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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수화

2

<BGM : 봄날(Spring Day) 피아노>

承(승)

 

 

 

   미술은 어떤 것에도 재미를 붙이기 어려웠던 태형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고 그 관심을 오래도록 유지한 분야였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던 태형이었다. 그런 막내 아들에게서 한국의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부터 살아남을 확률이 거의 제로 퍼센트에 육박할 것을 미리 예견했던 태형의 어머니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붙잡고 예체능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피아노 건반도 띵똥 띵똥 쳐보게 하고, 연기 대본도 달달 외워보게 하고, 태권도 도장에서 주먹을 휘둘러보게도 하고, 색소폰도 부웅 불어보게 시켜봤지만 전부 허사였다. 태형에게 하얗고 까맣기만 한 악보는 시시했고, 감독 지시대로 연기를 해야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고, 운동은 그냥 재능이 바닥이라고 간주하면 되었다. 코치님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으니 모자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나마 색소폰에는 조금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늘 그렇듯 태형의 흥미를 오래 붙잡아두기란 역부족이었다.

 

   반면 미술은 달랐다. 재질마다 가지각색의 질감을 가진 캔버스, 그런 캔버스 위를 채워나가는 제각각의 도구가 손에 감기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라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와도 같았다. 더불어 태형에게는 미술에 대한 독특한 재능도 있었다. 그 재능을 뒷받쳐 줄 만한 부모의 여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ㅡ대대손손 거창의 큰 손이었다ㅡ 그러니 미술에 푹 빠져들 수밖에. 알면 알수록 새롭고 무궁무진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미술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처음에는 사과, 꽃 등의 단순한 정물화를 그리는 것에 국한되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인물화와 풍경화까지 관심을 뻗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순수미술로 진로를 잡고 미래를 그리게 되는 수준으로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제2의 반 고흐가 되는 것을 목표로.

 

   다만, 뭐든지 꿈과 현실에는 간극과 괴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재미는 있어도 벌어먹고 살기에는 전망이 썩 좋지 않은 게 순수 미술이라 태형은 슬슬 다른 동기들처럼 디자인 쪽으로 편입을 하거나 따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고민이었다. 그저 미술이 좋아서, 재밌어서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마냥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녹록지 않은 사회로부터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예술 혼을 불사 지르기 위해 굶주림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과거의 제가 그렇게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단 것을 깨달은 이유였다. 때문에 요즈음의 미술 분야에서는 작가보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목표로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부생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태형처럼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하더라도 학부생의 절반 이상이 작가로 취업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거나 갈팡질팡하는 게 태산이었고. 혀끝이 씁쓸한 현실이다.

 

   그리고 일단 태형에게는 제대로 작가 활동을 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허구한 날 요상한 것들한테 시달려서 잠도 마음 편히 못 자는 마당에 거지까지 되라니. 진심으로 끔찍했다. 하루하루 수면 부족으로 겨우 눈만 뜨고 다니는 수준이라 요즘의 제 작업물도 처참하기 그지없어서 처음에는 열정적이었던 태형을 대놓고 편애하며 예뻐했던 교수님들도 매일 제자를 들들 볶지 못해 안달이었다.

 

 

   「요즘 왜 그래, 김태형? 정신이 해이해졌어!」

   「......」

   「이래서 이름을 알릴 수나 있겠어?!」

 

 

   그나마 남아있던 의욕마저 잿더미가 되는 건 두말하기 입 아팠다. 교수님도 어디 한 번 제 처지가 되어 보세요. 이름을 알리기는 개뿔, 일단 만성 다크서클이나 좀 어떻게 개선하고 싶은데.

 

   오늘은 오전까지 풀 강의가 진행되고, 네 시간 정도 공강 타임이 있은 후에 마지막 오후 강의 하나가 있는 시간표였다. 피로한 낯짝으로 어영부영 오전 강의를 모두 마친 태형은 교수님께서 또 던져주신 과제 때문에 잠시 괴로워했다. 곧 감정을 던져버리고 다른 거라도 얼른 끝내고자 회화과 전용 작업실로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몰려오는 수면을 뿌리치기 위해 샷을 세 번이나 내린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예전에는 커피라면 질색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생명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래 학년들 작업실을 지나친 태형이 삼학년 작업실에 다다랐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짙은 고동색의 문을 확 열었다. 하여튼 누가 예대 아니랄까 봐. 머리색들이 아주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다. 주황색, 파란색...... ㅡ그러는 태형도 정작 남들이 보면 혀를 찰 만큼 만만치 않은 에쉬 베이지였다ㅡ

 

 

   “오올, 여전히 저승사자 같은 몰골이군.”

   “야, 너도 만만치 않아. 집에 좀 가라, 정호석. 머리 언제 감았냐? 젖은 홍시도 아니고. 그리고 김태형, 생명수 그거 하나야? 센스 없게 네 것만 사 오냐? 너만 입 있어? 너만 주둥이야? 선배가 선배 같지 않아?”

   “그러는 윤기 형도 오늘 더 까칠한 걸 보니 교수님한테 거하게 까였나 봐요.”

   “조용히 해. 안 그래도 속 뒤집어졌으니까.”

   “야야, 이 형 건들지 마라. 아까 성질 진짜 더러웠어. 붓 집어던지고 쌍욕하고. 나한테 뭐라 하기 전에 지저분한 수염이나 깎아요.”

   “면도기로 머리 확 밀어버리기 전에 너나 좀 씻어. 정수리에 고속도로 뚫어줘? 시원하게 뚫어줘?”

   “어우, 시끄러워. 그만 싸워요. 둘 다 빨리 졸업이나 해버려. 후배 앞에서 채신머리 없이.”

 

 

   단언컨대, 밤샘 과제는 사람을 상거지에 인격 파탄자로 만들기 충분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거지 같은 몰골은 태형이 최고였다. 그나마 지민 덕분에 새벽에 뒤척이는 일은 좀 덜해졌지만, 다른 의미로 피로했다. 건조하고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길목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자 봉지와 맥주 캔을 요리조리 피해 지나쳤다. 제 캔버스가 세워져 있는 자리로 도달한 태형이 어제 작업하다 재료가 떨어진 각종 드로잉 도구를 채워놓았다. 그리고 사용하기 편하게 하나하나 펼쳐놓는데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태형 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쟤는 왜 날이 갈수록 몰골이 피폐해져.”

   “말도 마요. 난 쟤 새내기 때만 해도 하도 헥헥 웃고 다녀서 어디 모자란 앤 줄 알고 걱정했는데, 얼마 안 가서 졸도할 것 같은 몰골로 다녀가지고 진짜 병든 줄 알았어. 꽃집도 알아봤다, 내가. 국화꽃 준비하려고.”

   “낯짝만 저러냐? 요 며칠 전에는 뭐에 씌인 사람처럼 허공에다 중얼거리고 나중에는 지랄 떨길래 머리까지 아픈 줄 알았다. 나 그때 진심으로 소름 돋았어. 오늘은 좀 그래도 멀쩡하네.”

   “사는 게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요. 저 얼굴 좀 봐. 근심이 한층 더 깊어져서 기껏 저런 얼굴로 태어나가지고 눈에 띄지도 않잖아.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요, 형. 불쌍한 아이야.”

 

 

   어디까지 수군거리나 참다못한 태형이 빼액 고함쳤다.

    

 

   “아 진짜! 다 들리거든요? 남 동정할 시간에 교수님한테 통과나 받아요, 통과나! 난 그래도 통과는 받거든?”

   “웃기시네. 너 요즘 구박 엄청 받잖아. 겨우 통과 받으면서 잘난체하기는. 지금 그리는 건 뭉크의 절규냐?”

   “저 형 진짜 성격 나빴다.”

   “형도 만만치 않거든요?”

 

 

   상대해봤자 신랄하게 독이 오른 화석들을 이길 재간이 후배에게는 턱 없이 부족했다.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한 태형은 본격적으로 드로잉에 집중했다. 오후 강의까지 끝내지 못하면 당분간 과제의 늪에서 다리가 칭칭 묶여가지고 작업실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신세였다. 여기 있는 화석들과 함께. 그렇게 되면 피로감이 가중되는 것은 물론이고 지민에게까지 성가심을 당할 운명이었다. 별안간 붓칠하느라 분주하던 태형의 손이 멈추었다.

 

 

   “......”

 

 

   그러고 보니 걔는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구태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무룩했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사지 꽁꽁 묶어서 감금해둔 것도 아닌데 설마 집에만 있겠어? 거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어디 나들이라도 가겠지. 하교 후에 태형과 저녁노을을 맞으며 거리를 거닐던 것을 상당히 좋아하던 지민이었다.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를 조금이라도 모으기 위해 돌아다니던 거였지만, 그런 목적과는 별개로 밖의 풍경을 관전하던 지민의 얼굴은 늘 순수하게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땅한 단서를 찾지 못할 때마다 눈썹이 축 늘어지기는 해도 금방 해맑게 웃었다. 그게 꼭......

 

 

   “......산책하는 강아지도 아니고 말이야. 생긴 건 고양이에 더 가까운 상이지만.”

   “어? 뭐라고?”

   “아니에요, 혼잣말.”

   “분명 강아지 어쩌구 저쩌구 했는데. 너 동물 키워?”

 

 

   지금은 아니다. 유배 보낸 게 작년이었다. 반려동물 같은 존재가 옆에 있기는 한데, 그래도 동물은 아니니까. 고개를 저으려던 태형은 갑자기 종아리 부근에서 무언가 비비적거려지는 느낌에 얼굴을 숙였다. 제일 먼저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였다. 으잉? 몸집이 조그마한 새끼 고양이가 얼굴을 번쩍 들고 미야옹, 울기 시작한다. 헉. 당황한 태형이 반사적으로 의자를 뒤로 물렸다.

 

 

   “뭐, 뭐야. 고양이? 어떻게 들어왔지? 누가 키워요?”

 

 

   안절부절못하는 태형을 보고 호석이 깔깔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태형의 다리 사이를 오가는 고양이를 가볍게 안아든다. 발버둥을 치지도 않는다. 그저 순하게 귀를 쫑긋거린다. 전체적으로 하얀 몸집에 군데군데 노랗거나 고동색의 점이 찍혀 있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가끔 놀러 오는 얘더라고. 여기 먹을 거 많으니까 냄새 맡고 들어오나 봐.”

   “......”

   “표정이 왜 그러냐. 고양이 싫어해?”

   “......그건 아닌데, 누굴 좀 닮은 것 같아서.”

   “엥. 고양이가 누굴 닮아?”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의 형상이었으면 딱 저런 모습이었을 거다. 노란색 점은 복슬거리는 머리통, 고동색 점은 짙은 홍채, 하얀 게 꼭 보송보송한 솜털을 닮았다. 추궁하는 호석에게 대충 친구라고 얼버무리던 태형은 갑자기 자리를 벌떡 일어나는 윤기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팔레트도 확 접길래 물감이 발밑까지 튀겼다. 심장이 철렁였다.

 

 

   “악! 조심 좀 해요, 형! 내 캔버스에 튀길 뻔했어!”

   “야, 미안 미안. 내가 좀 급하게 가봐야 해서.”

   “뭔 일 있어요? 나 형 그렇게 다급하게 물건 챙기는 거 처음 보는데.”

   “고양이 보고 생각났는데, 집에 강아지 있어서. 얼마 전에 주워가지고 임시 보호 맡았거든. 밥 줘야 돼.”

 

 

   그런 건 재깍재깍 챙겨 먹도록 밥그릇에 미리 부어주고 나왔어야 되지 않냐고 호석이 핀잔을 주자 자기가 직접 손으로 안 주면 안 먹는 단다. 자꾸 그러면 버릇 드니까 그냥 가만 내버려 두라니까 새끼인데 어떻게 그러냐고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윤기였다. 매사 까탈스럽고 귀찮은 거 질색인 불같은 성격의 윤기가 임시 보호를 맡았다는 것도 놀라울 일인데 애물단지처럼 여기니 기함할 일이었다.

 

 

   “형, 근데 과제는 어떻게 하고요? 오늘 통과 받아야 한다며.”

   “다시 올 거야. 안 그래도 나중에 집에 들렀다가 다시 오려고 했어. 혼자 오래 두면 낑낑거리거든.”

 

 

   태형은 문득 심장 부근이 까끌거렸다.

 

 

   “아, 그럼 얼른 가봐야겠네. 나 예전에 주인이 외출하고 돌아올 때까지 고양이 일과 찍은 유튜브 영상 봤는데 진짜 가슴 아프더라. 하염없이 기다리던데.”

   “어어, 홀리도 그래.”

   “이름이 홀리에요? 깜찍하게 지었네. 아무튼 누가 댓글을 그렇게 달았더라고요. 고양이 시점에서 봤을 때 온통 주인의 냄새가 가득한 집 안에서 긴 시간을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낄 거라고.”

 

 

   태형은 더더욱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근데 진짜 좀 외로울 것 같아. 사방이 주인 물건과 옷으로 가득하잖아. 그런 곳에서 혼자 있는 건 무슨 기분일까.”

 

 

   호석에게 얌전히 안겨있던 새끼 고양이가 느닷없이 바르작거리더니 폴짝 뛰어내렸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다시 태형에게로 다가오더니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태형이 허리를 숙이고 앉았다. 그러자 맑은 눈으로 계속 기웃거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꼭 채근하거나 꾸짖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윤기는 여전히 작업물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었고, 그 옆에서 호석은 무어라 말을 하는 중이었다.

 

 

   「왜? 오늘은 왜 따라가면 안 돼?」

 

 

   머리 아래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태형아...... 나 데려가면 안 돼? 얌전히 있을게...」

 

 

   심장이 울렁거린다. 이상했다.

 

 

   “그럼 형 이따 몇 시에 올...... 엥? 야! 야 김태형! 너 캔버스 내팽개치고 어디 가?!”

   “저도 집 좀 들렀다 올게요!”

   “뭐? 팔레트 정리도 안 하고?! 누가 훔쳐 간다!”

 

 

   더 이상한 건 고양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전력 질주하는 제 자신이었다. 뒤에서 계속 애타게 부르는 호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태형의 발을 멈추지는 못했다. 완전 망했다. 지금 밀린 과제가 몇 갠데. 진짜 한 눈 팔 시간 없는데. 그런데도 더 급한 것이 기다리고 있으니 달리는 발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형의 턱 끝으로 맺힌 땀방울이 송글송글 떨어져내렸다.

 

 

 

 

 

 

 

 

 

 

   태형이 없는 그의 공간에서 지민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서 읽는다든지, 각종 도안 같은 게 그려져있는 스케치북을 펼쳐본다든지, 하다못해 청소라든지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따분함이 덜했을 텐데 지민의 손을 전부 통과해버리니 난감한 것이었다. 아마 지민이 만질 수 있는 거라고는 태형처럼 제 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이나 동물에 한정적일 것이었다. 혼자서 가능한 것이라고는 고작 땅 위에 발을 딛고 서는 것 정도. 그래서 태형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만지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태형이었기에 허용된 행동이 그저 쳐다보거나 말을 거는 것 밖에 없어서 더 자제하기 힘들었고.

 

 

   “......”

 

 

   그마저도 옆에 태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심심하다.”

 

 

   이렇게 집 구석에만 있지 말고 주변을 좀 정찰해볼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으나 곧 접어버렸다. 아직까지는 혼자만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그 서럽던 기분을 쉽게 떨쳐버리기가 힘든 이유였다. 그래도 태형이 함께 있어주면 외롭지 않아 좋았다. 무서웠던 세상이 찬란하게 아른거렸다. 혼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작게 입꼬리를 올린 지민이 태형이 살짝 열어놓고 간 창문 근처로 자박자박 걸어간다. 따사로운 햇살이 한창 아스팔트로 쏟아지고 있을 시간대였다. 빌라 앞마당에 소소하게 심어진 화단 사이사이로 솔솔 날아다니는 두 쌍의 흰나비를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덜컹 흔들리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는 지민의 귀로 삐리릭 울리는 알람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분명 해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가 돼서야 들릴 줄 알았던 도어락 열리는 소리였다. 단번에 얼굴이 밝아진 지민이 바로 현관으로 뛰어갔다. 뭐지? 강의가 일찍 끝났나? 원래 이렇게 일찍 돌아올 리가 없는데? 혹시 뭐 두고 갔나? 다다랐을 때는 막 무릎에 손을 짚고 헉헉거리며 숨을 가다듬고 있는 태형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모습으로. 벗은 청자켓 안에 받쳐 입었던 하얀색 티도 군데군데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말을 꺼내는 것도 버거워 보여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지민에게로 고개를 확 들어 올린 태형이 다시 확 몸을 낮춰 지민과 시선을 맞추었다. 눈동자가 굉장히 커서 또렷하고 짙은 시선이 직선적으로 꽂혀온다.

 

   그게 좀......

 

 

   “......”

   “......태형아?”

 

 

   이상했다. 뭔가 미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분명 평소와 같은 태형의 얼굴인데도 평소와 달랐다. 고요히 화를 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걱정하는 것도 같은 그런 눈. 다양한 감정을 드리우고 있는 눈. 그 속에 찰랑거리는 미안한 마음도 읽히는 것은 착각일까? 갸웃거리던 지민은 천천히 태형의 뺨으로 두 손을 뻗었다.

 

 

   “...뭐 두고 갔어? 급한 거야? 땀 좀 봐. 힘들었겠다.”

 

 

   톡, 닿는 손가락에 미약하게 번지는 온기.

 

   태형은 제 손으로 지민을 만질 수 있었으면, 하고 처음으로 바랐다. 처음으로 갈구하고 갈망했다. 정말로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애초에 연탄이와 있던 시간도 극히 짧았고, 키웠을 때는 방학이었고, 항상 제가 옆에 붙어 있었기에 쓸쓸해 하지 않아 미처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이던 지민의 모습은 상상하던 것보다도 태형의 마음을 묵직하게 울렸다. 거대한 납덩이가 억지로 혈관을 파고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늘 밖을 살펴볼 때는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쓸쓸해 보여서. 그제야 상기된 것이다.

 

   ......맞다. 얘 혼자 있는 거 무섭다고 했는데.

 

 

   “태형아?”

   “......다음부터는 그러고 기다리지 마.”

   “어?”

   “안 기다려도 된다고.”

 

 

   제가 또 뭘 잘못했는지, 그래서 또 뭘 하지 말라고 하는 건지 근심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지민에게 태형이 얼른 말했다.

 

 

   “이제 나랑 같이 나가자. 매일 나가자.”

   “...어?”

   “...너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미안해. 알면서도 내가 신경을 못썼어.

 

   뒷말은 차마 토로할 용기가 없어 삼켜버렸다. 말없이 눈꺼풀을 깜박거리던 지민이 곧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화사하게 미소를 그린다. 따스함이 퍼져 나간다. 꽃봉오리가 만발하는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다 안다는 듯한 그런 미소. 태형은 잠시 고개를 옆으로 꺾어서 눈을 내렸다. 뾰족한 귀 끝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침범당해버린 마음, 하나.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미끄러진다. 보드라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을 나온 태형이 너저분한 바닥을 보고 한숨을 터뜨렸다. 어영부영 작업실로 다시 돌아가기는 했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아니면 여느 때와 다르게 조잘거리지 않는 지민이 어색해서 그런지 영 진도를 나가지 못해 결국 자취방까지 끌고 온 것이었다.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편이 뭘 번거롭게 옮길 필요도 없고 더 편했겠지만, 심심해 보이는 지민이 계속 시야에 걸리는 터라 홧김에 도구를 챙기던 태형이었다. 작업실을 나갈 때만 해도 저녁 여덟시였다. 귀가 한 후에도 무려 여섯 시간을 드로잉에 쏟아부었으니 각종 물감과 흑채 가루로 난장판이 될 만도 했다. 으휴, 짐승 우리가 따로 없네. 가뜩이나 샤워하는데도 한 시간이나 걸려서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샴푸를 얼굴에 비비지 않나, 치약 대신 폼클렌징을 짜지 않나 아주 제대로 바보짓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이게 다 박지민 때문이야.

 

   태형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먼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지민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못마땅한 와중에도 그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니 갸웃거리며 손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팡팡 친다.

 

 

   “...안 오고 뭐 해? 안 잘 거야?”

 

 

   덕분에 퍼뜩 정신 차렸다. 얼른 입을 다물고 괜히 또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저 요망한 것. 누구는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데 팔자 좋지, 아주.

 

 

   “벌써 세 시 넘었어. 네 시 다 돼간다.”

   “......자. 잔다고. 뭔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왜 또 심술이 났어. 아직 할 거 더 남아서 그래?”

   “심술은 무슨.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제 발 저린 태형이 발끝에 채이는 물건들을 대충 발로 밀어두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청소야 뭐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치우겠지. 문제는 누가 봐도 싱글 사이즈인 침대를 집주인이 올라타도 비킬 생각 없이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지민이었다. 얘를 확 그냥 목덜미를 잡아채서 던질 수도 없고. 애초에 만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얘는 나 멋대로 더듬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못 만져? 만지지도 못하는데 감촉은 또 왜 이렇게 잘 느껴지고? 몸 싸움해봤자 편파 판정하는 심판도 가여워할 만큼 승패가 뻔한 승부였다. 결정적으로 만질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 온기가 그리워서, 추워서 저한테 붙어있었다는 말을 쓸쓸하게 하던 지민을 기억하는 한 태형은 결코 내치치 못할 것이었다.

 

   어휴. 내 팔자. 착한 건지, 등신인지.

 

   이제는 입씨름도 포기한 태형이 지민을 내버려 두고 낑겨 누워서 이불을 명치 부근까지 올렸다. 그 상태로 머리 위로 팔만 쭉 뻗어서 어딘가에 있을 스위치를 더듬거렸다.

 

 

   “불 끈다.”

 

 

   형광등이 딱 점멸하는 순간 뭔가 얼굴에 스쳤다. 되게 몰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인지하는 찰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뭐지? 착각인가? 덜 마른 머리카락을 레이더처럼 빳빳하게 곤두세울 때 마침 또 촉, 닿는 것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태형이 기겁하고 뺨을 감싸며 벌떡 일어났다.

 

 

   “너!”

   “응?”

   “방금! 뭐, 뭐뭐! 뭐 했어!”

   “......뽀뽀?”

   “누가 그걸 몰라? 왜 했냐고!!”

   “고마워서 그러지.”

 

 

   펄쩍 뛰던 태형이 더 펄쩍 날뛰었다. 기세로만 보면 우주 성층권까지 가뿐하게 뚫을 정도였다.

 

 

   “고마우면 그냥 고맙다고 말할 것이지 주둥이는 왜 갖다 비비는데!”

   “아니...... 나는 그냥,”

   “아 됐어! 말하지 마. 무슨 의도였든 말하지 마. 그냥 뭘 하지 마! 한 번만 더 이런 짓 해? 진짜 기억 되찾는 거고 뭐고 확 내쫓아버린다!”

   “......”

 

 

   나는 그냥......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애정표현의 하나로 가볍게 해본 거라고 말하려던 게 불발된 지민은 상상 이상으로 진저리치는 태형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 정체 모를 소설책에서 봤던 것처럼 혀 이리저리 난잡하게 섞어가며 키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뽀뽀를 문어 발판으로 있는 힘껏 빨아들이듯 찌이이인하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코에 갖다 대기만 했을 뿐인데 조금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씩씩거리던 태형이 또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씩이나 대못을 박아버려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지민이 태형의 반대쪽으로 홱 등을 돌리자 태형도 불을 확 껐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정적 속,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단단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게 꼭 처음으로 칼로 물 베기를 하고 토라진 신혼부부 같았는데 두 사람이 알리야 만무했다.

 

 

   “......”

 

 

   그냥 자려고 했는데, 지민은 되뇔수록 화가 나는 것이었다. 물론 싫어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런 행동을 제 마음대로 한 것은 분명 제 잘못이 맞았지만, 그래도 무슨 벌레 쫓듯 소스라치던 태형의 태도가 자꾸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유였다. 길길이 날뛰지만 않았지 표정만 보면 흡사 사회 봉기라도 들고 일어서는 농노라고 봐도 무방했다. 제가 뭐 천인공노한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저도 모르게 본심이 삐죽삐죽 흘러나와 쫑알거리기 시작한 지민이었다.

 

 

   “우리가 뭐 사귀는 것도 아니고.”

 

 

   역시 지민처럼 아직 자지 않았던 태형의 귀가 쫑긋거렸다.

 

 

   “막말로 홀딱 발가벗고 누운 남녀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정색해?”

 

 

   한 번 조잘거리기 시작한 입은 원래 꺼내지 않으려던 속내까지 다 끌어올렸다.

 

 

   “맨날 저리 가라고 하고, 옆에 붙지 말라고 하고.”

   “......”

   “오늘은 좀 착하게 말해줘서 그게 고마워서 그런 거였는데 내 마음도 모르고. 허구한 날 못된 말만 하는 나쁜 김태형.”

 

 

   태형이 이불을 확 걷어냈다. 지민의 뒷머리 바로 옆으로 손을 탁 짚는 것이었다. 움찔거린 지민이 속으로 조동아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 사이 태형의 그림자가 지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방금 전은 화가 나기는 했어도 마냥 가벼운 기색이었다면 지금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묵직한 거라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번 건 진짜 무슨 말을 들어도 명백히 제 실수였다. 어디까지나 저는 태형이 허락해서 운 좋게 한 지붕 아래에서 기거하고 있을 뿐인데. 주제도 모르고. 태형의 팔이 뻗어지는 동시에 지민이 눈을 꼭 감았다.

 

 

   “나 봐, 박지민.”

 

 

   돌덩이처럼 꼼짝하지 않는 지민에 태형의 한숨이 흩날린다. 여느 때보다도 무게가 실린 한숨이었다. 어깨를 돌리려고 팔을 뻗었지만 무참히 통과되는 것에 또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만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지민이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태형이 입을 열었다. 달빛에 반사되는 동공이 밤하늘처럼 깊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말.

 

 

   “나 남자 좋아해.”

 

 

   바로 알아듣지 못한 지민이 속눈썹을 한 번 깜박거렸다. 그렇게 멍하니 태형을 보았다.

 

 

   “남자 좋아한다고, 나는.”

   “......어?”

   “여자랑 하는 키스, 포옹, 섹스, 데이트 뭐 그런 거 나는 여자랑 안 하고 남자랑 한다고.”

 

 

   몇 분 뒤에 찾아온 침묵은 몇 분 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러니까 너무 엉겨 붙지 말라고. 너한테는 그저 장난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다 장난 아니야.”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침묵은 되려 정적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한 태형이 먼저 지민의 눈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고 제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마른 세수를 한다. 이렇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밝힐 마음은 없었는데, 아니 가능한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순간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본심이 새어나갔다. 바보같이.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니면서. 홧김에 말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단숨에 갈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민의 눈이 어떤 색을 띠고 있었는지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아 모르겠다. ...아니다. 구태여 알 필요도 없지. 반응이야 뻔한데, 뭐. 어쩔 줄 몰라 하거나, 경멸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훑어보거나. 기대할 것도 없는데 실망하게 된다. 가슴 한구석이 허허벌판이 된다. 내가 그렇지, 뭐.

 

 

   “...헛소리야. 잊어버려.”

 

 

   태형이 도로 누워서 베개에 머리를 벴을 때, 등 너머로 사락 움직이는 소리가 끼쳤다. 가까워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나지막이 소곤거려지는 목소리.

 

 

   “태형아. 남녀 사이라고 한 건 별뜻 없었어.”

   “......”

   “그 편이 아무래도 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한 거야.”

 

 

   고요한 허공으로 잔잔한 목소리가 흩어진다. 그 흩어진 화살이 다시 하나로 모여 태형의 심장으로 꽂혀들었다.

 

 

   “태형아.”

   “......”

   “그런 얼굴 하게 해서 미안해.”

 

 

   아프다기보다는 심장이 콕콕 쑤셨다. 그 쑤시는 감각이 욱신거리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너한테 사랑받는 남자는 되게 행복할 것 같아. 진심이야.”

 

 

   그렇다기보다는......

 

 

   “너 되게 다정해서 난 네가 좋거든.”

 

 

   심장이 아주 느리게, 하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크고 선명하게 쿵, 쿵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위로는 처음이었다. 이런 말도 정말 처음 들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뜸 사과를 하지도, 욕설을 퍼붓지도 않는 얼굴을 지금 당장 돌아보고 싶었다.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너무 보고 싶었다.

 

   낯이 확 뜨거워졌다.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가 놓은 태형이 목구멍에서 팔팔 끓어오르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체념 같은 한숨도 꿀꺽 삼켰다. 거 봐. 게임 오버라니까. 망했어. 난 얘 절대 못 거부해.

 

 

   “...바보야.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지.”

   “......”

   “내가 방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동요하는 목소리 위로 상냥한 웃음소리가 나풀나풀 내려앉는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 그냥 한 번은 알려주고 싶었어.”

   “......”

   “잘 자, 태형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숨소리가 오르내렸다. 그 소리에 귀를 세우다 보면 괜스레 주먹을 말아 쥐게 되는 거다. 뭐든 꽉 틀어쥐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야 해서. 아직은 그 감정이란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렇게 다짐할수록, 그 다짐을 곱씹을수록 물감처럼 삽시간에 번지는 마음을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는 거라 태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대로 숨을 참아 보았다. 조금이라도 덜 동요하기 위해. 매번 생소하지만 익숙한 그 감정이란 것에. 매번 벅차오르지만 그만큼 버거워서 외면하고 싶은 그 마음이란 것에.

 

   그렇게 침범당해버린 마음 둘.

 

 

 

 

 

 

 

 

 

 

   까무룩 잠이 들었던 지민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발소리에 강제로 기상해버렸다. 잠 기운이 무겁게 실린 눈을 힘겹게 치켜떴다. 푸석거리는 눈꺼풀을 벅벅 문지르며 소음의 근원지를 주시했더니, 투명 박스 테이프를 찌익 뜯어서 어떤 종이를 냉장고에 붙이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무슨 비밀문서라도 다루는 사람처럼 표정이 엄숙하고 진지하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린 지민이 자박자박 걸어서 태형의 바로 뒤로 섰다.

 

 

   “아침부터 뭐 하고 있어?”

   “아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태형이 손에 들고 있던 테이프를 쿵 떨어뜨렸다. 지민을 힐끔 돌아보더니 테이프를 도로 주워들며 투덜거린다.

 

 

   “기척 좀 내고 다녀라, 기척 좀. 심장마비 걸리겠네.”

   “미안. 난 발소리가 안 나서.”

   “......또 나만 나쁜 놈 만들지.”

   “괜찮아. 안 미안해해도 돼. 근데 이 종이는 뭐야?”

 

 

   호기심 어린 눈을 한 번, 냉장고에 반듯하게 붙여진 종이를 한 번 번갈아 본 태형이 팔짱을 끼고 지민과 똑바로 마주 섰다.

 

 

   “앞으로 너가 지켜야 할 것들.”

   “어?”

   “안 그래도 나 오늘 일찍 나가야 해서 슬슬 깨우려고 했는데, 잘 됐네. 읽어 봐.”

   “...이게 뭔데?”

   “읽어보면 알아.”

 

 

   A4 용지만 한 크기의 종이는 새벽 내내 정신은 피로하기 짝이 없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던 태형이 몇 번을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겨우 완성한 것이었다.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태형이었고, 그런 태형을 의아하게 여긴 지민이 냉장고 가까이로 몸을 붙였다.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민의 눈이 커졌다.

 

 

   ※ 앞으로 나랑 다닐 때 지켜주길 바라는 점들 ※

 

   1. 내가 씻을 때 화장실 들어오지 않기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함)

   2. 외출 시 나랑 단둘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말 걸지 않기 (큰 오해를 삼)

   1)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어깨 톡톡 쳐주기

   2) 혼자 어디 가야 하거나 들를 곳이 있으면 귓속말로 말해주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겠음. 다녀오라는 뜻)

   3. 때때로 예민해지거나 화를 낼 수 있는데 너무 상처받지 말기 (1번과 같은 이유이거나 잠을 못 자서, 또는 과제가 밀려서 스트레스를 무진장 받았기 때문. 그럴 경우 어제처럼 속 벅벅 긁으면 폭탄 발언을 할 수 있음)

   4. 내가 오해할만한 행동 금지 (꼭 지켜주기 바람)

   5.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평일 저녁 두 시간씩 기억 찾는 거 도와주겠음.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전날 미리 생각하고 알려주기 (교통편이라든지, 차비라든지 나도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이 필요함. 당일 말하면 가까운 곳이 아닐 경우 못 갈 확률 아주 높음)

   1) 거리가 너무 먼 곳은 주말에 이동하기

   2) 평일에 한 번, 주말에 한 번은 꼭 집에서 쉬기 (창작 연습, 컨디션 회복 등의 기타 이유 때문. 서운해하지 말기)

   추신 : 5번에 관해서 뭔가 요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주기 (밑의 번호로 달아두겠음)

 

   위의 사항들을 꼭 숙지하기 바람. 숙지하지 않거나 어길 시 동거 불가. -집주인 김태형-

 

 

   마지막 문장 옆에 ‘집주인 김태형’이라고 반듯하게 적힌 글씨 위로 새빨간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손가락이 워낙 곧고 길어서 그런지 지문 크기도 굉장히 길쭉했다. 어느새 잠이 확 달아난 지민이 푸흡 웃었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준비하나 싶었더니 이런 걸 만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라서. 중요한 부분은 밑줄로 강조하거나 형광펜으로 칠해두기까지 했다. 지민의 옆에서 목청을 큼, 가다듬은 태형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 읽었지?”

   “응. 열심히 적었네.”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적었어. 나도 내 생활이 있고, 사람들 시선이란 게 있으니까 적어도 여기 적힌 것들은 꼭 지켜줘야 해. 알았지? 안 지키면 진짜 상종도 안 하고 내쫓는다?”

 

 

   제 딴에는 짐짓 분위기 잡고 말한 거였는데 지민은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마냥 귀여워하는 느낌이 역력히 묻어 나왔다. 웃지만 말고 대답 좀 하라고 재촉하니까 알겠다고는 하는데 영 찝찝한 태형이었다. 새벽부터 이거 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성의 좀 보이라고 요구하자 이번에는 열심히, 막 떨어질 것처럼 열렬하게 고개를 흔드는 지민이었다. 그러면서도 원래 애교가 습관처럼 몸에 밴 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쫓지 말라고, 내쫓아도 상종은 해달라고 칭얼거리기도 했다. 그게 귀여워서 순간 웃음이 삐쭉 튀어나올뻔했지만, 태형은 가까스로 입가에 힘을 주고 웃음기를 가라앉혔다. 아, 진짜.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또 정신 못 차리고 질질 흘리고 난리냐, 김태형. 쟤는 왜 저런 얼굴로 애교까지 많은 건데. 괜히 또 아무 잘못 없는 지민에게 심술이 난 태형이 또 들키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직행했다. 어제 저녁에 낑낑 들고 온 물건들을 도로 작업실에 옮겨 놓으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덜 닫힌 화장실 문 틈 사이로 연신 종이를 들여다보며 눈꼬리를 휘고 있는 지민이 언뜻언뜻 비친다. 흘끔거리던 태형이 마음 대신 문을 꽉 닫았다.

 

 

 

 

 

 

 

 

 

 

   순조로운 하루였다. 긴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운 걸로도 모자라서 해가 완전히 뜨기 전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했던 것치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했으며, 불통을 받을 줄 알았던 작업물도 한 번에 통과되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던 마지막 오전 강의 교수님이 남은 한 시간을 공강으로 만들어주기까지. 이제 하나만 마무리 지으면 집에 갈 수 있었다. 점심시간 바로 직전이라 온통 캠퍼스 거리가 한산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 봉오리를 싱그럽게 개화한 벚꽃나무가 꽃잎을 흩날리고 있는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림처럼 수 놓아진 벚꽃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산란하는 빛처럼 태형의 얼굴 위를 아른거린다. 바로 옆에서 태형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 지민의 정수리로도 따스한 기운이 가득 내리쬐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솔솔 불어올 때마다 두 사람 사이로 연분홍색의 꽃잎비가 나부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자리 맡으러.”

   “자리?”

   “응. 곧 있으면 축제가 시작되거든.”

 

 

   5월은 벌과 나비가 솔솔 날아다니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만발하는 봄의 절정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꽃이란 건 비단 생화뿐만이 아니라 온갖 경사, 이를테면 대학생의 경우 축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 많고 많은 대학 중에서도 특히 예대의 축제는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델과도 같았다.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창조된 화려함과 정교함의 수준은 간혹 전문가들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고, 그렇게 톡톡 튄 학생들이 운 좋게 스카웃 제의를 받는 기회의 장이 되기도 했다. 예대 어디를 가든 청각을 감미롭게 자극하는 선율이 흐르고, 시각을 사로잡는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기에 무성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걸로도 유명했다. 때문에 아직 3월의 끝자락, 4월로는 진입하지도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물론 태형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마음 편히 관람할 생각이었다. 3학년이라 이것저것 준비할 공모전도, 과제도 워낙 많아서 뭘 따로 창작하기에는 시간이 한참 부족한 탓이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맡으러 가는 이유는 매년 회화과에서 진행하는 초상화 이벤트에 제가 강제로 지목당한 이유였다. 그것도 교수님께.

 

   태형이 속한 회화과는 과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매년 취업 준비로 정신없는 졸업학년을 제외하고 학년마다 몇 명씩 선별해서 이벤트를 개최했다. 반응도 취지도 참 좋은데, 억수로 힘들기만 하고 돈벌이가 잘 되지 않으니 다들 마다하는 분위기라는 게 문제였다. 작년에는 정말 지원자들이 없었고, 그래서 학회장이 대충 한가한 애들 위주로 아무나 지목한 결과 역대급으로 실력이 저조해 정말 역대급으로 반응이 최악이었다. 쟤네 과는 저런 애들만 있냐는 소리도 나왔다. 보통은 그 과의 간판들을 내놓으니까. 초파리만 윙윙 날리다 이벤트를 접었고, 당연히 그 망신살이 교수님들 귀에도 뻗친 게 가장 큰 수모였다. 그래서 올해는 그 망신을 어떻게든 만회해보고자 교수님들이 직접 본인 지도 학생들 중 소묘 실력이 가장 출중한 희생양들을 뽑았고, 그게 태형이었다. 물론 제자에게 거부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축제? 너도 뭐 준비하게?”

   “아니, 그냥 시켜서 하는 거야. 딱히 열심히 할 생각은 없어.”

   “그런 것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 같은데.”

   “늦게 가면 그늘진 자리 다 놓치고 햇볕 쨍쨍한 야외에서 죽치고 있어야 하거든. 요즘 같은 날씨에 땡볕 아래 있어 봐. 고문이 따로 없지.”

 

 

   내리막길 중간 즈음에 다다라서 평지를 좀 걷다 보니 드넓은 풀밭이 나왔다. 체육대회 때 운동장으로 사용되는 풀밭이었다. 멀리서 봐도 풀밭 양옆으로 각각 천막을 치고 무슨 과, 누구 영역임을 표시한 학생들의 머릿수가 꽤 많았다. 벌써부터 이젤을 세워두고 디스플레이를 하거나 음악과의 경우 버스킹을 연습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보였다. 구령대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회화과 천막으로 들어간 태형이 인사하는 후배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 고심했다. 어느 각도로든 자외선이 닿지 않는 자리여야 했다. 해가 기우는 정도도 세세하게 따져봐야 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해가 저물면 그대로 화통구이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자리는 이미 다 주인이 정해진 상태라서 썩 못마땅하게 둘러보는 태형의 어깨를 지민이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 적당히 구석지고 적당히 사람들 눈에 띄는 자리가 하나 보였다. 가운데 줄에서, 끝에서 네 번째. 누가 채갈까 바로 걸어간 태형이 제 이름이 적힌 미니 캔버스 하나를 의자 위로 탁 올려두었다. 끝! 이제 집에 가서 발 뻗고 드러눕기만 하면 된다. 급한 과제 두 개가 운 좋게 기한이 미뤄져서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 부족한 수면이 몰려와서 하품이 나왔다.

 

   제 뒤에 있는 지민에게 이제 가자, 말하려던 태형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지민이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어서. 뭘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고 있나 했더니 부러운 눈을 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버스킹 중인 두 학생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한 명은 피아노, 한 명은 보컬. 봄에 걸맞은 선율과 달달한 선곡이었다. 태형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각자의 일로 분주해서 아무도 저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였다. 지민의 옆으로 바짝 붙어 선 태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좀 놀다 와.”

   “...어? 그래도 돼?”

   “응. 나 연습용 그림 하나 그리고 있을게.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갈 때 되면 입모양으로 부를게.”

   “응!”

 

 

   기다렸다는 듯 바로 뛰쳐나가는 몸에 피식 웃어버린 태형도 천막을 지키고 있던 학회에게 이젤 하나를 빌렸다. 이젤을 세우고 그 위로 캔버스를 올려둔다. 앉을 때 끼익 소음을 내는 의자를 적당히 뒤로 물렸다. 어느새 저 멀리 간 지민은 그래도 제 말을 잊지는 않았는지 더 멀어지지 않고 그 주변만 팔랑팔랑 돌아다녔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해맑게 웃는 얼굴이 꼭 바깥세상을 처음 접한 고양이 같았다. 태형이 화통에서 연필을 하나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모델은 지민이 되었다. 선 하나를 그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귀를 녹이는 피아노 소리가 매미 소리처럼 녹아든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태형은 무언가를 그릴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뭐든 화려하게 튀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에 본 전공은 유화였지만, 흑백으로 표현하는 영역도 못지않게 사랑했다. 유화를 제 전공으로 마스터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물감을 두텁게 칠해 최대한의 질감과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임파스토 기법’에 큰 영향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림임에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과시했던 그의 붓놀림에 감탄을 남발했고, 추구하다 보니 어느새 고흐의 기법을 토대로 저만의 색채감을 연구하고 있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풍경을 많이 그렸던 고흐와는 달리 태형은 그림에 인물을 담아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학에서 순수 미술을 배우기 시작하면 일단 일 년은 죽어라 인체 해부에 대해 그리게 되는데, 이게 좀 적성에 맞았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든 춤을 추듯 움직이는 사람이든 저만의 시각으로 사람을 그리는 것을 가장 사랑한다. 그래서 소묘도 좋아했다. 연필 끝이 부지런히 지민을 담아냈다.

 

 

   “......”

 

 

   가만히 서 있는 그림을 하나 끝낸 태형이 이번에는 움직이는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고막으로 익숙한 노래가 흘러 들어왔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요즘 한창 떠오르는 솔로 가수의 신곡이었다. 천사가 노래하는 목소리로 일컬어질 만큼 황홀한 음색이 특징적인 곡이었다. 태형도 매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며 즐겨듣는 곡이었고. 음색도 음색이지만, 무대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영상으로 지민과 함께 숱하게 보던 밤을 떠올리며 발끝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태형이었고, 동시에 여태 얌전히 서 있거나 걷기만 하던 지민도 갑자기 넓은 중앙 홀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태형의 움직임이 딱 멎었을 때, 한 사람으로 일렁거리는 동공도 함께 멎어버렸다.

 

   빛무리로 가득한 상아색 홀 위에서 유연한 몸이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는다. 살랑살랑 나부끼는 꽃잎비 아래 턴을 하는 발목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허벅지의 근육이, 맑은 하늘로 곧게 뻗어지는 손끝이, 호흡 한 줌 흐트러지지 않고 고요히 오르내리는 숨결이, 차분하게 눈을 감다 이내 태형을 보고 청아하게 번지는 미소가 그렇게 태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빛무리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이는 지민이 그렇게 태형의 마음을 기어코 흔들고 말았다.

 

   손끝에 쥐고 있던 연필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꼭 심장 소리 같았다.

 

 

   “......”

 

 

   지난 새벽보다 더 극명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왜 모나리자를 그렸는지 진짜 이유를 아는 학생 있나?」

 

 

   마지막 강의 때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춘곤증이 만연한 봄이라서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많아 들려준 것이었다.

 

 

   「맞추는 학생에게 가산점 5점을 주마.」

 

 

   수많은 대답이 나왔다. 모나리자가 요청해서. 눈썹이 없는 여자가 신기해 그려보고 싶어서. 뭘 그릴지 고민할 때 마침 모나리자가 앞을 지나가서. 전부 오답이었다. 교수님께서 혀를 찼다. 오답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모나리자를 사랑해서요. 교수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눈썹이 없는데도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구나.」

 

 

   “......”

 

 

   「새삼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다빈치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킨 작품이었지. 어때, 낭만적이지?」

 

 

   떨어진 연필을 감히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는 태형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언젠가 제 누나가 억지로 읽어줬던 페이지의 구절이 오버랩되며 재생되었다. 마음에 덜컥 들어오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주변만 라이트 세례가 쏟아지는 것처럼 밝아진다고. 온통 암흑으로 뒤덮인 세상일지라도 그 사람만 유일하게 빛나고, 눈을 돌릴 수가 없고, 들릴 리가 없는 선율이 흐르며, 호흡하는 순간조차 멎은 것처럼 느려진다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 심장이 서럽게 운다고. 그냥 두서 없이 너만, 너만 보이는...... 찰나에 지민이 태형에게로 뛰어왔다. 태형의 마음 안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렇게 침범당해버린 마음 셋.

 

 

   “태형아!”

 

 

   그렇게 웃지 마.

 

 

   “태형아?”

 

 

   내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태형아. 너 얼굴 빨개.”

 

 

   제발. 제발, 박지민......

 

 

   “어디 아파? 집에 갈까?”

 

 

   끝내 부정하지 못한 태형이 얼굴을 두 손바닥에 묻었다. 깊이 묻었는데도 채 가려지지 못한 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귀를 화끈하게 달구었다. 그 열기가 불쾌하다기보다는 설렘이었다.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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