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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핑블

   "이러다 벚꽃이 다 떨어지고 말겠구나."

 

   지민이 툇마루에 앉아 종일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빗물이 그의 하얗고 작은 손가락을 적시며 부서져 내렸다. 

 

   "세자 저하, 아직 바람이 많이 차갑습니다. 혹여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스럽습니다."

 

   걱정이 가득한 내관의 말에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빗물에 젖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지민은 늘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온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비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한 연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상선은 그것을 걱정하면서도 쉬이 말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직 벚꽃이 질 때가 아닌데 말이지."

   "개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시간이 있사옵니다, 저하."

   "응, 그래야지."

 

   지민은 훅 끼쳐오는 찬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며 창을 닫았다. 벚꽃이 다시 필 때 즈음, 다시 보리라 약조를 하였는데 무정하게도 벌써 세 번의 봄이 지나가 버렸다. 지민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방 한구석에 자리한 자개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장 깊은 곳에서 꺼낸 것은 겉표지부터가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나달거리는 책 한 권이었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자 하얀 종이 한 장이 버선발 앞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 펼친 지민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얼굴을 꼭 닮은 바른 필체로 적혀있는 제 이름을 몇 번이고 손끝으로 쓸었다. 지민아, 낮게 깔린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혹시 내 앞으로 온 서찰은 없느냐."

   "예, 저하. 요즘 통 소식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여 다른 이에게 알아보라 일러두었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간간이 전해져 오던 그의 서찰도 소식이 끊긴 지 어언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탓에 요즘은 밤에 잠도 쉬이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띄게 까칠해진 세자의 얼굴에 눈치가 빠른 상선은 이미 사람을 시켜 그의 근황을 알아보라 일러두었다. 하루빨리 그자가 소식을 가져와 근심 가득한 세자의 얼굴에서 어두운 구름이 걷히길 바랄 뿐이었다.

 

   상선은 문득 그와 함께하던 지난날의 세자를 떠올렸다. 늘 봄과 같이 해사한 웃음을 짓던 두 사람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던 그였다. 그날 이후, 지민의 타고난 따듯한 성정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늘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운 빛을 띤 지 오래였다.

 

 

* * *

 

   "저하,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

   "어허, 네가 정녕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럼 어서 불러 보아라."

   "..."

 

   어서 불러보래도, 채근하는 지민의 말에 태형은 애꿎은 비단 자락만 꾹 쥔 채 안절부절못했다. 이어 작은 한숨과 함께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있는 지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웃음이 어릴 적 모습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민아,"

   "그래, 태형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지민의 등 뒤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귓가가 간질거렸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흩날리는 벚나무 꽃잎들을 바라보던 지민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이러다 하루가 다 가겠다. 어서 나가 보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이 못내 다정하여 지민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느새 반 뼘은 더 자라버린 태형 탓에 그의 발뒤꿈치가 느리게 올라섰다.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연분홍빛 꽃잎을 집어 드는 몸짓이 춤을 추는 듯 우아했다. 태형의 입이 조금 전보다 더 꾹 다물렸다. 저도 모르게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축이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비단이 스치는 소리가 괜스레 마음을 붕 떠오르게 했다.

 

   “되었다. 이제 정말 가자, 궁 밖으로.”

 

 

   잠행이라는 이름 아래, 궁 밖으로의 외출은 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지민의 모습의 태형의 입꼬리도 어느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언제와도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는 지민이겐 별천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장 한복판에서 태형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런 탓에 태형은 늘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그를 호위하곤 했다.

 

   "태형아, 이것 좀 봐라. 참 신기하게도 생겼다."

   "나리, 이것이 이번 청나라에서 넘어온 아주 진귀한 물건이옵죠."

   "그으래?"

 

   흥미를 보이는 지민의 반응에 신이 난 상인은 그것을 그 눈앞에까지 들어 보이며 열심이었다. 태형은 그러한 상인이 영 못마땅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웃음이 쏟아질 듯한 얼굴로 즐거워하는 지민의 모습에 조용히 반걸음 물러서 그를 눈에 담았다. 

 

   "태형아, 너는 이것에는 통 흥미가 없나 보다. 이보게, 내 조금 더 돌아보다 오겠네."

   "예예. 감사합니다, 나으리."

   "... 아니 저하 저는,"

 

   쉿, 여기서 내가 세자라 떠벌리기라도 할 셈이야?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귓가에 속삭이는 지민의 목소리에 장난이 가득했다. 한 번만 더 말을 낮추지 않았다간 내 혼쭐을 내줄 테야. 태형은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자네가 좀 안내해 주게나."

   "그러고 보니 좀 시장하지 않은...가?"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뭐라도 좀 먹으러 가지."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태형은 제 앞에 놓인 국밥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지민의 그릇을 끌어다가 그것을 한 김 식혀 다시 그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러니 내 버릇이 자꾸 안 좋아지는 게지."

   "내가 모시는 사람인데 당연한 것을."

   "태형아,"

 

   네가 내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조용하게 건네는 그 말에 태형이 내내 반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눈이었다. 늘 제 발끝을 내려다보던 세자익위가 아닌 오랜 벗, 김태형의 눈. 늘 단정하게 굳어있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불어오는 봄바람에 지민의 가슴께가 울렁였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담는 두 사람 머리 위로 벚꽃잎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 * *

 

   지민은 제 앞에 기절한 듯 누워있는 인영에 체면도 잊은 채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그 형체에 손이 절로 덜덜 떨려왔다. 죽은 건가?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몸을 겨우 이끌어 가까이 다가가자 새파란 머리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깨비라도 되는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지민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몸뚱어리를 돌아 눕혔다.

   "허억!"

   "으악!“

   돌아 눕힌 순간 눈을 뜬 인영에 화들짝 놀란 지민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누, 누구세요?”

   “... 태형?”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멀리서 들려오는 상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말 그대로 얼이 나가버린 그는 멍한 얼굴로 입술만 간신이 달싹이며 말했다.

   “아직 들지 말라. 물러가 있게나.”

   “예, 저하.”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주먹으로 한쪽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던 파란 머리의 태형은 불쑥 지민에게 다가와 말을 던졌다. 뭐야, 아직 꿈인가?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는 거야?”

   “엉?”

   “태형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야? 머리는 어찌... 어찌 이런 꼴을 당했는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누구세요?”

   “어디 머리라도 다친 거야?”

 

   심각해진 표정으로 얼굴까지 가까이하며 저를 살피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진 태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를 아는 듯 구는 남자의 모습에 묘한 소름이 돋은 태형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평소보다 배로 생생한 꿈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연스레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가려던 태형은 갑자기 제 손목을 잡아채는 악력에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나가면 죽는다.”

   “에?”

   “지금 나가면 자넨 바로 죽는다고.”

   “무슨 소리를,”

 

   저하, 전하께 문안을 드릴 시간이옵니다. 인기척과 함께 바로 문 너머로 들려오는 상선의 목소리에 지민은 반사적으로 태형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았네, 곧 일어나지. 제 입과 코를 겨우 가릴 만큼 작은 주제에 힘은 어찌나 좋은지 숨이 막힐 정도로 콱 틀어막는 손아귀 힘에 태형이 버둥거렸다. 옷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여 지민이 그를 데려간 곳은 어두컴컴한 병풍 뒤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욱여넣듯 등을 밀어대자 태형의 반항이 조금 전보다 커졌다. 화가 난 태형은 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쳐낸 뒤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왜 이러는 건데! 그리고 그제야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잠시만 내 말을 들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조금 이따 이야기하자. 금방 다녀올 터이니 제발 아무 소리 내지 말고, 꼼짝 말고 여기 있거라. 응?”

 

   사극에서나 볼법한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네는 주제에 표정만은 애절함이 절절 끓어 태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제야 조금은 안심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재차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가에 대보이곤 병풍 앞으로 가 침상에 앉았다.

 

   “이제 들라 해라.”

   “예, 저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태형 역시 조금 전보다 숨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적셔 닦는 듯 물의 찰방거림이 한참 이어지다 이번에는 비단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있으려니 그 정적은 더욱 크고 무겁게 태형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콜록, 긴장했던 탓일까. 침을 삼키던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작은 기침을 뱉고야 말았다.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하, 혹여 어제 찬기 탓에... 탕약을, 아니 어의를 부를까요?”

   “아니네. 그저 사레가 든 탓이지. 크흠, 흠.”

   그들은 지민의 말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제 할 일을 마친 뒤 방을 나섰다. 곧이어 채비를 마친 지민이 성큼성큼 창호 문 앞으로 다가갔다. 드르륵, 조용히 열린 문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 파란 머리의 태형이 있을 병풍 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내 그 시선을 거둔 지민이 작은 한숨과 함께 방을 빠져나가고 다시 한번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태형이 그 자리에 넘어졌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있던 탓에 저린 다리를 부여잡고 고개만 빼꼼 내민 그는 고요해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방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모두 꽤 고가로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한쪽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책 중 하나를 꺼내 펼치자 온통 읽기 어려운 한자로 가득했다. 금세 흥미를 잃은 태형은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놓고 반듯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침상으로 다가가 슬쩍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폭신한 촉감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몸을 모로 뉘어 턱을 받쳤다. 다시 돌아온다던 그 사람은 언제쯤 돌아올까? 손가락으로 탁탁 방바닥만 두드리던 태형은 밀려오는 무료함에 긴 하품을 뱉어냈다. 조금 전 소란으로 긴장했던 탓인지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지금 자면 안 되는데...”

   안 돼. 눈 뜨자. 잠을 깨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태형의 목소리가 느리게 잦아들었다.

 

 

* * *

 

   문안 인사를 마치고 동궁으로 향하던 지민은 제 뒤를 따르는 발소리들이 거슬렸다. 그만 가보아라.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세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모두 숨을 죽인 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조강(朝講) 전, 식사는 거르겠다는 말을 전하려던 지민은 문득 어두운 병풍 뒤에 숨어 있을 그 얼굴이 생각나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 기운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런 감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불안한 기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애꿎은 주먹만 꾹 쥐었다 피며 지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 어찌 이리 속 편히 자고 있을꼬.”

   비단 이불을 꽁꽁 싸맨 채 제 침상 위에 잠들어 있는 태형을 바라보던 지민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가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낮춰 다가간 지민이 그 앞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잠든 태형을 보는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편안해 보이는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늘빛으로 물든 짧은 머리가 생소하긴 하지만 어딜 보아도 태형이 맞았다. 짙은 눈썹과 그 아래 곧게 뻗은 콧대가 붓으로 그려낸 듯 수려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지민은 느리게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 저, 그...”

   “엉? 나... 왜 아직도 꿈속이지?”

   “응? 꿈?”

   아 이거 이상하네. 잠기운에 취해 몽롱한 눈을 끔벅거리며 중얼거리던 태형이 새파란 머리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지민의 몸이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그 고운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 태형이 지민에게 말했다. 나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한 태형의 말에 지민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처지가 지금 어떠한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게로구나.”

   “무슨 소리야, 그러는 너야말로 도대체 누군데?”

   “... 나는 네 오랜 벗이자 네가 모시던 세자, 박지민이지.”

 

   그 말에 벙찐 표정을 짓던 태형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사극을 너무 열심히 봤나, 별 꿈을 다 꾸네 진짜. 한참이나 큭큭 거리며 배를 잡고 웃는 태형에 지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쯤 되면 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뭐라 한마디 던질 법도 하건만 아무 말이 없는 그에 이상함을 느낀 태형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 내가 웃으려던 건 아닌데, 그... 혹시 화났어?”

   “... 아니다. 신경 쓰지 말아라.”

 

   물기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에 머쓱해진 태형은 도리어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소리마저 어색해질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때쯤 문밖에서 수라를 올리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축축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지민이 조용히 병풍으로 시선을 던졌다. 태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그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인들이 수라상을 차렸다. 조용히 기미를 마치고 나자 지민은 기척을 줄 터이니 나가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병풍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태형은 이것이 정말 꿈이 맞는 것인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라고 하기엔 냄새까지 너무나 생생한 탓이었다.

 

   “태형아 이리 나와 보아라.”

   “어?”

   “시장 할 텐데 좀 들어라. 난 통 생각이 없다.”

 

   지민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꼬르륵 울리는 배에 태형은 얼른 상 앞으로 가 앉았다. 갓 지은 쌀밥과 먹음직스러운 12첩 반상에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그는 염치도 잊은 채 고개를 한번 꾸벅이고는 빠르게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진짜 안 먹어?”

 

   입안 가득 산적을 우물거리던 태형이 물었다. 장난기 넘치던 어린 태형의 모습과 꼭 닮아 보여 지민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 웃는 거 처음 본다. 바쁘게 움직이던 수저도 멈춘 채 건네는 태형의 말에 민망해진 지민이 얼른 표정을 굳히고 웃음을 지워냈다. 찰나가 왠지 아쉬워 태형은 조금 전보다 느리게 손을 움직이며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응. 우선 난 조강을 다녀올 터이니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려보아라. 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을 테니.”

   “뭐... 알았어.”

 

   단정한 몸짓으로 옷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민을 보며 태형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병풍 뒤로 향했다. 고새 익숙하게 구는 행동에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제대로 묻지도 못한 채 어두운 구석으로 그를 숨겨야 하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다녀오겠다는 인사조차 뱉지 못한 채 지민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서연(書筵) 내내 통 집중하지 못하는 탓에 지민은 몇 번이고 지적을 받았다. 결국 강연은 평소보다 일식경 정도 일찍 마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엔 배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엄한 스승의 목소리에도 지민은 그저 멍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종일 이상해 보이는 세자의 모습에 상선은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연을 마치고도 모두를 물리려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간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송구하오나 저하, 혹여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지... 춘곤 때문이라면 오늘은 특식을 올리라 이를까요?”

   “괜찮네. 혹시 소식은 좀 있는가?”

   “아마 사나흘 내로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바로 궁에 들라 일렀으니 늦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오늘은 영 기운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쉬는 게 좋겠다. 누가 찾거든 내일 들라 이르게.”

   “예, 저하.”

 

   방으로 돌아와 흑룡포를 벗어낸 지민은 그제야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병풍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어 보았다.

 

   “아, 왔네!”

 

   마냥 해맑은 얼굴로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형에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지민은 편히 앉으라며 그에게 비단 방석을 내어주었다. 소리가 날 정도로 털썩 주저앉은 태형이 이내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괴고 앉아 지민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어디 한번 말해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 * *

 

   “삼족을 멸하라는 명이 내려졌지만 내 간곡한 청으로 네 목숨만은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거제로 유배를 가게 되었지.”

 

   지민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난 태형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여기의 나는 지금 생사를 알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거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리 묻는 거 아니겠냐. 도대체 여기까지 어찌 온 게야?”

 

   태형은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저 순해 빠진 남자에게 제가 살던 곳을 이해시키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태형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선 쉽게 말해서 난 먼 미래에서 온 것 같아.”

   “미래?”

 

   그러니까 난 네가 아는 그 태형이 아닌 거지. 그 말에 지민의 고개가 갸웃, 모로 기울어졌다. 태형은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종이 뭉텅이 중 하나를 꺼내 붓을 잡았다. 그 위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하려던 태형은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 붓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지민을 바라봤다.

 

    “먹을 묻혀야지.”

   “엉?”

 

   지민은 재빨리 벼루를 꺼내 먹을 갈아냈다. 스윽스윽 벼루에 먹을 문지를 때마다 기분 좋은 소음이 들려왔다. 금세 방안 가득 짙은 먹 냄새가 풍겼다. 태형은 벼루가 제 앞에 놓일 때까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묻혀서 그려보아라.”

 

   태형은 지민의 말대로 먹을 입혀 살살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 일상을 주절주절 두서없이 말하며 낙서하듯 의미 없는 줄을 긋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지민이 바짝 제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럼 이것이 있으면 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단 말이냐?”

   “카메라? 응.”

   “카... 마?”

   “카메라. 아 내 폰 있었으면 보여줬을 텐데. 나 깨울 때 혹시 옆에 네모난 거 뭐 떨어져 있던 건 없었어?”

   “응, 그런 것은 보지 못하였는데. 허, 그것참 신기한 물건이구나.”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지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태형은 신이나 팔까지 걷어붙이고 그가 흥미를 느낄 만한 것들을 골라 계속해서 설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호 문 너머로 상을 올리겠다는 아룀이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두 사람은 허겁지겁 방 안 가득 널브러져 있는 종이 뭉텅이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제자리에서 방황하던 태형은 손에 들고 있던 붓도 내려놓지 못한 채 병풍 뒤로 달려갔다.

 

   상을 들고 온 나인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방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기미 상궁이 그 옆구리를 쿡 찌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 굳은 채 얼마를 더 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지민은 기미를 마치자 그들을 물리고 방문을 닫았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태형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밖으로 나와 그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는 배 안 고파. 너 많이 먹어. 제 앞으로 밀어놓은 수저를 다시 지민 앞으로 놓아주며 태형이 말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늘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만 살아온 지민이었기에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형의 눈빛이 몹시 부담되었다. 긴장한 탓에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반찬을 두어 번 흘리자 그가 지민의 손에 들려있던 젓가락을 뺏어 들고는 그의 밥 위로 하나씩 집어 주기 시작했다.

 

   “세자가 젓가락질에 서툰가 보오.”

 

   제 말투를 따라 하며 씨익 웃는 그 모습에 지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변명을 뱉으려는 지민에 태형이 얼른 다른 반찬을 하나 더 집어 올려 주었다. 손에 들린 수저를 향해 고갯짓하며 얼른 먹으라고 재촉하는 탓에 결국 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밥을 씹어 넘겼다.

 

   상선은 종일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한 지민이 걱정되면서도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반찬까지 깨끗하게 비운 그의 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벚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봄을 타는 지민이었지만 여느 날과는 분명 달랐다. 묘한 위화감에 상선은 하루빨리 그가 소식을 가져오기만을 바라며 당분간은 제 세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창을 활짝 열자 은은한 꽃향기가 밤바람에 넘실거렸다. 지민은 손을 뻗어 제 손바닥 위로 쏟아지고 있는 달빛을 쥐어보았다. 고요한 궁 안에 풀벌레 울음소리가 애달프게 울려 퍼졌다. 태형은 병풍 옆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손을 꼼지락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솨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으로 물든 수목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람에 가지를 흔들어댔다.

   “술, 좋아하느냐.”

   

   술의 씁쓸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태형이 대답을 망설였다. 지민이 부스스 웃음을 흘리며 태형을 돌아보았다.

   “너는 그 태형이 아니라면서 어찌 그러한 것까지 똑 닮은 건지...”

   “아주 못 마시는 건 아니야.”

   “그럼 달달한 매실주를 올리라 할까?”

   그래,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민이 바로 주안상을 내오라 일렀다. 침상에 앉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지민의 작은 등이 꽤나 듬직해 보여 태형은 저도 모르게 병풍 밖으로 고개를 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은은하게 켜져 있는 초 몇 개가 전부였기에 병풍 그림자에 몸을 숨긴 태형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주안상을 들고 온 나인이 물러나고 지민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형의 눈빛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태형아,”

 

    잠에 들지 못하는 밤, 정처 없이 뜰이라도 걸을 때면 세 발자국 떨어진 채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나서야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태형이 겹쳐 그려졌다.

 

   “이리 가까이 와 앉아라.”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오는 지민의 목소리가 꽉 메어왔다. 부끄러움에 코를 훌쩍이며 도포의 소매로 얼굴을 살짝 가린 그가 태형을 불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자 어느새 젖었던 표정을 지우고 말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지민이 있었다. 그 앞에 다가가 앉자 향긋한 매실 향이 풍겨왔다. 태형이 먼저 술병을 들어 그 잔을 채워주었다. 쪼르륵 술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지민의 시선이 태형의 손끝 그리고 길에 뻗은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꿈일지도 모르겠구나.”

 

   두서없이 건네오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제 잔을 채우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너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구나, 하며 지민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치, 참 신기하지. 꿈인 것 같지만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해.”

 

   조금 가라앉아 보이는 지민의 모습에 태형은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하고 애꿎은 술잔만 비워냈다. 그런 태형에 지민 역시 속도를 맞추려 급하게 술을 들이켰다. 향긋한 매실주는 그저 달달한 술인 줄만 알았는데 꽤 독주였던 건지 금세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는 볼을 손등으로 식히던 태형은 잔뜩 느려진 손가락으로 엉성한 젓가락질을 하는 지민을 발견했다.

 

   “이거 먹고 싶어?”

   “응, 통 잡히지가 않는구나.”

 

   말투는 여전히 근엄하기 짝이 없는데 발음은 점점 뭉개져 가는 것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태형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지민의 눈이 반쯤 풀어진 채 저를 노려보았다.

 

   “감히!”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입가에 부스러기를 달고 성을 내는 것이 귀여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지민이 화들짝 놀라자 태형의 손 역시 허공에 붕 뜬 채 굳어버렸다. 미안, 작게 사과를 하는 낮은 목소리에 지민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모로 돌린 그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색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주안상을 밀어냈다. 그, 그만 자자. 그 말마저도 너무 어색했던 터라 지민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태형이 재빠르게 병풍 뒤로 몸을 숨겼고 나인들이 들어와 주안상을 치웠다. 곧이어 취침을 위한 준비가 이어졌다. 세안을 마치고 물이 담긴 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물러나는 나인을 향해 지민이 손짓을 했다.

 

   “한 번 더 갖다 주겠느냐.”

   “예?”

   “그 물. 그저 두고 가면 된다.”

 

   나인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저 취기이려니 여기며 다시 물을 떠 올렸다. 태형은 병풍 뒤에 숨어 잔뜩 취해 웅얼거리는 지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웃었다. 모든 취침 준비를 마친 지민이 침상에 누워 병풍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다 준비해 놓았으니 너도 어서 잘 준비를 하여라.”

 

   잠에 취해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대던 지민의 눈꺼풀이 졸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르륵 감겼다. 물그릇 한번, 지민 한번 번갈아 바라본 태형이 웃음을 꾹 참고 조용히 제 얼굴을 닦아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자야 하지? 잠시 고민에 빠졌던 태형은 침상 안쪽에 얌전히 누워있는 지민의 곁으로 가 몸을 뉘었다. 태형은 비단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 뒤 지민의 옆에 바짝 붙었다. 뒤늦게 올라오는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형은 깊게 잠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지민은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에 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떴다. 스르륵 몸을 돌리던 지민은 제 등에 바짝 붙어있는 인영에 놀라 이불을 확 잡아 내렸다. 옷가지는 언제 벗어 던졌는지 태형의 맨 상체가 뜨끈했다.

   “이, 일어나 보아라. 태형아.”

   “우움...”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태형에 지민은 애가 탔다. 눈치 빠른 상선이 오기 전에는 무조건 태형을 숨겨야 했다. 지민은 문득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의 이상한 옷가지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장으로 걸어가 곱게 개어있는 옷 중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머리엔 까치집을 얹고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태형이 물었다. 지민은 저 의복은 오히려 눈에 띄기 쉬우니 치우라는 말을 하며 그것을 입으라 재촉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태형은 반쯤 감긴 눈으로 느릿느릿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복은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보다 못한 지민이 그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손수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너는 영광인 줄 알아라. 내 이리 직접 옷을 입혀주고 있어야 한다니.”

   “근데... 우리 아직 그대로인 거지?”

   “아...!”

 

   도포 매듭까지 곱게 묶은 지민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돌아갈 줄 알았던 태형이 여전히 제 앞에 서 있었다. 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태형이 방황하고 있는 지민의 손을 살짝 쥐어 내려주고는 병풍 뒤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들이었지만 그사이 갑작스레 스며든 태형으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일상들이 이어졌다. 매일 병풍 뒤에 숨어 지민의 방에서 생활하는 것도 벌써 나흘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태형과 함께 점심 수라를 나눠 먹던 지민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왜? 하는 물음에 한참을 망설이던 지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기만 갇혀있으려니 답답하지 않아?”

 

   그 말에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로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오후 업무를 마치고 무언가를 가지고 오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를 달래고 방을 빠져나갔다. 지민이 나가고 나자 금세 무료해진 태형이 침상으로 풀썩 드러누웠다. 서안 위에 올려져 있는 책 하나를 갖고 와 의미 없이 책장을 넘겨댔다. 그 사이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펼쳐보자 글자가 빼곡히 쓰여 있는 것이 편지인 듯했다. 꽤 오래 보관했던 것인지 많이 낡아버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잡고 찬찬히 읽어보았으나 제가 아는 한자라고는 스무 글자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럴 때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태형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창을 슬쩍 밀어 열었다. 그 순간, 뜰을 지나가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태형이 급하게 몸을 일으켜 병풍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세자가 자리를 비운 탓에 쉬이 들어오지 못하는 듯했다. 태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빨리 그가 자리를 뜨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숨소리까지 낮춰가며 한참을 기다리자 그는 자리를 떴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긴장이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 앉은 태형은 제 처지가 처량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조선에 뚝 떨어진 것이 억울했다. 평범했던 제 일상이 그리웠다.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갑자기 밀려오는 무력감에 공포가 밀려왔다.

 

   오후 업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지민은 보이지 않는 태형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통 이 시간에는 침상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숨겨 두었던 간식들을 꺼내먹던 그였는데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는 것에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태형아...?”

   “응.”

 

   지민은 병풍 뒤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찌 여기 이러고 있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 얼굴에 깔린 어둠에 지민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답답하겠지. 겁도 나고. 네가 살던 곳이 얼마나 그립겠어.”

   “...”

   “미안하다.”

   “네 탓이 아닌데 뭐가 미안해.”

 

   내가 조금 더 너를 돌봤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 그러한 말과 동시에 지민이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태형이 의아한 얼굴로 그걸 풀어내자 흑립과 종이에 싸인 검은 가루가 나왔다. 지민은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것을 설명했다.

 

   “일시적이지만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가루라 하더구나. 검은빛으로 물들이고 흑립을 쓴다면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주 무리는 아닐 것이야.”

   “하지만 나가면 죽는다고...”

   “네 얼굴을 알지 못하는 궁 밖은 괜찮을 거다. 어때, 내일 한번 나랑 나가보겠어?”

 

   그제야 조금 웃어 보이는 태형에 지민 역시 그를 마주 보고 웃었다. 내가 장을 가는 것을 워낙 좋아하거든.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작게 열린 창틈 사이로 짙은 노을이 흘러넘쳤다. 지민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 빛에 눈이 부셨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눈에 담았다.

 

 

* * *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태형에 지민은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부스스한 웃음을 흘려댔다. 태형은 어젯밤 받아놓은 물에 검은 가루를 푼 뒤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찰방거리는 맑은 물소리가 자장가처럼 듣기 좋았다. 지민은 답지 않게 잠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비단 이불에 얼굴을 부비며 새벽의 선선함을 즐겼다.

 

   “... 어때?”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잠에 취해있던 지민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

 

   이상해? 잘 안됐어? 거울을 보지 못해 답답한 태형이 지민을 재촉했다. 지민은 검은 머리의 태형을 바라보며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다, 아주 잘 됐다. 잘 어울려.”

   “다행이다. 그럼 오늘은 강연은 듣지 않는 거야?”

   “응.”

 

   종일 바깥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태형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만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런 태형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민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물들이고 나니 정말 그인 것 같아 익숙하면서도 그와는 확실히 다른 그 모습에 지민은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조반을 들고 난 뒤 지민이 먼저 방을 나섰다. 모두가 지민을 따라 동궁을 벗어나자 의복을 모두 갖춘 태형이 슬며시 그 방에서 나와 담을 따라 걸었다. 어젯밤 지민이 일러주었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태형은 궁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길을 이리저리 따라 걸었다. 마침내 커다란 문이 나타났고 태형은 당당한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후,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보니 태형은 별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온갖 상인들이 소리를 치며 물건을 팔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좁은 골목길을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선 길을 잃기 십상이니 나를 꼭 잘 따라 오게나.”

 

   어느새 곁에 다가온 지민이 제 갓을 고쳐 쓰며 태형의 팔을 툭 쳤다. 지민의 얼굴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했다. 태형 역시 그런 지민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태형은 드라마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나같이 신기하고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태형에 지민이 그의 소매를 살며시 잡아끌었다. 그렇게 재미있느냐,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는 지민에 태형이 머쓱한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온갖 재료들을 팔고 있는 골목을 지나고 나자 다양한 옷감과 패물들을 파는 곳이 나타났다. 태형은 그중에서도 다양한 재료로 만든 가락지를 파는 곳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뚫어져라 구경을 했다.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그 모습에 지민은 체면도 잊은 채 웃음을 터트렸다. 맘에 드는 것인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지민이 주머니에서 엽전을 꺼내 내밀었다.

 

   “기념으로 가지도록 해.”

   “어? 아니 괜찮아.”

   “그냥 선물이라 생각해. 그리고 자, 몇 푼 들고 있다가 원하는 게 있으면 좀 사기도 하라고.”

 

   지민이 태형의 손에 쥐여준 주머니가 꽤 묵직했다. 태형은 이것을 받아도 될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들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민이 앞장서 걸어가며 그에게 생소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태형에게 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다 그에게 자신의 세계를 소개하려니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것은 아마도 청에서 들여온 물건... 어?”

 

   곧잘 따라붙던 추임새가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태형이 보이지 않았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에 지민이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태형아, 태형아 어디 갔느냐?”

 

   체면이 있어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지민은 작은 목소리로 태형을 애타게 불러댔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그는 정말 이도 저도 못 할 것을 알기에 더욱 겁이 났다. 어디로 간 거지, 그러다 문득 영영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홀연히.

 

   “... 아, 안돼.”

 

   지민은 제 앞에서 해맑게 웃던 파란 머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뚝뚝하고 제 눈을 바라보지 못하던 그가 아닌, 늘 저와 시선을 맞추며 환하게 웃음 짓던 그 얼굴이.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지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훌쩍이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애타게 찾던 그가 서 있었다.

 

   “왜, 왜 울어. 지민아 왜, 응?”

   “너... 어디 갔었던 거야!”

 

   지민이 그 어깨를 퍽 치자 태형이 뒤로 밀리며 손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다급하게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운 태형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지민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이거 너한테 선물로 주고 싶어가지고.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금방 사 온다는 게... 미안, 놀랐지? 길 따라 쭉 걸어가길래 안 잃어버릴 줄 알았어.”

 

   안절부절못하며 지민을 달랜 태형이 그 손 위에 작은 가락지 하나를 올려두었다. 그가 산 것과 비슷하게 생긴, 백옥으로 만든 가락지였다. 어이가 없다는 듯 지민이 가락지를 내려다보다 태형을 노려보자 그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자꾸 눈에 밟히더라고. 그의 낮은 목소리에 지민은 다시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부러 크게 코를 훌쩍인 지민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가자, 배고프다.

 

   주막에 들려 막걸리까지 걸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태형과 지민은 부리나케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되면 남자는 궁에 들 수 없기에 지민은 초조해졌다. 문지기가 늦은 시간에 궁 안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지민은 그저 옥패를 보여준 뒤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동궁으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지민은 태형에게 일러주었던 뒷길을 다시 한번 일러주며 안뜰로 향했다. 그가 기척을 냄과 동시에 나인과 내시들이 그 곁으로 따라붙었다. 어느새 동궁으로 몰래 들어온 태형은 뒤편으로 몸을 숨긴 뒤 그 안을 살폈다. 환복을 한 지민이 창을 활짝 연 뒤 그들을 물렸다.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기 전 태형이 그 창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슨 첩보영화 찍는 것 같네.”

   “첩보영화? 그건 또 무슨 뜻이야?”

 

   그 똑똑한 세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태형은 이번엔 영화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여놓으며 지민의 호기심을 끌었다. 술이 올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태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발을 까닥이는 모습이 딱 제 나이처럼 보였다.

 

   “답답하지 않아?”

   “날이 선선해서 괜찮아.”

   “아니 그런 거 말고. 사는 거.”

 

   태형의 말에 지민이 무언가에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는 거? 답답하지. 답답하고말고.

 

   “신분이 뭔지, 오랜 벗도 잃고 웃음도 잃고 책임의 무게만 더해지니까.”

   “내가 온 것처럼 너도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곳에?”

 

   태형의 무릎을 베고 누운 지민이 스르륵 눈을 감고 태형이 말했던 그곳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밤이면 모든 별이 땅으로 내려앉은 듯 반짝거리는 길거리와 말보다도 빠른 것들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행복하게 웃는 파란 머리의 너와 그걸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나.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웃고 뛰고 울 수 있는 그곳. 어느덧 꿈속으로 깊이 빠져든 지민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가만히 내려 보고 있던 태형이 그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다. 언제 낀 건지 그의 작은 검지에 자리하고 있는 백옥 가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태형은 그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잠을 청했다.

 

 

* * *

 

   “다시 말해보아라.”

   “송구하옵니다, 저하.”

   “어서. 다시 말해보라고 하지 않느냐.”

   “저하...”

 

   지민은 치미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주변에 있던 나인들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문 뒤로 몸을 감추었다.

 

   “누가 죽어? 누가 죽는단 말이냐, 세자 익위씩이나 했던 자가 어찌 그리 쉽게 죽는단 말이야!”

 

  상선은 땅에 머리가 닿도록 고개를 조아린 채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지민에게 있어 한줄기 동아줄과도 같았던 존재였다.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이 삭막한 궁 안에서 유일하게, 그가 웃게 만든 존재였다. 애처롭게 울음을 터트리는 세자에 상선의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에게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는 제 처지가 애통하여 그는 애꿎은 제 옷자락만 구길 뿐이었다.

 

   태형과 궁 밖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급하게 달려온 상선이 전한 것은 그의 비보였다. 소식을 듣기 위해 보낸 자가 거제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달리했다 했다. 유배를 가던 길에 얻은 병세가 악화되어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내다 갔다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던 지민은 그저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저하의 존함을 그리 불렀다 합니다.”

   “... 상선.”

   “예, 저하.”

   “지금이라도 그 시신을 거두어 제대로 장례를 치러 주게.”

   “... 예, 그리하겠습니다.”

   “물러가 보게나.”

 

   상선은 작은 숨을 내뱉고 조용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순간, 지민이 침상 위로 무너지듯 앉으며 병풍 뒤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지금 다시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상선은 그저 제가 잘못 본 것이라 여기며 조용히 그 앞에서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돌아갔다.

 

   침상 위로 풀썩 내려앉은 지민이 소매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는 울음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태형이 얼른 그에게 달려왔지만 쭉 뻗었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때 고개를 든 지민이 엉엉 소리를 내며 태형의 도포 자락을 잡아당겼다.

 

   “네가 죽었대. 이승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볼 수 없는 이가 되었대.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네가 아니라니 이 어찌...”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의 마른 등을 끌어안았다. 한 품에 안기는 몸이 너무도 여리고 작아 태형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작은 어깨 위에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인지 태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지민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직 진정은 하지 못했는지 몸이 간헐적으로 덜덜 떨려왔다. 태형은 그의 등을 토닥이다 쓸어내리며 작은 상 위에 올려있던 물을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다 정말 탈진해. 물이라도 좀 마셔봐.”

   “...흐흑, 으응.”

 

   지민은 태형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잔을 받아냈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낸 탓에 기력 없이 몸이 자꾸만 무겁게 늘어졌다. 태형이 그런 그를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뉘인 뒤 이마를 가만가만 쓸어 넘겼다.

 

   “푹 자고 일어나. 이러다 너까지 큰일 난다, 진짜.”

 

   지민은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에 짓무른 눈가를 살살 쓰다듬으며 태형은 아기를 재우듯 그의 등을 계속해서 토닥였다. 그 다정한 손길에 지민의 감은 눈가를 따라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태형은 그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을 때까지 쉬지 않고 그를 달래고 또 달랬다.

 

 

* * *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지민은 퉁퉁 부은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렸다. 선선한 새벽바람이 창을 넘어와 이마께를 간질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목이 따끔따끔할 만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온기가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지민이 정신을 차리자 저를 꽈악 끌어안고 있는 단단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이 고개를 살짝 들자 곧게 뻗은 턱선이 보였다. 지민은 뒤척이는 것을 멈추고 제 앞에 있는 태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햇빛을 닮은 그의 향기가 폐부를 진하게 채웠다. 지민은 마치 나쁜 짓을 한 아이처럼 심장이 쿵쿵 세게 뛰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진 탓에 지민이 몇 번 바르작거리자 그 기척을 알아챈 태형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를 품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아직 해도 안 떴어. 조금 더 자.”

   “응.”

 

   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입술이 낮은 목소리를 속삭일 때마다 따듯한 숨결이 이마에 와 닿았다. 지민은 확 달아나버린 잠에 뻑뻑한 두 눈만 끔벅거리며 한참을 그 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상선은 어딘가 변해버린 지민의 모습에 가타부타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하고 있었다. 비보를 들은 날 이후 병을 얻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이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밥을 먹는 양도 늘었을뿐더러 이젠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이 그에게 다행인지 아니면 오히려 독인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태형아, 이것도 먹어 보아라.”

   “응? 고마워.”

 

   양손에 한과를 잔뜩 들려주고도 지민은 성에 차지 않는지 손수 과일을 집어 그 입에 물려주었다.

 

   그저 잘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다는 핑계로 그에게 제 애정을 담뿍 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로 남았다. 파란 머리의 태형이 나타난 날과 제 벗 태형이 떠난 날, 묘하게 겹치는 그 시기에 혹시 네가 나에게 보낸 선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민은 지금 제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태형에게 똑같은 후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도 먹어야지. 내가 다 뺏어 먹어서 그런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다고.”

   “응, 알았다. 나도 잘 먹으마.”

 

   늘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하던 지민은 요즘 들어 환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반짝거리는 그 웃음에 태형은 늘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곤 했다. 태형은 턱을 괴고 가까이 앉아 지민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고 캠퍼스를 누비는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어느새 꽤 후덥해진 바람이 불어오자 태형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안뜰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벚나무는 어느새 분홍 꽃잎을 모두 떨구고 푸른 잎으로 새 단장을 한 지 오래였다.

 

   “오늘도 경연을 빠지면 아바마마께 혼쭐을 날지도 모르니 다녀오겠네.”

   “응, 오늘 저녁엔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할지 나도 열심히 고민하고 있을게. 공부 잘하고 와.”

   “심심하면 궁이나 한번 돌아보던지.”

 

   농담같이 않은 농담과 함게 지민이 방을 빠져나가자 태형은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거추장스러운 한복을 한 겹이라도 벗어던지기 위해 몸을 뒤척이던 태형은 장 아래 좁은 틈 사이에 끼어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장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비틀어가며 보니 각진 모서리가 보이는 듯했다. 그 묘한 익숙함에 태형은 얇은 물건을 찾아 온 책장을 뒤졌다. 마침내 얇은 대나무 가지를 발견한 그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물건을 꺼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틈에서 태형이 꺼낸 것은 그의 휴대폰이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뱉으며 먼지를 털어낸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휴대폰을 찾았다는 것이 제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은 꺼져있는 휴대폰의 전원을 눌러 켰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은 아니었는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태형은 지민과 사진부터 찍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가 얼마나 신기해 할지 상상하며 웃음 지었다.

 

   뚜루룽 뚜루룽-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놀란 태형이 숨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화가 울리고 있는 화면에는 그 어떤 발신 번호도 뜨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태형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끊이지 않는 벨소리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연을 마치자마자 지민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빨리하여 동궁으로 향했다. 오늘 스승께 들은 이야기 중 흥미로웠던 것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병풍 뒤에서 퐁 튀어나올 그가 조용했다. 지민은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병풍을 향해 걸어갔다.

 

   “예서 잠들었구나!”

 

   양팔을 번쩍 들고 그를 놀라게 하려던 지민은 텅 비어있는 병풍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여기가 아니면 어디 숨은 게야? 총총걸음으로 옷장 앞으로 걸어간 지민은 숨을 한번 고르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

 

   여기도 없네. 방에 커다란 태형이 몸을 숨길 곳이라곤 옷장과 병풍 뒤가 전부인데 보이지 않으니 지민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태형아, 장난치지 말고 이리 나오거라. 어서.

 

   내 명이다. 세자의 명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 태형아, 이러지 마라. 이제 좀 겁이 나려고 하는구나.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에 덜컥 겁이 난 지민이 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빠져나왔다. 화들짝 놀란 나인들과 내시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에게 달려왔다.

 

   “태, 태형이 보았느냐?”

   “예?”

   “내 방에 있던 그 사람 보았냐고!”

 

   방에? 그 소리에 놀란 내시 하나가 급하게 동궁전 별감으로 향했다. 지민은 버선발로 뜰까지 내려와 태형을 찾았다.

 

   태형아, 태형아.

   어디에 숨었느냐, 태형아.

 

 

   조용한 동궁에는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나인은 그 앞뜰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나 침을 꼴깍 삼켜냈다. 미쳐버린 세자가 사는 궁. 힘이 없는 나인은 모두가 기피하는 동궁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방안에서는 힘아리 없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겁이 난 나인은 주먹을 꾹 쥔 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흐흑, 갑자기 들려온 울음에 두 눈을 번쩍 뜬 태형이 제 품에 안겨있는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악몽을 꾸고 있는지 말랑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지민은 크게 몸을 떨며 흐느꼈다.

 

   “쉬이, 지민아 괜찮아. 꿈이야. 괜찮아, 응?”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자 태형은 그 어깨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지민아, 괜찮아? 한참을 흔들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지민은 태형의 얼굴을 보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앙, 어디 갔었어? 도대체 어디, 어디 갔었냐고!”

   두서없이 쏟아지는 원망에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던 태형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목이 메어와 입술만 벙긋거리던 태형이 지민을 제품으로 당겨 안았다.

 

   “미안해. 혼자 두고 와버려서 미안해.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 애틋한 목소리에 지민은 태형의 등을 힘주어 마주 안았다.

 

 

* * *

 

   전화를 받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간이 뚝 끊긴 것처럼 한참 뒤에나 눈을 떴을 때 태형은 익숙한 천장이 보이는 제 침대 위였다. 시간을 보자 고작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일어나 폰부터 확인했다. 약속에 늦지 말라는 친구들의 소소한 대화들이 수십 통 쌓여있었다. 태형은 대충 씻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무언가 잊은 듯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이려니 생각했다.

 

 

   태형은 제 앞에 걸려있는 흑룡포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양으로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선택한 탓에 평일에 홀로 박물관에 와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 길이었다. 의복이야 사극이나 텔레비전에서 수도 없이 봐왔기에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수가 놓인 검은 비단, 창틈으로 쏟아지던 햇살, 흩날리는 벚꽃잎 그리고 환하게 미소짓던 얼굴. 태형은 갑작스럽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장면들에 몸을 휘청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술을 마신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지민.”

   뿌옇게 흐렸던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박지민.”

   잊고 있던 그가 떠올랐다. 태형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응급실이었다. 별다른 증상은 없었기에 태형은 곧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태형은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시대의 기록을 뒤지고 또 뒤졌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가 어려웠다. 학교도 빠진 채 몇 날 며칠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살다시피 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늘도 밤늦게 도서관에서 나온 태형은 터덜터덜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밤하늘이 밝게 느껴져 고개를 드니 길을 따라 빼곡히 심어진 나무 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에 대한 흔적을 찾기 시작한 것은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그러한 ‘너’를 닮은 벚꽃이 피는 계절이 와있었다. 태형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벚꽃을 담아보았다. 생각보다 예쁘게 담기지 않는 사진에 태형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구도를 바꿔 찍어댔다.

 

   “어엇!”

   “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뒷걸음질 치던 태형에 누군가 걸려 넘어졌다. 놀란 태형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네, 괜찮아요.”

   묘하게 귀를 잡아끄는 목소리에 태형의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렸다. 태형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의 얼굴이 달빛에 찬찬히 드러났다.

 

   “고마워요.”

   멋쩍은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태형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꽃향기를 가득 담은 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벚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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