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go
포크
*개화(開花)*
“학교 가기 싫어...”
태형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 태형은 몹시 기분이 좋지 못했는데, 오늘은 3월 2일로 개학이었으며 날씨가 아주 추울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 농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태형은 감기라도 걸릴까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물론 마스크도. 폐에 먼지가 쌓여 일찍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태형은 벚꽃이라도 폈으면 기분이 덜 꿀꿀했을까 싶어 아직 비쩍 마른 나무를 바라보았다. 날짜 상으로는 봄,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그런 봄 같지 않은 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나무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비척비척 가던 길을 가다보니 어느 새 4층에 도달한 태형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3학년 2반을 찾았다. 반으로 들어서니 대부분 아는 얼굴이 많았다. 그야 음악과는 40명이 조금 넘으니까. 태형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 앉자 그의 친구들이 그 쪽으로 몰려갔다.
“피곤하니까 저리가...”
태형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애들을 무시하며 엎드려 잠에 들었다. 추운 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탓에 잠이 잘 오지는 않았지만 그리 좋지 못했던 컨디션에 금방 잠들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옆 자리의 친구가 태형을 깨웠다.
“야. 담임 들어왔어.”
태형은 그 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태형이 칠판 쪽을 바라보자 여태까지 학교에서 본 적 없는 젊은 남성이 서있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눈 두 덩이와 입술이 두툼한 게 전체적으로 온화한 느낌을 주는 듯 했다. 하지만 또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서늘해 보이는 인상에 태형은 그가 잘생긴 듯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잠이 덜 깨어 태형이 눈을 비비자 교탁 앞의 그 사람은 담임이라며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나는 박지민이야. 이 학교로 처음 발령받았어. 시창청음을 맡게 되었고. 혹시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니?”
지민의 말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번쩍 든다. ‘여자 친구 있어요.’부터 ‘고향이 어디에요.’까지. 확실히 사투리가 조금씩 들리기도 했다. 지민은 여자 친구 없다고 할 때보다 더 빨간 얼굴로 고향은 부산이라고 했다. 태형은 군대도 갔다 왔다는 지민의 말에 나이가 몇일지 궁금해졌지만 이미 다른 아이가 물어본 후였다.
“안 가르쳐줄 건데요. 한 사십?”
지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답하자 아이들은 야유를 보내지만 모두 즐거워 보이는 듯 했다. 태형은 그런 아이들에 젊은 선생님이 왔다고 신나하는 모습이 퍽이나 웃겼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입꼬리 또한 귀에 달린지 모르고.
“선생님. 전공이 뭐에요? 혹시 피아노면 손 다쳐서 못 치시나요?”
태형의 질문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엄지손가락에 둘러진 붕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창청음 과목 담당이라면 무조건 피아노를 치게 될 것인데. 태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지민은 어색하게 웃더니 입을 연다.
“맞아. 내 전공은 피아노야. 근데 손가락을 다쳐서 한동안은 못 쳐. 그래도 여기 피아노 잘 치는 애들 많지? 이따가 5교시에 자기소개하면서 다들 자기 전공 살려보자.”
지민의 말에 아이들은 경악했다. 연주를 한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이미 여러 콩쿠르나 대회를 나가, 긴장되더라도 익숙해져 있지만 새 학기의 자기소개는 별개니까.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지민의 그 말을 끝으로 아침 조례가 끝나는 종이 쳤다. 지민은 가볍게 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바로 반을 나섰다.
1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방송부 아이들이 각 반의 TV로 입학식을 틀어주었다. 물론 태형의 반도. 아이들은 담임이 없다고 떠들기 바빴다. 하지만 태형은 새로 발령 받은 선생님들을 소개하는 순간, 화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박지민이랬다. 담임에게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손가락을 다치는 모습에 태형은 지민을 부주의한 사람. 그렇게 정의했다. 태형은 그렇게 모니터 화면으로 지민을 빤히 보던 것도 잠시, 금방 고개를 돌리곤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1,2교시에 걸친 입학식이 끝나고, 3교시는 봉사활동(이라고 쓰고 교내청소라고 읽는다), 4교시는 방송교육. 태형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후 5교시. 지민의 담당 시간이었다. 음악실로 향한 아이들은 아까 지민이 말했듯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었다. 7번이었던 태형은 금방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친한 친구와 함께 무대로 나가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정말 간단했다. 이름과 학번만 말했다.)
태형의 자기소개가 끝난 뒤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친구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의 반주였다. 영화 파파로티의 OST로 유명하여 몇몇 아이들은 수군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태형의 노래도 시작되었다. 지민은 태형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음악과에서도 성악 전공자는 몇 되지 않았다. 지민은 수업 전부터 그 적은 전공자들 중 하나인 태형에게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더욱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기분 나쁜 소름이 아닌 쾌락과도 같은 소름이었다. 지민은 닭살이 돋은 팔을 자신도 모르게 쓸어내렸다.
지민은 시간관계상 1분 만에 앞의 아이들의 연주를 끊던 것과는 달리 태형의 노래는 끊지 않았다. 태형의 노래를 들으며 손가락을 허벅지에 탁, 탁, 탁 두들겼다. 지민은 반주를 치고 있는 아이 대신 저가 피아노를 치고 싶은 충동감이 일었다. 태형의 노래는 지민을 그렇게 만들었다. 태형의 낮은 저음을 들으며 지민이 눈을 감자 어두운 동굴 속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지민은 성악에 대해 전무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태형은 굉장히 잘 불렀다. 뿐만 아니라 노래의 정서도 잘 전달되었다. 지민은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며 태형의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던 도중 지민이 중재하지 않았지만 피아노 반주가 끊기고 자연스레 태형의 노래도 끝이 났다.
“쌤. 저 여기까지 밖에 못 쳐요...”
반주를 치던 아이는 분위기를 깬 것 같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혼이 빠진 듯 태형을 바라보던 지민은 정신을 차리곤 괜찮다며 둘 다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했다. 말과 달리 조금 아쉬웠던 지민이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형은 노래를 부를 때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이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은 어떤지. 반주가 잘 흘러가는지. 그리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아이들의 표정과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노래에 넋을 놓은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흡족해하던 도중 지민은 어떨까하고 힐끗 쳐다보았다. 지민 또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붕대를 감지 않은 손가락으로 저의 노래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이며 반주를 치고 있었다. 태형은 지민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저의 노래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지민이 이상한 동시에 신기해, 박자를 놓칠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반주를 맡은 친구가 연주를 멈춰 다행히 실수하지 않았다. 태형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지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 뒤에도 쭉. 아이들의 연주를 집중해서 듣는 지민의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끌림을 느꼈다.
지민은 왠지 모르게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당황했지만 태형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지민의 눈을 더욱 빤히 쳐다보았다. 지민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태형도 지민에게서 눈을 돌리곤 무대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어디가지...”
5,6,7교시가 모두 끝이 나고, 오늘은 학원이 쉰다는 걸 기억해낸 태형이 교내 연습실로 향했다. 하지만 새 학기인 만큼 다들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라도 생긴 건지 연습실은 꽉 차 있었고 예약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가끔 몰래 옥상에서 연습하던 태형은 옥상으로 향하다가도 오늘의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임을 기억하곤 교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교실로 들어와 창문 밖을 본 순간 구교사가 보였다.
태형은 지난 겨울방학이 매우 길었던 것은 지금 사용하는 신교사의 공사를 위함인 것이 기억나 골똘히 생각했다. 지금 이 건물을 쓰기 몇 년 전에는 구교사도 함께 사용했다고 하니 방음이 되는 연습실이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작은 음악실이라도. 태형은 출입 금지가 쓰여 있는 것을 무시하곤 구교사로 들어섰다. 몇 년 동안 안 쓴 것 치고는 깨끗했다. 하지만 이번 여름방학에 완전 새로 갈아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태형은 오히려 연습실이 늘어나는 것인가 하여 더 들떴다. 그렇게 1,2 그리고 3층을 둘러본 태형은 가장 위층으로 향했다. 연습실이 없는 것을 본 태형은 이 학교가 전엔 인문계 고등학교였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여러 반들을 지나던 태형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히사이시 조의 spring이었다.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ummer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노래였다. 태형은 곡이 제대로 들리는 순간부터 그 선율에 이끌리듯 음악실로 향했다. 음악실 앞으로 도착한 태형은 작은 창문을 통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태형은 지금 피아노를 치는 사람의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말할 순 없었다. spring은 꽤나 쉬운 곡이며 자신은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피아노엔 젬병이었으니까. 하지만 태형 자신이 그 피아노 연주에 이끌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빗방울이 피아노 위로 내리듯 가볍게 손이 건반을 눌렀지만 그 손의 움직임은 대담한 게 시원시원했다. 태형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태형은 연주자가 피아노가 아닌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들기며 쓸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중간 중간 보이는 손가락을 보며 ‘물 흐르듯 연주하다’라는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기분이었다.
태형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이 어서 빨리 뒤돌아 봐주길 원했다. 누구일까. 누가 이런 연주를 하는 걸까. 그 사람의 연주하는 뒷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태형은 피아노 위에는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무의미한 붕대, 그마저도 피아노 소리에 유의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연주는 끝으로 치닫더니 마침내 완주되었고, 피아노를 치던 사람은 붕대를 가져와 자신의 엄지에 감았다. 태형은 왜 붕대를 감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연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연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서는 순간 태형이 음악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어?”
태형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태형 못지않게 피아노를 연주했던 사람도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그 연주자는 지민이었다. 태형도, 지민도 너나 할 것 없이 경직되어서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태형은 지민을 불렀다.
“지민 쌤?”
지민은 태형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멈칫하더니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지민은 어떻게든 이 적막한 공간에서 빠져나가고픈 마음에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연습하러 왔어? 여기 출입금지니까 들어오면 안 돼.”
지민은 그렇게 말하곤 음악실에서 빠져나갔다. 태형은 지민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들어오지 말라면서 자기는 들어오는 게 뭐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지민이 나간 문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왜 멀쩡한 손을 가리지? 왜 다친 척 하지? 왜 더 연주해주지 않지? 수많은 질문들이 태형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마지막 질문은 순전히 태형의 사심이었지만.
그럼에도 태형은 계속 지민의 연주가 듣고 싶었다. 비록 지민이 도망쳤지만, 손가락을 다친 척했지만, 태형은 저가 지민의 연주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욱 그의 연주를 갈망하고 있었다. 태형은 아까 전 지민이 저의 노래에 맞춰 손가락으로 반주를 치고 있던 모습을 되뇌었다. 태형은 지민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싶어졌다. 잘 생각해보면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던 지민의 뒷모습에서부터 연주자는 누구인가는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형은 피아노 소리에 매혹당한 듯 재빠르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태형은 지민을 무어라 정의하기 힘들어졌다.
태형은 조심스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도, 레, 미. 뚱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섬세하지 못한 소리였다. 태형은 음악실 창문 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위치상 구교사 옆에는 학교에서 제일 큰 벚꽃나무가 있다. 태형이 잠시 눈을 감고 지민의 연주를 상상하자 벚꽃이 만개한 기분이 들었다. 태형은 눈을 비비곤 다시 창문 밖을 보았다. 그저 비쩍 마른 나무가 있을 뿐이었다. 태형은 피아노 연주 하나에 마약이라도 한 듯 헤롱헤롱 해진 자신이 낯설었다. 결국 연습을 위해 구교사를 들어간 것과는 달리, 태형은 노래 한마디 부르지 못하고 나왔다. 하지만 목이 간질간질한 게, 너무나도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지민의 연주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지민이 자신과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면 좋겠다.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CLOSER*
이런 걸 뭐라 하면 좋을까. 태형은 지민의 연주를 들은 뒤 약 일주일이나 고민했다. 이상하게 빨리 뛰는 심장이나, 자꾸만 아른거리는 피아노. 그리고 박지민.
태형은 피아노라면 진저리를 치는 인간이었다.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태형은 어려서부터 여러 악기들을 배우는 건 당연지사였다.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정말 안 해본 것 빼곤 다 해봤다. 그 중에서도 유독 피아노를 혹독히 배웠는데, 이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로인해 태형은 피아노수업에 빠지기는 물론 클래식에도 흥미를 잃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이었던 태형은 어머니를 따라 연주회를 간 것이 계기였다. 성악을 시작하게 된. 태형은 무대를 보자마자 말을 잃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태형은 성악을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라 정의했다. 담을 쌓고 지내던 클래식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된 태형을 본 태형의 부모님은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다며 태형을 놀려댔다.
그런데 태형은 지금, 그 때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성악을 만났을 때의 그 기분,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뭣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근질근질 거리는지. 태형은 학교에서 지민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물론 지민 또한 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지만.
“나 요즘 뷔가 그렇게 좋더라.”
“나는 슈가!”
전 수업시간 지민과 눈이 마주친 여파로 책상에 엎드려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태형은 앞자리 여자아이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뷔와 슈가라면 태형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으니까.
“너네 보단소년단 좋아해?”
태형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태형에게 답했다.
“어. 완전.” “노래도 좋고 춤도 잘 추잖아.”
“근데 왜 누구 하나가 더 좋다는 거야?”
“이건 그런 거야. 쇼팽, 베토벤, 리스트 등등 중에서 내가 비발디를 더 좋아하는 그런 거?”
한 아이가 예시를 이야기하자 주변의 아이들은 좋은 예라며 동의했다. 태형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본 한 아이가 태형을 위해 좀 더 간단하게 정리하여 이야기해준다.
“모두 다 좋아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좀 더 좋은 거야. 한 마디로 최애지.”
태형은 그제서야 아이들의 말을 이해했고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정의했다. 이건 지민을 최애로 여기는 마음이라고. 많은 피아니스트들(물론 좋아하지 않지만)의 연주 중에서 유독 지민을 더 좋아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한 이유는 저가 피아노를 싫어하기도 하고, 사람이니까 ‘더 좋아한다.’의 개념을 적용시키기 어려웠던 것일 뿐이라고. 태형은 드디어 자신의 심장이 왜 그리 쿵쾅대는지 명확한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아 기뻤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 위화감에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한지 모르고.
그 날 이후로 태형은 자신이 지민의 팬 같은 것이라고 자부하게 되어 걸핏하면 구교사 음악실 앞에서 지민을 기다렸다.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으니까. 그렇지만 방과 후를 더불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만 되면 태형의 노력에 무색하게 지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태형은 지민 찾아 삼만 리를 하며 몇 날 며칠을 보내었다.
하지만 웃기게도 지민과 태형의 만남은 음악실에서가 아니었다. 학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 태형이 버스카드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딱 버스카드를 넣어둔 체육복을 교실에 깜박하여 두고 온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순간 태형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두 명이요.”
뒤에 있던 지민이 버스에 올라타며 태형의 몫까지 낸 것이었다. 자신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쿨하게 좌석에 앉는 지민의 뒷모습을 본 태형은 경의에 찬 눈빛을 보내었다. 순간 그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니 며칠 전 구교사 음악실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귀 끝이 후끈해졌다. 하지만 태형은 자신이 지민의 팬이며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감정을 깨달았다는 사실 아닌 사실에 자신감이 들어 힘차게 지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필이면 지민이 일인용 좌석에는 모두 누군가가 앉아있었기에 이인 용 좌석에 앉은 탓이었다. 지민은 자신의 옆에 앉은 태형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 그저 창밖만 내다봤다.
“쌤 진짜 감사해요.”
“그냥 별 거 아냐.”
“제가 진짜 꼭 갚을게요.”
“됐네요.”
지민은 태형의 감사인사에 내심 뿌듯하여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태형에게 답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에 조금 들떠 베시시 웃었다. 태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지민의 손가락으로 옮겨졌고, 붕대가 없어진 걸 알아챘다.
“쌤 붕대 빼셨네요?”
“뭐, 다 나았으니까.”
태형은 지민의 손가락은 다친 적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넘어가주기로 하였다. 지민은 붕대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태형에 조금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더 지나자 태형이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 태형은 내심 아쉬웠지만 학원을 빠질 수는 없어 한껏 축 처진 채로 지민에게 인사를 하곤 버스에서 내렸다. 지민은 그런 태형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물론 태형이 내린 뒤에 웃었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지민과 태형의 만남 빈도수가 높아졌다. 구교사의 음악실에서 만나기도 하고(태형은 일부러 연습실 예약도 하지 않고 매일 구교사로 향했다), 수업시간에도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어주었다. 태형은 버스비를 갚는다는 것이 진심이었는지 사탕을 한 뭉큼 들고 와선 지민에게 주었다. 평소 사탕을 즐겨 먹는 지민이 아니었지만 태형의 성의를 생각하여 가끔 하나씩 꺼내먹게 되었다.
둘은 음악실에서 만나면 서로에 관해 이야기도 나누고(태형은 지민이 방송부 고문이란 걸 알곤 점심시간에 지민을 마주칠 수 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피아노를 쳤다. 혹은 지민이 피아노를 치면 태형이 노래를 부르거나. 지민은 간혹 팝송을 치면 곧잘 부르는 태형에 자연스레 넋을 놓게 되었다. 성악 창법이 아닌 일반 가수들이 하는 복식호흡. 태형이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모습에 지민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노래 부르는 태형을 아는 사람은 몇 없을테니까. 태형 또한 지민의 피아노소리를 들으며 간질거리는 심장을 참아내었다. 팬심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견뎌내기 힘든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는 그저 지민의 연주가 좋을 뿐인데.
“쌤. 저는 쌤 팬이에요.”
“무슨 소리야.”
여느 때처럼 방과 후 지민과 태형은 구교사의 음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태형의 갑작스러운 말에 지민은 배를 잡고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태형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다른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보다 쌤의 연주가 훨씬 좋아요.”
“그건 엄청 고맙네.”
“선생님만 봐도 엄청 심장이 뛰고, 막 쌤이 제 눈앞에 수시로 아른거려요.”
“...그래?”
“이런 건 팬심이라고 하잖아요.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거.”
태형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민은 태형의 말을 점점 듣다보니 혼란스러웠다. 저도 태형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으니까. 하지만 태형이든 저든 그 마음이 팬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랑일까? 지민은 그저 함께해서 두근거렸던 태형과의 시간을 되뇌었다. 태형이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민은 남자에게 이런 생각을 해본 것은 처음일뿐더러 좋아하는 것인지 그저 태형을 제자로서 아끼는 것인지 헷갈렸다. 태형이 그저 자신을 팬으로서 좋아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모습에 더욱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지민을 본 태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지민은 태형을 보며 맞장구 쳐주었다. 팬심이 맞다며.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민은 한편으론 쓸쓸한 마음이 들어 태형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애초에 서로가 좋아한들 이 변화에 큰 변화는 없을테니. 아마 함께하는 이 시간이 없어지겠지. 지민은 그렇게 덤덤히 생각했지만 가슴이 저려왔다. 태형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자신에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소중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쌤 왜 처음 왔을 때 붕대하고 계셨어요? 손가락에...”
태형은 문득 떠올라 조심스레 물었다.
“피아노 치고 싶지 않아서.”
“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의 무대 공포증?”
지민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열심히 노력하여 국내 탑 3안에 드는 예고에도 진학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피아노를 사람들 앞에서 치는 게 문득 두려워졌다. 점수가 매겨지고, 못 쳤는지 잘 쳤는지를 판단 당하는 것에 진저리가 나버린 것이었다. 소수의 사람이라면 괜찮지만 다수의 앞에서는 연주할 수 없게 된 지민은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음악을 한다고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을 받는 게 싫었던 지민은 공부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었기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고, 그 덕에 무사히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재수도 안하고 임용고시도 한 번에 패스했다.)
태형은 그제서야 지민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요즘 지민을 보면 유독 수업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할 때면 음이 불안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민의 가장 가까이에서 거의 매일 연주를 듣는 태형만이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수업시간 지민의 연주는 둘 뿐인 때보다 훨씬 완성도 등이 떨어지는 걸 지민 자신보다 태형이 더 잘 알았다. 그냥 봤을 땐 태형 외에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태형은 지민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음악과 공부를 병행한 점. 태형은 지금 완전히 공부에서 손을 떼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민이 커다란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피아노를 저 혼자 듣고 싶었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이런 게 팬심인가. 태형은 이마저도 팬심으로 치부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마지막으로 한 곡만 치고 가자. 뭐 듣고 싶어?”
진지한 이야기에 이어진 짧은 정적을 깬 건 지민이었다. 태형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무슨 노래가 좋을까 고민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지민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태형은 지민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피아노 건반을 댕, 댕, 누르며 입을 열었다.
“Closer요!”
지민은 그런 태형에게서 눈을 돌리곤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태형은 지민의 피아노에 맞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지민이든 태형이든, 지민의 피아노에 맞춰 태형이 노래 부르는 순간이면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지민은 무의식 중 피아노를 치며 태형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이 들어 연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같은 관계만 이어지길 바라면서도 조금만,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그렇게 지민이 넋을 놓으며 태형의 얼굴을 보고 있던 순간, 태형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더니 지민의 옆에 앉는다. 피아노 의자는 좁았지만 지민은 더 좁지 않아 아쉬웠다.
태형은 마지막 구절이 끝날 때까지 지민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민 또한 그러했다. 지민은 태형이 ‘We ain’t ever getting older’라고 읊조릴 때면 태형 또한 자신처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음 좋겠다고 생각하여 저에게 속삭여주는 것만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노래가 끝이 나고 태형은 지민을 보며 네모지게 웃었다. 태형이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지민은 그 표정에 두근거리면서도 이 관계를 깨버리고픈 마음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마치 지민은 자신이 태형을 좋아하는 것만 같아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곤 도망치듯 음악실을 나섰다.
태형은 지민이 음악실에서 나가도 피아노 옆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민이 피아노를 치며 저와 눈을 맞추며 연주하는 모습을 회상하던 태형은 건반을 하나를 여러 번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눈을 감곤 차가운 피아노 건반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태형은 문득 지민의 손이라면 이렇게 차갑지 않을 텐데 하며 눈을 살포시 떴다. 그 순간 태형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연주가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손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건, 태형조차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서툰 감정에 혼란스러워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태형도 모르지 않았다. 태형은 타오르는 것만 같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가 지민 쌤을 좋아하나?
*중간고사*
태형의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태형을 고집쟁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것에는 한 우물이라도 파려는 듯이 빠져들었고, 싫어하는 것이라면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쳤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월 초가 된 지금. 태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입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시험 잔소리를 들어야만했다. 지민이 말한다면 무엇인들 안 좋아하겠냐 만은, 태형은 공부와는 이미 손절한지 오래였다. 그러니 지민이 잔소리를 해봤자 귀여운 정도? 하지만 지민이 내건 제안은 태형에게 솔깃했다.
“평균 50점만이라도 넘기면 내가 소원 들어줄게. 진짜루.”
지민은 찌푸려진 자신의 미간을 검지로 누르며 말했다. 태형을 좋아하는...것 같지만 선생님으로서 학생을 가르쳐야하는 본분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지민은 태형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OMR카드에 그림을 그리는 수준인 줄은 몰랐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엠알 화가 김태형. 시험만 보면 미술과 아이들보다 더욱 독창적인 그림을 OMR카드에 그려 내는 탓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지민은 선생님들이 그 이야기를 제 앞에서 나누며 하하호호 웃을 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저의 반 학생이었으니까,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했음 좋겠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지민은 음악실에서 수학문제나 과학문제를 태형에게 떠보았다. 그것도 중학교 수준. 태형은 심각하게 몰랐다. 피타고라스도 제대로 모른다고 하면 감이 올까. 태형은 반 등수 중 뒤에서 일 이등을 다투는 아이였다. 그래서 결국 지민은 태형에게 내기를 건 것이다. 저와 함께 음악실에 있는 동안은 함께 공부하기로. 아니면 피아노도 쳐주지 않겠다고. 그리고 만약에, 태형이 평균 50점을 넘기면 진짜 뭐든 들어주기로 했다. 공적인 마음이든, 사적인 마음이든 지민은 태형이 공부를 못한다고 무시당하지 않길 바랬다.
태형은 지민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평소 근처도 가지 않던 서점에 가서 자습서도 샀다. 벚꽃의 숨겨진 꽃말은 중간고사라며 반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라는 태형에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그러했다. 혹시 내일 유성이라도 떨어지는 거 아니냐며 말하는 옆 반 담임 선생님의 우스갯소리를 들은 지민은 뿌듯한 마음에 초콜릿이나 사탕처럼 달달한 간식들을 가끔 태형에게 건네주었다.
태형이 진지하게 공부하는 나날이 어느새 2주째가 되던 날. 어김없이 방과 후 구교사 음악실엔 지민과 태형이 있다. 태형의 요청에 지민은 잔잔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며 공부를 하는 태형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오랜 시간 앉아 있으니 몸이 뻐근해진 태형이 기지개를 피자 지민은 피아노를 치다말고 일어나 태형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사실 지민은 태형이 작심삼일로 공부를 그만둘 줄 알았지만 계속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인 동시에 한편으론 미안했다. 너무 부담을 주거나 성악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것인가 해서.
“힘들지? 조금은 쉬어도 돼.”
“에이. 이걸론 평균 40점도 못 넘을 걸요.”
동감. 지민은 태형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겉으론 그저 웃으며 태형의 말을 흘려보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자신의 앞자리에 앉혔다. 지민이 앉자 태형은 책상에 팔을 비스듬히 괴어 엎드리더니 지민을 슬쩍 보았다.
“쌤 손 줘 봐요.”
“왜?”
“빨리.”
지민은 자신이 태형을 좋아하는 것만 같아 심란해 죽겠는데 태형이 자꾸만 스킨십을 하거나 웃어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물론 스킨십의 정도나 둘 사이의 거리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줄었다면 줄었지. 그야 태형도 지민처럼 심란하니까. 하지만 지민을 힐끗 본 태형은 그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이 마지못해 손을 태형에게 건네자 태형은 자신의 오른손과 지민의 왼손을 대어보며 미소 지었다.
“선생님 손 진짜 작다.”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지민은 얼굴을 붉히며 태형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태형이 계속 놀리자 지민은 왼 손가락을 당기며 태형을 째려보았다. 태형은 문득 지민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순간 움찔했지만 다시 웃으며 지민을 놀려댔다.
“늘린다고 늘어나요? 아님 왼손이 더 커?”
“반말은.”
지민은 태형은 머리에 딱밤을 놓곤 손가락 길이를 비교했다. 이변은 없었다. 무려 태형과 지민의 손가락 길이는 거의 한마디가 차이 났다. 지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렸고 태형은 손을 책상 위에 붙여 쫘악 폈다.
“손가락만 보면 내가 피아니스트인데.”
“손가락 길이가 다는 아니거든? 그리고 너 연영과처럼 생겼어.”
지민은 툴툴대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짧고 통통한 손가락을 보다가 태형의 기다란 손가락을 보니 괜히 부러워졌다. 지민은 태형의 손가락에 집중하여 만지작거렸다. 반지를 끼워도 이쁠 것 같아 손가락 굵기를 이리저리 보던 도중, 태형은 지민이 잡지 않은 손을 책상에 괴곤 자신의 입을 가렸다. 태형의 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 잘생겨서 연영과 같았어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정작 표정이나 얼굴색은 벌건게 부끄러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막상 그런 태형을 보니 자신도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이곤 태형의 손을 놓으려했다. 하지만 태형은 그런 지민을 알아채곤 손을 꽈악 붙잡았다.
“어. 너 잘생겼어.”
지민은 태형이 손을 놓아주지 않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태형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얼굴이 후끈후끈 거려,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태형의 붉게 물들었던 얼굴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민의 말에 그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여전히 손을 꽈악 붙들곤.
태형은 놓을 생각이 없는지 그 상태로 샤프를 집어 문제집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지민은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지만 태형과 잡고 있는 손이 나쁘지만은 않아 놓지 않았다. 태형은 공부를 하며 이따금씩 지민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느껴져 귀엽다고 생각했다.
♬
시험은 일주일 앞으로 찾아왔고 태형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태형은 살면서 이토록 열심히 공부한 적이 전무하고, 앞으로 후무할 것이라 생각했다. 태형의 부모님은 애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유난을 떨 정도였으니. 할 말은 다 했지.
오늘 유독 피곤했던 태형은 지민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간다는 것 하나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버스정류장에서 학원으로 가는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지민의 교직원회의가 늦어지는 탓에 버스를 2대나 보냈고, 다음 버스를 놓치면 태형은 학원에 늦게 된다.
[쌤 저 다음 버스 오면 가야돼요ㅜㅜ아님 저 학원 늦어요ㅠㅁㅠ]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보낸 태형은 오지 않는 지민에 더불어 쏟아지는 비에 습하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 우울해졌다. 태형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꼬인 이어폰을 꺼내어 핸드폰과 연결한 뒤 귀에 꽂았다. 지민이 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자주 들려주던 이루마의 ‘Liver flows in you’였다. 음질이 좋지 않았지만 태형은 마냥 좋았다. 지민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니까. 제목처럼 강이 흐르듯 연주하던 지민의 모습이 떠오른 태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운동화 앞쪽이 축축하게 젓은 것마저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태형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장금화면을 보자 지민에게서부터 온 문자임을 알게 된 태형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버리곤 급하게 문자를 확인했다.
[미안해ㅜㅜ지금 가!!]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는 3분이 남았다. 학교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5분 거리이니 지민이 늦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뛰어오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괜찮아요! 천천히 와도 돼요:)]
태형은 그렇게 문자를 보낸 뒤 노래를 이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지민과의 내기에서 이기면 무슨 소원을 빌까 고민되었다. 김칫국을 들이키는 것일지 몰라도 좋으니 태형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같이 영화를 볼까? 아니야 연주회가 더 좋겠어. 하지만 쌤이랑 콘서트를 가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놀이공원에 가도 좋겠다. 쇼핑도 같이 하고 싶은데.
태형은 지민과 함께 하는 여러 모습을 상상했다. 모든 걸 이루고 싶어져 고민되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태형이 타야하는 버스가 전광판에 잠시 후 도착이라고 떴다. 태형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곤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타야하긴 하는데 지민은 금방 올 것 같고. 태형이 버스 정류장 주위를 이리저리 도는 사이 버스는 도착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씩 탑승하기 시작했다. 태형이 학교 방향을 바라본 순간 노란색 우산 하나가 눈에 띄었다. 태형은 왠지 모르게 그 우산의 주인이 지민일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태형은 버스를 타야하는 것도, 우산을 쓰는 것도 잊고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지민은 우산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태형에 놀랐다. 태형은 우산이 있음에도 비를 다 맞고 있는 모습에 더. 지민은 급히 태형에게 자신의 노란 우산을 씌워주곤 물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 버스는? 저거 타야하는 거 아냐?”
지민이 버스를 가리키자 문이 닫히고 출발해버렸다. 지민은 이미 흠뻑 젖은 태형을 비로부터 피하게 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밀곤 의자에 앉혔다.
지민에 의해 앉혀진 태형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태형의 얼굴은 매우 붉었다. 괜히 연주를 듣고 있어서. 아니, 지민이 연주한 곡을 듣고 있었다며 후회했다. 태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빠르게 버스에 올라타지 않은 자신이 바보스러워졌다. 그냥 학원이나 갈 걸. 그렇게 멍하니 있는 태형을 말려주기 위해 지민은 저번에 길거리에서 받은 휴지라도 뽑아 태형을 닦아주었다. 태형은 멍하니 손길을 받다가도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을 바라본 것만으로 자신의 안에 무언가 꽉 들어차는 기분을 받았다. 태형은 따뜻하고 나른한 손길에 저도 모르게 기대었다. 태형은 눈을 감고 지민의 손에 몸을 맡겼다.
태형은 자신이 작은 나룻배에 타 강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태형은 노를 젓지 않고 강에 몸을 맡기었다. 태형은 노를 저어 반대편으로 향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태형은 몰랐다. 그 강이 지민에게로 향하는지.
태형은 지민의 강에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지민을 좋아하게 되었다.
*방송부*
중간고사가 끝이 나고, 태형은 시험을 말아먹었다. 일주일 전 맞았던 비로 인해 감기에 걸려 3일이나 학교에 빠졌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데. 태형은 내심 그 속설을 믿고 있었다. 자신은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크게 감기에 걸릴 줄은. 태형은 애초에 자신이 평균 50점을 넘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공부에 시간을 쓰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태형이 시험을 말아먹은 이유는 감기도, 원래부터 공부하지 않던 자신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박지민,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태형의 감기가 3일이나 간 것도 흔히들 말하는 상사병이나 사랑의 열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험시간. 태형은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인 수학시험시간에 들어온 지민을 원망했다. 지민을 힐끗힐끗 쳐다보느라 시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점심시간. 방송부를 담당하느라 바쁘던 지민이 끝난 시험 덕에 점심 라디오를 진행하지 않아 한가해졌다. 태형과 지민은 보는 눈이 많아 구교사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지민의 선생님이라는 특권을 통해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음악실을 통째로 빌렸다.
“평균 50점은 안되지만 어디 연주회라도 데려가줄게.”
지민은 태형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바로 옆에서 보았기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태형은 문득 연주회뿐이냐며 아쉬워한 자신에 놀라 손으로 머리를 한 대 팍 쳤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곤 태형이 자신의 성적에 많이 자책한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해졌다.
“괜찮아. 다음번에 잘 보면 되지.”
“저 이제 공부 안 할 거예요...”
지민은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에 투덜거리듯 말하면서도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아,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태형은 지민만 보면 히히덕거리는 저가 미친 것 같아 입꼬리를 내리곤 표정관리 했다.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태형의 마지막 말은 모른 체하곤 의자에 앉아 자신이 들고 온 종이 뭉치들을 훑어본다.
“그거 다 뭐에요?”
“사연 종이. 다음 주부턴 다시 점심 라디오 틀어야하니까.”
“사연을 선생님이 고르셔요?”
“부원 애들이 길게 쓰인 거 고르면 내가 읽고 내용이 더 좋은 걸 고르지. 다 읽을 순 없으니까.”
“사연이 길면 잘 뽑힌다는 거네요?”
“보통 그렇지?”
지민은 사연 종이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태형에게 답했다. 지민의 말을 들은 태형은 네모지게 웃었다. 지민은 보지 못했지만.
“익명이죠?”
“원하면.”
태형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지민과 헤어져 반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 놓여 진 사연 종이를 집어 들었다. 태형은 자신의 마음을 말할 곳이 없어 답답했던 참에 잘 됐다는 기분이 들어 빠르게 사연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태형이 여기서 간과한 게 있다면,
[이름 : 익명. 학번 : 30207]
이름은 익명이라 해도 학번은 적어야한다는 사실. 라디오에서는 학번을 말하지는 않지만 사연 종이에는 학번을 반드시 적어야만 했다. 익명으로 낼 경우, 절대 점심 라디오에서 읽어주지 않는다. 태형은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름은 익명으로 쓰고 정직하게 학번을 써서 냈다.
며칠 뒤 사연 종이를 훑어보던 지민은 익숙한 학번에 피식 웃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많은 걸 보니 꽤나 공들여 쓴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지민은 글자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려 애쓰며 읽었다. 그리고 다 읽은 순간 웃음보가 터졌다. 태형이 열심히 썼을 것을 생각하면 귀엽고, 이름은 익명이면서 학번은 정직하게 쓴 것도 귀여웠다. 그리고 사연.
태형은 지민이 너무 좋아져서 고민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마음을 팬심이라고 생각했던 게 멍청했다고 쓰여 있기도 하고, 지민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면 뛰는 심장박동수를 메크로놈에 비유하기도 했다.(지민은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지민을 봐도 설레고 안 봐도 설레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며 하소연까지 했다. 지민은 태형이 어느새 저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되었나 생각해보았다. 분명 버스정류장에서겠지. 지민은 비를 흠뻑 맞은 태형을 버스정류장에 앉힌 뒤 휴지로 물기를 닦아줄 때, 멍한 태형의 눈동자를 보았다. 하지만 태형의 눈동자에 저가 들어찬 순간, 태형에게는 생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그저 태형이 저를 눈에 담았을 뿐인데.
지민은 태형의 신청곡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루마의 Liver flows in you. 지민이 좋아하는 곡이었다. 태형에게도 한 번 말해준 적이 있는데, 태형은 저의 연주가 좋다며 녹음해도 되냐 물었다. 지민이 상관없다고 하자 태형은 활짝 웃으며 매우 기뻐했다. 지민은 대형견 같은 태형에게서 흔들대는 꼬리라도 보이는 기분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곡이에요. 저도 좋아하고 싶은 곡이에요.]
신청곡과 함께 쓰여 있던 마지막 문장이었다. 지민은 그 문장을 보자마자 심장을 누가 긁는 기분이었다. 쿵쾅 뛰기도 하고, 부풀었다가 갑자기 쪼그라드는 것 같기도 했다. 설레고 있었다. 지민은.
“이러면 어떻게 안 좋아해...”
지민은 엎드려서 중얼거렸다. 태형이 지민의 강에 흘러들어왔다. 자연스레.
♬
“쌤 진짜 제 사연 종이 본 적 없으세요?”
“익명인데 어떻게 알겠어.”
태형은 점심시간마다 자신의 사연이 나오길 기다렸다. 항상 반에 앉아 귀를 곤두세웠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결국 사연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사실 태형의 사연 종이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부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지민이 빼돌렸으니까. 지민은 태형이 물을 때마다 항상 자신은 모른다며 시침을 뚝 떼며 말했다. 속으로 자신은 연영과를 갔었어야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형은 사연의 내용을 차마 당사자인 지민에게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걸 보는 지민은 그저 웃길 뿐이고. 지민은 하루하루 태형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지민은 태형의 사연 종이를 두고두고 꺼내보았다. 이를 닦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집에 가다가도, 자기 전에도. 봐도봐도 처음 읽었던 그 설레이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자신의 사연이 나오지 않는다며 서운해 하던 태형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너무 좋은 걸 어떡하겠나.