생포는 불가능해질지도. KITY는 이미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자신이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저 어디 아득한 정신세계로 빨려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과는 다르게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장 아프게 죽는 방법은 화형이라고 했던가.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가이딩, 가이딩이 필요했다. 가이드가 필요해.

 

   “KITY!”

 

   저 너머로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KITY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등 뒤로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능력을 쓸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가이딩을 받은 횟수도 몇 번 되지는 않지만, KITY는 가이딩을 받을 때면 항상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옅은 시원함이었지만 가이딩을 받을 때 느껴지는 시원함과 동일한 느낌인 것은 분명했다. 누군가 KITY를 끌어안고 가이딩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 느낌은 분명 평소 받던 D나 E등급의 가이딩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상위 등급. KITY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의 상위등급 가이드는 Vante 밖에 없었다. Vante가 여긴 어떻게 왔지? 정신이 없어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Vante구나. Vante라면 자신의 폭주를 막아주겠지. 막연한 안심이 들었다.

 

   그러나 Vante 의 가이딩에도 KITY의 불길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등급도 아닌 두 등급이나 높은 가이딩인데, 어째서……. 정신이 없는 KITY 대신 당황한 건 Vante였다. 이 정도의 큰 접촉이면 분명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라앉히기는커녕 KITY의 폭주에 Vante까지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분명 KITY와 맞닿은 곳은 온통 화상투성이일 게 분명했다. 직접 불길에 타고 있는 KITY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리가 부러졌을 때만큼의 고통이 온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아, 가이딩하다가 죽는 건 아닐까. 진짜 딱 이런 생각이 들만큼의 고통이었다. 더 큰 가이딩이 필요한 건가. 그렇게 판단한 Vante는 재빠르게 KITY를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일 틈 없이 KITY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KITY의 입안으로 혀까지 집어넣은 이건, 명백한 키스였다. 

 

  가이딩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KITY 몸에서 피어나는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호텔로 번진 불길은 여전히 Vante와 KITY를 둘러싸고 있었고, KITY의 폭주를 막은 Vante는 폭주로 인해 기력을 소진한 KITY의 옆에 함께 쓰러졌다. KITY의 폭주를 막느라 Vante 또한 기력을 모두 소진한 듯했다. Vante는 기절하는 와중에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떠올렸다. KITY는 도대체 무얼 그리는지 알 수 없다고 투덜대던 그 그림은 Vante가 가장 공들여 그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Vante가 생각하기에 따뜻하다 느껴지는 색깔들을 고르고 골라 한정된 크기의 캠퍼스 안에 모아두다 보니 차마 형태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캠퍼스에서 느껴지는 온도만큼은 확실해서 작업의 막바지에 다다른 그림을 보며 Vante는 혼자 흐뭇해했었다. 그림의 이름은 ‘봄’이었다, ‘봄’. Vante는 그 그림을 KITY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B등급 가이드인 Vante의 인생은 그리 기구하지는 않았다. 센터에 들어간 후로도 부모님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지냈고, 센터에 있을 당시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현장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비록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센터와 트러블이 생기는 바람에 센터를 나오게 되었지만,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는 한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센터를 나오고 나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그저 그런 생활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JIN과 손을 잡게 되었지만, 그래도 Vante는 기구하지 않았다. 사랑받는 법을 알았고, 사랑하는 법을 알았고, 사랑을 주는 법을 알았다. 그런 Vante의 눈에 KITY는 사랑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KITY는 D와 연애를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는 서툴렀다. 그럼에도 Vante는 모르는 서로를 향한 끈끈한 무언가로 평탄한 연애 생활을 해온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D의 죽음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은 지 오래다. Vante는 그런 KITY를 동정했다. 아니, 사랑했다. KITY만큼 기구한 사람은 널렸다. 그럼에도 KITY만을 유달리 동정한 Vante는 KITY를 사랑하고 있었다.

 

   KITY의 온도에는 따뜻함이 없었다. 제 능력과 같은 온도의 뜨거운 증오와 분노,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아에 담긴 차가운 냉소. Vante는 KITY에게 따뜻함을 선물하고 싶었다. KITY는 봄, 봄, 도대체 그 봄이 뭐길래 사람들은 봄만 되면 봄 노래를 부르냐 했었다. Vante는 KITY에게 봄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너에게 봄을 알려줄 사람이 나이면 안 되겠냐, 고백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겠냐고, 내 손을 잡아주면 안 되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Vante는 눈을 감기 전, 기절한 KITY의 얼굴을 보였다. 온몸이 화상으로 인해 뜨겁고 아팠지만, 폭주를 그대로 맞은 KITY는 그보다도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들의 주위로는 여전히 화마가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나 지금 진짜 딱 죽을 것만 같은데, 이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넌 살아남을 수 있을까. KITY, 지민아, 내가 너에게 봄을 선물하고 싶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곧이어 Vante의 정신도 아득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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