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다새
조용한 밤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 달도 구름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어둠이 찾아오면 수많은 바이크들이 동시에 모래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지민은 그 중 유달리 반짝이는 핑크빛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희미한 별을 눈에 담으며 시동을 걸자 소리의 여파가 요란스럽게도 퍼져간다.
지민은 반란군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정부군의 학살에 절망의 능구렁이로 빠져들게 된 표본이자 그를 발판 삼아 반역자가 된 아이.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정의해 버리기에는 그가 겪은 삶의 굴곡이 다소 가팔랐던 게 흠이었다. 그를 무시하던 정부 소속 고아원은 의문의 폭발사고로 전부 불타버렸고 지민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원장은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교실에서 즉사했다. 검은 재가 되어버린 건물 앞에서 열일곱의 지민은 잔뜩 힘 준 눈으로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일종의 포부였다. 반란을 꿰차며 사막에서 진을 칠 때도, 모래 언덕을 넘어 초소 보초병을 저격할 때도 지민의 눈빛은 같았다. 지민이 노려보던 것들은 어느새 처참하게 부서져 무섭게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흩날렸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사라지고 싶을 때 사라지는, 지민은 이례 없는 반란군 최고 저격수가 되었다.
“우리 자기, 머리까지 핫 핑크네 이제?”
지민이 별안간 고개를 들자 입을 네모지게 벌린 태형이 지민을 반겼다. 태형이 센트럴 시티로 들어간 지 꼬박 2년 만이다.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있어야지. 태형이 푸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눌러 앉히고 뺨을 톡톡 찔렀다.
“한 번만.”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뗀 지민이 먼지를 뒤집은 바이크를 마저 닦으며 짓궂게 대꾸했다.
“그냥 하루 종일 하자고 하지? 어?”
“진짜? 그럴까?”
동그랗게 눈을 키운 태형이 순수한 표정과는 퍽 어울리지 않게 지민의 자켓을 젖혔다. 덕분에 자줏빛 큐빅이 어지럽게 박힌 라이더 자켓이 매끈한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허리를 당기는 팔뚝에 지민은 꼼짝없이 태형의 품에 갇힌 꼴이 되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잔뜩 기대한 대형견 같은 제 애인을 바라보던 지민이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며 자켓을 고쳐 입었다.
“내일 해, 밤에. 아침부터 총 쏘러 나가야 돼.”
이쯤 되면 단호박 그 자체인가 의심이 가기도 한다. 태형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지민에게서 멀어졌다.
어김없이 사막에도 밤이 찾아왔다. 소리 없는 바람은 지민과 태형이 나란히 누운 천막 또한 스치고 지나며 어둠을 알렸다. 조용히 허리에 얹히는 태형의 손이 오랜만이다. 민간 마을과 제일 가까운 구역의 진영을 해치우기로 한 오전의 임무에 지민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닫았다. 태형이 돌아오기 전부터 이 구역 정부군을 몰살하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반란군이었다. 사금이 잘 나는 강줄기를 끼고 있는 마을로부터의 약탈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횡포에 안타까워하는 건 지민뿐이 아니었다. 분개한 주민들의 반항 덕에 무기고가 털려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정부군의 분위기마저 거사에 최적이 된 참이다.
지민은 늘 그렇듯 긴 저격 총을 등에 지고 한창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작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늦은 입장에 집중되는 시선도 마다하고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번들거리는 한쪽 벽을 향한 허술한 빔 프로젝터는 목표물의 위성지도를 비추고 있었고 보초병이 서 있을 곳엔 붉은 다트가 하나씩 꽂혔다. 짧게 공지하며 나갈 채비를 하는 대장에 지민도 덩달아 대답하며 일어섰다.
“진입은 둘. 셋은 후방에서 대기하고 저격수들은 근거리로 이동해. 목표물 조준 잘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장님.”
지민이 총알을 한 개 집어 탄창에 집어넣었다. 정부군의 진영은 가지가 촘촘한 숲이 우거진 산등성이라 위장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너넨 다 뒤졌어, 더러운 놈들아.”
“말투가 너무 부드러운데?”
“응? 대갈빡에 빵구 내버린다, 쓸개즙 같은 새끼들.”
“풉, 진짜 웃기지 말라고!”
같은 위치에서 잠복하던 정국이 어색하게 총을 장전하며 지민을 깔깔대게 했다. 정국은 사막에서 반란을 준비하던 지민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줬던 사람이다. 이후 반란군의 자리도 정국이 저의 인맥으로 마련해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칼잡이로 자라왔던 정국이라 저격수로 실전에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민 덕에 기본기는 탄탄할 것이다. 정국이 지민과 같은 위치에 배정된 것도 지민이 가르친 정국의 믿음직스러운 실력 때문이었다. 귀에 꽂은 무전기에선 약간의 잡음과 함께 지시를 내리는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본부, 본부. 코드 JM, 들립니까?”
“들립니다.”
짧게 무전을 마친 지민이 총을 장전하고 스코프의 영점을 바로하기 위해 눈가를 바짝 붙였다. 정국은 그런 지민을 따라 조금 어설픈 손길로 총구를 만지작댔다. 렌즈로 바라본 초소의 입구에는 슬슬 정부군의 교대조가 나와 목숨이 날아갈 줄도 모르고 여유롭게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전으로 상황실에서 카운트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60초.”
“이상 무.”
늘 같은 일이지만 방아쇠를 당기기 전엔 항상 그렇듯 긴장감이 지민의 온 몸을 휘어잡았다. 사방에 정적이 맴돌았다. 발사하라는 지령과 함께 제일 먼저 적을 저격해야 하는 책임감 있는 임무에 지민은 오늘따라 유난히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30초. 조준.”
“…….”
꼴깍 침을 삼키는 지민을 따라 정국의 목울대도 출렁댔다.
“3, 2, 1, 발사!”
탕!
동시에 보초병을 완벽히 저격한 두 총구에 초소 앞으로 반란군 두 명이 은밀히 진입했다. 저격 후 곧바로 등을 돌린 정국과 달리 지민은 여전히 스코프를 통해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장하던 저격수들은 저격 후 적의 레이더망을 피해 몸을 숨기거나 잠복하던 장소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지민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추가 저격의 필요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총성이 울린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무전기를 통해 태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둘의 귓전을 때렸다.
“지민아!! 3시 방….”
태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끄럽게 발사된 두 번째 총성은 기어코 지민의 오른쪽 어깨를 스쳤다. 지민이 무전을 알아듣고 재빨리 몸을 숙이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미간에 명중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오려 몸을 들썩였지만 지민은 입술을 짓이기며 적진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 멀리 초소의 옥상에서는 군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정부군 하나가 지민과 정국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길긴 하지만 저격용이 아닌 상대의 총에 둘은 잔뜩 했던 긴장을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심하긴 이르다. 시선은 고정한 채로 천천히 정국이 지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는 나무에 기대 어깨를 부여잡은 지민은 쓰라림을 참기 위해 입술이 새하얘질 정도로 이를 내어 물었다.
한편, 무전으로만 지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태형은 발을 동동 굴렀다. 상황실 모두 한시름 놓고 있던 상황에서 해킹한 옥상 CCTV로 총을 장전하는 사람을 목격한 후 무작정 마이크를 뺏어들고 지민에게 소리치자마자, 총성이 울렸었다. 정국의 탄식 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말도 뒤따르지 않았다.
“아…, 우리 지민이 어떡해.”
일이 간단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항상 달던 바디캠도 지니지 않아 초조함은 더 커져만 갔다. 다행히 심장박동을 감지하는 센서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금쪽같은 제 애인이 작은 생채기라도 달고 복귀할까 태형은 들려올 지민의 대답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알아챈 대장이 무전으로 질문했다.
“코드 JM, 상태 보고.”
순간의 정적 이후 몰아쉬는 숨과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 어깨에 총상, 상태 양호 이상.”
태형은 머리를 헝클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크고 작은 흉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건 반란군의 숙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태형은 옥상으로 올라온 놈을 더 일찍 알려주지 못해 미안한 감정이 더 컸다.
정국은 자신의 옷 한 자락을 부욱 찢어 지민의 어깨를 단단히 지혈했다. 괜찮다며 얼른 총 들고 복귀하자는 지민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던 정국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지민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만 봐도 괜찮지가 않은데 말이다. 피가 멎은 어깨에 자신이 입고 있던 자켓을 걸쳐주고 널브러진 지민의 총까지 챙겨 정국은 일어섰다. 정국은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우리 제발 몸 좀 사립시다. 어? 그 뭐야, 애인도 있으면서.”
“……”
지민이 고개를 돌려 정국을 쳐다보았다. 정면만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분명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일 뿐인데 지민은 기분이 이상했다.
본부에 도착해 회의를 했던 컨테이너로 발을 들이자 시끄러웠던 분위기가 지민이 들어옴과 동시에 주춤했다. 뒤이어 구석에 앉아있던 태형이 벌떡 일어나 지민의 손목을 끌고 헐레벌떡 나갔다. 덩그러니 입구에 남겨진 정국은 조용히 하라는 모두의 암묵적인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지민아, 괜찮지?”
“괜찮아. 그냥 스쳤어.”
태형은 지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들었다 해도 그저 갑작스러웠던 부상에 놀랐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민은 총알이 제 어깨를 스친 순간 그동안 겪었던 부상과는 다른 생경한 충격을 받았다. 흘렀던 피의 양이며 뼈에 철골 조각이 박혔을 때보다 심하게 느낀 고통이며, 일반적인 총알에 의한 부상이 아닐 거라고. 지민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피는, 멎었고?”
“응, 나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가자. 보고할 것도 남았고.”
지민이 태형의 허리를 감으며 눈을 접고 해사하게 웃었다. 안심시키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내가 안 괜찮아. 업혀.”
태형은 허리를 수그려 지민의 앞에 자세를 잡았다. 엷은 미소가 잠시 입가에 번졌다 사라졌다. 지민은 속마음과 일부러 다르게 고민하는 척을 했다가 못 이기겠다는 듯이 태형의 널찍한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진한 코튼 향이 은은했다. 아직 간단한 응급처지만 되어있는 어깨는 잊은 채 양 팔을 태형의 목에 둘렀다. 붉은 햇빛으로 물든 모래사막의 한복판부터 어둠이 짙게 깔린 둘의 천막에서까지 그들은 태양만큼 뜨겁게, 은하수처럼 깊게 사랑했다.
황량한 땅에도 날은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 새파랗게 갠 하늘이 태형의 머리색과도 닮아 있었다. 지민은 태형의 품속에서 눈을 떴다. 예상대로 오른팔은 뻐근했고 허리에서도 저릿한 신경이 생경했다. 부스럭거리는 지민에 태형도 부스스하게 잠에서 깼다. 하지만 푸른 하늘처럼 모든 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지민은 오른팔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사지라도 하면 괜찮아 질 줄 알았던 게 반나절이 지나도록 쥐가 난 것 같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총이라도 쏴 보려 까딱하면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무리가 되었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근육 한 부분이 파열되었을 것이라고, 총탄에 신경도 여러 갈래가 끊겨 팔꿈치에서 어깨까지의 팔뚝은 아마 재활이 불가할 것이라고. 반란군 최고 저격수로 정부군한테까지 ‘핑크머리 걔’로 자자한 지민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단 한 발의 탄알로 인해 지민은 명중률 99.9%의 오른팔을 잃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는가. 옆에 있던 태형이 다행히도 지민을 감정의 파도 속에서 구출해주었다.
“나랑 같이 시티 들어가면 되겠네.”
“…어?”
지민의 팔을 살펴보던 대장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너 총 쏘지 말고 일단 태형이한테 해킹이라도 배워.”
“네? 총 쏘지 말라고요?”
지민은 황당함과 당황감이 마구잡이로 뒤엉킨 이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매번 시티로 들어가면 1년은 있다가 나오는 태형을 기다리는 게 지겹기도 했고, 항상 붙어있을 수 있게 된 것이 내심 기쁘기도 했다. 다음 태형의 잠입은 4일 뒤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장과 상의한 끝에 고안한 방법은 태형이 먼저 들어가 기회를 잡고 그 거사에 맞춰 지민과 다른 대원들이 같이 위장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 한계치를 알고 있던 지민은 별다른 반박 없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지민의 훈련 일정이 빡빡해져 태형이 본부에 머물 동안 지민은 그와 별다른 애정을 나누지 못했다. 그게 한이 되었던 것인지 태형이 잠입하기 전날 밤에는 아무도 함부로 그들의 천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예쁘다. 아이 예뻐.”
“내 눈에는 바다 냄새 나는 너 머리색이 더 예쁜데.”
“난 너 허리 밑부터 무릎 위까지만 예뻐. 그 위로는 다쳐서 안 예뻐.”
“아아~ 예뻐해주세요오.”
“하… 지민아, 미안하다.”
다음날 아침에 정국이 둘을 깨우러 들어갔을 땐 쌀쌀한 날씨임에도 후끈한 열기와 코를 찌르는 밤꽃 냄새, 쓰레기통에 처박힌 콘돔 아홉 상자가 얼이 빠진 그를 반겨주었다.
“딱 보름만 참아. 금방 갈게.”
“이리로 와봐. 안아주게.”
“뽀뽀는? 응?”
“뽀뽀해? 키스는 싫은가 보구나?”
떠나는 태형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배웅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진한 애정행각을 멈추지 않는 둘이게 정국이 따끔한 말을 했다.
“어제도 물고 빨고 별 거 다 했으면서.”
그러자 태형은 보란 듯이 지민의 어깨선에 입 맞추며 말한다.
“그건 나만 봐야 되는데, 우리가 사랑한다는 건 보여주고 싶어서.”
태형의 성격을 아는 모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맛에 연애한다고 했었나. 지민은 마지막으로 태형 특유의 향을 폐부 깊은 곳까지 들이키며 꼼꼼히 태형을 제 눈에 담았다. 애써 아직도 무거운 오른팔을 들어다 허리에 감으니 어깨를 확 당겨 힘껏 껴안는다.
“보고 싶을 거야, 자기.”
쇄골을 간질이는 지민의 흐려진 핑크색 머리칼이 어디서든 기억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형이 떠나고 지민은 약 6주 동안의 여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간단한 전파 탐지부터, 은신술, 스파이들의 암호같이 은밀한 것들도 훈련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지민을 경악케 한 건 어디든 몸을 숨길 수 있는 ‘비위’가 필요하다는 대장의 말이었다.
“비, 비위가 왜 필요한데요…?”
“정부가 너 찾으려고 애먼 곳까지 헤집을 거 아니냐. 그러면 당장 정화조에도 뛰어들 수 있는 비위가 필요하다는 거지.”
“……아….”
차라리 시체더미에 뛰어드는 게 낫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마침내 힘든 훈련과 재활을 거쳐 오른 팔을 쓰면서 완벽히 헬기에서 낙하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지민의 잠입 날짜가 확실해졌다. 5일 후였다. 시티에서 나온 브로커에게 위조 여권과 등록증을 건네받은 지민은 처음으로 태형의 인이어로 연락을 취했다. 그동안 훈련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애써 태형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당한 시기가 되었으니 태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지민이 마이크를 잡아들고 첫 마디를 건네려는 순간, 상황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대장이 들어왔다.
“박지민!! 무전 끊어 당장!!”
“예?! 예?”
다급하고 험악한 목소리에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대장의 손에 자신과 태형의 만남이 결려있어 지민은 황급히 자신의 잘못을 되짚기 시작했다. 별 거 없었다. 그와 동시에 대장은 연결선을 뽑고 무전을 해지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시티의 스파이에게 무전을 보내는 순간, 정부의 전파탐지 레이더에 본부의 좌표와 위치가 명확히 전송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방법보다는 태형을 직접 만나는 게 더 가능성이 있을 듯 했다.
지민은 장엄한 센트럴 시티의 입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국심사장에서는 조마조마한 감정을 감추며 가방 안 독침을 그러쥐었고 혹시나 제 팔을 불구로 만든 그 의문의 사람이 저를 알아볼까 싶었다. 본부를 떠나올 때, 정국은 태형이 현재 살고 있는 위치를 몰래 알아내 전달해 주었다. 누군가 알면 당장 쫓겨날 만한 행동이었지만 지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고 있던 정국은 안쓰러움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지민은 주소지에 적힌 태형의 집으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감정을 잘 진정시킨 뒤에 지민은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역시나 태형이 암시한 게 맞았다. 그러나 텅 빈 집에서는 태형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창문에 붙어있는 작은 쪽지에는 태형의 글씨체로 무엇인가 쓰여 있었다.
‘지민아, 첫 눈은 같이 보자. 미안해. 자기야, 사랑해.’
차례로 머리부터 으깨지는 느낌이다. 억장이 남김없이 무너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형이 이곳을 떠난 이유는 당연히 대장의 명령 때문일 거라는 생각에 분노가 들끓었다. 온 몸이 화에 지배당해 움직이기만 해도 뜨거운 응어리가 몸에 뒤섞였다. 지민은 반란군임을 뜻하는 귓불의 핀을 잡아 빼 바닥에 내던졌다. 동료나 버리는 더러운 곳 따위에는 소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 길로 지민은 임무와 직책을 버리고 태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흥신소에도 찾아가 보고, 태형의 집에서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 돌아오지 않을 태형을 기다리며 지민은 겨울을 맞았다. 올해 첫 눈은 같이 보자는 게 태형의 마지막 바람이었는데 그것마저 지민은 이루어주지 못했다. 가만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보면 눈송이 냄새 같기도, 눈사람 냄새 같기도 했던, 아니구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태형의 향이 떠오른다. 겨울이 다 지나는 동안 바뀐 게 참 많았다. 지민의 쨍한 핫핑크색의 머리도 자라나며 색이 빠져 벚꽃잎의 빛깔과 닮게 되었고. 찾아간 지 몇 개월이 지난 흥신소에서도 연락이 왔었다. 태형인지는 모르겠는데 핀 피어싱에 푸른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있다고 그랬다. 찾았으니 죽여 드릴까. 하는 질문에 지민은 퀭하지만 힘 준 눈으로 흥신소장을 노려보며 미소 지었다.
“그냥 어디 사는지만 알려주세요. 돈은 더 넣어드릴게요.”
소장은 태형이 시티 외곽의 한 시골마을에 산다고 말했다. 지민은 방금 전 자신이 내민 돈 봉투를 챙겨 일어나는 소장의 뒷덜미 급소에 정확히 독침을 명중시켰다. 억 소리를 내며 소장이 쓰러지자 밖에서 부하들이 급히 들어오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긴 소장실 안에서 지민은 봉투와 주소를 챙겨 유유히 창문을 넘었다.
쓸쓸하고 한산한 시골마을은 높은 빌딩만이 가득한 센트럴 시티에 이런 곳이 설마 싶을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었다. 좋은 옷을 입은 지민이 거리를 걷자 헤진 옷만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말라 돌출된 동그란 눈을 더 크게 키워 뜨며 지민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피어싱을 하고 머리까지 파란 사람이 있다면 눈 감고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민은 소장이 알려줬던 주소로 향했다. 작은 반지하였다.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부스스한 푸른 머리의 그 김태형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고 끊임없이 사랑해왔던 김태형이었다. 지민의 사람 김태형이었다. 태형은 지민을 알아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을 뱉어내는 눈으로 두 사람은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지민의 턱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쳐다봤다. 그 찰나의 순간에 지민은 태형의 손을 떼고 태형에게 키스했다. 서로의 눈물 덕에 축축해진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서로의 타액이 뒤엉키고 눈물마저 더해져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봄의 한 가운데, 지민과 태형은 서로를 나누었다.
태형의 머리칼을 닮은 하늘에서 지민의 머리칼을 닮은 하얀 꽃잎이 내린다. 봄의 첫 눈 아래서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둘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나와 너 중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가 되지 못하듯이 김태형에겐 박지민이, 박지민에겐 김태형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그들의 사랑하는 법칙이다.
봄, 눈.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