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리고
시작
글월
“갔다올게 짐나!”
태형이 창문에 있는 지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민 역시 환하게 웃으며 태형을 배웅해주었다.
2층 창문에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지민이 저 멀리 사라져가는 자전거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바람이 살랑이며 지민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봄, 이려나.”
가만히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지민이 읖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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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함께 살게 된 것은 겨울이 끝나가는 2월이었다. 여느 날처럼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 지민이 태형을 붙잡았다. 늘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너무 싫다며. 술에 취해 칭얼거리는 지민을 집에 데려다준 태형은 바로 그 다음날, 집을 구해왔다. 적금을 깼다며 같이 살자는 태형의 말에 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집이 자신이 임시로 선생님을 맡은 학교와 꽤 먼 위치여서 어쩌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휴직을 내신 선생님이 일찍 돌아오셔서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은 지민은 별 수 없이 태형과 함께 살게 되었다. 태형은 그저 뿌듯할 뿐이었다. 2층 집에 자신이 사랑하는 지민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기만 했다.
급하게 구한 집이였지만, 생각보다 예쁜 집이였다. 작기는 해도 있을 것들은 다 있었고 침실도 두개여서 서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지민은 한달 남짓 이집에서 살면서 제일 좋은 점을 찾았다. 시내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밤이 되면 반짝거리는 별들이 하늘을 수놓는 모습을 2층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였다. 퇴근한 태형이 집에 오면 둘은 항상 2층 창문으로 별을 보았다. 뒤에 있는 텃밭에도 무언가를 심고 싶어진 지민은 날이 따뜻해지면 심을 씨앗을 여러개 사왔다. 아직은 초봄이라서 쌀쌀했지만, 곧 날이 풀릴터였다. 느긋하게 서로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한 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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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나~ 일어나!”
태형의 외침에 지민이 몸을 뒤척거리다 살며시 눈을 떴다. 방금 막 씻은 것인지 지민에게 얕게 키스하는 태형에게서 비누향이 났다. 일도 없겠다, 늦잠을 자려하는 지민을 매일 아침마다 태형이 깨우는 이유는 단 하나, 아침을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지민은 요리를 정말로 못했다. 그래서 동거를 시작한 후 둘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요리는 태형이 하는 것으로. 대신 뒷정리는 늘 지민의 몫이었기 때문에 둘 중 누구에게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비몽사몽 까치집이 진 상태로 제 입보다 한참 큰 샌드위치를 베어 먹는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볼에 묻힌 줄도 모르고 열심히 먹는 지민의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천천히 먹어. 체한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먹는 이유는 간단해, 태태.”
뭔데? 태형의 질문에 지민은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아침만 먹으면 다시 자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눈에는 어떻게든 늦잠을 자고 말겠다는 결연함이 새겨져있었다. 웃음이 터진 태형은 휴지를 뽑아 지민의 볼을 닦아준 후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어. 이것만 먹고, 다시 올라가서 자.”
이미 태형은 자기 몫의 아침을 다 먹은 상태였다. 지민이 마저 먹자 태형은 출근 준비를 하러 방으로 향했다. 머리를 긁적이던 지민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봄이었지만 쌀쌀한 새벽 공기에 지민은 꽤나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다. 태형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민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는 집을 나섰다.
“갔다올게 짐나! 일어나면 씻고 있어!”
밑에서 외치는 태형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지민은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일으켜 태형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창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지민의 손에, 태형은 빙그레 웃으며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렸다. 태형이 멀리 가는 모습을 확인한 지민은 이불 위로 풀썩, 하고 쓰러지듯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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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봄이 찾아왔음을 지민은 온 몸으로 알았다. 태형이 집을 나설 때의 햇볕으로,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따뜻함으로, 두꺼운 이불을 덮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불을 걷어찬 자신의 다리로부터. 길가에 피어나는 들꽃들마저 봄을 노래하듯 살랑거렸다. 가장 큰 변화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 벚꽃나무에서 일어났다. 하루가 지나가면 나무도 달라졌다. 꽃망울이 환하게 벌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일만큼 큰 벚꽃나무였다. 지민의 직업인 교사는 사실 벚꽃이 필 때가 제일 바빴다. 작년에는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아서 거의 다 질 무렵 태형과 함께 본 벚꽃이 끝이었다. 그래서 지민은 이번에 만반의 계획을 다 세워놓았다. 4월의 첫번째 주말, 그러니까 벚꽃이 가장 절정인 날에 친한 이들을 모두 초대해 함께 벚꽃 구경을 갈 생각이었다. 태형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둘의 친한 지인은 뻔했다. 예전에 대학을 다닐 때 같은 동아리였던 사람들을 불러 오랜만에 얼굴을 볼 계획이었다.
태형과 지민은 CC였다. 벚꽃 필 때 사귀어서 벚꽃이 질 때 헤어진다는 선배들의 짖궃은 놀림에도 둘은 어느새 5년, 다섯번의 봄을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게 된 계기였던 동아리는 음악 동아리였다. 태형은 같은 경영학과인 남준이 꼬셔서 들어온 동아리였고, 지민은 포스터를 보고 들어온 동아리였다. 그곳에서 만난 일곱명은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분이 된지 오래였다. 이제는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계절이 바뀔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얼굴을 보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 지민과 태형은 둘이 함께 산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반응이 어떨지 지민은 너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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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오랜만이구만 다들~”
석진이 너스레를 떨며 손을 흔들었다. 미리 도착해있던 모든 사람들이 석진의 인사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요, 형!”
정국이 석진을 타박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호석의 질문에 석진은 차가 막혔다며 미안하다고 멋쩍게 웃었다. 태형이 사온 도시락을 먹던 윤기는 입을 우물거리다 각자의 안부를 물어보는 지민에게 말을 걸었다.
“지민아, 너한테서 태형이랑 되게 비슷한 향기 나는데 옷 훔쳐입었냐?”
“...넹?”
지민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갑자기 다운된 분위기에 정국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설마요, 형. 둘이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윤기가 정국의 말에 그렇겠지, 라며 수긍하면서 다시 도시락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형이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 저희 같이 산지 한 한달 정도? 지났어요.”
남준이 먹던 음료수를 뿜었다. 모두가 하고 있었던 행동을 멈추며 일제히 지민과 태형에게 외쳤다.
“뭐,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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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진정시키고 잠시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늦게까지 놀기에는 바쁜 사람들이 있어서 아쉽지만 이쯤할까, 라며 모두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민이 호석과 함께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에 남준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너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남준에 물음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태형에게 남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동거 다음은, 뻔하지 않아? 6년이면... 오래 사귀긴 했지.”
남준의 말을 이해한 태형의 귀가 붉어졌다. 남준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태형은 저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지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은,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건 너네의 일이지. 알아서 잘 결정해봐.”
남준의 시선이 노을이 저물어가는 하늘로 향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따뜻한 바람이 부는게 느껴졌다. 이제 계절은 막 봄으로 바뀌어갔고, 봄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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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찍 마치긴 했지만 시간이 남는 석진과 호석, 정국과 밤 늦게까지 놀다보니 태형과 지민 모두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지민이 비틀비틀 1층에 있는 태형의 침실로 내려가 태형의 옆에 누웠다.
“태태... 자?”
지민의 웅얼거리는 물음에 잠시 몸을 뒤척이던 태형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언제 일어났어...?”
“방금, 막.”
그런 시답잖은 말을 비몽사몽인 채로 주고받던 둘은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있잖아, 태태.”
시리얼을 먹던 지민이 태형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우리 둘이서만 벚꽃 보러 한번 더 갈래?”
지민은 어제 재밌게 놀긴 했지만 노는데에 집중하느라 벚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태형과 둘이서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거라면 난 상관없지, 뭐.”
“히히. 그럼 밥 다 먹고 바로 갔다 오자!”
시리얼을 다 먹은 지민이 서둘러 윗옷을 걸쳤다. 머리가 까치집이 지긴 했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태형도 대충 옷을 거치고 집을 나섰다.
지민은 너무 행복했다. 같이 산다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태형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또 달랐다. 그 사람의 일상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엄청난 거구나. 지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그 상태 그대로 산책을 하는게 참 기분 좋았다. 태형은 헤실헤실 웃고 있는 지민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지민은 미소지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태형은 쥐고 있던 지민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느긋하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벚꽃나무 앞에 와있었다.
“우와아아...”
벚꽃나무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어제 분명히 봤는데도 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진짜 예쁘네. 사진 찍어줄까, 짐나?”
고개를 끄덕인 지민은 얼른 뛰어가서 벚꽃나무 밑에서 포즈를 잡았다. 태형으 그런 지민을 흐뭇하게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태형아, 여기로 와봐!”
지민의 부름에 다가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벚꽃으로 가득한 풍경이 너무 멋졌다.
“이런 걸 기껏해야 일주일밖에 못 본다는 건 조금 아쉽다. 그치?”
지민이 중얼거리자 태형은 카메라를 들어 벚꽃을 찍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이것 봐봐. 벌써 떨어진다.”
카메라위로 떨어진 꽃잎을 집어든 태형이 그렇게 말하면서 날아오는 꽃잎을 잡아 지민에게 건냈다.
“떨어지는 벚꽃잎 잡으면 첫사랑 이루어진다는데.”
“난 해당 안돼.”
태형의 단호한 대답에 지민이 왜?하고 묻자 태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잖아,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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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봄이 언제왔었냐는 듯이 여름이 오겠지. 그리고 우리는 이 봄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다음에 올 봄을 기대하게 될거야. 그때도 우리는 함께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