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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ZE - Mood Indigo

 

 

 

 

 

 

 

테리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건 평소 태형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캠퍼스를 거닐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시험이며 과제에 찌들어 도서관을 드나들 때도 태형은 늘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받아왔다. 분만실에서 응애 울기도 전부터 예쁘단 소리를 들었으니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길에서 받은 기획사 명함은 명함집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태형은 예쁘고, 잘 생겼다. 세상에 예쁜 얼굴 많고 잘 생긴 얼굴 많지만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얼굴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태형은 그걸 해냈다. 게다가 어딜 가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런 얼굴을 이용해먹지 않아서였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잘난 건 알고 있지만 잘난 ‘척’은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열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더해도 지금까지 해온 연애를 셀 수 없었다. 첫 연애는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언제나 태형의 곁엔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태형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태형은 그런 호감들을 딱히 거절해야 할 이유를 못 느꼈고 전부 받아줬다. 솔직히 연애가 막 재미있진 않았다. 특별할 거 없이 다 똑같았으니까. 그저 사랑받는 게 익숙하고 편했다. 그리고 항상 차이는 건 태형이었다. 다들 사랑을 남김없이 바닥까지 싹싹 긁어 퍼주고 결국엔 지쳐 나가 떨어졌다. 붙잡아야할 이유도 못 느꼈다. 의도치 않게 나쁜 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너 진짜 개새끼야. 알아?”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면전에 대놓고 개새끼 소리를 하는 애는 처음이었다. 태형은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대뜸 “나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봐.” 라길래 대답을 못 했더니 저런다. 아니, 그게 개새끼 소리를 들을 만큼 잘못한 거야? 너무 하네.

 

   “심해? 내가 심해? 진짜 심한 게 뭔지 보여줘?”

   “......”

   “내가 너 가만 안 둬.”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다며 눈물이 그렁해선 이를 갈고 말했다. 가만있어도 남자가 줄을 섰다나 뭐라나. 그나저나 저런 얼굴이 있었어? 약간 섬뜩했다. 태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태형이 입술을 내밀고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내가 울고 싶다. 내가.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닿는 시선들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 챈 태형이었다. 몰래 힐끔대면서 숙덕숙덕.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개강 첫 날부터 이 무슨 불길한 예감이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에어팟을 빼고 자리에 앉으니 뒤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은 저렇게 잘 생겼는데... 못 세운대... 어떡하냐...”

   “야 듣겠다. 조용히 해.”

 

    ...뭐?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냐. 어떻게 고자라고 소문을 내? 나 걔랑 잠도 안 잤어. 뭐 하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꺼 본 적도 없으면서 세우니 못 세우니 그런 말을 하고 다녀? 아 씨, 확 고소해버릴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에 호석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형! 내 말 듣고 있어?”

   “저러다 금방 또 잠잠해져.”

   “아니, 잠잠해져도 내가 못 세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이 형이 자기 일 아니라고 진짜.

 

   “나 수업 들어가야 돼. 김교수님 첫 날부터 수업이야.”

   “......”

   “너도 수업 있다 하지 않았냐?”

 

   몰라. 오티겠지. 안 갈래. 태형은 반쯤 드러누워 징징대는 소리를 냈다. 내가 아주 쪽팔려서 경영대 건물은 들어갈 수가 없어. 남은 바나나우유를 쪽 마신 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맘대로 해라. 이따 전화해.”

   “웅.”

 

   호석이 가고 나서도 태형은 한참이나 발을 까딱이며 누워있었다. 하, 진짜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벌떡 몸을 일으킨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씩씩댔다. 이 와중에 배가 고팠다. 햄버거나 사먹어야지 생각한 태형이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건물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봄 냄새가 났다.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좀 있으면 여기저기 꽃도 피겠지. 태형은 가벼운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때 멀리서 뛰어오는 쬐깐한 남자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한 쪽으로 비켜 걷는데 점점 이 쪽으로 오는 게 이상했다. 뭐지?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온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태형의 멱살을 잡았다. 뭐, 뭐야? 그리곤 태형이 당황할 새도 없이 제 입술을 갖다 댔다.

 

   ...?! 깜짝 놀란 태형이 그 자리에 굳어 두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앞니가 다 아팠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남자 어깨 너머로 입을 떡 벌린 채 서있는 키 큰 녀석 하나가 보였다. 그제야 맞닿은 도톰한 입술이 느껴졌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까지. 미간을 찌푸린 태형이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빼자 남자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

   “...아,”

 

   아? 지금 멀쩡히 지나가는 사람 멱살 잡아다 키스 해놓고. 고작 아? 태형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햄버거 먹으러 가려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를 돌아봤다. 멀찍이 서있던 녀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시 태형을 보는 얼굴은 뭐... 솔직히 조금 귀엽긴 했다. 남자는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태형의 입술 위를 벅벅 닦았다. 눈을 내려 보니 티슈였다. 나 참, 비빌 거 다 비비고 이제 와서 닦으면 뭐해.

 

   “죄송해요. 어떡해. 죄송해요.”

   “...아파요.”

   “아, 죄송해요...”

 

   허둥지둥하는 꼴이 딱 정신줄 놓은 사람의 그것이라 태형은 됐다는 의미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남자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애꿎은 티슈만 만지작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작고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보였다. 태형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억울해서 자초지종을 좀 들어봐야 될 것 같은데.”

   “......”

   “햄버거 먹을래요?”

 

   대체 왜 내가 상황 정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입술 부딪혀놓고 아무렇지 않게 갈 길 가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입술 하나로 노발대발 화를 내는 것도 웃기고.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싶어 햄버거나 사라고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아, 절대 저 귀여운 얼굴에 넘어간 건 아니다. 절대로.

 

   태형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남자가 그 뒤를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제가 살게요.” 작게 중얼거렸다. 황당한 표정의 태형이 남자를 홱 돌아봤다. 당연히 그래야지. 라지 세트로 먹을 거야.

 

 

 

*

 

 

 

   내 인생은 한 마디로 망했다. 얘기를 들어보면 누구나 와 너 진짜 개망했다 하고 공감할 것이다. 사건은 일주일 전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바를 끝내고 약속 장소인 호프집에 들어서니 동기들은 주당 박선생 오셨다며 지민을 반겼다. 술자리는 벌써부터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상석에 억지로 앉혀진 지민은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제 손에 쥐어지는 잔을 받아야 했다. 마침 알바도 마지막 날이었고 다음날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민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부짜리 소맥 세 잔을 연달아 마시고 바로 게임에 합류했다. 그날따라 술이 쭉쭉 들어갔고 기분은 최고조였다. 크게 울려 퍼지는 음악엔 몸까지 흔들었다. 몇 시간 게임을 하고 나니 몇 명은 테이블에 엎어져있었고 몇 명은 자리를 이탈해 속을 비워내기 바빴다. 중간 중간 비어있는 자리를 보니 집으로 도망간 녀석도 몇 있는 것 같았다. 늘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지민이었지만 그날은 피곤한 상태로 마셔서 그런지 얼마 안 마신 것 같은데도 골이 빠개질 것 같았다. 시야는 어지럽고 한숨처럼 나오는 숨은 뜨거웠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뜨끈뜨끈 튀어나올 것 같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맞은편에 차연호가 있었다. 아까는 없었는데... 언제 왔지. “너 언제 왔냐.” 묻자 빙그레 웃으며 “아까.” 하고 답한다. 얘는 여전히 잘 생겼고 여전히 자상하게 웃는다. 차연호를 반년 넘게 좋아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처음부터 뭘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완벽한 스트레잇이라는 걸 알고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근데 마음을 정리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구나 싶었다.

 

   다들 반쯤 정신이 나갔으면서 또 게임을 하자고 했다. 기억은 안 나는데 누군가 술을 더 시켰고 진실 게임 비스무리 한 걸 했다. 거기서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녀석이 의자에 올라가 춤을 췄고 그걸 보면서 깔깔대고 웃다가 대뜸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주둥이로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렸다. “야. 나 차연호 좋아했다?” 잔뜩 들떠서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몰랐다. “반년도 넘게. 존나 웃기지?” ...등신. 뭐가 웃겨. 하나도 안 웃겨. 그래도 그땐 뭐가 웃긴지 혼자 막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필름이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다들 놀라서 웃지도 못하고 있는데 나 혼자 뒤집어지게 웃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이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생각했지만 겨우 2층이라 포기했다. 휴학 신청 기간은 끝났고 개강이 코앞이었다. 온갖 쌍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물론 내 자신한테 하는 소리였다. 핸드폰은 꺼내볼 용기도 안 났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한강 다리가 어디더라.

 

   아주 잠깐 어제 일이 꿈이었나 싶었다. 겨우 확인한 단톡방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난리가 나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차연호한테 와있는 메시지를 보곤 바로 절망했다. [지민아. 할 얘기 있는데 너 일어나면 연락 줘.] ...아, 진짜 좆 됐다. 그냥 평생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안 일어난 척 했다. 되도 않는 잠수를 탔다. 차연호한테 오는 연락을 싸그리 무시하다 결국 차단을 해버렸다. 지가 잘못해놓고 엄한 사람을. 진짜 또라이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다 빠졌다. 후... 머리숱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개강 하루 전에는 기억 상실인 척을 해볼까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놓고 오 쫌 기발하다 싶었다. 하지만 좋았던 기분도 잠시. 그럴 거면 연락은 왜 피하고 차단은 왜 했는데? 참, 되는 일이 없다.

 

   [야 연호가 너 왜 연락 안 되냐는데?] [지민아. 연호가 너 찾아.] [박지민 너 죽었냐? 왜 연락이 안 돼.] 응. 나 죽었다고 해. 제발.

 

   개강 첫 날부터 숨어 다니는 인생을 살게 될 줄이야. 나름 인싸였던 지민은 개강 하자마자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핸드폰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무슨 죄인 마냥 주변을 살피면서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언덕 중간에서 헉헉 대는데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악 미친! 최대한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전력질주 했다.

 

   “지민아!”

 

   와 시력도 드럽게 좋네.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냅다 뛰었다. 뒤따라오던 차연호가 같이 뛰는 게 느껴졌다. 염병할 언덕.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는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더 쪽팔린 일을 만들기 전에 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민은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옷깃을 잡아 쥐었다. 차연호가 바로 뒤에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옷깃을 당겨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애석하게도 인생 첫 키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의 남자가 큰 눈을 깜빡이며 서있었다. 그 와중에 진짜 겁나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잘 생겼다는 말로도 한참 부족했다. 예쁘면서 잘 생긴... 신기한 얼굴이었다. 홀린 듯 쳐다보다 문득 차연호의 존재가 떠올라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녀석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제야 남자가 느꼈을 불쾌감이 걱정돼 서둘러 티슈를 꺼내고 입술을 닦아줬다. 닦을수록 표정이 더 구겨지는 것 같아 손이 덜덜 떨렸다.

 

   “죄송해요. 어떡해. 죄송해요.”

   “...아파요.”

   “아,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고민하는 찰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순간 반쯤 굽혔던 무릎을 반사적으로 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억울해서 자초지종을 좀 들어봐야 될 것 같은데.”

   “......”

   “햄버거 먹을래요?”

 

   자초지종과 햄버거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닥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햄버거? 열 개도 사줄 수 있었다. 성추행으로 신고만 안 한다면.

 

   남자는 치즈 와퍼 라지 세트를 먹으면서 내 얘기를 들었다.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전부 털어놨다. 얘기를 하다 보니 지금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커밍아웃을 하고 있구나 싶어 잠깐 말을 멈췄는데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감자튀김을 하나 내밀었다. 난 또 홀린 듯 입을 벌리고 그걸 받아먹었다.

 

   배를 채우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쥐고 나왔을 땐 서로 이름과 나이를 알고 난 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형은 그때 딱히 내 얘기에 관심이 없었다. 어이없게도 햄버거를 하나 더 먹을까 아님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태형을 힐긋 보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옆모습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생긴 얼굴도 존재하는 구나. 같은 학교인데 왜 몰랐지. 경영학과면 건물도 우리 사과대 바로 옆인데. 멍하니 보고 있는데 태형이 어깨를 툭 쳤다. 파란불이 된 것도 모르고 얘 얼굴만 감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슬슬 헤어지기 위해 폼을 잡았다. 잘 생긴 얼굴 계속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만남은 오래 지속되어선 안 된다. 잘못된 만남이다. 암 그렇고말고. 지민은 정문 앞에 서서 태형을 바라봤다. 잘 가라는 암묵적 미소였다. 그러나 태형은 말간 얼굴로 싱긋 웃을 뿐이었다.

 

   “햄버거 하나로 퉁 치려고?”

   “...?”

   “저녁도 사줘.”

 

   그래, 잘못된 만남이 맞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단다. 분위기가 죽인다며. 입 다물고 따라가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이대로 노예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녁도 사줘 가 내일도 밥 사줘 가 되고, 한 달 밥값 책임져줘 가 되고, 결국 너 내 똘마니 할래? 가 되는 건 아닐까. 젠장. 눈앞이 캄캄했다. 내 인생 어떻게 되는 걸까. 그날 한강 다리를 갔어야 했는데. 하...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그러나 지민은 한 시간도 안 되서 모든 걱정을 훌훌 털어냈다. 가게는 태형의 말대로 정말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는 치킨과 맥주, 콜라를 시켰다. 신나는 밴드 음악이 나오자 태형이 기분 좋게 어깨를 움직였다. 그러다 태형은 네 얘기만 들을 수 없다며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평온함을 되찾은 지민은 턱을 괴고 태형의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을 내냐구.”

   “그러게. 너무 했당.”

 

   퍽퍽한 가슴살은 밀어두고 기름지고 맛있는 살을 포크로 콕 찍어 내밀었다. 태형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먹었다. 우린 분위기에 취해 조금 들떠있었다.

 

   “나 소스 찍어서 또 줘.”

   “웅.”

 

   소스를 찍으면서 뭔가 살짝 이상했지만 태형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냠 소리까지 내가며 야무지게 받아먹은 태형이 불현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헐 너 인제 나랑 계약 하나 할래?”

 

   아 시바... 올 게 왔다. 결국 노예 계약을 하게 되는구나. 평온함이 깨진 지민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지장 찍을 손가락을 문질러 닦았다.

 

   “연후인지 윤후인지 걔 볼 때마다 곤란할 거 아냐.”

 

   ...연후 윤후 아니고 연호. 지민은 태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예 계약 말하는 게 아닌가...? 일말의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랑 사귀는 척 하자.”

   “푸흡!!!”

   “아, 디러...”

   “미안 미안. 뭐라고?”

 

   지민이 티슈를 왕창 뽑아 태형의 얼굴이며 옷을 마구 두드려 닦았다.  “괜찮아. 너부터 닦아.” 태형이 손등으로 젖은 턱을 닦아주자 순간 기분이 이상해진 지민이 흠칫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는 사이 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일이 좀 생겨서. 형 먼저 가.” 태형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뭐하나 봤더니 직원에게 펜을 빌리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웃어 보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태형이 티슈를 종이처럼 테이블에 깔았다.

 

   “뭐해?”

   “드라마 보니까 구두 계약은 문제 생기면 내용 입증이 골치 아프더라고.”

 

   갑자기 있지도 않은 안경을 올리는 척 하면서 명석한 표정을 한다. 아니, 그 계약인지 뭔지 한다고도 안 했는데... 게다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진지한 건데?

 

   “기간은 윤호랑 내 소문 떨어져 나갈 때까지로 하자.”

   “...연호.”

   “아, 연호.”

 

   태형은 티슈에 글씨를 쓰면서 가볍게 웃었지만 지민은 함께 웃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상황이 말도 안 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귀는 척을 하자고? 너랑 나랑? 왜?

 

   “저기, 태형아.”

 

   고개까지 숙인 채 열심히 쓰고 있는 태형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말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우와... 너 손 진짜 작다.”

   “...어?”

 

   말릴 생각이었다. 정말로.

 

   “어떡해. 귀여워.”

 

   차이가 나봤자 뭐 얼마나 나겠나 했는데 황당하게도 태형의 한 손에 주먹이 전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와 뭐냐. 자존심 상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태형은 손 크기도 재보고 깍지도 껴보면서 연신 즐겁게 웃었고 난 머쓱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안 될 것도 없었다. 김태형이 도와만 준다면 그날 일 쯤은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 차연호를 피해 숨어 다닐 일도 없고. 널 좋아했던 건 지난 날 아주 잠깐이었고 지금 내 옆엔 김태형이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지 않을까?

 

   처음엔 말도 안 된다 생각해놓고 어느덧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하, 진짜 말릴 생각이었는데. 얼빠인 나는 저 얼굴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꼬박 하루 숨어 다녔다고 그새 몸이 적응했는지 지민은 숨지 않으려 해도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차연호와 비슷한 뒷모습만 보여도 몸이 흠칫 흠칫 놀랐다. 제대로 마주쳐야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 정도로 심장이 벌렁벌렁 한 걸 보면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어제 태형과는 막차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떠들다 겨우 헤어졌다. 별 시답지 않은 얘기들이었는데도 신기하게 재밌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웃었다. 시원하던 맥주는 그대로 방치돼 미지근해지고 식어빠진 치킨은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단순히 예쁘고 잘 생긴 줄만 알았던 태형은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고 웃을 땐 눈이 살짝 접히면서 입이 네모 모양이 됐고 중간 중간 내 손가락을 가져가 만지는 걸 봐선 작고 귀여운 거라면 껌뻑 죽는 것 같았다. 화법도 독특했다. 논리정연한 문장을 구사하진 않지만 태형만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함이 있었다. 막차에 올라탔을 땐 주머니에 티슈가 들어있었다. ‘각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똑같은 내용이 적힌 티슈를 한 장씩 나눠 가진 것이었다. 오늘 아침 지민은 그 티슈를 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곱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구석에 작게 있는 태형의 서명이 나름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태형을 생각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복도 저 끝에 차연호가 있었다. 헉.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데 차연호가 더 빨랐다. 지민의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민아. 너 나 피하는 거 맞지?”

   “어? 야 무슨... 내가 널 왜 피하냐. 바빠서 그랬어. 바빠서.”

 

   차연호는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색한 정적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저번에 술자리에서,”

   “야. 차연호.”

 

   지민이 입술을 축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우선 말을 막는 건 성공했는데. 준비해놓은 멘트가 있는데 연습까지 해놓고 도통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나가던 몇몇 녀석들이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짧게 심호흡을 하곤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는데 그거 별 거 아냐. 신경 쓸 필요 없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자. 자연스럽게.

 

   “다 지난 일이고 나는 지금...”

   “......”

   “지금... 그러니까...”

 

   왜 이래. 빨리 말해. 김태형이랑 사귄다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목구멍에 걸린 말은 안 나오고 머리는 어질어질 몸은 돌처럼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누구랑 사귄다는 거짓말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시바. 사실 나는 모쏠이었다.

 

   “지금 뭐?”

 

   차연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나는 지금... 사귀는 사람이...”

   “내 애인한테 쓸데없이 관심이 많네.”

 

   정말이지 그 순간은 꼭 무슨 마법 같았다. 차연호 목소리가 아닌 김태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돌아본 곳엔 태형이 서있었다. 벽에 기댄 채 여전히 예쁘고 잘 생긴 얼굴로 웃으면서 말이다.

 

   태형은 자연스레 지민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황한 지민이 눈을 굴리든 말든 능청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허리를 당겨 가깝게 붙었다. 쪽팔리게 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인?”

   “지민아. 우리 사귄다는 말 아직 안 했어?”

   “어? 어... 어.”

 

   차연호가 뭔가 미심쩍다는 듯 둘을 번갈아 보았으나 태형은 지민만 바라보며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친구랑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자.” 태형은 차연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민은 거의 품에 안겨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의 손을 잡고 건물을 나오는데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면 김태형이 진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태형은 지민을 교내 옥상 카페로 데려갔다. 지민을 앉혀두고 사라진 태형은 이내 딸기 스무디 두 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빨대까지 꽂아 입에 물려주는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지민이 놀랄 정도였다.

 

   “나 이거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네가 어제 말했어.”

   “아...”

 

   이런 거까지 말했어? 진짜 별 얘기를 다 했구나.

 

   “지금 계약서 갖고 있어?”

 

   순간 무슨 계약서 말하는 건가 했다.

 

   “있음 꺼내봐.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하자.”

 

   지민이 순순히 지갑에서 티슈를 꺼내는 동안 태형도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원하는 조항 같은 거 있어? 내가 지켜야 할 거.”

   “......”

   “아까는 급해서 내 맘대로 했는데 네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할래.”

 

   길고 예쁜 손가락 사이로 돌아가는 펜을 멍하니 보다 태형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한다니.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얼굴이 저렇게 생겨서 그런가. 아님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시원한 스무디를 한 입 쪽 빨았다. 원하는 조항이라... 하나 있긴 한데. 태형은 곰곰이 생각 중인 듯한 지민을 말없이 기다렸다.

 

   “먼저 안 웃는다고 약속해.”

   “안 웃을게.”

 

   김칫국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래, 정말 혹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키스는 안 돼.”

   “먼저 해놓고 이제 와서 안 된다고?”

   “야 그건! 키스는 아니지...”

   “앞니 다 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 씨... 쪽팔리게 진짜.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지는 지민을 보며 태형이 몰래 웃었다.

 

   “지민아.”

   “왜.”

   “너 설마 그게 첫 키스고 그런 건 아니지?”

   “......”

   “......”

   “......”

   “...맞아?”

   “무슨... 미쳤냐? 아니거든?!”

   “아님 말고. 왜 화를 내.”

 

   얘 진짜 뭐지? 마법사 맞나?

 

   “아무튼 키스는 안 돼.”

 

   태형은 펜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지민을 뚫어지게 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을. 그러더니 대뜸 “왜?” 하고 물었다. 지민은 난간 앞에서 키스하는 커플을 보고 있었다.

 

   “그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

   “......”

 

   턱까지 괴고 지민을 보던 태형은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눈썹을 실룩이며 시선을 피했다.

 

   “알았어.”

   “근데 난 뭘 하면 돼?”

   “응?”

   “너는 나랑 사귀는 척 해주고. 나는?”

 

   태형이 노트에 계약 내용을 옮겨 적다말고 잠시 손을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사귀는 척 하다 보면 소문 같은 건 없어져 있겠지 뭐.”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태형을 보며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소문 때문에 난리 난리를 칠 땐 언제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한다. 둘은 노트 페이지 맨 아래 서명을 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본격적인 계약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지민은 첫날부터 계약을 전부 무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태형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쟨 배우가 돼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아침마다 영 적응이 안 되는 모닝 백허그와 볼 뽀뽀를 받아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붙어오는 손과 몸에 깜짝깜짝 놀라야 했다. 그러다보니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종일을 쿵쾅댔다. 나중엔 귀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쿵쿵. 쿵쿵. 그 소리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속도 좋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김태형 게이였어? 하고 수군대는 게 나한테까지 들리는데 그럴 때마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흐흥 웃었다. 주변 눈치를 보며 손을 빼려하면 입술을 내밀고 삐친 척을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다가도 곰돌이 같은 저 웃음을 보면 나도 그냥 같이 웃게 됐다. 순간순간 태형이가 정말 내 남자친구인 것만 같았다.

 

   “왜 피해?”

   “야... 너무 갑자기 이렇게...”

   “너무 갑자기야?”

 

   이제 좀 적응했나 싶었는데 이번 건 진짜 놀랐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다 갑자기 태형이 목덜미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순간 목부터 어깨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태형은 너무하단 얼굴로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이 정도도 못 하는 커플이 어디 있어?”

 

   쟤가 저런 말을 하면 난 진심으로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이쪽 길은 사람도 얼마 없는데 굳이...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간 정말 토라지기라도 할까 얼마 전 태형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던 웃음을 지어보였다. 태형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알았으니까 얼른 와. 배고프다며.”

   “손 잡아줘. 아님 안 가.”

 

   더 있다간 바닥에 주저앉기라도 할 기세였다. 성큼성큼 다가가 공중에 팔랑이는 손을 잡아챘다. 딱 들어맞는 손가락이 자연스레 얽혔다. 오늘도 나는 내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김태형한테 져주고 있었다.

Foolish

*

 

 

 

   인생 첫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했다. 여자친구 아니고 남자친구. 하지만 진짜는 아니다. 가짜지만 귀엽고 가짜지만 사랑스럽다. 지민이와 있으면 봄에 취하는 기분이다. 연애라는 게 이렇게 재밌었나.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분이 들뜨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매일이 기대되고 즐거웠다. 아침마다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껴안고 말랑말랑한 볼에 입술을 댈 때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지민이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특별하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햄버거를 먹는 내내 지민이는 열심히 자기 얘기를 했지만 미안하게도 그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고 말랑해 보이는 눈코입을 구경했다. 이렇게 귀엽게 생긴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이야? 감자튀김을 받아먹는 부리 같은 입술을 보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목이 타서 콜라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햄버거 가게를 나왔을 땐 정말 보내기가 싫었다. 처음엔 분명 얘 뭐지? 였는데 어느새 얜 뭘까? 가 되어있었다. 얼른 헤어지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했지만 모른 척 붙잡았다. 술을 사라는 말은 다 핑계였다. 그냥 지민이를 더 보고 싶었다. 술이 들어가니 발그레해지는 두 뺨이 귀여웠다. 워낙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한 나였지만 지금까진 그게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지민이가 처음이었다. 먼저 입술을 갖다 댄 것 때문에 지민이는 곤란해 하면서도 내 말이라면 쉽게 거절을 하지 못했다. 오늘이 지나면 그날 일은 다 지난 일 아니냐며 날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 언뜻 들은 연후인지 윤후인지 그 녀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쁜놈이 되는 것보다 지민이를 붙잡는 게 더 중요했다. 거길 못 세운다는 헛소문도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 마디로 지민이를 제외하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티슈를 한 장씩 나눠 갖고 막차에 올랐을 땐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봉오리들은 꼭 내 마음 같았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키스는 안 돼.”

 

   청천벽력이었다. 키스 금지라니. 그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키스 생각만 한 건 아니지만. 사귀는 사이에 키스가 안 된다니. 이해가 안 됐다. 그럼 저 입술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소리야? 신종 고문인가?

 

   “그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

 

   ...그래, 난 가짜다 이거냐.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 가짜 맞잖아. 나도 날 모르겠어서 속이 답답했다.

 

   이런 말을 하면 지민이가 기겁을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껏 만나온 여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지민이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날 위해 어디서 뚝 떨어진 천사가 아닐까. 그날 입술 박치기도 다 운명이었던 거고. 그동안 여기저기 차이느라 고생했다고 선물로 주신 거 아닐까. 그게 아니고선 어떻게 날 이렇게 매일매일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캠퍼스에 벚꽃이 가득했다. 지민이는 날이 갈수록 더 귀여워졌다. “지민이 약간 심각하게 귀엽지 않아?” 물으면 다들 질색팔색을 했다. 네 눈에나 귀여운 거라면서. 말도 안 돼. 세상엔 거짓말쟁이들이 판을 친다.

 

   나보다 시험이 하루 늦게 끝나는 지민이를 기다렸다. 밤 벚꽃 보러 가자고 일주일을 졸랐다. 드디어 오늘이었다. 맛있는 거 먹이고 사진도 많이 찍어줘야지. 흐드러진 벚꽃 아래 선 지민이를 상상하며 두 다리를 흔들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지민이가 보였다. 앉은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리자 지민이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시험공부 때문에 말랑하던 볼살이 그새 좀 줄었다. 다시 찌워놔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들었다. 가방을 들어주면서 볼캡 아래 눈두덩이에 짧게 쪽, 뽀뽀를 했다. 두 눈만 깜빡이고 푸흐 웃을 뿐 이젠 놀라지도 않고 앞장서 걷는다. 쟤 지금 내 뽀뽀 완전히 적응한 거 맞지? 으 귀여워!

 

   사실대로 말하자면 벚꽃이 보고 싶어 온 건 아니다. 벚꽃을 보는 지민이를 보고 싶었던 거지. 자취방에 가방을 던져두고 고기부터 사먹였다. 배부르다고 우는 소리를 했지만 디저트로 팬케이크까지 먹이니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해가 질 무렵 손을 잡고 석촌 호수를 걸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벚꽃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연인, 가족, 친구 모두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향긋한 꽃냄새와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강아지들이 지나갈 땐 지민이가 눈높이를 낮추고 방긋 웃었다. 조금 한적한 곳이 나왔을 때 지민이를 뒤에서 껴안았다. 좋은 향기가 났다. 하나 둘 불빛이 켜지는 호수를 보던 지민이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내 속눈썹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 손길 하나에 주변 소리들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 진짜 예쁘게 생겼어.”

 

   이 분위기에서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그것도 엄청 진지한 얼굴로. 예상을 빗나가는 엉뚱함에 웃음이 나왔다.

 

   “네가 훨씬 더 예뻐.”

 

   벚꽃 아래 서있어서 그런지 유독 지민이의 뺨이 붉었다. 그 위로 몇 번 입을 맞추다 지민이가 살짝 눈을 감았을 때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지민이의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살 물면서 허리를 끌어당겼다. 우린 맞닿은 입술 사이로 간지러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더 이상 가짜가 아니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민이가 좋았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타고 물이 뚝뚝 흘러 내렸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손등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마주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 태형이 저번에 마지막으로 차인 여자였다. 옆 학교 동갑내기. 할 말이 있다길래 나왔더니 대화는커녕 보자마자 찬물 세례였다. 이런 식의 무례함은 참을 수 없었다.

 

   “너 게이라며.”

   “......”

   “말해봐. 나 갖고 논 거야?”

 

   그 소문이 거기까지 갔구나. 하여간 SNS는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태형은 SNS를 하지도 않는데 늘 여기저기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이럴 땐 좀 피곤했다.

 

   “너한테 그걸 꼭 설명해야해?”

   “뭐?”

   “얘기하기 싫어.”

 

   여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태형의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이제 상관도 없는 사람들한테 지민이 얘기를 하기 싫었다. 지민이와 둘만의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고 지민이를 향한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꺼내 보여주기도 싫었다. 이건 지민이만을 위한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 게이인 거 숨기려고 나 이용했냐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이미 천하에 개새끼 된 거 굳이 나서서 해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럴 시간에 지민이를 한 번 더 보러 가는 게 낫다. 말 나온 김에 보고 싶다 메시지나 보내볼까 생각하는데 마침 카페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지민은 울고 있는 여자에게 티슈를 건네는 내 손 한 번, 조금 당황한 내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그대로 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너무 순식간이라 상황 파악도 잘 안 됐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가방을 챙겨 지민이를 따라 나섰다. 걸음이 느려 얼마 가지도 못한 지민이의 앞을 막아서기까지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전혀 오해할만한 상황이 아닌데 오해를 한 것 같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얼마든지 오해해도 괜찮지만 지민이만큼은 예외다. 우리 사이엔 그 어떤 오해도 있어선 안 된다.

 

   손목을 잡으면 놀랄 것 같아 빠르게 뛰어서 앞을 막아섰다. 걸음을 멈춘 지민이가 시선을 마주했다. 그새 차분해진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지민아. 아닌 거 네가 더 잘 알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초조했다.

 

   “태형아.”

   “응.”

 

   침착한 목소리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사람의 직감이란 무섭다. 그리고 태형은 앞으로 닥쳐올 상황이 무서웠다. 뭔가 정리를 끝마친 듯한 저 얼굴이.

 

   “우리 이제 그만할까.”

 

   무서웠다.

 

 

 

*

 

 

 

   능청스레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우린 시작부터 가짜였으니 순간순간 보여주는 태형이의 눈빛이나 표정들은 전부 진짜가 아니라고. 그 생각이 흐려지지 않게 계속 상기시켰다. 사실상 계약은 끝이 났다. 차연호는 정리됐고 태형이의 소문 또한 잠잠해졌다. 태형이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관계를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아마 연기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태형이가 솔직해질수록, 그 진심이 무거워질수록 불안감에 도망치고 싶었다. 저렇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마음은 그만큼 더 빨리 사라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상처 받을 내가 두려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았다. 그러려면 핑계 거리가 필요했다. 그동안 태형이가 매일같이 예쁘다 말해줬던 게 무색하도록 나는 못난이 겁쟁이였다.

 

   태형이는 내가 놀라기라도 할까 손도 대지 못하고 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늘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내 눈만 보고도 뭘 원하는지 알아챌 정도였다.

 

   “지민아. 아닌 거 네가 더 잘 알지?”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마음이 아팠다.

 

   “태형아.”

   “응.”

 

   태형이의 눈가가 떨리는 게 보였다. 괴롭다.

 

   “우리 이제 그만 할까.”

 

   너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몇 번이고 손을 잡으려는 걸 무시하고 뿌리쳤다. 태형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어보였다. 내가 단단히 오해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있는 대로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깨달았을 거다. 오해한 게 아니라는 걸. 결국 답답함에 화가 났으면서 바보같이 나한텐 제대로 화도 내질 못했다.

 

   “이렇게 그만 두면 나는.”

   “......”

   “나 버려두고 혼자 도망가겠다고?”

 

   차마 태형이의 눈을 볼 수가 없어 이를 꽉 물고 다른 곳을 봐야했다. 눈물을 참아내느라 목이 아프고 심장이 저릿했다.

 

   “나만 진심이었어?”

 

   진심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더 이상 버티고 서있기가 힘들었다.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끝을 내야 한다. 수십 번 마음을 다잡고 나서야 태형이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땐 숨 쉬는 걸 잊어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두 눈이 말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동자는 더 이상 설렘으로 반짝이지 않았다.

 

   “지민아... 무슨 말이라도 해봐. 제발.”

   “......”

   “......”

   “나 너 안 좋아해.”

   “......”

   “가짜였잖아. 처음부터.”

 

   더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내 속을 전부 꺼내 보여줄 것 같아 멍하니 서있는 태형이를 지나쳐 무작정 걸었다. 나중엔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고작 반나절 엉엉 울어놓고 태형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놓고 난 못난이야 중얼거리며 몇 시간을 질질 짰다. 처음엔 내 새끼가 왜 못난이냐며 달래주던 엄마도 결국 질려서 지갑을 던져주고 제발 나가서 울다 오라 했다.

 

   어제 자체 휴강을 때리고 내친김에 오늘도 할까 했으나 이번 시험 죽 쒀놓은 게 생각나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가방을 챙겼다. 평소 그냥 웃어도 앞이 잘 안 보이는데 울기까지 하니 아주 가관이었다. 무슨 저승길이라도 끌려가는 애 마냥 느릿느릿 운동화를 신었더니 엄마가 뒤에서 혀를 끌끌 찼다. 아침부터 서러움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최대한 피하려고는 했지만 태형이는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이틀 내내 울리던 전화도 뚝 끊긴 지 오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애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설마 어디 코 박고... 아, 아니지 아니지. 이런 생각 하면 안 돼. 고개를 좌우로 털고 여기저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나 멍하니 보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순간 너무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당연히 태형이는 아니고... 사촌형이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잠깐 얼굴이나 볼까 싶어 전화한 거란다. 딸기 프라푸치노 위에 쌓인 생크림을 휘휘 저었다. 만나자마자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한참을 웃어서 기분 바닥 치게 하더니 음료는 또 제일 큰 사이즈를 시켜줬다. 사람 병 주고 약 주나. 그래도 맛있어서 군말 없이 빨대를 입에 물었다. 태형이도 이거 자주 사줬는데. 형은 사약 같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내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꼬라지가 이렇게 된 거야?”

   “......”

   “걔 꼬라지는 어떻디?”

   “...몰라. 안 보여.”

   “뭐 어디 절이라도 들어간 거 아니냐. 난생 처음 남자한테 상처 받은 거잖아.”

   “......”

 

   절은 내가 들어가고 싶다.

 

   “그래도 형한테 이렇게 말하니까 좀 낫다.”

   “어디 말도 못하고 며칠을 질질 짰겠네.”

 

   피 좀 섞였다고 이렇게 사람 꿰뚫어 보기 있냐.

 

   “먼저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해. 진심 아니었다고.”

   “......”

   “이 말 듣고 싶어서 구구절절 묻지도 않은 얘기 늘어놓은 거 아냐?”

 

   ...진짜 싫다. 맞는 말만 해서 더 재수 없어. 빨대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형 어깨 너머로 믿기지 않는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싶어 눈까지 비벼봤으나 진짜였다. 흰색 볼캡을 눌러쓰고 어깨엔 베이지색 가방을 걸치고 있는 김태형. 넋을 놓고 보느라 “쟤야?” 하고 묻는 형의 목소리는 한참 뒤에나 들려왔다.

 

   “야 정신 차려. 입에 다 묻었잖아.”

 

   형이 환멸 어린 표정으로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는 순간 태형이가 앉을 자리를 찾는 건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미친 순발력으로 재빨리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지만 이미 태형이와 눈이 마주친 뒤였다. 얼마나 세게 박았으면 쿵 하는 소리가 났는데 아픈 것도 안 느껴졌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댔다. ...울고 싶다 진짜. 어떡해. 테이블 밑을 기어서 밖으로 나갈까 고민하는 찰나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서는 게 느껴졌다.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태형이가 말없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인데 어딘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은 살이 내려서 두 볼이 홀쭉했다. 태형이는 형을 보면서 턱뼈가 움직이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형은 자신에게 닿는 싸늘한 시선에 영문도 모른 채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태형이가 다시 날 돌아보면서 한숨을 뱉었는데 그 속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아차 싶었다. 이건 진짜 오해다. 그때의 나처럼 오해한 척이 아니라 진짜 오해.

 

   “태형아. 그게,”

   “잠깐 얘기 좀 해.”

   “......”

 

   이대로 따라 나가는 게 맞는 걸까. 단지 확신이 필요해서 형을 쳐다본 건데 그것까지 오해한 태형이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날씨는 더럽게도 좋았다. 내려앉는 햇살과 바람이 따뜻했다. 그 속에 서있는 태형이만 냉랭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생각을 정리하는 건지 한참을 돌아서있던 태형이는 내가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지민아.”

   “......”

   “묻고 싶은 건 많은데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안 할게.”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축 처진 눈을 하고 말한다.

 

   “너 안 보고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

   “나 안 좋아해도 되니까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만 있어주면 안될까.”

   “......”

   “안 보니까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래...”

 

   절박한 목소리에 눈가가 뜨거워져 입술을 앙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저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해. 진심 아니었다고. 아까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형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런데 태형이는 내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실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힘겹게 돌아서려는 태형이의 옷자락을 얼른 붙잡았다.

 

   “사촌형이야.”

   “...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고 사촌형이라구.”

   “......”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

   “......”

   “나도 너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어서 맨날 울었어. 나 진짜 못났지.”

 

   한 번 쏟아내기 시작하니 진심은 폭포수 마냥 마구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도 태형이 눈물이 멈춰서 후회가 되거나 하진 않았다. 태형이는 울고 있는 내 앞으로 다가와 젖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익숙한 다정함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우리를 쳐다보는데도 내 눈엔 태형이만 보였다. 이제는 숨길 수도 없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거짓말 했어. 좋아하는데... 무서워서...”

   “알아. 다 알아. 지민아.”

 

   태형이가 안아주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따뜻하고 너른 품에서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태형아.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해. 흐어엉.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내 등을 태형이가 큰 손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태형이는 내 두 뺨을 잡고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같이 울어서 빨개진 눈을 하고.

 

   “혼나는 건 나중에. 대신 약속해. 다시는 나 혼자 두지 마.”

   “응. 응. 절대 안 그래.”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대답했더니 태형이가 귀여워서 못 살겠다고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곤 슬쩍 눈치를 보다 물었다.

 

   “아직도 키스는 안 돼?”

 

   저건 내 대답을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밤 벚꽃 보면서도 해놓고. 투명한 김태형. 사랑스러운 김태형.

 

   “돼. 얼른 해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조르듯 까치발을 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했더니 태형이가 장난스레 고개를 뒤로 빼고 웃었다. 막상 해달라니까 요리조리 피하는 게 얄미웠다. 안달난 내가 뒷목을 잡고 그대로 키스했다. 입술이 벌어지자 태형이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안고 숨 막히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태형이랑 키스하면 짜릿함에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혀끝이 닿으면 캄캄하던 눈앞에 형형색색 폭죽이 터지고 달콤한 마시멜로 맛이 난다. 나만 이렇게 좋은 줄 알았는데 태형이도 똑같다고 했다. 대신 마시멜로가 아닌 슈크림 맛이 난단다.

 

   “인제 키스 맨날 할래.”

   “누구 맘대로?”

   “나 아직 화 안 풀렸거든?”

   “웃기시네. 너 아까부터 웃고 있거든?”

 

   우리는 아주 평범한 연애를 했다. 서로 먹여주느라 삼십분이면 다 먹을 밥을 두 시간 가까이 먹었고, 학교 근처 카페마다 우리만의 자리를 만들었고, 허구한 날 쪽쪽 대는 거 꼴 보기 싫다며 맨날 동방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밤 산책을 하면서는 춥다고 서로 옷을 벗어주려다 결국 옷을 바꿔 입고 한참 큭큭 웃는 바람에 오밤중에 시끄럽다며 호되게 혼이 났다. 기억도 잘 안 나는 이유들로 싸우고 하루를 못 가 새벽에 펑펑 울면서 전화로 화해를 했고, 집 앞 가로등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키스하는 비밀장소가 됐다.

 

   그 평범한 연애가 너무도 재밌었다. 매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유치하게 만두 하나로 삐치고 울어도 김태형이라서, 박지민이라서 괜찮았다. 이 봄이 지나면 우린 또 남은 계절들을 함께 울고 웃고 지지고 볶을 것이다. 형들 말을 빌리자면 징글징글하게 붙어서 말이다. 뭐 좀 바보 같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에게만 특별하면 된다. 그리고 약속하면 된다. 기꺼이 함께 바보가 되어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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