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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보고싶어서

보내는 편지

퓨리파이

   너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좀 잔기침이 심했었어. 가끔은 자주 사레가 든다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고,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어. 그렇게 심하게 기침을 한 건 아니었거든. 가끔은 에어컨 밑에 있어서 추위를 좀 타는구나, 하고 너에게 담요를 덮어주기도 했었다, 그치. 너는 담요를 덮어주면 엄청 감동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어. 추위를 타는 건지, 아니면 그냥 부끄러워하는 건지 얼굴이 붉은데 그게 참 예뻤어. 우리가 사귀고 나서 내가 못 참고 입술을 맞추면, 너는 그냥 푸스스 웃어버렸어. 나는 그 웃음이 좋아서 몇 번을 키스했었고. 일부러 추운 곳에 있고 싶다며 너는 일부러 담요를 단단히 여미기도 했고.

 

   그 때가 봄이었지. 나는 사진학과에 다니니까, 널 모델로 사진을 종종 찍으러 다녔어. 인화한 거 엄청 많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너랑 같이 찍은 사진은 다 사진첩에 넣어놨거든. 너는 내가 못 나온 사진은 다 삭제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아니야. 지금도 네가 인화하지 말라던 그 데이터 내 컴퓨터에 그대로 있어. 진달래 축제니, 철쭉 축제니 한다고 해서 너랑 많이 갔었잖아. 꽃 속에 파묻힌 너를 필름에 담았어. 하얗고, 또 붉은 너와 색깔 가득한 꽃이 참 잘 어울렸어. 꽃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사람이 잘 나오기가 쉽지 않은 거 알아? 다들 꽃의 아름다움에 묻혀서 말야. 근데 네가 꽃이니까 전혀 이상하지가 않더라. 인제, 약간 지민이가 화훼단지에서 엄청 많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직도 화사해, 아직도 봄이야. 내 사진첩은.

 

   너는 근육이 잘 뭉친다고 했었어. 원래 안 그랬는데, 대학교 들어와서 공부하는데 어깨가 자주 아프다고 했던가. 난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 기대서 안마 해달라고 하는 네 모습이 너무 좋았어. 넌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배도 그렇고 근육이 잡혀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했거든. 아니, 엄청 딱딱해도 좋았을 거야. 안마할 때마다 으음, 하고 기분 좋게 웃던 너, 안기는 작고 따뜻한 몸이 다 좋았어. 좀 더 꽉 끌어안고 싶다, 이러다가 어… 있잖아. 막 좀 더 사랑하고 싶고 그런 거. 나쁜 생각도 좀 했었는데.

 

   그 날은 유독 아프다고 했어. 안마도 하지 말라고 했었지. 안마를 하면 더 아프다고. 왠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는데, 넌 왜라고 말도 하지 않았어. 병원에 가긴 가야 하는데 왜 망설였던 걸까?

 

   사실 너, 그 때 이미 기침을 하면 피가 휴지에 묻어나오고 있었잖아. 진짜 나중에 알았어. 가방에 진통제 통을 항상 들고 다녔던 거. 정식으로 병원에 간 게 아니라서, 타이레놀을 하얀 약통에 잔뜩 넣고 다녔다는 걸 왜 내가 그때는 몰랐을까. 훨씬 먼저 알았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왜 지금 너한테 보내는 편지에서조차 후회하고 있을까. 아냐. 미안해.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는데 몰라, 난 내려놓는 거 잘 모르겠다.

 

 

   너는 병원에 가는데, 그냥 감기 때문에 병원 가는 거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꼭 나랑 같이 가자고 했었어. 나야 당연히, 병원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데 넌 나랑 같이 가겠다고 하면서도 굉장히 머뭇거렸지. 나를 잡는 손은 항상 따뜻했는데, 왜 그날따라 그렇게 차가웠는지, 나 그땐 진짜 몰랐어. 감기 때문에 왜 그렇게 덜덜 떠는지, 난 진짜 네가 감기 때문에 손이 차가운 줄 알았어. 추워서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있잖아, 너는 그때 예상하고 있는 거였어. 너 그때, 그랬잖아. 나한테. 혹시 내가 죽으면 다른 애인 만날 거냐고. 무슨 감기에 그렇게 오버하냐고 내가 어이없어 했잖아. 다른 애인 생각도 하지 말라고, 나는 네가 다른 사람 만나는게 더 무섭다고 걱정했는데 내가 그걸 걱정할 게 아니더라. 네가 왜 그 말 하는지 알았어야 했어.

 

   너는 꼭 같이 가자고 해놓고도 날 대기실에 두고 너는 혼자 들어갔어. 같이 왔는데 왜 나를 두고 가냐고 물어도 너는 꼭 나보고 여기 있으라고 했었어. 그러지 말 걸. 네가 처음으로 진단받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나는 상상도 못 하겠어. 그냥 곁에서 네 손이라도 잡아주었어야 했는데. 네 곁에 항상 내가 있다는 걸 네가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날 때까지 네 옆에 있기는 했지만, 모든 무서운 순간들마다 너와 함께 있어주지는 못했던 것 같아서 가끔 나를 죽이고 싶어. 눈치가 없는 내가 순간순간마다 너무 미워서 나는, 아직도 죽을 것만 같아. 미안해. 그냥 너한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려고 썼는데 가만히 불 다 꺼놓은 책상에서 오랜만에 연필을 들고 있으니까 약간 바보가 된 것 같아. 똑같은 생각만 계속 반복해.

 

 

   네가 내 앞에서 손을 떨던 순간이 너무 선명하게 기억나. 우리 지민이가 많이 추운가 봐. 왜 이렇게 추워하지? 아직 봄인데. 꽃샘추위가 심한가? 우리 지민이가 정말 예쁜 꽃이라서 지민이를 겨울이 질투하고 있는 걸까? 지민아, 나 똑똑하지. 아니, 멍청하지. 진짜. 병원 간지도 한참 된 것 같은데, 내가 날 불러서 아주 오래 뜸을 들였어.

 

   태형아, 있잖아.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뭐야, 나. 배우 하라는 소리도 들어봤고, 아이돌 하라는 소리는 훨씬 더 많이 들어봤지만 이렇게 진짜 내가 영화 주인공이 될 줄은 나도 인제 약간 엄청, 당황스러웠어. 아니, 당황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어. 놀랐어. 화가 났어. 왜 갑자기 헤어지자는 건지 몰라서 나 엄청 너한테 매달렸잖아. 처음에는 당황해서 눈물도 안 나고, 너랑 헤어져서 만나지 않는다는 걸 잠깐 상상하는데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내가 뭘 들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더니, 이렇게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게 사실 데이트 하러 온 거였지 싶고 현실이 분간이 안 되는 거야.

 

   지민아. 레몬에이드 얼음 다 녹았어.

   태형아, 헤어지자고. 나도 말하는 게 힘들었는데, 헤어지고 싶어. 우리 안 맞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정말. 네가 우리 잘 맞는다고 했잖아. 내 성격이 좋다고 했잖아. 나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평생 이렇게 품에 안겨있으면 좋겠다고 웃었잖아. 아니야, 헤어지기는 무슨.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지금 우린 카페에 와서 음료수를 나눠 마시면서 서로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고, 뽀뽀하려고 온 거잖아. 우리 카페에서 맨날 뽀뽀해서 욕먹었잖아, 응? 내가 너무 잘생겨서 다들 쳐다본다면서 네가 먼저 나한테 그랬었잖아. 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해. 나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도망쳤잖아. 계산도 안 하고. 네가 얼른 계산하고 왔는지 내 집 문 엄청 두드렸었고. 너도 놀랐던 거야, 그치. 아픈 거 말 못하고 헤어지자고는 했는데 내가 그렇게 상처받고 도망치니까 그건 그것대로 무섭고 싫었던 거잖아.

 

   너는 그렇게 사랑스럽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땅은 파래지고. 세상이 뒤집히고, 너의 얼굴에 소용돌이가 일어서 다 망가지고 나는 무너졌어. 내 집 문 두드리던 네가, 내가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내니까 무서웠나봐. 우리 당연히 서로 집 비밀번호를 알았고 너는 망설임도 없이 열고 들어와서 나를 찾았어. 찾을 필요도 없었지, 나 어떻게든 도망쳐서 집에 왔는데 신발도 못 벗고 현관에 주저앉아있었으니까. 너도 나름 용기 내서 헤어지자고 한 거일 텐데, 내 등을 꼭 끌어안고 고백했었어. 미안해. 사실은 나. 근데 나 너의 말을 듣고 기절해버렸잖아. 헤어지자는 말이 더 충격이었는지, 네가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나 그때 기억이 사실 조금 가물가물해.

 

   10cm 정도의 악성 종양입니다. 조직검사상 adenocarcinoma, 선암입니다. 간, 뇌, 심장까지 전이가 있어요. 시간은… 1년 정도, 그보다도 더 짧을 수 있습니다. 전이 속도가 빨라요. 일단 항암부터 진행해야 하겠지만, 완치는 어렵습니다. 남은 시간을 조금 더 길게 해줄 뿐입니다. 심장까지 전이가 있어서, 급사할 수도 있습니다.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내가 들어야 한다고, 난 그런 거 인정 못한다고 깨어난 내가 악을 썼지. 나도 어려서, 나도 모자라서 그랬어. 지금 또다시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면… 아니, 그런 일은 이제 있을 수도 없지만. 그때는 네가 그런 상처를 또 경험하지 않게 해줄 수 있을까. 그래도 너한테 그 말을 또 듣지 않게 하겠답시고, 네 동의하에 나 혼자만 의사를 만났었지. 너는 보호자가 따로 없었고, 나는 너의 유일한 동반자였으니까. 힘이 빠져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고 네가 들어와서 나를 일으켰어. 내가 약해 빠져서 너를 고생시키더라. 미안해. 생각해보면 미안한 게 너무 많아.

 

   일본에 무슨 면역치료가 있대. 지민아, 한국에서 일단 수술 하고, 일본 가서 주사 맞고 반복하면 돼. 돈 걱정 하지 마. 응? 네가 살 수 있으면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진짜야. 그리고, 요즘 완치되는 사람 많다고 하잖아.

 

   현실 도피하는 나를 바라보는 네가 더 힘들었을까. 너는 내 말에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네 가슴을 가리켰어. chemoport, 항암 계속 한다고 가슴 안에 삽입하는 수술을 했었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 생기는 정도의 크기인 원판. 항암하면 혈관이 자극이 많이 되어서 아프고 염증이 생기기 쉽다고, 가슴에 그걸 삽입해놓으면 그리로만 주입하면 되니까 훨씬 편하다고 넌 나를 안심시켰어.

 

   나 섹시해? 하고 작게 웃는데, 그런 기분도 분명 아니었을 텐데 너는 내 눈물을 멈추려고 부던히도 노력했어. 나 잘 웃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런 칭찬 많이 들었는데, 왜 그때는 못 그랬을까. 내가 받아들이는 시간보다도 너는 훨씬 더 빨리 나빠지기만 했으니까, 그냥… 그래서 그랬나봐.

 

 

   항암 병동에 처음 입원하던 날 넌 그래도 의연했었어. 태형아, 우리 사진 많지. 영정 사진에 둘이 같이 나온 사진을 올리면 너도 죽은 것처럼 되는 걸까? 근데 나 영정 사진에 내가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입원하는 사이에도 급격히 악화되어서 너는 침대에서 똑바로 일어나지도 못 하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어. 영정 사진… 내가 지금까지 찍어왔던 네 수많은 사진들 중에, 그걸 내가 직접 골라야 할 때가 올까. 네가 혼자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당연히 그 자리에도 함께 하고 싶었어. 굳이 사진뿐만이 아니라, 정말 내 영혼과 마음, 몸, 가능하다면 전부. 내가 말을 하지 않고 네 손만 잡고 있으니 너는 참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어. 안쓰러워하는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나는 그때 네 마음을 다 읽을 수 없지만 내가 같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너도 느꼈을까. 병원 창문에 풍경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좋았어. 봄이라 꽃이 잔뜩 핀 산이 보이고, 잘 보면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태형아, 꽃 봐. 예쁘지. 매년 꽃이 필 텐데, 나한테 꼭 보여줘야 해. 알겠지?

 

   그래, 매년. 꽃이 피잖아. 너도 계속 피어 있어야지. 곁에 있어줄 거지, 하고 내가 웃으니까 너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우리 서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어. 간호사는 네 혈압을 재겠다고 왔고, 나는 그 혈압에도 예민해서 항상 알지도 못하는 정상 수치를 찾아가며 비교를 했어. 나중에야 혈압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항암만 하고 간단히 퇴원하던데, 너는 너무 아파해서 항암제보다도 진통제를 훨씬 많이 맞았던 것 같아. 케모포트로는 항암제만 투여한다고 진통제만 맞을 주사를 팔에 새로 꽂았는데 가는 바늘이라 아프지 않다고 너는 유난스럽게도 나한테 웃었어. 원래 내가 너 생채기만 나도 약국 대일밴드 코너에서 사이즈 별로 밴드 다 사온다는 걸 아는 너니까 그랬겠지.

 

    너는 가끔 옷이 닿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다고 환자복 앞가슴을 헤쳐 놓았어. 나 섹시하지 않아? 하고 장난을 치는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그게 장난 같지도 않았어. 거기다 케모포트가 살짝 도드라진 하얗고 창백한 피부를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가슴이 미어져서 보호자 침대에서 몸을 웅크렸어. 내가 10분만 자고 딱 일어날게, 하는 잠 핑계나 대면서.

 

 

   너는 항암제를 맞아도 아무 느낌도 없었다며 어깨를 으쓱거렸어. 마약성 진통제 때문에 울렁거리는지 그렇게 땀이 많은 편도 아니면서 턱끝까지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힘들어 했으면서. 속을 다 게우고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가, 내가 잠시 네 입맛이 돌만한 간식을 사서 돌아와 너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등을 두드리니 고양이들은 변기 물 마셔. 하고 장난 같지도 않은 장난을 쳤었어. 누가 엉덩이 댔을지도 모르는 변기에 얼굴 처박고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항암제 괜찮다고 해서 뭘 해. 화도 못 내고, 그렇다고 울지도 못하고 네 얼굴을 보는 나나 내 얼굴을 보는 나나 병보다도 힘든 게 병으로 고통받는 서로였다는 걸.

 

   항암을 하면 퇴원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어서 주치의랑 너 몰래 엄청 싸웠어. 저렇게 아파하고,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집에 보낼 수가 있냐고. 먹는 진통제를 충분히 처방해줄 거래. 너무 아프면 작은 병원에 가서 진통제만 좀 맞고 오라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해, 너는 아플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또다른 항암 환자가 와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나는 더 항의도 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네게 돌아왔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가 없으면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너를 알았으니까.

 

 

   어차피 병원이랑 그렇게 멀지는 않으니까, 너랑 나는 네 집에서 동거를 시작했어. 같이 살아서 좋다고 너는 포슬포슬한 솜사탕처럼 웃는데 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 인제, 떠나기 전에 결혼을 해두어야 하는 걸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까. 안 돼. 이런 생각 하지 말자, 그런 생각 하면서도 나는 계속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네가 겨우 잠든 밤조차 나는 홀로 넘길 수가 없어서 네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기도 하고 끌어안는 척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듣고 있기도 했어. 케모포트가 볼에 닿을 때마다 내가 차라리 먼저 죽으면 어떨까, 내 건강을 너에게 나누어주면 어떨까 싶었어. 콩콩 뛰는 심장 소리가 너처럼 참 작았어. 소중했어. 이 증거가. 아직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증명이. 하지만 나는 그걸 들어도 잠을 못 잤어.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어. 그래도 여전히 몽롱하기만 하고 잠을 못 잤지. 너한테 약봉투를 들켰을 때, 너는 그 봉투를 보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면서도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너도 무서웠던 거야. 점점 마음이 망가져가는 나를 보면서도 너를 떠나라고 이제 말할 수 없었던 게. 그나마 증상이 심하지 않던 때에 나보고 헤어지자고 했던 것도 그 잠깐이 마지막이었잖아. 바로 다시 내게 병을 고백했잖아. 그러니 너도 내가 없으면 이제 버틸 자신이 없었던 거야. 무서웠겠지. 잠깐일 거라고, 죽기 전까지만 나를 붙잡고 싶다고. 네가 죽으면 나를 놓아줄 테니까, 연인으로서 잠깐의 시간만 욕심내고 싶다고.

 

 

   게임처럼 사람이 단순하면 좋을 텐데, 행복도 나누고 건강도 나누고. 남은 생명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래도 되잖아. 하느님은 참 바보야. 하느님이 직접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사람한테 적당히 사랑도, 행복도 찢어서 던져 주면 알아서 나누고 서로 행복할 텐데. 신을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신도 귀찮을 필요 없고.

 

   동거도 잠깐이었지, 네가 항암 후 폐렴으로 다시 입원을 했으니까. 그게 네가 제 발로 바깥 땅을 밟는 마지막 순간일 줄 알았으면 너랑 데이트 정말 많이 했을 텐데. 아주 그냥, 사귀자마자 널 업고 세상을 다 보여줘야 했는데. 나는 해외여행 책자를 잔뜩 빌려 와서 너랑 같은 침대에 누워 한참 여행지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어. 너는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맞는 것 말고는 병원에서 하는 게 없었으니까, 나랑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은 많았지. 너랑 얘길 하다 보면 세상에 참 많은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럴수록 내게 아름다울 수 있는 세상은 하나하나 사라져갔어. 너와 가지 못하는 곳들은 너와 ‘멋지겠다, 예쁘겠다’ 하며 웃던 이 순간으로 공유된 것보다 이제 못할 거니까.

 

 

   뜨거운 여름, 네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오려면 그렇게 더운 아스팔트를 한참 뛰어다녀야 했지만 나는 더운 줄도 모르고 왔어. 전신에 비오듯 땀을 흘리는 나를 보면서 그렇게 덥냐며 너는 울상이었지만, 나는 그냥 헐떡이는 개처럼 헥헥거리면서도 그저 너를 향해 웃기만 했었지. 차가운 아이스크림 정도는 아직 맛있게 느껴진다며 목 뒤로 겨우 넘기던 네가 그나마 나를 안심시켰으니까.

 

   키스해줘,

   응?

   병이 옮을까봐 그래? 태형아. 내 애인이잖아, 요즘은 왜 안 해줘.

   왜 그렇게 말을 해?

 

   나는 너한테 화를 내본 일이 없었어. 아니, 그래도 가끔은 있었을지도 몰라. 시험 끝나고 나랑 데이트 하자고 했는데 네가 친구 생일 있다고 가버렸을 때? 나 두고 혼자 전단지 아르바이트 해서 생일 선물 산거 네가 숨겼을 때? 아, 생각해 보니까 많다. 미안해. 그냥 내가 참을 걸, 너 고생하는 거 싫고 나 두고 노는 거 싫고 해서 그랬는데. 근데 네가 어느 날 거울을 한참 보더라. 항암 치료를 하기 전에 머리를 다 밀어두는 게 좋다고 했는데, 너는 머리 밀기가 싫다고 했었어. 오히려 다 미는 것보다 더 듬성듬성 머리가 빠져서 이상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너는 머리를 미는 건 싫다고 했었어. 이제 항암 때문에 입술부터 바짝 말라서 피가 나고,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속눈썹이 빠져도 너는 그냥 웃기만 해서 그래도 잘 참는 구나 생각했어.

 

   사실 참 이상한 거야, 예쁜 네 모습이 망가지는 게 싫어서 머리도 안 미는데, 왜 그냥 웃기만 할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어. 왜 키스 안 해주냐고, 암이 옮을까봐 무섭냐고 갑자기 화를 내던 네 모습에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혹시 아픈 네게 너무 내 욕심만 드러내는 게 아닐까, 정말 건드리면 부서지는 게 아닐까 두렵고 무서워서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근데 너는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나도 아직 모자란 마음에 화가 난 걸까.

 

   그냥, 너는 무너지는 네 모습이 싫었을 텐데. 예쁘고 화사하던, 꼭 봄꽃 같던 네 모습은 네가 봐도 예뻤을 텐데. 몰라, 사실 정곡을 찔려서일지도 몰라. 좀 더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네 모습에 손을 대기 무서워서였을지도 몰라. 손닿으면 현실이 될까봐. 그때는 간병하는 나 자신의 상황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계속 계속 외면했는데. 아름다운 세상 그 수많은 곳들이 너랑 가지 못하는 곳이 되는 것도, 네가 늘 말하고는 했던 ‘네가 없는 내년’에 필 꽃들도 다 그냥 입에 올리기만 할 뿐 현실로 찾아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사실, 나는 너를 감싼 이불을 보면서 안에 있는 네가 이미 죽어있었으면 하고도 생각했었어. 내가 조심히 이불을 들추고 너를 찾았을 때, 이미 너무 작아져버린 네가 숨 쉬는 걸 보고 얼마나…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괴로웠는지 너는 모를 거야. 나는 내 기분을 설명을 못 하겠어. 네가 죽었으면 하고 바란 내가 미워서였을까, 아니면 네가 죽지 않아서 슬펐던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네가 더이상 괴롭지 않기 바랐을 뿐인데, 왜 그 결론이 꼭 네가 죽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 나는 지금도 모르겠어. 이제는 네가 없는데도 나는 그 때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해. 몸을 웅크리고, 산소 라인은 머리에 칭칭 감긴 채로 색색거리며 숨을 쉬는 너. 이제는 산소 없이 숨도 못 쉬는 그런 너.

 

   울었던 것인지, 아니면 생리적인 것인지 모를 네 눈가의 자국들과 마른 입술…. 그리고 너의 눈을 가린 머리카락.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며 웃던 얼굴에서 봤던 뺨의 붉은기는 다 사라진 채로 창백하게 사그라드는 너. 조금씩 불씨가 꺼져버리고 있는 너. 태양 아래 환히 웃던 너는 이제 양초에 피운 불처럼 언제 불어 없어질 지 모르는 모습이었어.

 

 

   나는 무서움을 이기고 너에게 입 맞췄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는 너무 차가웠어. 얼음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차가울까? 나는 이렇게 속이 타들어 가는데, 갑자기 얼음장에 불타는 쇠공을 집어던진 것처럼. 나, 너랑 키스하는 데 네 뒤에 서있는 저승사자를 봤어. 네가 죽을 때가 그 때는 아니었나봐, 가만히 너랑 나를 지켜보기만 하더라. 몰라, 데려가지 마. 저승사자면 살아있는 사람은 잡아가지 못하잖아. 내가 널 안고 있을게. 널 지켜줄게. 네가 손에 힘이 없어지는 그 날에도 내가 널 꽉 붙들게. 울지 마. 키스하는 데 우는 거 아니야. 암이 옮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자꾸 네가 무드를 깨잖아. 그냥 그래서 나도 울었어. 한 사람만 울면 이거 나쁜 짓 같잖아. 그런 온통 뒤죽박죽인 생각들이….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했지만, 너의 가족은 아니었어. 어쩌면 내가 너를 놓아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릴 아주 얄팍한 관계. 없던 사이처럼 돌아갈 수도 있을 사이. 연인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야. 헤어진다고 말하면 이제 다시 보지 않을 남이 되어버리잖아. 좋게 헤어진다는 건 사실 없잖아. 나쁘게 헤어지거나, 아니면 서로 만나면 감정이 남아서 쳐다보기도 싫은 그런 거야. 너의 치료 동의서도 다 네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네 흔적 어디에도 정식적인 이름을 남길 수가 없어. 그래도… 지민아, 거기서는 어때? 거기에선 이제 내 존재도 네 곁에 없잖아. 이제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을까?

 

 

 

 

   나는 그래도 너의 사랑이더라. 이제는 걷는 것조차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며, 간호사는 너에게 기저귀를 채우라고 했었어. 거의 절대적인 침상안정. 갑옷같이 생긴 보조기를 착용해야 한다고. 너는 아프고 나서도 내 앞에서 참 많이 웃었는데, 그 땐 참 많이 울었지. 그런 일을 많이 겪었을 간호사도 당황할 만큼 울었어. 너는 폭포처럼 울고, 또 울고, 너를 보는 나도 울게 만들었어. 뭐 때문이라고 했더라, 골 스캔을 했고, 뼈에 전이가 되었다고 했지. 증오스러울 만큼 너의 몸을 갉아먹는 그 암세포들이 이제는 네 다리를 다 좀먹었대. 함부로 움직이면 골절이 될 수 있다고 했었던 것 같아.

 

   너와 함께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네가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내가 저 위에도 먼저 말을 했지만, 안될 거 알면서도. 우리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지구 반대편까지 가보자고 했었고, 남극에서 펭귄을 만나자고도 했었잖아. 나는 너한테 그러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다며 웃었는데, 너는 내 위로같은 건 이제 통하지 않게 되었더라. 그래, 맞아. 나는 네가 그저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으면 했을 뿐이야. 예전에도 알았고 지금도 알고 확실히 그렇게 되었지만. 너무 당연하게 정해진 끝을 알면서도. 병에 익숙해서 마음이 건조해질 줄 알았어. 너와 나는 피어나는 연인이었고, 결혼을 한 것도 아주 오래 사귄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너의 기저귀를 치우고, 닦는 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 지민아. 갑자기 쓰다 보니까 네가 보고 싶어.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까 우리 사귄지 3년도 안 됐어.

 

 

   더러운 모습 보이기 싫다고, 기침, 가래, 콧물, 뭐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몰래 하고 싶어서 내 눈치를 보던 너인데. 감기라도 걸려서 옆에서 같이 더럽고 싶은데 그랬다간 백혈구 수치가 0에 가깝다는 네가 더 아플까봐. 정말 나는 어떻게 감기에 걸릴지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 너는 이제 잠깐이라도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고, 이제 내게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다 잊어버릴 만큼 정신이 없어졌어.

 

   종양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걸까? 심장을 누르는 거야? 아니면? 종양이 상대정맥이라는 데를 눌러서, 너는 얼굴이 붓고 숨이 차다고 했어.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혈압도 계속 치솟고 눈까지 퉁퉁 부었지. 산소를 처음에는 1L, 2L씩 주다가 이제 너는 마스크로도 잘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

 

   숨이 차, 태형아. 죽을 것 같아, 나 당장 지금 눈 감으면 죽을 것 같아서 무서워. 태형아. 다른 사람 만날 거야? 만나지 마. 난 이렇게 죽는데 왜 너는 다른 사람 만나. 싫어. 나 영원히 네 곁에 있고 싶어. 당장, 나,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여. 나 눈도 이상해?

 

   산소를 몇 십 리터를 들이붓는 기계는 이제 너랑 휠체어를 타고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게 했어. 뭐 때문인지 너는 땀을 심하게 흘렸고 나는 하염없이 네 몸의 땀을 닦았어. 땀이 묻고 냄새가 나도 너는 이제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차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어. 네가 평소에 하지 않는 말들, 병이 말하는 건지 네가 말하는 건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 그 수많은 말들은 이제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뭉개졌어. 조금 정신이 들 때면 제발 날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이런 병원에서 너는 제발 도망치라고 애원하던 네 모습. 어느 게 진짜일까. 어떤 게 진짜여도 좋아.

 

   추워지는 가을이니까, 어차피 휠체어 타고 나가도 추워서 더 아플 뿐이야. 보이는 건 마른 낙엽 뿐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아름답게 보일 감성은 이제 없으니까. 커텐이 있다면 치고 싶어졌어, 네가 빨갛게 익다가 이내 어둡게 변해가는 낙엽을 보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너무 아슬아슬해서.

 

 

   나는 그 때까지 네가 떠나고야 말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냥 평생 아프더라도 내 눈 앞에 있을 줄 알았나봐. 이제 시간이 1년도 남지 않았다 들었어도, 네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 같아. 그냥 이 작은 손을 꽉 붙들고 있으면 너를 계속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나봐. 네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비명을 질러도, 비명을 지르다 못해 지쳐 잠깐 잠이 들어도 그랬어. 네 손이 너무 새하얗고, 차갑고…. 그래도 여전히 숨을 쉬었고, 어떻게든 깨우면 눈을 뜨고, 그랬으니까. 근데 지금은 왜…. 이젠 진짜 눈을 감으면 뜨지 않을 것 같아. 네가 아프다고 해서, 계속 진통제를 달라고 했는데. 진통제를 맞으면 그나마 조금 괜찮아 보였는데. 네가 눈을 안 떠. 숨을 안 쉬어. 몰라, 그 약에 취한 거래. 약의 부작용이 그렇대. 숨을 안 쉬고, 네가 사라지고. 네가 아프다고 하면 무시할걸. 그냥 아플 수도 있다고 할 걸.

 

   차라리 네가 아파하는 게 나았어. 살아있는 게 나았어. 아니, 그냥 이렇게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나는, 모르겠어. 지민아, 지민아. 일어나. 아니, 너는 이제는 이미 떠났지만. 너는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 있지만, 나는 아직도 네 숨이 잠시 멈춰있던 그 순간의 공포가 아직도 네 죽음보다 더 자주 꿈에 찾아와. 해독제를 한참 맞고 겨우 정신이 든 너의 눈을 마주쳤을 때, 네 진짜 기분은 내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지금도 그게 나를 원망하는 시선처럼 느껴져. 왜 나를 깨웠어, 가장 조용히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하는. 순간의 공포와, 나를 원망하는 너의 시선이 계속 나의 발목을 물고 나를 쓰러트려.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고, 그 자리에 처박혀 있으라고 내 귓가에서 속삭여.

 

 

 

   너는 나 몰래 연명치료중단 동의서에 서명을 했어. 너 오랜만에 제발 친구들 얼굴도 좀 보고, 부모님 얼굴도 좀 보고 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거의 간병을 1년 가까이 하면서 그 누가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두었으니. 내가 너 놓을 용기가 없다는 거 너도 알아서…. 너는 친족이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날름 사인해버리면 끝이냐고. 네가 떠나고 간호사가 나한테 그랬어, 그렇게 혼자 사인해도 괜찮으냐고. 너를 1년간 간병하고 있는 그 애랑 얘기는 해 봤느냐고 물어봤었다고.

 

   넌 정말 그렇게 써놓지 않으면 더이상 ‘나에게 웃어줄 수 없는 너’로 너무 오래 나를 괴롭힐 거라며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었다고 했지. 그 동의서를 썼다는 이야기를 네가 아닌 주치의에게 듣고 나는 이제 화를 낼 기력조차 없는데도 바닥에 쓰러져 울었어. 정말 나는 너의 아무것도 아니라서 네 선택에 손을 댈 수가 없구나. 혹시나 잠깐이라도 살 수 있는 기회를 네 손으로 완전히 지워버리는 건 너에게도 대단한 용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절망감이 치밀었어. 보안요원이 잠시 나를 데리고 나가서 물을 주는데 독약이었으면 했어. 네가 직접 나에게 친절하게 독약을 먹인 거야. 네가 아프면서 내 안에 생긴 병을 좀 더 빨리 끝내버릴 약.

 

 

 

   이제 너의 산소포화도가 유지가 안 되고, 의식이 점점 처지면서 내가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나는 심장이 멎으면 꼭 심폐소생술을 해달라고 악을 썼어. 보호자분, 나가계세요. 보호자? 나 보호자 아니야. 저 애 애인이야. 누가 봐도 이상해. 옆에 달고 있는 저 커다란 기계에서 수많은 줄들이 지나가잖아. 원래 아주 규칙적이었어. 똑같은 그림이 계속 지나갔는데, 지금은 무슨 노이즈 낀 것처럼 엉망진창이잖아. 이상해, 알람도 시끄럽고. 인제 나는, 나가있는 거 몰라. 지민이 옆이 내 자리야. 병에 조금씩 망가져가는 건 너 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고, 네가 떠나는 그 날에 나는 완전히 부서졌어. 다들 똑같은 환자이고 똑같은 보호자인데, 다들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 손을 잡았어. 그러면 안 됐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같이 무섭고 두려운데, 너처럼 아픈데 나는 그런 거 상관없었어.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무서워서. 조용히 너의 심장이 멎을 순간을 기다리는 게. 심폐소생술 하지 않을 거니까. 억지로 네 기도를 절개해서 열고 관을 꽂지는 않을 거니까. 네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그냥 네가 숨이 멎는 걸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게 당장 1초 후일지도 몰라서 숨 쉬는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유언을 남긴다고 하던데, 너는 이미 이산화탄소가 몸에 꽉 차서 의식이 없었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나는 네가 내게 했던 수많은 말들을 곱씹어야 했어. 사람이 죽기 전에 청각이 가장 예민하대. 간호사가 그랬어. 너 지금 많이 불안할 거라고. 내가 있다는 걸 확신시켜주라고. 가기 전까지 손 잡아주라고. 천사가 손을 잡고 천국으로 데려가 줄 거니까, 옆에서 계속 속삭여주래. 사랑한다고. 안심할 거라고. 사랑해. 지민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실은 두고 가지 말라고, 제발 기적이 일어나 달라고, 환하게 웃는 모습 제발 한번만 다시 보여 달라고 부르짖고 싶은데 나 지금까지 너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아픈 너한테 해야 할 일 제대로 못 해서 이것만이라도 잘 해야 한다고 다짐했어. 넌 표정이 없었는데, 왜인지 눈물 한 방울을 흘렸어. 네 입술에 닿았을 때처럼 차가울까. 저 눈물을 닦으려 네 피부에 손을 대면 어떨까. 하지만 이번엔 내가 네 눈물을 닦았어. 무서워하지 마. 사실은 내게 하는 말을 너에게 전하며.

 

   하얀 천을 덮은 너의 차가운 몸을 한참 끌어안고 있는 나를 아무도 밀어내지 못했어. 이건 분명 너도 못 봤겠지, 그 때 너는… 정말, 이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너는 꽃이니까. 늘 환하게 피어 있었으니까. 네가 완전히 내 곁을 떠나고 나서도, 나는 밤에 잠시 잎을 오므렸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 그러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어. 너는 다시 피어나고, 나는 너의 햇살이었으면. 너는 가끔 나에게 너를 피우는 게 나라고 했으니까. 태양처럼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너의 생명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영정사진은 너랑 여행 갔을 때 찍었던 거로 했어. 보통은 얼굴이 잘 나온 걸 올릴 텐데, 나는 ‘따라와, 태형아! 얼른 와!’하고 내게 손짓하던 너의 모습을 거기에 담았어. 그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두면 정말 내가 일부러 너를 따라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네 곁에 있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 절대 너 먼저 따라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주름 30개 만들기 전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천국에서 너는 이제 걸을 수 있겠지. 세상에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겠지. 꼭 나의 꿈에 찾아와서 너의 행복을 다 말해줘. 내가 없는 세상이어도 너는 행복을 찾았다고, 이제 더이상 괴롭고 힘들지 않다고. 천국에도 네가 좋아하던 작은 들풀들과 야생화, 나비같은 것들이 있다 전해줘. 하늘이 얼마나 맑고 청명한지도. 나는 이기적이어서, 너를 찾아갈 때까지 네가 애인을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힘들겠지. 너는 거기서 내가 그토록 바라던 너의 행복을 찾았을 거고, 그렇게 행복해하는 너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너를 데려가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모르겠어. 나는 이제 악바리야.

 

 

   주름 30개 만들어서, 좀 내가 인제 내가 약간 인기가 없어져도 나 알아봐야 해, 잠깐 내가 없는 동안은 다른 애인 만나도 돼. 내가 잘못했으니까 잠깐 허락해 줄게. 그 대신 오자마자 바로 달려와야 해. 구부정한 내 허리를 펴주고, 내 주름진 입술에 입맞춰줘. 내가 늙어도 늙은 사람 중에서는 제일 잘생겼을 거야. 천국에선 늙지 않을 테니까, 나는 평생 젊고 예쁜 애인이랑 같이 살겠다. 그치, 그런 거지… 지민아.

 

 

   내가 네게 찾아온 겨울이었다면, 이제 봄이 왔으니 겨울은…

 

 

   왕벚나무 앞에서 태형은 천천히 지민의 무덤을 끌어안았다. 이 자리에 있으면 꽃이 필 때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천국으로 아예 가버렸을 테니 아예 이 꽃을 볼 일도 없어진 거였지만, 그래도 태형은 이 자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서로 여행을 같이 와서, 첫 키스를 한 언덕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였다. 네 고향에 온 여행인데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손을 잡고 데려온 곳인데, 지민은 그 때도 자신도 이 장소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될 것 같다고 깜찍하게 웃었다. 작은 그네가 매달린 바로 앞자리에 지민이 있었다.

 

   천국으로 보냈다고 몇 번이고 생각해놓고, 막상 또 너를 묻고 나니 네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결국 천국을 믿는 거야, 아니면 뭐를 믿는 거야. 태형은 무덤 주위를 멤돌다가 그네에 앉았다. A4용지로 10장은 되는 편지였다. 수도 없이 흘린 눈물 자국을 보니 지민이 청승맞다며 싫어할 것 같았다. 미안해, 내가 내년에는 좀 더 예쁘게 편지를 쓸게. 내가 인제, 이모티콘 잔뜩 배워가지고 말야. 스티커도 잔뜩 사서 꾸미고 그럴게. 천국에서 애인이 써준 편지라고 자랑을 해야 하잖아, 응. 정말 다른 사람 사귀고 있으면 몰래 읽고 보관해 둬. 내가 가서 소유권 주장할 거니까. 알겠지?

 

   태형은 한 번 쓰고 다시 읽지 못했던 편지를 손에 쥔 채로 한참 그네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흩날리는 벚꽃에서 가끔 지민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지민의 몸에서 나던 살냄새, 그렇게 오래 간병을 했는데도 더럽고 쿰쿰한 냄새가 생각나지 않고 말도 안될 만큼 달콤하고 풋풋한 향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꽃잎 하나, 꽃잎 둘. 꽃잎 셋.

 

   이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눈앞에 무덤을 두고서도, 이 그네에 지민과 같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뭐야, 유치해. 우주도 있는데 하늘이랑 땅만큼 밖에 사랑 안 해? 인제 약간 다른 행성만큼 바람을 피우겠다는 거야? 행성 몇 개였지?     애인 그렇게 많아?

   우리 태태, 진짜 질투쟁이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안 들려. 지민아, 좀 더 크게. 옆에 안 보여. 귀에도 안 들려.

 

   태형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네 줄을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앞뒤로 움직이던 그네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메마른 남자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무덤 앞에 힘없이, 봄에 홀로 진 낙엽처럼. 손에 쥐고 있던 편지가 바람에 날렸다. 가야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날았다. 한 장, 한 장 전부 무덤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했다. 벚꽃 한 잎, 편지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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