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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수화

4

<BGM : Lauv - Never not>

結(결)

 

 

 

   제아무리 색채가 강렬했던 꿈이었을지언정 그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생생하게 겪었던 경험들은 전부 희미해지고 만다. 마치 원래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누군가 불투명한 종이로 가려버린 것처럼. 그래서 간혹 아주 긴 꿈을 꾸다 깨어나는 경우 대체로 마지막 장면만 머릿속에 남기 마련이었다. 조금 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유독 인상 깊었던 파편 몇 가지를 더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서사를 다시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떠올린 파편들도 따로 메모를 하지 않는 이상 침대 밖으로 발을 뻗는 순간, 혹은 씻는 도중에, 아니면 그냥 돌아서는 찰나에 갑자기 흩어지고 만다. 또는 하나씩, 하나씩 까만 매직으로 죽죽 그어나가듯 서서히 지워진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잠에 빠지려는 그때에는 어떤 이상한 꿈, 슬픈 꿈, 기쁜 꿈을 꿨다는 텅 빈 감정만 존재하고 그 이상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마치 구멍이 송송 뚫린 스펀지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민아. 이제 곧 퇴원할 거야. 여기 옷 가져왔으니까 갈아입어.”

   “응.”

   “짐은 다 챙겼지? 뭐 놓고 간 거 없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피고 있어. 엄마는 밑에 차 좀 미리 빼놓고 있을게.”

   “알았어.”

 

 

   내밀어지는 티셔츠와 바지를 받아든 지민이 바로 병실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녀가 멀어지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하얀 커튼을 치려던 지민은 재빨리 고개를 원위치로 복구시켰다.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어떤 잔상 때문에. 여전히 그녀의 마른 등만 눈에 들어오고 뭔가 선명해지는 입체감이 없는 것이었다. 지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분명 더 단단하고 더 컸던 뒷모습을 눈에 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라. 그런 거라. 그것도 꽤 자주. 하지만 제 주변 사람 그 누구로부터도 볼 수 있는 뒷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석연치 않은 느낌은 지민이 눈을 뜬 순간부터 오늘 퇴원하기까지 쭉 지속되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데자뷰? 데자뷰라고 하던가? 분명 최초의 경험임에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나 환상.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데자뷰가 맞을 것이었다.

 

 

   “하긴, 너무 오래 자다 일어나기는 했지......”

 

 

   무려 한 달 넘게 잠들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 꿈을 얼마나 꿨겠어.

 

   찰나에 따스한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갑갑해서 열어놓은 창 틈을 비집고 살랑살랑 불어온다. 부드러운 바람이 지민의 앞머리를 헝클였다. 묶어놓지 않아 풀어헤쳐진 커튼도 얇게 펄럭거린다. 커튼 사이사이로 조촐하게 꾸려놓은 짐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지민은 잠시 회상하는 것처럼 속눈썹을 밑으로 내렸다.

 

   무려 서른 밤 하고도 닷새가 지날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을 때는 서른 밤이 되던 째 날. 신음이 터지기 시작한 건 그다음 날부터. 앓는 와중에 계속 누군가를 불렀다고 한다. 누구야, 누구야. 애타게 부르는데 발음이 불분명해서 알아듣기는 힘들었다고. 활력징후가 좋은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지 닷새째가 되던 날 드디어 정신을 되찾았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지민을 때마침 발견한 간호사가 의사를 불러왔고, 곧 지민의 엄마도 도착했다. 지민은 뺨이 온통 눈물로 젖어 달려오던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조우하던 그녀와는 너무 달라서.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녀와 심하게 다투었다. 상대적으로 늦게 입문한 것치고 현대무용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남달라 미래 유망주로 불렸던 지민은 한창 우울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그저 무용이 좋아서,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게 좋아서 시작했던 것이 차츰 자라면서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를 맞닥뜨린 후 의욕이 저하되던 중이었다. 연습은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저하된 의욕은 성적으로 나타났다. 이미 그것을 이유로 모친과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마찰이 잦았다.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식탐마저 저하되 체력이 부실해졌다. 쉬고 싶었다. 그래서 말문을 텄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언성이 높아지다 충동적으로 달리는 차의 뒷문을 열어젖혔던 지민이었다. 급하게 차가 멈춰 섰고 바로 뛰쳐나가던 지민은 뒤에서 들이 받쳐지는 또 다른 차와 쾅 충돌하고 말았다. 다행히 서행하던 차라 반동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하필 머리부터 추락하는 바람에 뇌졸중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다리의 큰 혈관이 찢어져서 출혈도 심했다고 한다. 서서히 의식이 소실돼가던 지민이 정말 잘못되는 줄 알고 매일같이 새벽 기도를 올렸다고, 용서를 구했다고 지민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설명해주던 모친이었다.

 

 

   “......”

 

 

   두꺼운 붕대를 풀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또다시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잠들어 있는 동안 죽어버린 근육을 다시 키우느라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다리가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건 예상과 생각과 각오한 다짐 이상으로 좌절스러워서. 장래에 대한 전망도 함께 좌절되는 줄 알았다. 주먹으로 하얀 벽을 내려칠 수는 없으니 대신 가슴을 가격했다.

 

 

   “......”

 

 

   주먹으로 투둑 떨어지던 눈물에는 또다른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아주 생생한 꿈을 꾸었다. 초반에는 많이 무서웠는데 뒤로 갈수록 행복한 마음으로 넘실거렸던. 혼자였다 둘이 되었다. 늘 같이 붙어 다녔다. 문제는 그 사람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항상 제 옆에 누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 그 사람이 남자라는 것. 저를 귀찮아하면서도 세심하게 챙겨줬다는 것.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라 쓸쓸하지 않게 해주었다는 것. 딱 그 네 가지만 연상되고 정작 중요한 부분들은 필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이목구비는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뭔지, 나이는 뭔지, 뭘 하던 사람인지, 뭘 좋아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함께 했다는 텅 빈 추억만 존재했다.

 

   아마도 애타게 찾았다던 이름은 그 사람이겠지. 아마도 계속 잔상으로 떠다니는 뒷모습은 그 사람의 등이겠지.

 

 

   “......”

 

 

   지민은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방금 전보다 거세진 풍랑에 눈이 시큰했다. 제 머리카락처럼 나부끼다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들. 한 잎씩, 두 잎씩 떨어지는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한다. 별안간 이유 없이 처연해진다. 마음이 덜컥 무너져 눈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단순한 꿈에 불과할 텐데, 그럴 텐데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잊어버린 것 같아서. 정말 소중했던 존재가 지워진 것 같아서. 휴지가 없어 하얀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달 가까이 훌쩍 거려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이 영 갈무리되지 않는다. 운다고 해서 덜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엉망진창으로 얼룩덜룩 번지기만 할 뿐. 꼭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는 걸을 수 있는데도. 그런데도.

 

   축축하게 젖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사이 커튼이 젖혔다. 잠시 놀란 표정을 하던 그녀가 지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얘 또 울고 있네. 뭐가 그렇게 서러워. 이제 다리도 다 나았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나 이제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데. 엄마랑 화해도 했는데. 그런데도 너무 슬퍼. 서러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서러운 지민의 마음을 대변하듯 병원 공터에 있는 나무들이 쉴 새 없이 꽃잎을 떨어뜨렸다. 5월 중순, 그렇게 봄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안 간다니까?”

   “그냥 가자니까?”

   “싫어. 내가 거길 왜 가. 휴학도 했구만.”

   “휴학생이면 뭐 학교 오지 말라는 법 있어? 방 구석에 처박혀서 곰팡내 풍기는 버섯 만들지 말고 그냥 놀다 오자고요. 대체 햇빛을 얼마나 안 본 거야.”

   “......”

   “아, 진짜. 이 고집불통.”

 

 

   초반에는 살살 달래보던 정국이 이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전완근 위로 튀어나온 힘줄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퇴원한 후 바로 대학교로 가서 지도 교수님을 찾아뵌 지민이었다. 그간 감추고만 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매사 엄격하던 교수님이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안부를 묻고는 잘 쉬다 오라는 말을 들려주셨을 뿐이었다. 한 학기의 절반을 병원에서 날려보냈으니 휴학은 어쩔 수 없던 선택이었다. 늘 학교 아니면 연습실, 집만 오가던 지민이라 연습 말고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슬럼프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고, 그런 마음으로 하는 무용은 즐겁지도 않았다. 결국 또 청승을 떨던 지민을 귀신같이 알고 채고 찾아온 정국이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게 하려고 지민과 실랑이를 벌이던 참이었다. 마침 축제가 막바지였으니까. 올해는 특히 더 규모가 성대하고 장엄했다. 정국의 생각은 그랬다. 우울하다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골병이 깊어지기밖에 더 해?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게 어떻게 나아져?

 

 

   “후배가 기껏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바람 맞출 거예요?”

   “지가 멋대로 찾아와놓고는 생색이야...”

   “뭐예요?”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어낸 정국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던 주먹도 스르르 내려놓는다. 반면 불만족스러운 지민은 여전히 속으로 투덜거리는 중이었지만. 은근 고집이 센 정국이라 저 주먹에 멱살이 잡히지 않으려면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꽃가루가 기승을 부린다. 병원에만 있어 면역력이 확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생전 나오지도 않던 재채기가 연신 튀어나온다. 엣취. 푸엣취! 연속으로 기침하고 맑게 흘러나오는 콧물을 훌쩍거린 지민이 이제 막 정문을 지나치는 정국을 따라 걸었다. 저번에는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꽁꽁 싸매고 와서 제대로 살펴볼 여력이 없었는데, 다시 마주하게 된 대학교의 풍경은 여전했다. 짙은 회색의 정문 양옆으로 푸른 잔디가 무성하게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목을 꼿꼿하게 세운 꽃들이 연신 꽃잎을 나풀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 이파리를 흔드는 것도 여전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가는 길 곳곳마다 잔뜩 세워져 있는 푯말 정도. 확실히 축제는 축제였다. 그래도 익숙하게 여겨지는 아스팔트를 걷다가 문득 지금 느껴지는 익숙함이 친숙한 길을 지나오는 것에서 비롯되는 그 익숙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우직한 어깨와 도드라져서 툭 튀어나온 날갯죽지가 보인다. 들리지 않는 발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살짝 뒤로 움직였다. 안 오고 뭐 해요? 설마 그 사이에 마음 바뀐 거 아니지? 꼭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눈에 다시 부지런히 발을 움직인다. 지민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매달리지 말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아 어차피 만나지도 못할 사람인데. 나만 초라해지지.

 

   지민이 걸음을 서둘러서 정국의 옆에 섰다. 이마저도 분명 비슷한 경험을 한 느낌이 끼쳤지만 애써 떨쳐내며.

 

   정국에게 끌려다니다 보니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 정오를 가리켰다. 오랜만에 기타 소리도 듣고, 허밍하는 목소리도 감상하고, 화려하게 발재간을 부리는 댄스도 구경하고, 몇몇 조각상과 그림도 눈여겨보다 보니 확실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어느새 혼자가 된 지민이 머뭇거리다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신나게 쏘다니던 정국이 무용과에서 주선하는 주막 도우미로 강제 징용된 탓이었다. 제가 더 나이가 많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선배가 부르는 거라 감히 구출할 생각조차 못 했다. 그래도 꽤 자비로운 구석이 있던 선배는 퇴원한 지민을 알아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손은 잠시 빌렸다가 돌려줄 테니 그동안 맛있는 거라도 먹고 있으라며 만 원짜리 한 장도 쥐여주었다.

 

   소란스러운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지니 사람들의 표정이 한눈에 보였다. 모두 저만 빼고 다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눈꼬리를 활짝 휘고 입꼬리를 막 올리며 깔깔거린다. 쉴 새 없이 떠들며 장난을 친다. 괜히 질투가 나는 거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여서. 사춘기 소녀처럼 다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발끝으로 걸리는 돌부리를 툭툭 치워내던 지민이 이내 저한테 뛰어드는 무언가에 화들짝 놀랐다. 곧 울기 시작하는 목소리에 더 놀랐다. 냐앙. 눈이 굉장히 큰 삼색 고양이었다. 지민이 무릎을 접고 앉자 바로 제 머리를 들이밀며 애교를 피운다. 정국과 떨어지고 처음 미소가 번진 지민이 손을 뻗어 보드라운 털을 빗어내렸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어차피 듣지도 못할 대답이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보았다. 고양이를 어루만지면서 목 주변을 살펴보는데 인식표 같은 목걸이가 없다. 새끼 고양이가 이렇게 혼자 주인도 없이 돌아다니지는 않을 텐데. 배가 고픈지 자꾸 제 조막만 한 손등을 핥길래 주머니를 뒤적거려보지만 줄 수 있는 간식 같은 게 있을 리가. 뭘 챙길 틈도 없이 끌려 나왔던 터라 지갑도 놔두고 왔고 잔돈도 없......

 

 

   “아. 아까 만원 받았지.”

 

 

   근처에 학생회관이 있었다. 학생회관 옆에 큰 편의점이 하나 있었고. 또다시 몸을 부벼오는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발톱을 세우지도 않고 얌전히 안겨 있는 게 굉장히 기특하면서도 신기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손길에 익숙한 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인파를 비집고 들어설 때, 갑자기 고양이가 발버둥을 쳤다.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며 냥, 냐앙 줄기차게 운다. 시선의 끝에 다소 한적해 보이는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다 같이 우르르 어디를 갔는지 몇 사람만 손님을 받고 있는.

 

 

   “저기 어디에 네 주인이 있어?”

 

 

   의문을 갖는 지민에게 고양이가 다시 재촉하며 채근했다. 알았다고, 진정하라고 머리를 톡톡 간질여준 지민이 발을 옮겼다.

 

 

 

 

 

 

 

 

 

 

   사람마다 정도마다 제각각 다르겠지만 큰 상실감을 겪은 후의 마음은 생각 외로, 또 의외로 일상과 다름없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은 아무런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굴러가니까. 태평한 하늘, 태평한 거리, 태평한 사람들처럼 잠시 앓다가 떨쳐내고 또 잠시 괴로워하다 단단해지는 것을 반복하는 거다. 그렇게 조금씩 괜찮아지고 나아지는 거였다.

 

   모든 연인들의 애정행각이 거슬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판 모르는 남 앞에서 보란 듯이 입술을 쪽쪽거리는 애들은 정말 별로였다.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기 전부터 온갖 애정행각을 펼쳤던 한 커플을 얼른 떠나보내면서 태형은 표정을 이죽거렸다. 혀도 찼다. 몇 걸음 전진하지도 않고 또 부리를 부딪치길래.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부러움도 피어오르는 거라 잠시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하늘로 시선을 돌려본다.

 

 

   “......날씨 한 번 되게 쨍쨍하네.”

 

 

   괜히 서럽게.

 

   광활한 하늘을 눈에 담을 때면 황홀이 펼쳐졌고, 황홀이 펼쳐지면 붉은 다리가 연상됐고, 붉은 다리가 연상되면 그 난간을 개구지게 걷던 누군가가 그려졌다.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이 아주 예뻤던. 마지막으로 마주하던 얼굴은 무척 괴로운 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애가 그렇게 다급하고 화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형은 천천히 그 당시의 기억을 들춰보았다.

 

 

   「아! 아파요! 할아버지!」

   「아프라고 때렸다! 아프라고!」

   「저 갈비뼈에 금 갔거든요? 절대 안정하라고 의사가 신신당부 했거든요? 겨우 붙으려고 하는데!」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친히 때어주랴? 땠다가 다시 붙어주랴?」

 

 

   퓨즈가 나가 푹 꺼진 정신이 다시 밝혀졌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곧바로 사위에서 근심으로 가득한 눈초리도 날아들었다. 엄마부터 시작해서 아빠, 맨날 구박하기 바쁘던 누나들,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 태형의 조부가 내내 태형의 곁을 지켰다. 입원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입원생활이었지만, 입담을 나눌만한 사람이 조부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여전히 입이 걸걸한 조부 탓에 태형이 실 없이 웃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챈 건지 어째 매번 볼 때마다 얼굴에 수심이 더 깊어지냐고 묻던 조부였다. 태형은 머뭇거리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꾹꾹 감추면서 혼자 앓았던 고생들을, 고민들을, 그리고 최근에 만난 어떤 인연에 대해서도. 일부로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저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낌새조차 흘리지 않던 태형이었다. 예상대로 다 듣더니 다짜고짜 이마빡부터 숟가락으로 후려치던 할아버지였다. 그것도 지저분하게 밥 먹던 숟가락으로. 기겁한 태형이 꽥 비명을 내질렀다.

 

 

   「아 좀! 그만 때리면 안 돼요? 저 진짜 아프거든요?」

   「못난 놈, 고작 그거 얻어맞고 아프다는 소리가 나와? 엄살 한 번 요란하기는... 그렇게 엄살떠는 놈이 그동안 어떻게 입도 벙긋 안 한 거냐?」

   「말했으면 당장 짐 싸고 내려오라고 했을 거잖아요. 허튼 꿈 꾸지 말고 밭이나 갈라고 부려먹을 거였으면서.」

   「네놈이 아주 매를 벌지, 매를 벌어. 봐주려다가도 괘심해서 안 되겠다, 네 녀석은.」 

   「말은 그렇게 해도 숟가락 내려놓는 우리 할아버지 최고. 근데 왜 이렇게 아프지? 숟가락이 아니라 무슨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은 것 같은데.」

 

 

   연신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태형에 픽 웃은 조부가 그제야 진실을 밝혔다.

 

 

   「그냥 때린 게 아니니까 그러지.」

   「네?」

   「이제 편히 잘 수 있을 거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알고 보니 태형의 할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께서 지니셨다던 그 퇴마 능력이 얼마 전까지 밭을 매던 평범한 할아버지에게도 전수된 것이었다. 다만 그 먼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은 퇴마사도, 문서도 별로 남아있지 않은 터라 미미한 정도로만 전수된다고. 그것도 태형의 조부나 태형처럼 영적인 존재들에 예민한 사람들만 그들을 감지할 수 있으며 요술을 부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고 한들 너무 아파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태형은 뭔가 허무해지고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간단히. 너무나도 간단히. 그럼 나는 이제까지 왜......

 

 

   「왜 바보같이 혼자 끙끙 거렸냐......」

 

 

   드디어 저주받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태형이었지만, 영 기뻐하지 않는 태형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다독였다.

 

 

   「세월의 힘이란 무서운 거다.」

   「네?」

   「시초로부터 몇 백 년이나 흘렀지. 시간이란 건 그 어떤 것도 거스를 수 없어서 산도 깎이고 강도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 게야. 제깟 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었어도 처음의 그 기백을 유지할 수는 없는 거지. 단순한 잡귀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거다, 산신이 아닌 이상.」

   「......」

   「그러니까 그 아이도 쉽게 물리칠 수 있었겠지. 네 녀석이야 뭐 고작 감지만 하는 정도라 그 애도, 잡귀들도 만질 수 없었을 테지만.」

 

 

   그 말에 태형이 할아버지에게로 눈을 고정시켰다. 요 몇 년 간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해본 적이 없던 할아버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그에게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까맣던 머리는 하얗게 새 버렸고, 많지 않았던 검버섯이 활짝 폈으며, 살결은 잔뜩 주름이 져 쭈글쭈글해졌다. 어째 키도 좀 줄어드신 것 같다. 그의 젊었던 나날들이 조금씩, 하루씩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태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언젠가 제 마음도 이렇게 사그라들겠지. 천천히 식어버리겠지. 뭐든지 영원한 건 없으니까.

 

 

   “......”

 

 

   슬슬 안구로 맑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힘차게 구름을 가르는 비행기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태형이 고개를 내렸다. 너무 밝았던 것을 보다 그늘을 주시하니 블랙아웃 현상이 펼쳐진다. 태형이 눈 앞머리 사이를 짚고 잠시 가열된 동공을 식혔다. 다행히도 다들 점심을 먹을 시간대라 천막 내부가 한산했다. 손님도 별로 없으니 입맛이 없는 태형과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애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러 떠난 상태였다.

 

 

   “태형 선배. 저희도 그냥 뭐라도 간단하게 먹고 올게요. 맨날 뭐 먹던 시간에 아무것도 안 먹으니까 허전하더라고요. 선배는 진짜 안 드시게요?”

   “어. 천천히 먹고 와.”

   “음료수라도 사 올까요?”

   “그래, 고맙다.”

 

 

   재잘재잘 떠들던 후배 두 명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주변이 더 적적해진다. 태형이 미간을 더 깊게 짚었다. 익숙함이란 참 무서운 감정이었다. 처음 그것을 인지했을 때는 맨날 안고 자던 베개가 터져서 솜이 다 튀어나왔을 때, 그다음은 항상 매고 다니던 목걸이 줄이 끊겼을 때, 또 그다음은 가족 반지를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은...... 늘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떠났을 때였다. 마지막이 가장 상실감이 컸다. 허전한 품, 허전한 목, 허전한 손보다도 가장 어색함에 적응하는 시간이 길었다. 고작 한 달 알고 지냈을 뿐인데. 그랬을 뿐인데.

   이 상실감 또한 익숙해지겠지.

 

   고작 한 달 지났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얼굴이 희미해졌다. 당연했다. 사진 한 장마저 없었으니까. 그림으로라도 남은 실루엣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정도였다. 아주 가끔 지민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을 때, 굳어버린 손을 푼다는 핑계로 지민을 모델로 세우며 그려냈던 얇은 종이들이 태형과 지민을 간신히 이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그림조차 지문으로 흐려졌지만. 기적처럼 다시 내 앞에 나타나주면 좋으련만. 그래주면 좋으련만. 속절없는 그리움이었다.

 

 

   “......”

 

 

   퇴원하기 전, 물어보는 태형에게 할아버지는 이런 답변을 들려주셨다.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사라질 경우 영혼이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간 거라고. 처음부터 죽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정처 없이 세상을 떠다니는 혼 앞으로 저승사자가 마중 나와서 데려간다고. 아마 영혼과 육신의 연결이 불완전한 혼수상태여서 오랫동안 사경을 헤맸을 거라고. 영혼이 본래 제 혼을 담던 그릇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좋은 의미일 수도, 반대로 나쁜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한다. 태형은 부디 전자이기를 바랐다. 꼭 어딘가에서 살아있기를 바랐다. 건강하기를 바랐다.

 

   숨을 깊게 들이마실 때마다 짙은 꽃향기가 향수처럼 스며든다. 축제 마지막 날이라고 꽃잎을 마구 뿌려대서 그런지 평소보다 풍기는 향기가 코에 오래 머물다 떠나간다. 이렇게 봄도 곧 막을 내릴 거다. 서서히 지고 있는 봄처럼 태형의 사랑도 조용히 막을 내릴 모양이었다. 태형이 손을 내렸다. 제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보는 눈이 슬펐다. 구차해 보이더라도 한 번쯤은 쏟아내 볼걸. 뭐가 그렇게 두렵다고.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뒤늦게 솔직해졌다. 내가 너를 좋아해. 이름도 모르는 너를 그리워해. 지금에서야 쏟아본들 목적지를 잃어 전해지지 못한 고백은 그저 허공만 부유하다 흩어졌다. 공허한 소리가 마음마저 허허벌판으로 만든다.

 

   그때 어디선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정비시키기도 전 익숙한 울음소리가 끼친다. 냥, 냐앙. 태형이 바로 몸을 숙여 폴짝 뛰어오는 새끼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작업실에서 몇 번 간식을 챙겨주었더니 태형만 보면 졸졸 쫓아다니던 삼색 고양이었다. 어찌나 잘 따르던지 오죽하면 학과 사람들이 모두 태형을 주인으로 알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태형의 손길을 유난히 반겼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귀여워하던 태형이었지만, 선뜻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또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해도 묘하게 지민을 많이 닮은 생김새를 무시할 수 없었던 터라 아침마다 배는 안 곯고 있는지, 지난 밤도 무사히 하루를 잘 보냈는지 살뜰하게 보살펴주며 주인 역할을 자처했다. 오늘은 어째 보이지 않더라니. 하루 종일 어디 갔던 거야. 짧게 잔소리를 해준 후 습관적으로 챙겨온 간식을 주머니에서 꺼내려는 태형에게 발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왜 이렇게 울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배 많이 고파?”

 

 

   또 한 걸음.

 

 

   “형이 오늘은 더 맛있는 거 챙겨 왔......”

 

 

   바로 코앞에서 구두 소리가 멈추었다.

 

   태형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들렸다.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 먼저 낯설지 않은 체향이 훅 코를 간질였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이었다. 멈추어졌던 눈이 다시 천천히 올라간다. 앞코가 깨끗한 구두에서 검은색 바지로. 검은색 바지에서 선이 두껍지 않은 허리로. 허리에서 하얀 목덜미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얼굴로.

 

 

   “혹시 이 고양이 주인이세요?”

 

 

   태형의 눈이 느리게 한 번 깜박였다. 점점 눈꺼풀이 올라갔다. 이윽고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확 커졌다.

 

 

   “너무 작아서 사람들한테 밟힐까 봐 데려왔어요.”

 

 

   마음이 달달 떨렸다. 눈도, 입술도 달달 떨렸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태형에 지민이 어색해하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혹시 아닌가요?”

   “......”

   “그럼 실례했......”

   “맞아요. 주인은 아닌데, 제가 돌보는 애는 맞아요.”

 

 

   이렇게 또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었다. 지금 제 눈이, 머리가 잘못되지 않은 이상 지민이 분명했다. 확실했다. 어떻게든 붙잡아 놓기 위해 태형이 얼른 선수쳤다.

 

 

   “안 그래도 계속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감사합니다.”

   “아...... 네.”

   “시간 괜찮으시면 답례하고 싶은데.”

   “네?”

   “그림 한 장 그려드릴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별로 돌아다니지도 않았어요.”

 

 

   태형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에 괜히 머쓱해진 지민이 땀을 흘렸다. 아까부터 뭔가...... 뭔가 이 남자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이상했다. 엄청 놀라더니 저를 뚫어져라 보던 것도, 갑자기 차분해진 것도, 그러더니 갑자기 비 쫄딱 맞은 강아지가 돼서 애처로운 눈을 하는 것도. 모든 게 이상한데, 그게 또 낯설지 않은 제 자신이 가장 이상했다. 결국 그 눈을 외면하지 못한 지민이 조그맣게 목소리를 흘렸다.

 

 

   “...저 이런 거 모델 해본 적 없는데.”

 

 

   어두웠던 얼굴이 다시 맑게 개인다. 태형이 부드러운 미소로 반겼다. 괜찮아요. 그냥 여기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 걸리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플락스틱 의자를 가리킨다. 또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지민이 어물쩍 앉아버렸고, 곧바로 태형의 손에 흑심이 뾰족한 연필이 들렸다. 제 딴에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선을 모른 척하는 태형이었고, 삐뚤거리는 선 대신 태형은 까만 동공으로 지민을 부지런히 담아보았다. 언젠가처럼 마음껏. 그때보다는 훨씬 더 뛰는 심장으로. 훨씬 더 떨리는 마음으로.

   지민은 원래 모델을 서면 이렇게 집요한 시선을 받는 건가 싶어 의아해졌다. 그야 다른 것도 아니고 초상화니까 샅샅이 훑어보기야 하겠지만...... 눈도 커다란 사람이 눈빛까지 저렇게 깊으니 퍽 낯부끄러워지는 거다. 그래도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 눈빛이 무례하지 않고 꼼꼼하게 살펴보는 느낌이라 생각보다 시선을 받는 게 괜찮았다. 또 끊임없이 말을 걸어준 태형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덜 민망하기도 했고. 차분하게 던져지는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지민의 긴장도 많이 풀려있는 상태였다.

 

 

   “학생이에요?”

   “...네. 여기 학교 학생이에요.”

   “아... 정말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전 스물둘인데.”

   “동갑이에요.”

   “...동갑이었구나.”

 

 

   태형이 웃었다.

 

   왜 한 번도 못 봤을까, 동갑인데 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의 미소였다.

 

 

   “무슨 과예요?”

   “현대무용이요.”

 

 

   또 웃었다.

 

   그렇구나. 왠지 그래 보였어. 무용하던 사람 같았어. 어쩐지, 가수보다도 더 아름답게 추더라, 하는 이해의 미소였다.

 

 

   “축제는 혼자 놀러 왔어요?”

   “아니요. 일행이 있었는데 잡혀갔어요.”

   “네?”

   “주막 도우미로 끌려갔거든요. 그쪽도 같은 이유로 지금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미소가 멎었다.

 

   처음으로 지민이 조곤조곤 미소를 띄운 이유였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는 그런 지민을 더 자세히 보았다. 안아주고 싶고, 입 맞춰추고 싶은 그런 얼굴이었다.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멈추어졌던 연필 끝이 다시 세워진다.

 

 

   “그쪽 아니고 김태형.”

   “네?”

   “내 이름이에요.”

   “......”

   “나도 통성명해주면 좋겠는데. 이름, 필요하거든요.”

   “...네?”

   “완성한 그림 밑에 적어야 돼서.”

   “아...... 박지민이요.”

 

 

   마지막에는 또 웃었다.

 

   어쩐지, 임시 이름치고는 너무 잘 어울린다 싶더라. 기억을 잃었어도 본능적으로 제 이름을 찾았던 거구나, 하는 환희의 미소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많지도 적지도 않은 대화가 오갔다.

 

   태형은 이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에 보던 모습보다 조금 말랐다고. 머리가 더 길었다고. 노랗던 머리 색이 갈색으로 변했다고. 실제 분위기는 훨씬 더 차분한 편이라고. 잘 웃는 것과 포근한 체향이 묻어 나오는 것은 여전하다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 진짜 이름도 진짜 나이도 알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슬픈 눈을 했다, 기쁜 눈을 했다, 감정이 널뛰기를 한다고. 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라고. 굉장한 미남이라고. 처음 보는데...... 그전부터 꼭 알고 지냈던 사람 같다고. 너무 다정하게 눈을 맞춰준다고. 그래서 아까부터 손끝이 간질거린다고. 이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으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고 여겼다.

 

 

   “......여기. 완성됐어요.”

   “와. 진짜 얼마 안 걸렸네요?”

   “많이 그려봤으니까.”

   “하긴, 그랬을 거 같아요. 오늘 사람도 정말 많아서 더 많이 보고 더 자주 그렸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진짜, 많이 보고 자주 그렸네요.”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태형이 하얀 종이의 앞면을 돌려 지민에게 보여주었다. 시종일관 달달 떨어 평소보다 깔끔하지 못한 선이었지만 그래도 예쁘게 그리기 위한 노력을 알아봤는지 지민은 보조개를 푹 패이며 웃어주었다. 지민에게 그대로 건네주던 태형이 다시 그림을 저에게로 가져왔다. 바로 코앞에서 뺏긴 지민이 의아해하는데도 뭘 사각사각 적는다.

 

 

   “이름을 안 적어서요.”

   “내 이름?”

   “아니, 내 이름.”

   “......”

   “보통 길거리에서 그려주는 초상화에는 그린 날짜, 화가, 초상화 주인의 이름을 같이 남기거든요.”

 

 

   태형이 다시 돌려주었다.

 

 

   “그래야 잊지 않으니까.”

 

 

   제가 이상한 걸까. 차분한 말투임에도 꼭 잊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눈높이가 더 높은 태형을 한 번 올려다본 지민이 그림을 제 품으로 가져왔다. 뭔가 아쉬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림, 고마워요.”

 

 

   무척 황홀하게도 웃는다, 이 남자는. 고작 감사 인사임에도.

 

 

   “이제 어디 가요? 일행분 잡혀갔다면서.”

   “안 그래도 슬슬 찾으러 가보려고요.”

   “그래요. 나도 이제 정리하고 마지막 꽃 구경하러 이동하려던 참이었어요. 우리 학교 엄청 긴 내리막길 알죠? 벚꽃나무 많은 곳. 거기 아직 꽃이 다 안 졌으니까 나중에 한 번 가봐요. 재밌게 놀고.”

   “......네. 그쪽도, 음...... 태형아? 라고 불러도 되나. 태형씨?”

 

 

   그쪽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지민 앞에서 태형이 또 먼저 선수를 쳤다.

 

 

   “응. 나도 재밌게 놀게.”

   “......”

   “안녕. 지민아.”

 

 

   ‘잘 가’라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말이 묘했다.

 

   태형은 다시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지민에게로 손을 뻗었다. 색이 차분해진 앞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여본다. 손길만큼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흘러내린다. 드디어 만져보네. 내가, 너를. 금방이라도 와르르 털어놓고 싶은 속내를 꾹 참고 정수리에 내려앉았던 하얀색 꽃잎을 떼어낸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지민에게로 후, 불자 두 개의 꽃잎이 두 사람 사이를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태형이 조용히 웃자 지민도 곧 따라 눈꼬리를 휘었다.

 

 

   “응. 안녕, 태형아.”

 

 

 

 

 

 

 

 

 

 

   “한 시간만 더 놀고 있으라고?”

   「진짜 미안해요. 상철 선배가 한 시간만 더 뛰어달라고 간곡해서.」

   “어쩔 수 없지, 뭐. 이따 끝나고 연락해.”

   「대신 수고비 두둑하게 챙겨준대요. 아, 나 부른다! 전화할게요!」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정국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확 끊긴 전화에 머리를 긁적거린 지민이었다. 아까 얘랑 하도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더 이상 가볼 만한 데도 없는데.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던 지민이 곧 떠오르는 장소에 별생각 없이 발을 옮겼다. 걸으면서 아까 태형이 그려준 초상화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제가 그림 보는 눈은 없지만, 이런 까막눈으로 봐도 재능이 대단한 것 같았다. 단순한 흑백 그림인데도, 선이 꼭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명력을 과시해서 신기했다. 명암을 표현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특히 눈동자가 더 그랬다. 밤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집에 갈 때까지 구겨지지 않게 잘 들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누가 그려준, 그것도 이렇게 잘 그려준 초상화는 처음이라서 액자에도 잘 보관하고 싶었다. 차분하게 시선을 내리며 그림을 눈여겨보던 지민이 순간 걸음을 뚝 멈추었다.

 

 

   “...어? 이게 뭐지?”

 

 

   「보통 길거리에서 그려주는 초상화에는 그린 날짜, 화가, 초상화 주인의 이름을 같이 남기거든요.」

 

 

   날짜, 화가 이름, 제 이름 말고도 또 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 몇 문장 되지 않은 쪽지였다. 처음에는 뜻밖의 반가움, 그다음에는 뜻밖의 기쁨, 또 그다음에는 무슨 쪽지일까 하는 호기심, 또 그다음에는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 마지막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벅차오르는 마음이었다. 지민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찰나 내리막길 위로 만발한 벚꽃나무들이 꽃잎비를 우수수 쏟아낸다. 워낙 드넓고 길어서 활주로라고도 불리는 도로가 흐드러지게 나부끼는 벚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 장관의 끝에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지민은 쪽지를 다시 한 번 읽고, 멀어지는 태형의 뒷모습을 다시 주시했다. 마음이 달달 떨렸다. 이제야, 이제야 겨우...... 그토록 애타게 했던 등의 주인이 바로 보인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겨우 찾았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멈춰있던 발이 한 걸음, 두 걸음 차분하게 움직이다 뛰어가게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태형아!”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김태형!”

 

 

   멈춰. 더 멀어지지 마. 아, 태형아. 제발, 제발, 제발......

 

 

   “태형아!!!”

 

 

   그 울음기 섞인 외침에 태형이 멈추었다. 그제야 태형의 고개가 움직이며 뒤를 돌아본다. 나리는 꽃잎비 사이로 두 사람이 그렇게 마주 보았다. 조금씩 선명하게 맞추어지는 시선. 태형이 웃었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지민이 있는 힘껏 뛰어들었다.

 

   언젠가 태형의 마음으로 풍덩 뛰어들듯, 그렇게.

 

 

 

 

                                  

                      

Date. 2019. 05. 20.

Artist. 김태형.

Model. 박지민.

 

박지민. 기억 돌아오면 연락해.

기억 안 돌아와도 연락해도 돼. 기다릴게.

보고 싶었어.

 

ㅡ010 1995 123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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