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미학
김탁구
그 애를 처음 인식했던 것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였다. 아직 반 애들 이름도, 얼굴도 외우지 못했던 때였다.
“야, 괜찮냐?!!”
“아야....아, 뭐야?”
쿵 하는 소리가 한 번 들려왔고 퍽 하는 소리가 뒤를 이어 들려와서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봤더니 한 명은 놀란 얼굴을 하고서 누군가를 살피고 있었고 살펴지는 사람은 제 머리를 문질문질 하면서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유리 안 들어갔어, 옷에?”
“응. 유리는 안 들어간 거 같은데. 와, 이거 어떡해. 시계 다 깨졌어.”
“시계가 문제냐 지금? 너 머리 박살날 뻔 했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다 교실에서 들릴 법한 말이 아니어서 나는 꽤 주의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신경 쓰이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주고받는 얘기들을 들어서 종합해보니 교실 안에서 축구공을 차대던 녀석들이 있었는데 공중을 붕붕 날라 다니던 축구공이 누군가가 잘못 차는 바람에 하필이면 시계가 높게 걸려 있는 그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시계가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 시계 바로 밑에서 저 애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거였다. 시계가 걸렸던 벽에 기대 서 있던 애의 머리 위로 벽시계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제법 세게 강타했고 그 바람에 시계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치지 않았나 싶어서 안경을 치켜 올리고선 그 애를 유심히 바라보는데 그 애가 그러는 거다.
“괜찮아. 그보다 시계 망가져서 애들 불편하겠다. 내일 하나 사와야겠어.”
“야, 그걸 네가 왜. 착해빠졌네.”
여전히 시계에 가격당한 머리가 아프기는 한지 손바닥으로 문질문질 하고는 있었지만 진심으로 시계가 깨진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짓는 모습이 순간, 굉장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잘못도 아닌데 다친 머리보다 깨진 시계를 먼저 챙기는 모습이 어쩐 일인지 내 안에 강하게 이미지 화 됐다.
“.....착하네.”
그렇게 그 애의 이름도 모른 채로 착하다는 인상만 받고서 지나가버렸다.
그 다음으로 그 애를 인식했던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시계 사건이 있은 후로 한 달 반가량이 지난 5월의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동네에 새로 생긴 중학교로 진학했던지라 걸어서 통학이 가능해서 봄기운을 잔뜩 느끼면서 무거운 가방을 맨 채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에 가서 뭐 먹지, 엄마가 뭘 해놓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중였던지라 학교와 집이 가까운 애들은 자전거 통학을 하기도 했는데 소리의 근원은 자전거를 한 무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길 가장자리로 붙어 걸어가면서 자전거 진로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뒤까지 자전거가 다가온 소리 말고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얘가 너 좋아한대!!”
들려온 소리의 내용을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은 그냥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누군가 싶은 궁금증도 있기는 했던 거 같다. 내가 여전히 걸어가면서 고개만 뒤로 돌릴 때 이미 내 옆으로 소리를 지른 걸로 추정되는 자전거 무리가 지나갔고 나는 뒤를 확인했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좋다고 이 대낮 길거리에서 고백을 하나 싶어서.
“................”
첫 번째로 황당했던 것은 내 뒤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 옆에도, 내 앞에도 그 자전거 무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두 번째로 황당했던 것은 자전거 무리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거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학교는 남중이었으니까.
뭐지, 하는 얼굴로 다시 앞을 봤는데 자전거 무리 중 눈에 익은 애들이 여럿이었다. 대부분이 우리 반이었던 거 같고 그 중 한 명이 그 애였다. 새 학기에 누가 찬 축구공 때문에 시계에 머리가 부서질 뻔 했던 애. 누굴 향해 소리를 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 친 ‘얘’가 그 애라는 것을. 다시 앞을 봤을 때 그 애만 유일하게 뒤를 돌아보았으니까. 자전거를 몰면서.
마지막으로 그 애를 인식한 것은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을 알게 해준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격렬하게 동요했으며 강한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질투의 감정 또한 느끼게 됐다.
“이거 문제 좀 풀어줘. 이거 진짜 중딩 수준 문제 맞냐?”
“뭔데. 아, 이거는.”
“참, 너 쟤 얘기 들었어?”
옆에 앉은 짝이 손으로 가리키는 ‘쟤’는 그 애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보기만 했더니 내 팔뚝을 툭 치고선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옆 반에 김준영 알지? 걔가 쟤 좋아한대.”
“....뭐?”
“고백하는 걸 3반 누가 봐가지고 소문 쫙 퍼졌는데 몰랐어?”
“..............”
전혀. 그리고 또한 몰랐다. 누군가의 근거 없는 소문에 내 안에서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알지 못한 채로 짝이 계속 지껄이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더 쇼킹한 건 쟤가 그 김준영한테 그랬다더라고. 좋아하는 애가 우리 학교에 있다고.”
그 순간 영화 같은 장면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화창한 봄. 자전거 소리. 느닷없던 고백. 혼자였던 나. 그리고 그 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심장은 말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
촤악.
“나쁜 새끼. 넌 화도 안 나니? 아무리 내가.......”
“...............”
“당신, 사랑 같은 거 절대로 하지 마.”
또각또각. 저주를 퍼붓고 걸어가는 여자의 구두 소리가 강렬했다. 지민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커피를 마시려다 눈앞에서 펼쳐진 진부한 드라마 같은 사랑싸움에 혀를 내둘렀다. 고개를 돌려 미련 없이 가버리는 여자의 뒷모습도 굉장했지만 더 대단한 것은 여자가 그러고 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미동도 한 번 없던 남자였다. 남자의 등만 보이는 자리라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변명 한 번을 하지 않는 남자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절대로 사랑 같은 걸 하지 말라는 악담을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계속 쳐다보는데도 남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형.”
“어, 왔어?”
어떤 얼굴일지 궁금했는데 기다리던 이가 왔다. 지민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정국의 모습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정국은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국이 자연스레 허리를 낮춰 지민의 볼에 제 볼을 살짝 갖다 대며 볼뽀뽀를 했다. 지민 역시 정국의 인사를 함께 나눴다.
“일찍 왔네.”
정국이 자연스레 앉으면서 다가온 직원에게 빠르게 커피를 주문했다. 지민은 이미 앞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이면서 장난스레 답했다.
“네가 급할 거 같아서.”
“그건 그런데 커피 한 잔 할 시간도 없을까봐?”
“시간이야 있겠지만. 참을 수 있어?”
“왜 도발이실까. 어련히 알아서 올라갈 텐데.”
정국이 포켓에 넣어두었던 룸 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걸 본 지민이 저도 모르게 웃다 소리가 너무 컸나 싶어 주위를 힐끗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까의 그 남자가 있었다. 아직도? 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선을 줬더니 정국이 눈앞으로 손을 휙휙 흔들었다.
“뭐해?”
“어? 아니, 그냥. 뭐 좀 궁금. 쉿!”
“왜 그래?”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남자 때문에 지민은 괜히 찔려서 조용히 하라고 정국에게 난리를 쳤다. 정작 정국은 지민이 왜 이러는지를 몰라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릴 뿐이었고 그 사이 아까의 그 남자가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들고서 지민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구가 그쪽이라 이제 나가려나보다 싶은 생각에 지민은 흥미로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슬쩍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태형...?”
“.................”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나보다. 남자가 지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민은 확신했다. 김태형이 맞았다. 그때처럼 여전히 멋있는 모습으로 그때와는 조금 다른 서늘한 눈빛을 지니고서 말이다.
“태형아. 김태형 맞지?”
“......누구시죠.”
“나.....기억....못 하는 거야?”
“................”
지민이 조금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반면 태형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반가움에 의자를 박차고 태형에게 더 다가가려던 발이 우뚝 멈춰선 채로 모든 걸 깡그리 다 잊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는 태형의 앞에 있었다. 지민은 이런 서늘한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형. 아는 분이야?”
“어? 아, 그게....”
중학교 동창이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를 않아서 지민이 잠시 망설였다. 얼굴부터 상체 옷까지 흠뻑 젖은 태형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정국이 대답이 없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난처한 얼굴인 것도 같았고 잔뜩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정국은 이런 지민을 본 기억이 없었다.
“................”
지민이 태형을 소개할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동안 태형은 지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커피 잔과 핸드폰, 그리고 툭 던져진 룸 키. 거기까지 본 태형이 미련없이 자리를 뜨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정국에게 태형을 소개하려던 지민이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태형의 뒷모습에 깜짝 놀라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국아, 잠시만!”
“형!”
양해를 가장한 통보를 하고서 지민은 이미 저만치 가버린 태형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차마 호텔 안 카페라 요란하게 뛸 수가 없어 경보하듯 걸어 가까스로 태형을 따라잡았다. 지민은 간신히 태형의 팔을 잡을 수 있었다.
“태형아, 잠깐.”
“................”
아무런 대꾸 없이 지민에게 잡힌 팔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지민이 슬그머니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멋쩍음을 느껴야 했지만 일단은 태형을 잡아두는 게 먼저였다. 이대로 보낼 수는, 절대로 없다.
“나야. 지민이. 기억 안 나?”
“그래서?”
“어?”
“네가 박지민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
“우리가 이렇게 얼굴 보고 인사할 사이던가?”
“...............”
“너, 기억력에 무슨 문제 있냐? 감히 나한테 친구인 척 인사를 해?”
“...............”
“네가 한 짓 기억났으면 이제 꺼져.”
“..............”
잔뜩 할퀴어진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고서 태형은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십 수 년 전의 봄날로 회귀하는 시간이 두 사람의 기억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찬란했으며 또한 고통이었다.
***
사랑의 열병을 앓느라 며칠 동안 공부도 하지 못하고 밥도 못 먹다 결국은 제대로 몸살감기에 걸려 버렸다. 봄은 봄이지만 여전히 일교차가 커서 주의해야 하는 시기였음에도 이런저런 고민거리들로 몸 관리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버티다 담임의 허락 하에 보건실로 내려 왔다. 곧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열이 꽤 올라서 제대로 앉아있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엎드려버리는 걸 보고 선생님이 보건실로 가라고 했다.
“보건 담당 누구지?”
“네.”
그 애다. 그 애 목소리였다.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와라.”
“네.”
어쩌지. 어떡하지.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함께라니.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나에겐 버거운 일이었고 확실하게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 애도 나를 좋아할 수도 있을 거라는 것도 역시나 버거운 일이었다. 연애를 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건 차치하고라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틀릴 확률은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확인해봐야 할 거고 그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을 그 애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축해줄까?”
“어? 아니, 아니!”
“어, 그래.”
교실을 벗어나 열 때문에 비틀거리는 걸 보고서 부축해주겠다고 한 모양인데 멍청하게도 정색하면서 거절을 했다. 그래주면 고맙겠다고 했어야지, 멍청아.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쩌겠나 싶어도 자꾸만 그 짧은 순간이 후회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많이 아파 보인다.”
“괘, 괜찮아, 이 정돈.”
“감기 몸살인 거야?”
“어.....”
사실은 상사병일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렸다. 보건실까지 이렇게 멀었던가. 아니, 조금 더 멀었으면 좋겠다, 양가감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 애를 보면서 멍청하다고 나를 수십 번 원망했다. 좀 더 얘기할 거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자꾸만 속이 상했다.
어느 새 야속하게도 보건실에 도착해 있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선생님 안 계시나본데. 아, 일단 먼저 누워. 내가 약 찾아줄게.”
힘들 거라면서 내 팔을 잡아 끄는 바람에 온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순순히 나는 나를 잡아 끄는 팔을 뿌리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얘 앞에서 눕는다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 눕기는 좀 그랬다.
“해열제 어디 있지.”
해열제를 찾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단 둘이 남겨져 버렸다. 이렇게 아픈 이유가 자기 때문인 걸 알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심장은 마구 뛰어대고 시선은 자꾸만 따라 움직이고 그러면서도 정작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해열제를 찾아 물을 가지고 내 옆에 걸터앉아서는 나를 빤히 보면서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
“이거 먹으면 될 거야.”
“어, 고마워.”
“열 많이 나? 약 한 알이면 되겠지?”
“열은 잘....!!”
부드러운 손바닥이 이마에 얹어졌다. 온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닿았던 손이 떨어지고는 애매한 얼굴을 한 그 애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나는 손으로 열 잘 못 재거든. 다르게 재도 돼?”
“.....어.”
내가 대답을 했다는 인식도 못한 채로 멍하니 있는데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 이마에 그 애의 이마가 맞닿은 것이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멈춰버렸다.
“열이 그렇게 많이 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
서로의 이마가 맞대어진 채로 숨결이 닿았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밀착된 거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열 때문에 아찔한 건지, 얘 때문에 아찔한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한 채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그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입술 위로 그 애의 입술이 살포시 닿은 것이다. 머릿속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떨어졌고 그 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마 그 애를 올려다 볼 용기가 없어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이마를 짚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내가 인지한 대로가 맞는지, 아니면 열 때문에 꿈이라도 꾼 건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어디가 아파서 왔니.”
“아, 어, 감긴 거 같아요, 선생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학생, 거기 누워 있고 이거 한 알 먹으면 된다.”
“........네.”
그 애가 보건실을 나섰고 나는 보건 선생님이 주신 약을 먹고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그 애와 달콤한 키스를 나눈 것 같았다.
***
“왜 그렇게 울상이야?”
“...............”
“아까 따라 나간 사람 때문에 그래?”
“정국아.”
“응.”
지민은 눈앞에 늘어진 도장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초조한 얼굴을 한 정국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알겠는데 뭐 때문인지 모르겠어서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지민이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정국은 지민의 개인적인 일에는 큰 흥미는 없었다. 이 서류에 도장이 찍히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사실 큰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나 있잖아, 중학교 때 진짜 좋아했던 애가 있거든?”
“근데?”
“근데 내가 그 애한테 뭘 크게 잘못했나봐.”
“그게 뭔데?”
“그걸.....모르겠어. 나 뭐 잘못했지?”
“.........형, 도장.”
정국이 계약서를 스윽 내밀었다. 이 호텔에 무조건 스위트 룸 하나 장기로 잡아주면 계약을 하겠다고 해놓고선 막상 룸으로 올라와서는 넋을 빼놓고 있어서 정국은 애가 탔다. 이 계약서에 도장을 받아가지 못하면 사직서를 내야 할 판이었다.
“정국아, 나 부탁이 있어.”
“......아, 혀엉.”
“제발. 어? 나 진짜 심각해.”
“도장 찍어주면 다 들어줄게. 무슨 부탁이든 내가 다.”
“아까 그 사람 좀 찾아줘. 그럼 도장 찍을게.”
“형, 진짜......”
“제발, 정국아. 제바알. 나 꼭 그 애 찾아야 해. 꼭.”
정국은 머리가 띵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마를 짚었다. 그동안 어르고 달래고 매달리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드디어 계약을 앞뒀는데 또다시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드라마 한 편 계약하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니. 정국은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 박지민을 드디어 잡나 싶었다가 바로 코앞에서 또 계약이 엎어지자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형, 도장 찍고 찾으면 안.”
“걔가 먼저야. 그 애가 먼저라고.”
“...............”
도저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상태인 것 같았다. 정국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새 드라마를 하자고 조르는 정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하고 도장을 찍으려던 자리였다. 작업을 위한 호텔 스위트룸을 잡아놓으면 그곳에서 도장을 찍겠다고 해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 거였다. 그 자리에서 태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지민은 아까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날이 선 눈빛과 적의가 아니, 분노가 가득했던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태형이 내뱉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지민은 변해버린 태형이 너무 놀라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형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물을 수가 없었다.
지민은 반짝반짝 빛나던 그때의 태형을 떠올려보았다. 태형을 좋아했던 기억, 첫 입맞춤, 보건실의 냄새까지 모든 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멀어지는 태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 뛰던 첫사랑이 그렇게 흐지부지 된 것과 태형의 분노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때 어쩌다가 그렇게 됐던 걸까. 왜 갑자기 태형과 멀어졌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잘 모르겠다. 지민은 괴로운 얼굴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
“뭐해?”
“어? 복습하려고.”
“너 진짜 성실하다. 옆에 앉아도 돼?”
“그, 그럼.”
그 보건실에서의 일이 있은 이후로 우리는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날의 일은 누구도 먼저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많은 말이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흐르는 공기가, 눈빛이, 그걸 모두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풋풋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시험이 코앞인데도 집중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할 정도였다. 그 애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는 이 첫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이것이 남들이 말하는 연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아주 맹목적으로 그 애가 좋았다. 그 애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 애의 말투, 눈빛, 손짓, 표정까지도 어느 하나 나를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정확히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 그 애와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라고 확신했었다.
“이따 학교 끝나고 뭐 할 거야?”
“끝나고? 별로....집에 가는데.”
“그럼 나랑 서점 안 갈래? 서점 갈 일이 있는데 혼자는 심심해서.”
“.....좋아.”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방긋 웃는 미소가 아주 예뻤다. 그리고 아주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애의 입술에 다시 한 번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놀라서 얼굴이 빨개지려고 하자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지만 말이다. 그 날의 그 보건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사실은 좀 겁이 나기도 했다. 이런 감정, 이런 순간들이 다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은 아주 당연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날의 보건실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을 나는 아주 많이 처절하게 후회해야 했다.
학교 1층에 위치한 우리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운동장이 넓게 보였다. 바로 옆에는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자전거 주차장을 만들어 두었는데 아주 가끔 타이밍이 맞거나 하면 그 애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아직 반 애들이 다 등교하지 않았을 땐 내 자리는 아니지만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그 애가 오는 것을 가끔 보곤 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친구들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볼 때도 많았다. 물론 그 애는 이런 나를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하게 숨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를 발견한 적은 없었다. 물론 덕분에 나는 그 애를 맘껏 볼 수 있었다.
그 날은 일찍 눈이 떠져서 학교를 빨리 왔다. 달리 할 것도 없고 더 자면 일어났을 때 배로 고생해야 하는 걸 경험으로 알아서 좀 더 자더라도 학교에 가서 자자고 생각하면서 등교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에 도착하니까 내가 제일 먼저 등교했다. 자리에 가방을 놓고서 잠을 좀 더 잘까 했는데 잠이 다 깨기도 했고 날씨가 너무 좋기도 했다. 이른 시간이라 학교는 마치 숲 속처럼 고요했다. 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봄볕이 아름답게 내리쬐고 있었고 아침을 시작하는 새소리도 들려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 고요함을 즐기면서 그 애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싶었다.
보건실에서의 일이 있은 후로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이 이어졌다. 누구도 먼저 그 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같은 반 친구였지만 데면데면했던 전과는 달리 함께 있는 시간이 확실히 늘어났다. 대부분이 그 애가 먼저 내 자리로 오거나 함께 어딜 가자고 얘기를 꺼내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용기가 생기면 그때처럼 그 애와 또 한 번 더 뽀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내가 좀 엉큼한가 싶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면 당연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하여튼 요즘의 내 생각 대부분이 온통 그 애였다. 그 애를 알게 해준 이 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고 속으로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저 멀리서 자전거 두 대가 오고 있었다. 창틀에 팔을 대고 엎드리듯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옆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으로 가겠거니 싶어서 그 자전거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운동장 흙먼지가 폴폴 풍기면서 점점 가까워지는데 맙소사, 그 애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렇게 아침 일찍 어쩐 일일까 싶다가도 반갑기도 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그 애에게 다가가 학교가 끝나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애가 자전거 주차장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애는 자전거 주차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함께 온 누군가와 자전거에서 내려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멀지 않은 거리였고 내 모습은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듯했다.
“요새도 그 자식만 보면 좋아죽겠냐?”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뭘. 요즘 자주 같이 있었잖아. 원하는 대로 친해져서 좋냐고.”
“친해지긴 친해졌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에 나는 아주 본능적으로 내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 얘기였다. 그 애와 나 사이를 옆에 있는 친구가 아는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때 등 뒤에서 ‘얘가 너 좋아한대.’ 라고 소리친 애는 분명 그 애가 아니었으니까 아는 친구가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나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그 애가 너무 좋아서 그런 쪽으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슬슬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둘 사이에 이상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너 그 자식 좋다는 티 좀 그만 내. 소문 돌더라니까. 너랑 그 자식 게이라고. 성격 마음에 든다고 친해지고 싶다 그래서 물꼬까지 터줬더니만 연애라도 하려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 그냥 걔 공부 되게 잘하니까 도움 될까 싶어서 그런 거지. 성격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잘해주는 건 그냥 그 정도 이유야. 나한테 도움 안 되면 내가 왜 그런 애한테 잘해주겠냐?”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소문 이상하게 나면 골치 아파져.”
“어....”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쿵. 쿵쿵.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알겠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고서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자리로 가 내려놓은 책가방을 들고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애가 들어올 정문 쪽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었고 눈앞에 보이는 도서관으로 몸을 날리듯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도움 될까 싶어서 그런 거지.’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잘해주는 건 그냥 그 정도 이유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나한테 도움 안 되면 내가 왜 그런 애한테 잘해주겠냐?’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나를 이용하려던 수단이었던 거다.
“................”
그런 것도 모르고. 그런 것도 모른 채로 나는 그 애의 손에 놀아나면서 마치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서 내 마음까지 줘버렸다. 처음부터 모든 게 짜여 있었던 걸까. 그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던 얘가 너 좋아한다던 말도 친해지고 싶다는 아니, 날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었던 거다. 그런 것도 모른 채로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 날의 뽀뽀는. 보건실에서의 일 역시 마찬가지였나. 내가, 내 행동이, 내 눈빛이 너무 눈에 보여서 적선하듯 해준 건가, 아니면 내 마음을 저에게 매어두려던 계획이었던 걸까.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먹었던 모든 걸 게워낼 것만 같았다. 이런 나를 보면서 얼마나 재밌었을까.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란 놈은 얼마나 멍청했던 걸까. 그 애가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던 나를 구경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왜 나는 남자인 그 애가 남자인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한 번도 의문이란 걸 품지 않았던 걸까. 왜. 왜.
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민을 사랑하는 것일까.
***
“후....힘들었다. 당장 도장 찍어.”
“알았으니까 얼른.”
“도장 안 찍으면 안 줘. 내가 형 도장 못 받아서 얼마나 욕먹은 줄 알아? 짤릴 뻔 했다고.”
지민이 정국이 내민 계약서를 바라보다 재킷에 넣어두었던 도장을 꺼내 빼앗듯 잡아채서는 빠르게 훑어 내리곤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국이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만세!!!”
“전정국, 안 내놔?”
“이제 제작 바로 들어갈 거니까 초고 완성 되는 대로 넘겨주고 반드시 연락 닿아야 돼. 아니면 이거 안 준다.”
“알았으니까 내놔, 얼른!”
지민의 다급함을 보며 정국이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지민은 막상 그 종이를 받지 못한 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받아?”
“....좀 무서워서.”
“나참. 얼른 받고 알아보니까 근처 살더라. 형네 집에서 별로 안 멀던데, 회사가? 근데 공부 되게 잘했나보던데? S 기업 다니는 거 보면.”
“....응. 되게 잘했었어. 그래서 그 애를 처음 알게 됐으니까.”
“아무튼 난 갈 테니까 정신 빼놓고 연락 안 닿으면 죽는다, 진짜. 그리고 여기 콕 처박혀서 초고 나올 동안은 움직이지도 마라, 형.”
“잘 가.”
매정하게 가라는 지민을 보면서 정국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계약서를 빠르게 챙겨 룸을 벗어났다. 프린트 된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고 작업을 쉬지 않고 하긴 했는지 노트북이 계속 켜져 있었다. 첫사랑에 넋을 빼놓더니 그래도 일은 일이라고 하는 모양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은 채 정국은 호텔을 빠져나갔다.
지민은 정국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 주소와 회사가 적혀 있었고 연락처도 있었다. 김태형이라고 적힌 세 글자가 왜 이렇게 낯설면서도 그리운지 지민은 마치 첫사랑을 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풋풋했고 처음이었고 그래서 서툴렀던 사랑이었다. 미련이 계속 남아서 태형을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 소원을 지금에서야 신이 들어줬나 싶었지만 만나선 안 됐던가 싶기도 했다. 살벌했던 태형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대체 자신에게 왜 그렇게 적대적인 것일까. 여전히 지민은 태형을 떠올리면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태형이 아파서 보건실에 데려다 줬던 바로 그 날. 그곳에서의 달콤한 첫 뽀뽀를 말이다.
지민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을 만날 일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때와 변함없는 모습, 태형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금의 자신을 다시금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나쁘게 기억하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겠기에. 지민은 태형의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쥐고서 호텔 룸을 나섰다.
“여긴가....”
작고 아담한 주택이었다. 아파트에 살 것 같았는데 S 기업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태형은. 주소지만 들고서 집을 찾는다고 좀 헤매기는 했지만 맞게 도착한 듯싶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니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아니면 혼자 지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태형이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민은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 봄바람이 살랑 불었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태형이 다가오고 있었다.
“..............”
“..............”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표정에 동요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지만 태형은 빠르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담벼락에 기대었던 몸을 다시금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태형을 향해 다가갔다. 태형은 기가 막힌 듯 그 자리에서 지민이 제게로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순간 시간이 마치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태형아.”
“....여긴 어떻게 알았어.”
“좀....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 꼭 너를 봐야겠어서.”
“사과라도 하려고?”
“..............”
“이제 와서 뭐 하러. 됐으니까 비켜.”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 잠깐이면 돼. 어?”
“사과는 그때 했었어야지. 지금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나간 거 아닌가? 어차피 너한텐 놀이였을 텐데 그때 없던 죄책감이 생기기라도 했단 거냐?”
“그게 아니라 난 네가 무슨 얘길 하는지 전혀 모르겠.”
“모른다? 하, 그래. 그런 애였지, 넌. 알았으니까 꺼져.”
순진한 얼굴로, 여전히 그때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그 날의 잘못을 감히 모른다는 말로 치부해버리는 지민을 보면서 태형은 절망해야 했다. 그때처럼 뛰는 가슴이, 그때처럼 박지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봤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때의 사랑의 기억과 배신의 처절함은 강렬하게 태형에게 남아 살아가는 내내 끊임없이 괴롭혀댔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다가온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해 늘 사랑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던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제 앞에서 감히 모른다고 지껄이는 지민을 견딜 수가 없으면서도 떨렸다. 스스로가 말도 못하게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면서 1초라도 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민을 그 자리에 두고서 스쳐 지나려 했는데 지민은 그런 태형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지민에게 잡힌 팔이 강하게 돌려세워졌다. 태형은 다시금 지민을 마주해야 했다.
“날 멀리한 건 너잖아!!”
“.............”
“사과는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날 없는 사람 취급했잖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리고는 말도 없이 전학 가버렸잖아. 사과는 네가 나한테 해야 하잖아!”
“............”
“그때 내가...너를....얼마나....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
“왜 그 날, 안 나왔어?”
“............”
태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민이 말하는 그 날도, 기다렸다는 말도,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지민은 아무런 말이 없는 태형을 보면서 지독하게 뜨겁고 또한 눅눅했던 여름의 어느 날로 회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